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화 – 개종.
“달칵.”
종이컵이 단단한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 서향(書香)이 자신의 영어 이름인 ‘캐서린’이 쓰여진 컵을 내려놓는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다. Catherine. 캐서린을 C로 쓰는 멍청이는 처음 본다. 그녀가 긴 머리를 뒤로 넘긴다. 진한 아이섀도우와 눈꼬리가 강조된 화장과 그에 어울리는 옷차림. 누가 봐도 미국에서 굉장히 오래 지낸 중국계 여성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컵을 들어올린다.
“우웅-“
아주 작은 소리가 그녀의 소매에서 울린다. 그녀가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알파벳 C를 문지른다.
“됐다.”
만족한 듯한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함께, K로 변해버린 글자가 드러난다. 보통 하우스 플람뷰에 소속된 헤르메틱 메이지는 전술 핵무기Tacnuke라고 불리곤 한다. 그만큼 화려하고, 시끄럽고, 동시에 파괴적인 힘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향은 조금 다르다. 그녀의 동료들이 폭발물이라면 그녀는 수술칼에 가깝다. 조용하고, 정확하며, 효과적이다. 방금 사용한 마법도 그렇다. 뭔가 화려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그녀의 동료 및 동기들과는 달리 그녀의 마법은 아주 약한 수준의 표시만 날 뿐이다. 가끔은 말 그대로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노트를 펴 놓고 수면자들에게 보이지 않게 ‘공부’를 시작한다. 그녀의 스승이 만들어낸 에노키안을 압축시켜 놓은 일련의 심볼들이다. 이질적인 방법론을 다수 채용하는 하우스 플람뷰 기준에서도 상당히 간소화된 이 심볼들은 신속하게 물체의 변형 -대다수의 경우 파괴적인 방향이지만- 및 원소 조작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상징 간의 상호작용과 조합에 대해서 거의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사실 그녀가 스승에게 유일하게 인정받고 있는 부분은 하나의 상징만을 사용할 때였다. 하나의 상징만을 사용할 때라면 그녀는 심지어 그녀의 스승보다도 빠르고 정확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메이지들은 내면의 깨달음이라던가 하는 것에서부터 더 강한 힘을 얻는 모양이지만, 서향에게 있어서는 에노키안을 통해 힘의 상호작용을 공부하고 지식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계몽 과학자들이 물리법칙을 공부해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드는 것처럼, 헤르메틱 메이지도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함으로써 더 강대한 힘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빨리 달리기만 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달리는 도중에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이 얼마나 쓸모가 있겠느냐?”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
그녀의 멘토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는 서향. ‘스승’이라는 단어도 아직까지 어색하다. 동양계라 하더라도 애초에 미국에서 자란 그녀니까. 그러나 단어 자체의 어색함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를 오더 오브 헤르메스 내에서 통용되는 명칭으로 부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곧 아직 그녀에게 자격이 없음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켜 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스승은 교육을 전담하는 챈트리로 배정받아야 하는 그녀를 아직도 잡아 두고 있었다. 간소화된 심볼 간의 상호작용마저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큰 지식의 바다를 시선에 넣어야 할 헤르메틱의 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누누히 말하지 않았느냐. 네 방식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동굴을 깊게 파놓는 것과 다름 없다. 그것들을 서로 연결 해야만 더 높은 이해를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사실, 첫 심볼을 배우는데만 해도 엄청나게 오래 걸렸다. 그것도 아주 오래. 70년 전에 지어진 집의 지하실에서 문서가 파손되지 않게 관리하고, 직접 필사 하여 새로운 복사본을 만들기를 몇 년. 그녀가 제대로 읽을 수 조차 없는 글자들을 몇 만개나 쓰고 나서야 그녀는 처음으로 그 속에 감추어진 비밀의 편린을 볼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기초를 익히는데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갑갑한 저택에서 나와 이렇게 문명의 이기를 즐길 수 있는 것도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은 처음으로 허락되는 것보다 훨씬 멀리 나온 상태였다. 집 근처에는 도대체 즐길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 일찍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커피를 마신다.
세상에. 스타벅스 커피가 이렇게 맛있을 줄이야.
서향이 감탄하며 에노키안 심볼을 머리 속에 새겨 나간다. 훨씬 머리속에 잘 들어오는 느낌이다. 그래, 이게 훨씬 낫지. 이어폰을 낀다. 오, 음악을 실어 나르는 헤르메스의 날개Internet시여. 어찌나-
“…?”
서향의 시선이 고정된다. 카페 한쪽에 정장을 입은 동양계 여성이 앉아있었다. 태블릿을 들고 무엇인가 하고 있는 그녀가 서향의 시선을 눈치챈 듯,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다. 새까만 정장과 대비되는 지나치게 흰 셔츠. 함부로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분위기.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진다. 서향이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시선을 힐끔거리며 그녀를 살핀다.
지나치게 정적인 동작. 숨을 쉬지 않는 듯, 가만히 있을 때는 말 그대로 미동도 없다.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는 그녀. 그 너머에서 살짝 붉은 기운이 느껴지는 검은 눈동자가 보인다. 서향이 본능적으로 그 눈이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눈치챈다.
제기랄.
서향이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난다. 그러나 당황을 감추지 못해, 단 한 모금 마신 커피를 그대로 놓고 거의 달아나듯 카페 밖으로 나선다. 살짝 뒤를 돌아본다.
