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D&D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서사룰’이 아님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D&D가 서사를 위한 요소가 없는 건 아니고
도리어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즐기기에 적합한 규칙을 갖고 있지

레벨 상승으로 전체적 능력이 증가하고 각종 위기 상황을 내성굴림으로 돌파하며
이전엔 사용하지 못했던 힘과 장비를 얻어 이전엔 엄두도 내지 못했던 강적과 싸워서
점차 영웅으로 성장해 나가는 서사를 즐기기에 최적인 룰이 D&D임
(지금은 없어졌지만 이전에는 레벨 오를 때마다 호칭이 달라지는 것 같은
쓸데없이 로망만 고려한 규칙 같은 것도 있었다)

같은 이야기를 겁스로 즐기려고 할 때 되게 자잘한 조절이 필요한 걸 생각해 보면
D&D가 목표하고, 게임을 통해 만들어지는 서사가 얼마나 분명한지 잘 알 수 있지
(우리가 CoC를 서사룰이라고 부르진 않지만 CoC 역시 자기가 잘 하는 서사에 최적화된 룰인 것처럼)


그런데 이런 서사를 만드는 방법이 걍 던전크롤일 리가 있나
던전크롤이 최초인 건 맞았어도 이미 몇십 년 전에 그 단계를 빠져나온 룰임

던전크롤만 해도 서사는 생긴다? 맞음
D&D에서 가장 재미있는 요소가 전투다? 맞음
던전크롤 외의 다른 거 하면 낭비다? 이건 케바케임.

물론 세상에는 모눈종이 채우는 거랑 루팅하는 걸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문지기 히드라를 물리치고 들어간 던전 최심부에 스켈레톤 한 마리가 보스랍시고 있는 걸
좋은 시나리오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은 자연스럽게 기승전결과 이야기의 완급을 추구하기 마련임
그러니까 은색 팔 가진 대장장이를 찾아서 축복 받은 무기를 만들고 그걸로 드래곤 대가리를 으깨거나,
온갖 차원이 짬뽕된 혼란스러운 동네에서 아가씨랑 미팅을 하거나,
신의 피를 이었단 애들끼리 땅따먹기를 하거나 이러는 걸 캠페인 세팅이라고 내놓고 그러는 거고

D&D가 던전크롤 잘하고 그것만 해도 재미있을 수 있는 룰이지만
던전크롤만 하라고 되어 있는 게임은 아니고 도리어 그 영역을 넓혀나가기 위해 애써 온 게임이기도 함
무슨 던전까기만 해야 하는 게임처럼은 말하지 않아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