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tation. V20 한국어판에서는 은덕 거래, 일본판에서는 은대제(恩貸制)로 번역이 된 바 있음.
혈족 사회의 화폐 거래 제도라고 보면 되는데, 여기서 화폐는 은덕(Boon)이 됨.
소설이나 세계관 설정집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내용인데, 막상 그 중요성에 비해 룰북에서의 설명은 빈약한 설정 중 하나임.
개정판에서는 짤막하게 소개했고, V20에서는 컴패니언의 한 챕터를 빌려 다루는 내용임.
그러나 실제 VtM을 처음 플레이하는 텔러나 플레이어들한테는 그리 인상 깊은 항목이 아니었는지 잘 간과하는 항목이기도 함.
그래서 이 제도의 중요성을 한 번 짚고 넘어가보려고.
일단 이 제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려면 혈족 사회의 특성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데,
혈족 사회에서 인간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은 사실 그다지 매력적인 재화가 되지 못한다.
돈? 당장 갓 뱀파이어가 된 네오네이트도 생활하는데 필요한 돈 정도는 쉽게 벌 수 있는 역량이 있다.
(물론 사업체를 운영한다든가, 제대로 된 부동산을 장만한다든가 하는 건 좀 복잡한 얘기지만)
게다가 뱀파이어가 영생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인간의 재화는 가치 변화가 너무 빠르다.
그렇기에 혈족들에게 있어 가장 값진 건 피, 그리고 은덕(Boon)이 된다.
Prestation은 이 은덕을 마치 돈처럼 주고 받아 채무 관계를 형성하는 혈족들의 시스템을 말한다.
돈의 가치는 변할지언정, 누가 누구에게 빚진 은덕 자체는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수십 년을 살든, 수백 년을 살든, 한 번 빚진 은덕은 채무관계가 해소되기 전까지는 유효하다.
그리고 이 특성은 분파에 상관 없이, 혈족 사회를 유지하는 밑바탕이 된다.
소설이나 설정집들을 보면 누가 누구한테 은덕을 빚졌고, 이걸 해소하기 위해 무슨 일을 해주고 하는 일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모두 다 이 Prestation의 개념을 따르는 거라 보면 된다.
일단 이 제도는 다른 일반적인 사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기득권층에게 매우 유리한 제도이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탄탄히 유지되었고, 또 강력하게 집행이 된다)
나이 든 혈족들은 어린 혈족들에 비해 훨씬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의 풀이 크다.
영지도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거고, 실질적인 재산이나 제공받는 서비스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리고 엘더들은 이를 타인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은덕을 빚지게 만든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영향력 있는 대부를 갖지 못한 네오네이트가 당장 그 도시에서 제대로 된 안식처를 만드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특히 그 도시의 프린스가 매우 엄격하고, 철두철미하게 계율을 따르는 꼰대라서 자의적으로 영지를 가지는 걸 인정 안해주는 인물이라면?
네오네이트는 프린스와 연줄이 있는 사람을 소개 받고, 이 사람을 통해 조그마한 안식처라도 영지로 인정 받을 수 있게 공작을 벌여야 할 거임.
이 과정에서 이미 네오네이트는 세 개의 은덕을 빚지게 된다.
연줄을 소개해준 사람에게 은덕 하나, 프린스에게 영지의 승인을 요청한 연줄에게 은덕 하나, 그리고 승인해준 프린스에게 은덕 하나.
(물론 세 번째의 경우 실질적으론, 요청한 연줄이 프린스에게 은덕을 빚지는 것이지만)
이제 네오네이트는 꼼짝 없이 세 명의 혈족과 채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채권자들은 이 네오네이트를 자기 뜻대로 써먹을 수 있는 타당한 권리를 획득하게 된 거지.
(물론 첫 번째 은덕은 상대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쉽게 해소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똑똑한 채권자들은 빚이란 건 갈수록 불어나기 쉽다는 걸 알고 있고, 결코 쉽게 해소하게 만들어선 안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묵혀 놓았다가 정말 필요할 때 써먹겠지.