젠장. 제기랄.
그녀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정장을 입은 여성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여유라도 부리려는 것인지 서향이 놓고 간 커피를 들어올리는 것이 보인다. 서향을 따라오겠다는 무언의 선언인걸까?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할 시간조차 없었다.
맨 인 블랙Man in Black.
테크노크라시와의 첫 조우가 이렇게 일어날 줄은 몰랐다. 여기저기서 많이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거기에 이 도시에서 오더 오브 헤르메스와 테크노크라시는 굉장히 험악한 관계라고 들었다. 서향이 추적을 막기 위해 마법적인 보호가 걸린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황급히 번호를 누른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스승님이 연락하라고 했던 번호였다.
스타벅스를 나서 큰 길가로 향하려는 그녀의 시선 한 가운데 또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단정하다 못해 그려내듯 각이 잡힌 위협적인 검은 양복을 입은 동양계의 남자다. 몰개성한 것이 아니라, 아예 기억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특징이 없는 인상. 만약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있었다면 전혀 그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천천히 서향에게 다가온다. 서향이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다.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다.
서향이 그를 피하기 위해 황급히 코너를 돌아 스타벅스 뒷편의 좁은 골목으로 향한다. 골목 멀리서 공간이 뒤틀리며 고대의 글자가 원을 그리며 허공에 나타나는 것이 보인다. 원형의 게이트웨이가 공간을 관통하고, 두 명의 플람뷰 메이지가 나타나 서향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서향의 긴급한 호출을 받고 달려온 자들이 틀림 없었다. 서향이 한숨 돌리는 순간-
“아가씨.”
서향이 화들짝 놀라며 뒤 돌아선다. 아까의 여성이었다. 이렇게 끝장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서향에게 그녀가 유창한 영어로 말하며 커피를 건네 준다.
“커피 놓고 가셨어요.”
서향이 당황한다. 다짜고짜 권총을 쏘거나 할 줄 알았는데-
“가… 감사합니다.”
그녀가 재빨리 뒤돌아서서는 플람뷰 소속의 메이지들이 다가오기도 전에 다시 스타벅스 안으로 들어간다. 서향은 어찌나 당황했는지, 그 여성이 무언가의 제스쳐를 취하는 것 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거의 아찔하기까지 한 안도감이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캐서린!”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뒤에서 호통이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누가 플람뷰 소속의 메이지들이 아니랄까봐 유난스럽게 크게 울리는 듯 했다. 서향이 풀 죽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돌아선다.
“아… 망했다…”
서향이 침대에 머리를 파묻으며 말한다. 그녀가 머리를 흔들고는 차가운 침대 위에 앉는다. 한숨이 꺼져라 내쉬는 그녀.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스승이자 멘토인 존 케인은 부재중이었기에 자신의 성급한 행동 때문에 당장 혼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서향의 행동은 쉽사리 용서받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허락된 지역을 벗어난데다가 급하게 다른 메이지들을 호출해버리는 바람에 그들이 패러독스를 감수하고 묶음의 기예Ars Conjunctionis를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보통 유니언의 요원과 헤르메틱 메이지가 그 정도로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면 무언가 큰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만약 그들이 작정하고 서향을 해하려 했다면 그녀는 물론이고 급하게 오느라 별 준비가 안되어 있던 다른 메이지들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도시를 담당하고 있는 아말감과 서향이 속해있는 챈트리는 매우 험악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손을 휘둘러 허공에 심볼을 그린다. 방향성도, 색도 없는 평범한 빛이 떠오른다. 이런 것은 쉽다. 원하면 훨씬 강한 빛을 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 단순한 일에 한해서라면 도제Apprentice 수준의 헤르메틱 메이지 중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빛을 이용해 눈을 멀게 하거나Force/Life, 빛으로 이루어진 움직이는 형상Force/Prime을 만들어내는데는 서투르기 그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투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수준이다.
문득 그녀가 스타벅스 커피를 쳐다본다. 용케 여기까지 오면서도 버리지 않았-
“…?”
서향이 커피를 집어 든다. 분명 자신이 꽂은 기억이 없는 스틱이 꽂혀 있다. 그녀가 그것을 뽑아 든다. 스틱에 말려 있던 방수 종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풀려나온다.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겠습니다, 요원.
서향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기들끼리 전달하려고 했던 비밀 메시지를 실수로 넣은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귀에 박히게 들은 게 맞다면 그들이 이런 실수를 할 리는 없는데…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을 공격한 것도 아니고, 납치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우연히 마주쳤다고 하기에는 일부러 너무 그녀에게 가깝게 다가왔던 것이다. 오히려 도발하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일 합당할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이런 걸 생각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만약 오늘 만난 자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거나, 서향을 호위하기 위해 다른 메이지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서향은 고문을 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상상에 몸서리치며, 그녀가 피곤함에 빠져 천천히 잠든다.
“요원.”
“네, 국장님.”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는 차량 안에서 류 국장과 하은이 대화를 나눈다. 두 사람의 말투는 같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비슷했다. 감정이 최소화된, 극히 사무적인 말투. 창 밖에서 주광색의 가로등 불빛이 차 안을 주기적으로 비춘다.
“최근 업무 상황은?”
