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imageM.php?id=trpg&no=24b0d769e1d32ca73cef83fa11d02831a8a78790708c2166b82f7de95f9d30af9670cc24bfb3744986b4efd7109468ebeb9b7cec1c113b6b4dfc99616291424050139b168e0d1ece97a487bc113fe98884601153d6c2c9aea73fbb786b2a7e025837e45c13f3e9

28화 – 세 클론 이야기, 여덟.



“…”

천천히, 자신이 그린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탈리아.

그녀의 회랑에서, 프라빈과 탈리아의 발 밑에 쓰러져 바닥을 시뻘건 피로 적시고 있는 하은의 모습이 불쾌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예언 중 하나다. 동일한 인물에 대해서 무려 3번이나 예언이 내려진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무한의 순환에서 넘어갈 수 없는 고리.

그러나, 그 예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래의 하은 대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온몸이 기계 덩어리로 된 클론이었다.

“탈리아.”

“데미안. 눈은?”

“괜찮습니다.”

그가 끄덕인다.

“하루 종일 이 그림만 쳐다보고 있군요.”

“납득이 가지 않아서.”

“탈리아. 예언이 항상 맞는 건 아니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겠죠?”

“알아. 하지만 그건 우리가 행동했을 때 뿐이었어. 우리의 개입이 없다면, 항상 맞아 들어갔었지.”

탈리아가 그림을 노려본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참수당한 인간의 몸. 보고만 있어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현실감. 그림을 보는 사람마저 예언의 내용에 설득될 것 같은 디테일함.

“그렇다면 한가지 결론밖에 나오지 않네요.”

“…누군가 운명을 뒤틀어버렸다는 이야기지.”

그녀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중얼거린다.



“털컹-“

무거운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잔해가 치워진다. 인질이나 다름없었던 민간인들은 전부 병원으로 이송된 상태. 남은 것은 잔해 밑에 깔린 두 명의 하은 뿐이다. 중장비가 몇 겹이나 쌓인 잔해를 모두 치우자 마침내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잔해 바로 밑에 깔려 있는 것은 클론 쪽의 하은이다. 철근과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그녀의 의체 이곳 저곳을 관통한 상태. 원래라면 이 정도 잔해에 깔려도 멀쩡해야 할 의체지만 엔트로피적 효과에 의해 약화된 탓에 상당한 손상을 입고 있었다. 그 밑에는 오리지널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클론을 방패로 삼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친 듯한 그녀의 모습.

그러나 그녀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거의 녹아 내리다시피 한 얼굴이 흉물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회수팀이 말없이 잔해를 치우며 두 사람을 꺼내기 시작한다.



“오리지널 쪽은 혼수 상태에요.”

소피아가 진단을 내린다. 에이팍도 마찬가지의 내용을 보고한다.

“저희 측 요원 쪽은 의체의 총체적인 기능 부전입니다.”

그레인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배에는 붕대가 단단히 묶여 있었고, 의수에 달린 포트를 통해 수액이 투입되고 있었다. 부상을 입었을 때 의수가 몸 속에 흘려 넣은 의료용 나노 머신 덕분에 그녀의 상태는 의외로 멀쩡했다. 배에 아무런 감각도 없는 것을 제외하면.

삑, 삑, 하는 소리를 규칙적으로 내는 의료기기의 비프음이 새하얀 의료실 내에서 울린다. 의료실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은 두 명의 하은. 한쪽은 박살 난 의체, 다른 쪽은 몸만은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있는 오리지널.

“그레인저 감독관님. 핵심 파츠가 분자 구조에서부터 뒤틀려 있기 때문에 여기의 장비로는 도저히 수리가 불가능합니다. 현재 수면모드로 유지 중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상부에 보내는게…”

“아뇨, 그건 안돼요.”

그레인저가 단칼에 잘라 말한다.

“하지만 감독관님, 이대로 놔두면 확실히…”

“알고 있어요. 현 상황 유지는 얼마나 오래 가능하죠?”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일 겁니다.”

에이팍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한다. 엔트로피적 현실 교란 효과에 처참하게 당한 그녀의 의체는 점점 기능부전을 일으켜 결국 생명조차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단순하게 팔다리가 없어진 정도라면 파츠를 교체하면 된다. 그러나 거의 모든 부품이 분자 구조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지금이라면 그런 정도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그대로 유지시켜줘요. 빠른 시간 내에 지시를 하도록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레인저가 그들을 뒤로하고 의료실을 나선다.

류 국장이 무엇을 했는지, 그리고 계획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오리지널이 류 국장에 대해서 말한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더욱 더 알 수 없다. 그것을 믿어야 하는가? 그것 역시 확실하지 않다.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러나 그의 손에 하은을 넘겨주는 것은 안된다. 그녀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 집무실로 향한다. 휠체어를 사용하라는 소피아의 권고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그랬다가는 스스로의 긴장을 놓아버릴 것 같아서다.

