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갑자기 밤참먹고 기분이 싱숭생숭해졌으니 오랫만에 뻘글이 아닌 제목으로 글을 써 보자.

물론 내용은 예전과 별반 차이가 없는 뻘글 되겠다 ^^ㅋ


누군가는 TRPG를 어떻게 즐기든 재미있으면 그만.... 이라고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

좀 위화감이 느껴지는 말인데, 문제는 TRPG라는 것은 원래는 '어떻게 즐기든' 재미있으면 그만이던

그런 장르가 아니었다는 것임. 피아노 건반을 마구잡이로 누르면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그게 연주는

아니지 않냐? 옛날 옛적의 TRPG는 사실 좀 하드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지식들 내지는

일반 상식을 요구하는 장르였고, 이미 갖고 있는 지식들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도 무시할 수 없었음.

너희들 입장에서 흉악해 보이기 그지 없을 사례 몇 개를 한 번 살펴보자.


사례 1 - V:TM

3차 십자군 전쟁 시절 벤트루 십자군 기사와 브루하 이슬람 기사가 마주쳤다. 서로는 상대에게 딱히

적의가 없음을 알리려고...브루하가 먼저 누가복음의 한 구절을 읊었고 벤트루는 이슬람권의 시인인

잘랄 알 딘의 시로 화답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rpg&no=74863를 참조.

멋지지? 물론 잘랄 알 딘이라는 시인은 사실 3차 십자군 때는 태어나지도 않은 것 같지만 알 게 뭐야.

멋있잖아? 어쨌든 이런 걸 하려면 배경 지식과 상황판단 등이 필요하며 그런 건 다 공부해서 얻어야

하는 지식에 속함.


사례 2 - 올드 스쿨 RPG

깜깜한 복도가 눈 앞에 펼쳐져 있음. 플레이어는 물을 살짝 바닥에 붓고 그게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확인해 봄. 특이한 모양으로 흘러가는 것을 확인한 뒤, 플레이어는 복도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을 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그럴 근거가 나왔으니까) 옆으로 지나쳐 가기로 결정함.


역시 자세한 내용은 http://blog.storygames.kr/entry/old_school_gaming를 참조.

여기서는 상식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플레이어의 창의력을 요구함. 판정을 해 볼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실패해서 X되는 것보다 이런 수단으로 우회하는 것이 훨씬 확실하기 때문에 이런 상식빨의

플레이로 판정을 넘기는 걸 잘 하는 쪽이 유능한 플레이어가 되고 반대로 마스터의 경우는 특정한

상황에 대해서 상식과 개인적 지식빨로 그 상황을 알기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쪽이 유능한 마스터가

되었던 것임.


사례 3 - M:TA

누군가가 갤에서 마게 구인을 했음. 몇 명이 모인 것 같았지만 캐릭터를 만드는 도중에 하나 빼고

전부 다 리타이어했다는 것 같음. 지망자가 딱 둘이었고 그 중에서 하나만 남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게라는 룰이 이렇게 해롭다는 것임. 아, 룰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돌아갔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자신이 어떤 캐릭터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그런 캐릭터의 밑천이 어떻게 쌓아 올려졌는가를 마스터와 함께 쌓아나갈 때 무슨 단군왕검 시절

호랑이 쑥마늘 먹다 도망간 거 마냥 대부분이 견디지 못하고 그만 포기한 결과가 저 모양이었겠지.

당연히 근거는 없음 ^^. 어쨌든 그런 밑천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바로 배경 지식이란 거임.

그런데 불행히도 마게는 대개 룰북만으로는 그러기에 모자란 축에 속함...... 살짝 더 쉬운 예로는

아마 모르는 군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내가 군대 설명 글을 썼는데, 그거 읽으면서 이게

무슨 정신나간 개소리인가 했던 갤럼도 없지는 않겠지?


'공부'의 무게와 방향 잡기

어쨌든 이런 룰들을 건드리는 것은 그에 필요한 것을 배웠거나 혹은 배우려는 의사가 필요한 일임.

문제는 요새 풍조를 보면 알다시피 그런 지식을 늘어놓으면 부심부린다고 까이고 플레이를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고 하면 노는데 굳이 공부까지 해야 하냐며 거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보인다는 것임.

반지성주의 만세!


물론 모든 룰이 공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야. 그렇지만 이런 밑천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선택을

하는 부분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임. 예를 들어 D&D 5판을 돌리는 팀에서 마스터가 PHB를 보기

귀찮은 사람은 Basic 공개본만 보고 캐릭터를 만들어 와도 되고 원하는 사람은 PHB를 써도 된다고

해 보자. 아마 플레이를 조금만 해 봐도 다들 PHB 보고 캐릭터 만들고 심지어 XGE같은 서플먼트를

추가로 사서 보려고 들 걸? 물론 요구되는 지식이 너무 복잡한데 그런 걸 처리하는 메카니즘까지도

병맛스러우면 마게처럼 사람의 정신을 잡아먹기 때문에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지식은

어느 정도까지는 갖고 깔아두는 게 좋다는 것임. 그렇다고 3.5판 시절처럼 슈퍼 서플먼트 대전하는

등의 용도로 남용하면 안 되고.