“양호합니다.”
“그레인저 감독관은 어떤가?”
“저와 방식은 다르지만, 배울 점이 있습니다.”
“그렇겠지.”
류 국장이 담담하게 말한다. 심포지움을 관리해야 할 그이지만, 이번 임무의 경우 현장에서 하은과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뜻한다. 이 임무가 정말 어렵던가, 아니면 류 국장의 레벨에서만 알아야할 더 큰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다.
“나는 그녀를 신뢰한다.”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난다. 또 다시 건조하고 침착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차 안에 내려앉는다.주광색의 불빛이 번뜩이며 하은의 눈동자를 비춘다.
“캐서린.”
플람뷰의 헤르메틱, 강대한 메이지인 존 케인이 여행에 지친 듯한 표정으로 서향의 이름을 부른다. 그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고, 한쪽 손등 위로는 패러독스로 인해 입은 마법적 화상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낡은 양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얼핏 보면 그냥 성질머리 있는 평범한 중년의 남성에 불과했지만 그렇게 그를 얕보았던 그의 적들은 모조리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마기스테르 스콜라에Magister Scholae라는 그의 호칭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서향이 간신히 벌벌 떠는 것을 참으며 대답한다.
“네.”
“헤르메틱이 되는 것은 단순히 에노키안을 읊고 더 많은 지식을 아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용기와 신중함, 하우스 플람뷰에서 제일 존중 받는 미덕이 아니더냐?”
“네… 알고 있습니다.”
존이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한다. 힘의 대가Master of Force라는 이름이 전혀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사람을 짓누르는 힘이 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성급하게 행동했지?”
“죄송합니다…”
서향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까지는 이해하겠다. 그러한 싸움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규율을 어기고 그들의 영향권으로 무단 외출하다니?”
“죄송합니다... 경솔했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고되고 지루한 시간을 꾹 참으며 보낸 네가, 조금의 시간을 더 참을 수 없다니.”
서향이 속으로 그건 스승님이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대답을 참는다. 물론 그를 존경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지식과 힘 뿐만 아니라 발전이 정체되어 있는 서향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가르치고 발전시키려 하는 그의 끈기까지.
“서향. 네 재능은 아주 귀중하다. 복잡한 단계에는 오르지 못했더라도 기초적인 힘을 다루는데 있어서 네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 널 이제 서서히 아카데미로 보내려고 했다만…”
그의 말에 서향이 고개를 번쩍 든다. 유니언에서도 그렇듯, 헤르메틱의 사회에서 인정 받기 위해서라면 일종의 교육 기관을 거치는 것이 거의 필수적이다. 단지 지식 뿐만 아니라 인맥에 있어서도 그 과정은 아주 중요했다. 그 기회가 지금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아직 준비가 안된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내가 보기엔 그런 것 같지 않은데.”
“하지만 스승님께서는 한번도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서향이 입을 다문다. 실수했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를. 스승의 면전에서 대든 것이다. 스승일 뿐만 아니라, 손짓 한번에 그녀를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존재 앞에서.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다. 서향은 마치 사극에 나오는 인물처럼 머리를 숙인 채 감히 스승을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존이 입을 연다.
“…좋다. 어쩌면 내 실수일지도 모르겠구나.”
예상 외의 답변. 서향이 또 다시 고개를 든다. 그의 스승이 미소를 짓는다.
“여기서 책에 코를 박고 있는 것보다는 실전을 경험해 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물론 도움은 되지 않을게다. 그러나 동기부여는 확실히 되리라고 생각한다.”
서향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콰앙!”
보강된 철근 콘크리트 벽이 터져 나간다. 이 곳은 서향이 속해 있는 챈트리와 대립하고 있는 유니언 아말감의 시설 중 하나다. 서향에게 접근한 것을 도발이라 보고, 그 도발을 그대로 돌려주기 위해 이 시설을 공격하기로 한 것이다. 최근 챈트리가 존재를 알아낸 이 시설은 도시 내의 거의 모든 감시카메라와 연결되어 있는, 말 그대로 아말감의 눈이다.
“클론들이 운영하는 시설인가보군.”
한 플람뷰 메이지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말한다. 그의 발 밑으로 5명 정도의 무장한 클론이 쓰러져 있었다. 클론들이 들고 있는 총의 탄창은 모조리 터져 나가 있었다. 클론의 수나 무장 상태로만 보면 충실하지만, 정식 요원은 없는 모양이었다.
“도발 목적이니, 우리 쪽에서도 피를 보지 않으면 좋지.”
또 다른 메이지가 들어오며 말한다. 그의 손에서 권총이 장전된다. 물론 그 안에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강화된 총탄들이 들어있다. 그들 뒤로 5명 정도의 소서러Sorcerer들이 들어온다. 유니언이 EC를 운영하는 것처럼, 이들도 패러독스를 유발하지 못할 정도의 저위계의 마법을 다루는 인원들을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좋아. 가-“
갑자기 코너에서 클론 둘이 튀어나와 그들에게 사격을 퍼붓는다. 그러나 그 총탄에 반응하듯 플람뷰 메이지의 재킷에 새겨진 글자Ward들이 허공에 빛을 뿜기 시작한다. 총탄들이 그 빛을 지나자마자 모두 녹아버린다. 뭉툭한 납덩이리조차 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소멸되는 탄환.
