그렇기 때문에, 어떤 장르 소설이나 장르 RPG도 본질적으로 '현실적'일 수는 없음.

현실성을 통해 몰입감과 잔재미를 더할 수는 있어도 말이지.

물론 대체역사물 같은 거 보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조금 다른 부류긴 한데, 일단 여기서는 넘어가자.



쉽게 말하면, D&D풍의 소드&소서리(이하 검과 마법을 줄여 '검마'라 서술)세계관이 중세인 이유는,

절대로 중세의 사회상을 재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칼질과 마법뿜뿜을 하기 위해서라는 거임.

여기서 중세의 리얼리티를 찾는 것은, 그것이 재미있냐 마느냐와는 별개로,

검마 세계관의 '존재목적'과는 완전히 배치되어 버린다고 할 수 있음.


마찬가지 원리로, 추리소설에서 범죄자가 나오는 이유는, 절대로 현실 세계의 범죄를 묘사하려는 게 아니라,

탐정이 범인을 잡는다는 구성을 위해 출현시키는 거라는 점에서 일반문학과 구별되고,

로맨스 소설이나 기타 모든 장르들은 그런 면에서 '목적'을 가지고 세계를 구축한다고 할 수 있음.

그리고, 이런 '목적성'은, 현실과 완전히 이질적인 세계관을 구성하는 판타지/SF/호러,

소위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 계열에서 더더욱 두드러지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급적 '의도적으로 현실과 이질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극도로 제한된 배경에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것이 아무래도 고증이 피곤한 사람들에게 편리하다고 생각함.


이건 RPG가 아니라 소설 이야기긴 하지만, 나는 RPG와 소설에 큰 차이를 못 느끼는 사람이라 예시로 들어보자면,

내가 동아리에서 심심하다고 릴소를 써 보자는 떡밥을 던진 적이 있었음.

그리고 같이 쓸 세계관 같은 걸 정하는데... 투표 결과 키워드로 잡힌 게 '마법', '초능력', '스팀펑크' 였음.

일관성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나와 친구들은 마법과 초능력을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 등등으로 고민하다가,

내 아이디어로 '초능력자들의 피를 정제해 만든 에센스라는 결정이 마법의 원동력인 세계'를 키워드로 잡았고,

여기서 '파괴력은 낮지만 다용도인 마법이 군사적으로 월등히 유용한 세계', '때문에 사육당하는 초능력자들',

'이런 상황에 저항하는 초능력 레지스탕스들과, 이들을 죽이고 시체를 정부에 넘기는 마법사 헌터들'

같은 세계관의 핵심 방향성을 정했음.


그리고 나서 내가 추가로 한 거라고는,

19~20세기 복식에 대해서 구글 검색 한 번 하고, 구글 어스 켜서 영국 지도 쭉 살펴본 게 끝이었다.


왜냐하면, 이 이상은 건드릴 필요도 조사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임.

스팀펑크 세계관이니까 항공전함은 있음. 하지만 주인공은 공군 제독(?)이 아니니 짤 필요가 없었음.

초능력자가 존재한다니까, 기독교 문화권 외에는 초능력자들이 오히려 종교권력화되었을 가능성이 생각났고,

나는 머릿속에 일본과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의 생태에 대한 설정 세 페이지가 떠올랐지만,

주인공들이 일본이나 미국에 갈 일이 없는 한 쓸모 없다고 생각해서 역시 내 머릿속에만 남겨뒀지.



개인적으로, RPG의 세계관이라는 것도 이런 식인 게 접근성이 높지 않을까 하고 생각함.

장르의 세계관은, 절대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남.

그리고 장르 세계관은, 그것이 얼마나 현실적인지가 아니라,

그 목적을 얼마나 잘 구현해 냈느냐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함.




근데 그건 그거고,

판타지/SF 소설을 쓰려고 하면 엄근진한 밀덕들이 발광하지 않게 고증 엄청 신경써야 함...




P.S. 내일 수리물리 시험인데 난 왜 이러고 있지.

아니 과장이 아니라 하나도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