물론 네오네이트가 좀 더 현명하고, 그리고 이 Prestation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좀 더 빚을 안 지거나 덜 지는 방식을 찾겠지만 말이다.
(본인이 직접 열심히 사교 생활을 해서, 연줄을 찾아내거나, 굳이 요청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소개를 받으면 된다.
그리고 본인이 직접 거래를 주도하게 되면, 수수료를 제할 수 있다. 아니면 이 중간 과정을 오히려 늘려서, 작은 은덕들로 매우 잘게 나누어서 처리한다든가)
그럼 이 Prestation이 왜 중요한가?
바로 이 제도를 통해 혈족 사회의 권력 관계가 형성되고, 또 좋은 말로는 신뢰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일단 채무 관계가 형성되는 순간, 혈족 사회에서 채권자는 무조건적인 갑, 채무자는 무조건적인 을이 된다.
이게 네오네이트와 엘더의 관계라면 애초부터 갑과 을이었으니 사실 그리 억울할 건 없지만,
동등한 계급 간의 채무 관계는 확실하게 상하관계를 형성한다.
A가 B에게 은덕을 빚진 이상, A는 B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도 A는 B보다 낮은 존재로 인정받게 된다.
이게 싫어서 B를 처치하려고 하거나, 은덕 관계를 무시해버리면, Prestation을 소중히 여기는 혈족 사회 전체의 엄벌을 받게 된다.
(이 시스템이 무너져버리면 지금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런 채무 관계를 형성해놓은 엘더들의 자산이 갑자기 휴지조각이 되버리는 셈이니까)
실질적으로 암살시도를 했다간 당연히 계율 위반이니 블러드 헌트의 낙인이 찍힐테고, 이를 무시했다간 사교계의 왕따가 되버릴 것이다.
물론 현실 세계의 빚과 마찬가지로 Prestation은 적당히 이용할 줄만 알면 유용한 도구가 된다.
그리고 뱀파이어 사회에서 권력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어떤 혈족들은 일부러 채무자가 된 다음, 채권자의 보호를 받는 방식을 이용하기도 한다.(자기가 죽으면 변제를 못 받는 점을 역으로 이용해서)
언제든지 갚을 수 있는 부담 없는 은덕의 거래가 더 흔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는 결국 상호 간의 외교 관계를 형성하게 되고, 감정적으로 미워하더라도 서로 쉽게 칠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
('내가 얘한테 은덕을 졌는데, 내가 얘를 쳐버리면 나한테로 의심이 돌아오겠지?', '얘가 밉더라도 얘가 나한테 빚진게 있으니 그거 받기 전까진 친하게 지내야지')
대충 여기까지만 봐도 알겠지만, 이 Prestation은 혈족 사회의 권력 구조를 형성하는 중심핵이 된다.
A가 B에게 빚을 지고, B가 C에게 빚을 지고...이런 복잡한 채무 관계의 연결망이 한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면,
이제 이 채무관계를 이용해서 라이벌들을 약화시키고, 자기 장기말을 형성해서 권력을 잡는 일들이 일어난다.
마음에 안드는 혈족이 있다?
그럼 그 혈족이 빚을 진 채권자들을 자신의 채무자로 만들어서 간접적으로 그 혈족을 자신의 채무자로 만든다.
그 다음은 그 혈족이 갚지 못할 정도로 변제 요구를 늘려서 삶을 망가뜨리면 된다.
'이거 해줘. 이것도 동시에 해줘. 아 이것도 해줘야지? 응? 못하겠다고? 너 신용도 엉망이네? 소문 내야지.'
모두 신용 관리를 제대로 못한 그 혈족의 잘못이다.
안타깝게도 혈족 사회에는 불법 추심이고 뭐고 그런 보호 제도가 없다.(물론 너무 정도가 지나칠 경우 제재가 가해지기도 하지만)
카마릴라에서 이 시스템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바로 토레아도르와 벤트루이다.
카마릴라에는 이 시스템을 관리하는 감독관인 Harpy들이 있는데, 얘네들은 빚이 1) 올바른 방식으로, 2) 적절한 시장 값어치에 맞게, 3) 제때 제때 변제되는지를 감시한다.