“철컥-“
재장전하는 소리. 서향이 재빨리 앞으로 나서 그들을 향해 힘의 상징Sigil을 그린다. 그들을 향해 엄청난 중압이 쏟아지고, 손에 들린 그들의 탄창이 튕겨나간다.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는 그들의 이마에 다른 자들이 쏘는 총알이 박힌다.
“방금은 괜찮았다, 캐서린.”
서향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존의 말처럼 상호관계에 대한 이해가 증진된다던가 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시설을 눈으로 보는 것 자체가 그녀가 어떤 상황에 있는 것인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광경만을 보고 있자면, 카페에서 여유 부리며 커피나 마시고 있을 틈이 없는 것이다. 그들이 복도를 지나 관제실로 들어간다. 관제실을 지키는 클론들의 반항이 있었지만, 별 문제 없이 제압되었다.
서향이 관제실 안에 들어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그들이 현대사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은행 외벽의 ATM CCTV에서부터 교외의 천문대 카메라까지 기록 가능한 모든 영상이 이 시설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사방의 모니터들이 빛나며 도시의 모든 광경을 비추고 있었다. 그들의 라이벌 -라이벌이라 할 수 있다면- 들은 이런 시설을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향이 깨닫는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경제적인 것도, 심지어 사상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는 이 정도로 편집증적인 수단까지 동원할 동기가 생겨나지 않으리라. 오히려 그들의 싸움은 종교적인 것에 가까웠다.
“전부 녹여버려야겠군.”
우스운 일이지만, 관제실에 불을 지르거나 했다가는 소화 시설이 작동해 전원이 물에 빠질 생쥐꼴이 될 것이다. 대신 그들은 EMP의 헤르메스 버전이라 할 수 있는 마법을 사용한다. 관제실의 모니터 한 가운데에 펜타그램과 함께 화성과 수성을 상징하는 심볼이 그 주위에 그려진다. 그것을 보조하는 상징들이 완성되자마자 작은 스파크가 일어난다. 동시에 모니터들이 일제히 쇼트되며 꺼져버린다.
“좋아. 가지.”
그들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떠난다. 유니언 놈들은 최소한 몇 달간 이 시설을 다시 지어야 할 것이고, 그 동안 플람뷰 메이지들의 운신의 폭이 훨씬 넓어지게 될 것이다.
“좋아, 이제 돌아가면-“
-철컹.
갑자기 무거운 금속음과 함께 불이 꺼진다. 조명 뿐만 아니라 감시 시설도 모두 셧다운 된다.
“뭐야?”
“항복하라.”
싸늘한 목소리가 복도의 사방에서 들려온다. 스피커를 이용한 것이 분명하다. 전쟁터에 나온 병사가 아닌, 서류업무를 담당하는 관료가 쓸 법한 사무적인 어조. 플람뷰의 메이지들이 당황한다. 그들이 야시경 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리가 없고, 그런 쪽의 기예를 배우지도 않았으니 시야를 확보할 방법은 마법 뿐이다.
“제기랄…”
플람뷰 중 한명이 품속에서 에노키안이 새겨진 유황 덩어리를 공중으로 던진다. 순식간에 유황 덩어리가 조각나며 마치 조명탄을 연상케 하는 모양으로 주위에 뿌려진다. 빛이 피어 오른다.
그리고, 그 빛이 그들의 코앞에 조용하게 서있는 한 요원을 비춘다. 동양계에, 지극히 평범해서 기억하기 조차 힘든 외모.
“아악!”
그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 요원이 제일 가까이 있는 메이지에게 순식간에 접근한다. 한손으로 쇄골뼈를 내리쳐 분쇄하고, 다른 손으로는 작은 라이터 같은 장비를 꺼낸다. 그 장비가 빛나며 섬광을 발한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모두의 시야가 가려진다.
“!”
그들의 시야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 그 요원의 모습은 없었다. 그 사이에 쇄골이 부러지고 양쪽 어깨가 완전히 탈구된 아까의 플람뷰가 고통에 겨운지 비명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모두 경계를 늦추지 마!”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가 어둠속을 겨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침묵 뿐.
심지어 통풍 시설마저 완전히 차단된 것인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으스스한 기분이 그들을 감싸온다.
“떨어지지 마라.”
그러나 그 말을 얼마나 잘 지킬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진.”
“에이다. 어떻게 되가고 있대요?”
MSF-44 아말감. 그레인저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엄청난 양의 서류작업 -그 중 상당수는 하은의 교체 파츠에 관한 것과, 우주로 나갔을 때의 일을 적당히 둘러대기 위한 것이었다- 을 처리하고 있었다. 에이다가 아말감 내부망으로 정보를 업로드 하며 간단하게 대답한다.
“별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
그레인저가 스크린에 뜨는 간단한 보고를 읽기 시작했다.
“…’퇴출’ 작전이라니.”
그레인저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비꼬듯 말한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간다.
“전 이 작전이 정말 싫어요.”
“이해합니다.”
에이다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헉…헉…”
서향이 거의 비명을 내지르듯 숨을 몰아쉰다.
세상에.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실력을 가진 요원임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하면 요원인지, 아니면 마법을 사용하는 다른 메이지인지도 구분이 안 갈 정도다. 시설에서 안전하게 탈출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복도에 설치된 비살상용의 부비트랩.
