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룰을 쓰든 재밌게만 하면 그만이다'라는 글이 가끔 보이더라고.


나도 기본적으로 이 명제에 동의해. 하지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게 있어. 상품기획상 특정한 재미를 보다 쉽게 체험하게 해주는 룰은 분명 존재한다는 거지.


영화 '슛댐업' 본 사람 있나? 그 영화 보면 주인공이 당근으로 악당을 찔러 죽이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와. 물론 뛰어난 살인자라면 당근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분명 쉽지는 않은 일이야. 당근은 사람 죽이라고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니까. 여기서 애초에 사람을 찌르라고 만든 나이프로 쑤신다면 훨씬 쉽게 사람을 담글 수 있겠지.


아주 괴랄한 비유를 들기는 했지만 게임도 비슷해. 대부분의 게임은 룰 디자인상 특정한 재미를 더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특징들이 있어.


아마 산업디자인이나 게임개발업계에 몸 담은 사람이라면 나보다 잘 알 텐데... 이처럼 애초에 상품이 특정한 방향으로 이용되게 디자인 하는 걸 '행위유도성에 기반한 디자인(affordance based design)'이라고 해. 여기서 행위유도성은 대상이 지닌 어떤 속성이 이용자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 유도하게 만드는 성질을 뜻하지.


예를 하나 들어보자. 볼링공에 뚫린 구멍 세 개 있지?. 볼링공을 그냥 들고 던질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 손가락 끼우고 잡고 던지면 더 쉬워. 이 구멍은 볼링공 만든 놈이 그렇게 공 집어서 던지라고 일부러 뚫어둔 거야. 제품 디자인 단계에서 어떻게 쓰라고 미리 정해놓고 만든 거지.


게임도 비슷해. 모든 기획자는 자기가 만든 게임이 특정한 종류의 재미(혹은 체험)를 제공할지, 이 재미를 어떤 매커니즘으로 즐길 수 있을지 미리 정해둬. 


D&D를 보면 전투를 체계적으로 치를 수 있게 해주는 규칙이 많아. 하지만 미묘한 정치역학을 다루거나, 드라마틱한 상황을 플레이어가 직접 서술하게 해주거나, 캐릭터의 도덕적 타락과 내적갈등 같은 걸 지원하는 규칙은 없거나 적지. D&D는 기획자들이 [조사-전투-보상-성장] 사이클을 중심으로 한 모험을 하라고 디자인한 게임이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룰 대부분이 이 사이클을 플레이 하는 걸 지원하는 거고, 그 외의 룰은 일부로 배제하거나 축약한 거지. 핵심 재미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렇다고 D&D에서 전투 외에 다른 걸 못 한다는 뜻은 아니야. 어떤 팀은 원한다면 D&D로 사각관계 로맨스물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설령 그런 캠페인을 한다고 해도, 그건 D&D 기획자들이 의도하고 유도한 것과 조금 다른 플레이일 거야. D&D에는 사각관계의 미묘한 감정선을 그리는 룰이 없거든. 그리고 제품을 의도되지 않은 방식으로 쓰는 건 다소간 불편함이 따를 수 있지. 전기톱을 요리용 식칼처럼 쓰거나, 화분에 금붕어를 키우는 것처럼 말이야.


물론 실제로 그러한 불편을 감수하고 특정 게임을 소위 '마개조' 해서 본래 기획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굴리는 팀도 있어. 그건 그 팀 자유야. 뭐, 나도 그렇게 한 적 있고. 다만 그건 그 전문기획자들이 오랜 세월 정교하게 고안한 틀을 벗어나는 거야. 그게 더 재미 있을지, 혹은 끔찍하게 재미 없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 룰의 기획의도를 크게 벗어난 플레이는 그만큼 위험부담을 진다는 얘기야. 


잠깐 짬 난 김에 잡설 써봄. 하나마나한 얘기였다면 ㅈ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