(그리고 이 하피들 중에는 토레아도르들이 많다)
하피들은 보통 엘리시움의 터줏대감들이고, 카마릴라 사교계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때문에,
이 Prestation과 관련해서 하피의 노여움을 사면 따 되는건 시간 문제다.
도시에 따라서는 아예 하피나 특정 직위에 있는 인물이 그 도시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소한 채무 관계를 기록해서 관리하기도 한다.
중요한 채무 관계라면 중간에 중개인(하피)을 끼기도 하고, 중개인들은 이를 통해 수수료로 은덕을 쏠쏠히 벌어 먹기도 한다.
그리고 엘더들이라면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오래된 채무 관계가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심지어 이 제도는 분파에 상관 없이 유효하기 때문에, 카마릴라와 사바트 간의 거래 역시 이루어진다
(물론 대놓고 했다간 의심 먹기 딱 좋지만).
그럼 가장 중요한 것.
이제 이 Prestation이란 개념을 실제 플레이에선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다른 모든 설정 떡밥들과 마찬가지로, 시나리오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건 뭐 말할 것도 없고.
PC와 NPC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 좋은 소재가 됨.
예를 들어 PC들에게 프린스가 임무를 하달하는 형식에 당위성을 부여할 수 있고(프린스의 은덕을 얻을 수 있을테니)
PC들이 왜 Coterie를 형성해서 같이 다니는지에 대한 이유도 부여할 수 있음(많은 백그라운드를 가진 PC에게 빚을 진 다른 PC들이라든가).
플레이 내에서 마주치게 되는 NPC들 간의 관계도 이 제도를 이용하면, 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음.
제대로 플레이하면 PC들은 수많은 작고 큰 은덕들을 빚지거나 빚지게 될 것이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음.
(포옹을 해서 자손을 만들고 싶은가? 프린스 말 따라 열심히 굴러야지 뭐)
PC들 입장에선 자신이 가진 백그라운드 수치들을 실질적인 플레이에서 이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또 새로운 백그라운드를 직,간접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됨.
특히 새로운 디시플린을 배우고자 하는 파워 지향 플레이어라면 이 은덕을 빚지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거임.
그리고 만약 자기가 도시 설정을 만든 야심 큰 텔러라면, 이 제도를 잘 이용해서 도시 내의 권력 구조에 대해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음.
겉으로 보기에 더 권력이 크고, 오래 산 엘더가 그보다 나이 어린 앤실라에게 쩔쩔 맨다? 아마도 둘 사이에는 채무관계가 있을 거임.
어떤 두 강력한 혈족들이 서로를 혐오한다? 어쩌면 여기에도 채무 관계가 얽혀 있을 수 있을 거임.
모든 갈등을 협박 아님 유혹으로 해결하는 평범한 플레이어에겐 너무 갑갑하고 번거롭다
군머에서 관계 주고받아서 목표 퍼센티지 높이는거랑 비슷하네요
확실히 실제 플레이에서 이를 복잡하게 활용하는 건 머리가 빠개지니까, 단순화된 버전 정도만 사용하면 됨. 그리고 정치플이 아니면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어쩐지 뭔가 부족하더라니
크로스오버를 가정한 사악한 질문) 하피의 관할 하에 뱀파이어가 아닌 다른 초자연체나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 은덕이 오갈 수도 있음? 그냥 설정하기 나름인가?
존버하면 죽는 놈들이랑 거래가 성립할까?
익숙하게 하던 일들에 이름이 붙어있으니 오묘하구나
충효 따지는 유교사회네
빚진놈 천시하는건 채무자한테 얽힐까봐 피하면서 생긴 문화려나?
사실 메타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굉장히 쓸만한 요소이기 때문에 비슷한 개념이 다른 초자연체들에게도 다 있긴 함(애초에 보은이라는 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이기도 하고) 근데 일단 그런 상황이 굉장히 드물게 일어날 거임...
뱀파이어들 사이의 신의에 인간이나 마게는 잘 안 낌. 지킨다면 그건 사회적 관습에 의해 강요되는 게 아니라 개인 신의지.