환풍구에서의 공격.
스피커와 홀로그램을 이용한 감각 교란.
시야 교란 및 시설 내부의 도어락을 이용한 고립.
상대하고 있는 것이 한명인지 그 이상인지도 알 수가 없다. 플람뷰 메이지들이 대응하기도 전에 사라진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상대하고 있는 자는 이 도시를 담당하는 아말감에 소속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정도 실력을 가진 요원이 있었다면 진작에 챈트리 내에서 경계 대상으로 지정되었을 것이다.
다른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서향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홀로 고립되고 말았다.
“헉… 헉…”
멀리서 작은 폭발음이 들려온다. 그와 동시에 턱,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서향의 어깨를 쥐고는 벽으로 몰아붙인다. 서향이 쥐고 있는 권총을 쳐내고, 그녀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댄다. 어둠속에서 붉은 빛이 도는 검은색 눈동자가 보인다. 폭발과 함께 갑자기 조명이 희미하게 켜진다.
“너.. 넌…”
그때 스타벅스에서 마주친 여자 요원, 노하은이다. 그녀가 마치 서향의 얼굴을 스캔하듯 그녀를 훑어본다. 뭔가 확인하려는 모습이었다.
“…?”
서향의 이마를 노리고 있던 요원이 총을 거둔다. 그녀가 마치 서향을 무시하듯이 그녀를 지나쳐 코너에 몸을 은폐한채 폭발음이 울려 퍼지는 복도를 내다본다.
“요원. 좀 늦었군요.”
그녀가 차가운 말투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다.
“거기에 준비도 불충분 합니다. 이 시설에 끌어들인다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오히려 저희가 당하겠군요.”
서향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대체 무슨 소리지?
“괜찮습니다. 저희에겐-“
파직.
몇 겹이나 겹쳐 쓴 힘의 기예Ars Essentiae의 가장 순수한 형태. 그 상징이 휘감긴 주먹이 그녀의 옆구리를 찢어발긴다. 힘이나 그것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기도 전에 그 힘을 휘두르는 서향. 적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약점을 보였다면, 그대로 공략하면 되는 것이다. 서향에게는 상황을 판단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윽-“
서향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힘의 반작용을 고려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자신의 팔도 큰 상처Paradox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서향에게는 이해의 부족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피와 살이 튀는 대신, 금속과 윤활유가 튄다. 말로만 들었던 기계로 된 인간. 그때 숨을 쉬지 않는 것 처럼 보였던 것도 이해가 간다. 어딘가 중요한 시스템이 손상된 것인지 그녀가 그대로 주저앉아 서향을 올려다본다.
“요원…?”
“나… 난 요원 같은게 아니야!”
서향이 당황하며 말한다. 그 순간 그들이 있는 복도로 누군가가 내팽겨쳐진다. 서향과 함께하고 있던 플람뷰 메이지 중 하나다. 곳곳에 총상을 입은 그가 저항하려는 듯 손을 힘겹게 들어올리지만 그 전에 그를 쫓고 있던 요원이 다가와 그의 손가락을 꺾어버린다. 그 때 스타벅스에서 보았던 남성 요원, 류 국장이었다.
“아악!”
비명에 주춤하는 서향. 그녀의 존재를 눈치챈 듯 그가 고개를 돌린다.
“…?”
류 국장이 천천히 서향을 쳐다본다. 그가 벽으로 몰아 붙이고 있던 메이지가 거의 정신을 잃은 모습으로 서서히 바닥으로 쓰러진다.
“뭘 하고 있는 건가, 요원?”
그가 돌아선다. 서향이 당황한다. 그때 자신을 쫓아오려 했던 요원임을 기억해낸 그녀가 즉시 하은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놔줘!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박살내버리겠어!”
하은은 저항하지 않고 가만히 앉은 채 류 국장을 바라본다. 마치 그의 결정을 기다리는 듯 했다. 류 국장이 한참동안이나 서향을 쳐다본다. 피가 튄 선글라스 너머로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영혼을 꿰뚫어보는 듯한 -만약 유니언의 요원에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그 시선에 으스스한 기분을 느낀 서향이 소리지른다.
“뭐 하고 있어!”
“…다시 묻겠다. 뭘 하고 있는 건가, 요원?”
그가 조용하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귀 옆에서 묻는 듯한 꺼림칙함이 서향의 목덜미를 타고 오른다. 지금 쓰러져 있는 요원에게 자폭이라도 하라고 독촉하고 있는 건가? 그녀가 그 생각에 몸서리치며 대답한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당신은 지금 나와 대화하고 있는 거라고!”
“알고 있다. 나는 자네에게 이야기 하고 있는 거다, 요원.”
“…?”
서향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황혼Quiet의 영향으로 인해 미쳐버린 메이지들 중 피아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모두를 살해하려 하는 자들은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설마 적을 아군으로 인식하는 어처구니 없는 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헛소리 그만하시지!”
그녀가 단호하게 말한다. 류 국장이 또다시 침묵을 지키며 서향을 바라본다. 복도가 묘한 침묵에 빠진다. 아무 말 없이 서향을 쳐다보는 류 국장. 작게 손을 떨며 하은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 서향. 저항 없이 서향을 올려다보는 하은. 그 광경 언저리에서 기절해 있는 플람뷰 메이지.