“위잉-“

“!”

어두운 집무실. 누군가 있다. 그레인저가 반사적으로 권총을 꺼내 들어 집무실 의자에 앉아있는 자에게 겨눈다.

“그레인저. 무사하다니 다행이군.”

“…류 국장.”

불조차 켜지지 않은 그녀에 앉아있는 것은 류 국장이었다.

“괜히 사람 놀래키고 말이야.”

“너 답지 않더군.”

류 국장이 조용히 말을 이어간다.

“…변명할 여지가 없네.”

그레인저가 순순히 인정한다. 사실 이번의 사태와 관련한 그녀의 행동은 징계감이다. 그녀가 오리지널과 협력한 것은 필요 뿐만 아니라 그녀의 호기심, 그 중에서도 특히 류 국장이 관련된 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그녀는 오리지널에 관한 정보를 보고하지 않았다. 태스크포스 측에 넘어간 정보도 제한적이다. 따라서 외부의 시선에서는 네판디를 쫓는 중에 현실교란자로 위장한 또 다른 네판디와 협력했다가 속아넘어간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말감 지휘관으로서는 아슬아슬하게 실격 범위인 것이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 류 국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에게 징계 내역을 읊어줘도 무리가 없을 지경.

“이번 일에 대한 평가는 좀 미뤄두도록 하지. 노하은 요원의 상태는?”

“의체가 총체적인 기능부전 상태라…”

그레인저가 그녀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린다. 역시, 하고 그녀가 생각한다. MSF-44 아말감의 성과보다 일개 요원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MSF-44 아말감은 단지 정보와 인원, 그 중에서도 하은을 간편하게 관리하기 위한 방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가? 최대한 빨리 회수하도록 해야겠군. 휘하의 정비팀을 보내도록 하지.”

“…”

그레인저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다. 명령에 가까운 그의 말을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레인저. 표정이 매우 안 좋아 보이는데.”

그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그레인저에게 다가온다. 그가 그녀 바로 앞에 선 채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선글라스 뒤에서도 영혼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보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옥죄는 것 같은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다.

그의 시선을 피했다가는-

“…뭔가 말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

-분명히 들킨다. 그녀의 생각과 의심을.

의체로 개조당하고 기억까지 지워진 하은, 하은의 감독관인 자신에게도 열람 권한이 주어지지 않은 에페메라 작전. 대체 무엇을 목격했길래 그런 짓을 해야 했던 것일까. AP-5 아말감이 해체된 것과 동시에 급작스럽게 중단된 레콘키스타 작전, 자신의 생각을 뒤틀어버린 것이 류 국장이라고 대답하던 오리지널.

그녀의 목덜미에 한기가 흐르는 것 같다.

어쩌면… 류 국장이-

“아니, 없어. 부상당한 곳이 불편해서.”

그녀가 태연하게 말하며 집무실 의자로 향한다.

“나노 머신이 도움이 된 모양이군. 원래라면 침대에 꼼짝 없이 누워있어야 할 텐데.”

“…그래, 다행이지.”

“그럼 가보도록 하지.”

“잠깐, 이런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거야?”

그레인저가 묻는다. 말 그대로다.

“당연히 아니지. 하지만, 뜻을 말로 전할 필요가 있나?”

그 말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닫힌다. 그레인저가 말없이 손을 내젓자 불이 켜진다. 그녀가 즉시 출입기록을 확인한다. 아말감 시설에는 출입기록이 없다. 다시 말해, 이건 협박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MSF 아말감도 없어져버릴 수 있다는 협박.

“…”

그녀가 이마를 감싼다.

그냥, 이대로 보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든다.

아냐, 그럴 순 없다.

그럴 수는-



[수면 모드 해제]

HUD에 붉은 글씨가 나타나며 하은의 시야가 말 그대로 켜진다. 그녀의 시각 센서가 상당부분 손상된 탓에 시야가 간헐적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색상 정보도 완전하지 않아 어떤 부분은 녹색이 강조되어 보이고, 어떤 부분은 아예 흑백이다. 이 정도 손상이라면 자체 점검 프로그램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손상: 87%]

손상 정도를 체크한다. 87%라면, 말 그대로 생명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희미한 조명 밑에 누워 있는 그녀의 오리지널. 움직임이 없다. 그 옆의 의료 장비의 모니터가 그녀가 식물인간 수준의 혼수 상태임을 알려준다. 하은이 천장을 바라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움직일 수조차 없다. 그저 멍하니 기다리는 것 뿐.

결국, 살아남은 것은 그녀였다. 오리지널은 그녀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하은의 정신은 궁지에 몰려서도 힌트를 찾아 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생사를 갈랐다.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두 존재의 충돌.