그러면 왜 이런 공부를 회피하는, 또는 안 하는 것일까? 가장 큰 문제를 뽑자면 당연히 뭔가를 사서

보는 데 쓸 돈, 그것을 읽는 데 들일 시간, 그럴 의지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겠고, 하나 정도를

덧붙이자면 그 '필요한 지식이 담긴 뭔가를 어떻게 구할 수 있냐'는 것을 솔직히 잘 모른다는 점임.

내가 가끔씩 구글-푸가 부족하다고 남을 놀리는 덧글을 다는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을 말하는 건데,

왜냐면 나머지를 충족해도 이게 안 되면 필연적으로 헤멜 수밖에 없기 때문임. 간단한 사례를 보자.

최근에 누군가가 한글화를 한 아캄 시의 지도임.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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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를 읽는 데는 시간과 원본을 보기 위한 돈이 들었겠지? 다만 이 작업을 한 사람은 경찰서와

소방서 자리를 못 찾아서 감으로 찍었다는데... 그 부분에 대한 내 반응은 "엥 둘 다 아캄 서플먼트에

어디 붙어있나 번지까지 적혀 나오는데 그거는 아직 못 봤나 보네"였다... 경찰서는 북 마쉬 거리와

동 아미티지 거리가 만나는 사거리에 있고 소방서는 화살표가 9시가 아닌 12시 방향으로 뻗어야 함.

두 시설은 모두 동 아미티지 거리에 있는 걸로 되어 있거든. 참고로 여기 쓴 지도는 구판 룰북에 실린

그거 같은데 확실히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 어쨌든 내가 이걸로 뭘 말하고 싶은 지는 잘 알겠지?

이래서 TRPG의 공부는 겉보기보다 훨씬 어렵게 보이고 하기 좀 그렇게 느껴지는 거야.


가벼운 룰들은 없나?

있지 왜 없어? 스토리 게임류가 대체로 이런 공부를 비교적 덜 해도 되는 쪽을 택함. 일단 말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거든. 대신 순발력이나 재치 그런 걸 요구하니까 사실

이런 것도 일장일단이 있다고 봐야 함. 물론 이것도 자신이 하려는 행동을 적당히 합리화하고 그럴 때

지식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그 갭은 위의 험악해 보이는 사례들, 특히 과거 역사적 소재 같은 거

배경으로 들고 나와 잘 모르는 사람의 멘탈을 깎는 물건들에 비하면 절대로 크지는 않을 것임.


혹은 졸라게 친절한 마스터가 하나하나 가르쳐주면서 진행하는 뭐 그런 기적과 같은 팀에 끼어 들어갈

수도 있음. 근데 그래도 자기가 배우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룰은 스스로의 '공부' 없이는 잘 안 됨.

이게 그런 룰을 돌리려다 실패하는 이들이 겪는 대부분의 비극이 아닐까 싶음. 내가 하고 싶은 뭔가를

하려면 지식이 필요하다는데 그거 없이 하자니 힘들고 그걸 쌓자니 더 힘드니까 그냥 포기해버리는 거.

괜찮아, 나도 포기하는 거 하나는 잘 하니까. 포기는 배추를 셀 때만 쓰는 말이 아니잖아?


마스터에게 선택권은 없다

그런데 플레이어의 경우는 이런 게 선택이지만 마스터는 그렇지 않아. 왜냐면 모르는 플레이어들은

일단 마스터에게 물어볼 거거든? 그러니까 거기 답할 준비를 해야 함. 같이 버벅대면 계속 버벅대다

플레이가 느려지고 세션이 끝나고 팀이 폭파되고 뭐 그런 불상사가 터질 수도 있거든. 물론 모르지만

물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자기 상상을 부풀리는 놈도 있는데 요새 턀갤럼이라면 아마도 그런 놈들을

라그나의 범주에 넣을지 말지를 고민하겠지.


하여간 마스터는 그래서 자신이 돌리려는 룰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 게 미덕임.

단순히 룰북이나 시나리오 펴들고 그대로 읽어주기만 하는 게 다가 아니라고. 물론 요새 일부 관점은

마스터를 그렇게 보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말이지! 이게 그 주제도 없고 결말도 없고 의미도 없는...

아 아니지 참. 하여간 마스터를 그렇게 시나리오 돌려주는 기계나 영화 설명하는 변사 취급하듯 본다면

그런 관점은 좀 확실히 뭔가 아니지 않나 싶음.


3줄 요약

TRPG에서 배경 지식은 좀 더 근사한 플레이의 밑천이 되어 줌.

근데 요즘에는 대부분 공부를 싫어하니까 그런 거 안 하려는 듯.

하지만 룰에 따라서는 / 일단 마스터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