어디선가 들려오는,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화이트 노이즈.
희미한 조명만에 의지해 간신히 그 광경을 알아 볼 수 있는 복도.
옅지만 길게 늘어진 그림자.
하은의 머리를 겨누고 있는 총.
그 총구의 무게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상대방의 무반응.
정체된 상황.
답답함.
숨이 막혀올 듯한 공기.
희미하게 섞여오는 타는 냄새.
“안 들려?!”
당장에라도 신경증에 걸릴 듯한 이 답답함을 깨 버리려는 듯, 서향이 소리지르며 류 국장에게 총구를 들어올린다.
“-?!”
하은의 머리에서 총구가 들어올려지며 서향의 자세와 시선이 흔들리는 순간 류 국장이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웬만한 육상 선수를 넘어서는 속도로 가속해, 그대로 총구의 사선을 타고 서향에게 접근하는 그. 당황해 마법은커녕 조준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의 어깨를 류 국장의 손날이 스친다.
“으악!”
서향의 비명. 그러나 류 국장은 그녀를 공격하는 대신 그녀를 멀리 밀쳐낸다. 그 와중에 방아쇠를 잘못 당겨 눈먼 총알이 복도에 튄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진 그녀가 류 국장을 향해 허겁지겁 총구를 향한다. 류 국장 역시 어느샌가 권총을 꺼내 서향을 겨누고 있었다. 그가 마치 하은을 보호하듯 하은과 서향 사이에 서서는 말한다.
“많이 잊어버린 것 같군.”
그가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분명 자신의 부하를 질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향이 발작적으로 방아쇠를 당기지만 총알은 나가지 않는다. 류 국장이 천천히 다른 손으로 그녀의 권총에 삽입되어 있던 탄창을 들어올린다. 탄창도 없고, 약실에 들어가 있던 총탄은 허공에 낭비해 버렸다.
저항하기 위해서는 마법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그녀가 또 다시 에노키안 심볼을 그리려는 순간 류 국장이 말을 꺼낸다.
“회수는 실패군. 가라.”
그의 위압적인 한마디에 서향이 주춤주춤 물러선다. 그의 스승과는 또 다른 종류의, 그러나 동일한 정도의 중압감이다. 그녀가 물러서는 것을 보고서도 류 국장은 쫓아오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동료를 부축해 사라질 때까지도 그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향이 캐리어를 끌고 방에 들어선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보관해 놓은 짐을 부쳐 달라고 한 것이 이제야 도착한 것이다. 교육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 -마치 군대 훈련소처럼-로 지금까지는 사용을 허락 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좀 달랐다. 유니언의 시설에 침투한 자들은 대다수가 중경상을 입었지만 시설 자체의 무력화에는 성공했기에 동점이었다. 그 와중에 서향이 부상당한 플람뷰 메이지들을 수습해 돌아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에 그녀의 개인적인 위상도 꽤나 올라갔다.
그녀가 캐리어를 바닥에 놓는다. 아직도 맞은 어깨가 약간 아프긴 했지만 며칠 있으면 나을 것이다.
“어?”
서향이 캐리어 안쪽 제일 위에 놓여 있는 노트를 꺼내 올린다. 그녀의 일기장이다.
“오랜만에 보네…”
그녀가 중얼거리며 침대에 걸터앉는다. 사실 일기장이라고 해봐야 마법을 접하게 된 이후로는 쓰는 것을 그만 둔 채였다.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인지 그녀가 일기장을 펼친다.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추억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모범생은 아니었지만 성적만 떼고 보면 항상 공부는 잘했던 그녀였다. 그녀가 피식 웃으며 한페이지 한페이지를 넘긴다.
추억.
마법 같은 것을 몰랐을 때의 그녀는 지금보다 더 대책 없고, 경솔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어쩌면 고치려고 해도 안고쳐지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피식 웃는다. 오더 오브 헤르메스 같은 곳이 아니라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분파에 들어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녀에게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추억에 젖은 그녀가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간다.
[드디어 침입하는데 성공했다. 지금부터 나 스스로에게 기억 소거 절차를 실시할 것이다. 이 일기장은 혹시라도 기억 소거 프로시져가 제 시간에 해제되지 않았을 경우 스스로에게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남겨둔다.]
서향의 손이 또다시 떨린다.
이런… 걸 쓴 기억은… 없는데?
그러나 분명 그녀의 필체다. 서향이 일기를 계속 읽어 내려간다.
[현재 그들의 현실교란적 테크닉을 흉내 내기 위해, 기존의 텔레키네시스를 강화하기 위한 시술을 받았다. 그들의 ‘가르침’이 적절한 트리거가 되어 하나씩 심리적 억제 장치가 자동으로 해제되면 그들과 비슷한 흉내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다. 위험한 임무임은 알고 있고-]
서향이 일기장을 덮어버린다.
말도 안돼.
하지만.
왜?
그녀가 즉시 일기장 위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허공에 유려한 곡선을 지닌 상징을 그린다. 즉시 일기장이 불타 먼지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에노키안이 압축된 상징의 안에 담긴 힘이 발현된 것이다.
에노키안…의… 그 안에 담긴…
자신이 쉴새 없이 필사해온…
서향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속임수다.
맞아, 속임수다.