조직화된 선물 교환 비슷한거군
V20 번역한 텔러는 자주 은덕을 체면에 비유했는데, 내가 볼 때도 비슷함. 사실 은덕 쌩까고 사는 놈 고대부터 의외로 꽤 많이 있고, 이런 애들도 대충 살거든. 단지 안 지키면 뱀프 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고, 그러니까 큰 일 하기 힘들어지는 거.
그런데 그런 보은한 행위가 실제로 있었다는건 어떻게 증명함? 없는 부채 만든다거나 빛 진거 그런거 없었음 하고 잡아때거나 하는 일 많을거 같은데
그걸 하피가 감독한다는 거 아닌가.
실제로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지. 하지만 뱀파이어는 여차하면 도미네이트, 어스펙스, 프레젠스 따위로 진실을 토해내게 할 수 있으니, 엘더들 앞에서 대질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끝장이야.
채무자가 누구냐에 따라서도 조금 영향이 있는데, 빚을 진 쪽이 더 나이가 많다면 사실 묵살되는 경우도 있음. 보통 상식으로는 "쟤가 뭐가 아쉬워서 너한테 빚을 졌겠냐?"라는 인식도 있고. 물론 여기에 이제 그 엘더랑 척을 진 다른 엘더가 개입하기 시작하면 판이 커지는 거지. 그 사항이 중대할 경우 프린스가 직접 나서서 심리를 맡기도 하고, 이 은덕이 클랜 단위의 은덕이라면 아예 콘클라베가 일어날 수도 있음.
요컨대 프린스쯤 되면 은덕이도 뭐고 묻어버릴 수 있는 거군
반대임. 프린스야 말로 은덕을 가장 무시 못하는 위치지. 자길 노리는 정적도 많고, 도시도 지배해야 하고, 인간 사회에 관리할 것도 많은, 그야 말로 '가진 게 많아서 잃을 것도 많은' 자리니까. 이런 애라면 자리 보전하기 위해 많은 도움과 협조가 필요하고, 최소한 방해라도 안 당해야겠지? 그러니 가급적 매사를 공정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해야 함. 안 그러면 언제 아랫놈들이 담합해서 거역할지 모르니까.
그리고 프린스의 권위 중 하나는 '도시 내 트래디션의 최종 해석자'라는 데 있음. 문제가 생길 시 트래디션이 해당 사안에 어떻게 적용될지 판단하고 판결한다는 거지. 근데 그 심판관이 지좆대로 하고 다니면 그 동네 뱀파이어들이 불안해서 어떻게 살겠냐. 당연히 지들끼리 음지에 모여서 프린스 끌어내릴 작당하겠지. 이렇게 될 빌미를 안 주기 위해서라도 프린스한테 은덕은 중요함.
게다가 프린스한테는 상대적으로 은덕을 갚아나갈 수단이 풍부히 있음. 도시의 영역 분배라는, 혈족 사회에서 굉장히 강력한 권리가 프린스의 권한이기 때문에, 적당한 영지 하나 떼어주거나 사냥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자잘한 은덕들은 갚을 수 있음. 사실 프린스의 은덕을 얻으려는 혈족들 대부분이 원하는 게 이런 거기도 하고. 대자를 만들 권리 역시 마찬가지고, 좀 비밀스럽고 더럽게 행해지는 것 중에는 '내 정적을 암살해도 묵인해줄 것' 같은 것도 있음. 특히나 그 정적이 프린스 눈에도 고까운 존재였다면? 꿩먹고 알먹기지.
Prestation의 올가미에 걸리는 네오네이트의 입장을 체험하고 싶다면 Paths of Storytelling: Vampire(
http://www.drivethrurpg.com/product/89955/Paths-of-Storytelling-Vampire-Original-Scan-PDF?src=also_purchased)를
보면 됨. full pdf는 0.99달러고 그냥 스캔본은 공짜. 옛날 게임북 같이 몇 번으로 가시오 식의 포맷인데, 토레아도르 클랜으로 가면 이를 경험해볼 수 있음.
자료 ㄱㅅㄱㅅ. 뱀파이어 정치질 관련글 볼때마다 느끼는 건데 얘들은 오래살면사도 심심하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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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