서향이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 얼굴을 파묻는다. 스승님에게 이야기해 볼까. 하지만 즉시 그만 둔다. 나 혼자서도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다. 그냥 무시하면 되는 일이다. 유니언 놈들의 음모가 틀림 없었다. 자신이 이야기 하는 순간 일어날 혼란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유니언과 대적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들의 수작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바다.
그래, 별일 아닌 것이다.
자신이 조용히 하고 있으면 그들의 음모는 아무일 없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자신만 조용히 하고 있으면-
“우웅-“
서향을 태운 비행기가 서서히 이륙하기 시작한다. 헤르메틱 메이지라고 해서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챈트리 간의 이동에는 마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은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 유니언의 실험실에서 텔레포터를 사용하더라도 실패의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만약 공간이동을 하는 당사자가 마법에 능통하다면 유사공간에 떨어져버리더라도 어떻게든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서향 같이 헤르메틱의 기예에 발을 막 담근 경우에는 자력으로 귀환하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유니언이 텔레포터보다 비행기를 더 선호하는 것처럼, 헤르메틱 메이지도 상황이 허락한다면 비슷한 선택을 -물론 고루한 옛 메이지들 중에서는 그런 생각 마저도 거부하는 자들이 있지만- 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상황은 최적이다. 감시 시설의 파괴로 인해 최소한 이 도시에 한에서는 유니언의 눈이 가려진 셈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여권을 통한 필터링 정도는 하우스 포르투나가 만들어낸 몇몇 로테를 사용하면 막을 수 있다. 물론 유니언이 처음부터 비행기를 타는 메이지를 주의 깊게 추적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건 유니언의 기준에서 지나치게 위험한 메이지에 국한된 일이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벨트 사인이 깜빡인다. 서향이 항공기 2층, 퍼스트 클래스 좌석의 팔걸이를 만져본다. 그녀의 스승과 챈트리는 가난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기다릴 필요도 없고 2층이다 보니 지나가는 이코노미 승객들의 짐에 치일 일도 없다.
여러 토론 끝에, 그녀를 오더 오브 헤르메스가 운영하는 교육 전담 챈트리로 보내는 것이 결정되었다. 존 케인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도박일 것이다. 한편으로는 서향을 다양한 환경에 노출 시킴으로써 기량을 향상시킬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가 독자적으로 연구한 상징학을 그대로 다른 자들에게 공개하는 셈이니까.
그러나 지금의 서향에게 있어서는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 큰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더 많은 지식, 그리고 더 많은 힘.
그것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좌석 벨트 사인이 꺼지자 마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2층에는 소수의 퍼스트 및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 뿐. 그녀가 2층을 둘러본다. 비수기인지 좌석은 한산했다. 대다수의 승객들은 이런 여행이 익숙한 것인지 신문에 얼굴을 파묻고 있거나, 태블릿이나 노트북을 꺼내 들고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승객들을 뒤로하고 그녀가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아예 땅이 안보이기 전에, 좀 더 지상이 잘 보이는 1층 창문에서 구경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1층에서 전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뭐야?”
그녀가 불안감을 억누르려는 듯 작게 중얼거리며 1층으로 내려온다. 이코노미 좌석으로 가는 커튼을 열어 젖히는 순간.
“…?”
아무도 없다.
이코노미 석에는 승객은 커녕, 승무원 조차 보이지 않는다. 서향의 머리속이 하얘진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들은-
“요원.”
악몽속에 나올 것 같은 목소리. 서향이 돌아서자 그때의 여성 요원이 서있었다. 서향이 반항하기도 전에 그녀가 서향을 제압하고 목덜미에 주사를 꽂아 넣는다. 서향이 발버둥치지만 곧바로 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하고 시야가 흐려진다.
안돼, 하는 혼잣말과 함께 그녀의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진다.
“요원.”
서향이 서서히 깨어난다. 환자용의 침대다. 머리가 아프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제일 먼저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 목 뒤다.
“…?”
서향이 목 뒤로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에 손을 가져간다.
“!”
피부를 절개한 자국이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난 것인지, 아니면 유니언의 기술력으로 상처를 아물게 한 것인지 붕대 같은 것으로 덮어놓지 않아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감각이다. 무엇인가 외과적으로 삽입된 것일까. 그런 생각과 함께 패닉이 그녀를 덮쳐온다.
“안돼…”
그녀가 신음을 흘린다.
“요원.”
또 다시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지긋지긋할 지경이다. 서향의 옆에는 그때의 여성 요원이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다.
“난 요원 같은게 아니야!”
“…”
하은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조용히 이야기를 꺼낸다.
“미안합니다. 역시 당신이 아니라 제가 임무에 자청 했어야 하는데.”
대체 무슨 소리일까. 서향이 고개를 들어 하은을 바라본다. 짧은 패닉에 이어 찾아오는 것은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다.
“당신의 임무는 극비였기에 저희 측에서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저 뿐이었는데 제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회수 절차가 늦어졌습니다. 거기에 당신의 기억 복원 프로시져마저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그녀가 말하며 서향과 시선을 맞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 안에서 움직이는 수 개의 렌즈가 보인다. 서향이 에노키안 심볼을 그리려 한다. 그러나, 손가락은 허공을 가를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텔레키네시스 강화 장비를 수술로 적출했습니다. 당분간 거부반응으로 인해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하은의 말이 이어진다. 그녀가 손을 펴 보이자 정말로 그녀의 몸에서 추출한 듯한, 여기저기 핏자국이 묻어 있는 복잡한 장치가 드러난다. 서향의 몸이 떨린다. 뭔가 몸에 넣은 게 아니라, 빼냈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죠?”
“정말 기억나지 않는 겁니까? 그들을 속이기 위해 단순한 종류의 텔레키네시스에 한해서-“
“됐어요!”
서향이 히스테릭하게 외친다. 그래. 알고 있다. 그때 일기장에 쓰여진 그대로다.
“제기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할 수 있음에도 자신을 공격하지 않는 유니언의 요원을 봤고, 자신의 일기를 봤고, 결정적으로 저 장치의 제거와 함께 더 이상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자신이 있다.
하은이 그녀의 손에 무엇인가를 쥐여준다. 색이 바래다시피한 신분증이다. 거기에는 서향의 얼굴과, 그녀의 소속, 계급명, 인식번호 등이 똑바로 인쇄되어 있었다. 서향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본다.
“…미안합니다, 요원.”
“…당신의 말이 진짜라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나요?”
서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초기 검사의 결과에 따르면 제한된 정도에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워낙 복잡하게 설계된 프로시져였기에… 하지만 이 정도로-“
“됐어요!”
서향이 히스테리컬한 목소리로 외친다.
“젠장… 제기랄… 그럼 난…”
그녀가 고개를 파묻고 흐느낀다. 하은은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은채 그저 그녀의 옆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류 국장.”
그레인저가 병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류 국장에게 다가온다. 물론 안쪽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다.
“그레인저. 구경하러왔나?”
그레인저가 고개를 강하게 젓는다.
“끝났는지만 물어보러 왔는데.”
“끝났다. 제어 장치도 외과적으로 삽입되었고, 이제 기억을 만들어서 처음부터 유니언 측의 요원이었다고 생각하게 하면 되겠지.”
“…맘에 들지 않는데.”
류 국장이 팔짱을 낀 채로 심문실을 내려다본다.
“글쎄. 믿음의 힘이란 강력하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억양은 없지만, 그가 거의 조롱하듯 말한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여기서 헤르메틱 식 교육을 할 것도 아니고.”
“그녀의 현실 교란적인 능력은 사이킥 연구의 프레임워크내에서 충분히 해석 가능한 수준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훌륭한 헤르메틱 메이지가 되었을 것 같진 않군.”
“…냉전 시대의 유물말야?”
“잘 알고 있군. 그녀는 다른 의미에서 힘Force Sphere의 대가가 되겠지.”
그레인저가 신발 뒤굽을 바닥에 두드리며 불만을 표시한다.
“그래서, 저 아이가 왜 필요한 건지는 안 알려 줄거야?”
“그건 기밀사항이다. 그렇게 이 작전이 맘에 들지 않는가?”
그레인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도 오더 오브 헤르메스의 분파 출신의 전향자다. 이런 상황과 자신의 과거가 겹치는데, 불편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개별의 상황만 보면 속아넘어가지 않겠지. 저 장치를 진짜 자기 몸에서 꺼낸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테고, 일기장이야 택배를 중간에 가로채 조작하면 되는 일이고, 우리가 공격하지 않는 거야 그냥 트릭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류 국장이 계획을 평가한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거기에 패닉까지 겹쳐버린다면 속이기 쉽겠지. 비행기 부분을 제외하면 예산 면에서도 효율적인 계획이다. 기계에 묶어 놓고 정신이 텅 빌 때까지 고문하는 절차도 없다.”
류 국장이 그 답지 않게 말을 이어간다.
“지극히 간단한 방법을 동원해 처음부터 우리측의 요원이었다고 세뇌하는, 아주 효과적인 계획이다. 그런데 뭐가 맘에 들지 않는거지?”
“…내가 이 계획을 수립했다는 부분이지.”
그레인저가 말을 내뱉으며 등을 돌린다. 그녀가 자리를 떠난 곳에서 류 국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병실 안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문서등록번호 A991-EPHEMERA-05-REVISED-V6
작성자 K████ A████ 박사, 에페메라 작전의 주임 카운슬러, 보안 등급 2-M
<<해당 문서는 음성으로 작성 되었으며, 보이스 리더를 통해 문서로 기록 되었음을 참고할 것. 어투의 수정은 있지만, 내용의 수정은 없음.>>
<<이전 내용 검열됨>>
국장님. 저번 보고서에서 소셜 컨디셔닝의 실시를 조언 드렸습니다. 그에 따라 제가 직접 최근 N의 심리 검사를 다시 실시하였습니다.
<<27초간 침묵>>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이제 N은 더 이상 이 세계를 퍼즐이나 문제의 조합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제
<<13초간 침묵>>
아니, 아직 그렇게 보고 있기는 합니다.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이제 N은
<<잡음>>
잠깐, 류 국장님? 여기서 뭘 하고 계신겁니까?
<<비명>>
<<문서 끝>>
==
개인 사정으로 인해 흔들흔들
참고 작품: Push, 빅오
제목의 (i) 는 오타입니다
갓....
무서어따
궁극의 세뇌조교,...
추추
너무너무 비열하드아 ㅡㅡ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