한쪽은 현실이라는 퍼즐을 조각조각 박살내려 하고, 다른 쪽은 풀어내려 한다.

승리한 것은, 후자였다.

“…?”

하은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를 눈치챈다. 교관the Man은 아니다.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질감으로 만들어진, 그녀와 똑같은 모습을 한 인형. 멀리서 보면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구체관절과 그려진 듯한 얼굴, 철저하게 기계적인 움직임까지 더해져 사람 크기의 인형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천천히 오리지널에게 걸어간다.

하은이 그 존재에게 말을 걸고자 한다. 그러나 보이스 모듈이 오프라인인 탓에 아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그것을 알아차린 듯 인형이 돌아선다. 그 손에는 책이 한권 들려 있었다. 인형이 책을 펴 보인다.

천천히 페이지가 넘겨진다.


괴물 제압, 반산화작용과 호흡, 성공.

탈출, 연필심과 전선만을 사용해 불을 내는 방법, 성공.

군중 진정시키기, 핵심 인물을 제압, 실패.

도피, 지하철의 시간표, 성공.

발 묶기, 인공적인 무중력 환경을 만들어 내기 위한 파라볼릭 플라이트, 성공.

잠시 만이라도, “코드 M-44-B5”, 성공.


글씨를 손으로 써 본지는 무척 오래되었지만 분명 하은 본인의 글씨체다.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은 전부 그녀가 맞닥뜨린 상황들, 그리고 그녀가 그 상황을 풀어내기 위해 쓴… 힌트들이다. 그제서야 하은은 그 인형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 그녀의 천재성Genius이다.

그러나 그 생각에 인형이 고개를 젓는다.

…그래, 그럴리가 없다.

계몽된 요원을 수면자로부터 구분하는 자질로 여겨지는 천재성Genius은 정돈되고 통제가능한 정신의 일부분일 뿐이다. 환영으로 나타난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로 없고, 없어야 하며, 없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인형은-

하은이 그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그 인형이 책을 덮고 돌아선다. 그것이 오리지널에게 손을 뻗는다. 오리지널의 목을 잡고 들어올리는 인형. 그러나 그녀의 몸은 그대로 누워있을 뿐이다. 따라 올라오는 것은 또 다른 인형.

고뇌의 표정, 수 없는 자해의 흔적, 부서진 관절과 몸체, 그리고 온몸에 새겨진 저주의 글귀들. 한쪽 손에는 산산조각난 금속 퍼즐이 들려 있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 모습. 그 근본을 이루는 악의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는 부서져가는 권능만이 남은 껍데기.

서서히 끌어당겨지는 인형.

동시에 하은의 시각 센서가 점멸한다. 더 이상 연결을 유지할 수 없는지 시각 정보가 하나씩 사라진다. 이제는 두 인형의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시야가 점점 왜곡된다. 희미해져 가는 시야에 기괴한 광경이 들어온다.

그녀의 인형의 턱이 마치 뱀처럼 늘어난다. 그림자 같은 그것의 실루엣이 다른 인형을 끌어당긴다.

“우드득-“

먹어 치운다.

그녀의 인형이, 오리지널의 인형을 먹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은 불쾌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불완전하고, 어쩌면 비인간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한 부분Shattered Avatar이 채워지는 듯한 느낌. 그녀의 시야가 새까매진다. 이내 그녀의 중추 신경 시스템이 다시 한번 셧다운 되며 수면 모드로 들어간다. 그녀의 의식이 침잠한다.



“감독관님.”

그레인저의 방에 에이팍이 들어선다. 그의 얼굴은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살짝 긴장된 모습이었다. 평소에는 상급자에 대한 긴장이라면, 지금은 이 상황 전반에 대한 긴장이라고 할까.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레인저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에이팍 소위. 혹시 의체의 의식을, 멀쩡한 저쪽 몸으로 옮길 수 있나요?”

“의체의 의식… 그러니까 저희 측 요원의 의식을 말입니까?”

“네.”

현장 임무에 종사하는 아말감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마인드 테이핑이나 의식 전송 같은 행위는 연구 시설에나 가야 안전하게 실행할 수 있는 프로시져다. 에이팍이 잠깐 생각에 빠진다. 물론 그레인저는 그것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다.

“역시 그것도 상부의 도움이 필요하겠죠?”

그러나 그레인저의 예상과는 달리 에이팍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뇨, SC-2 임플란트를 경유하면 저희 쪽 장비로도 가능합니다. 감독관님 지시에 따라 해당 임플란트의 기능을 조사해보고 있었습니다. 정신 안정 기능 이외에도 시냅스 패턴 전송 포트로 사용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레인저가 살짝 놀랐다. 아마도 백업이나 파츠 교체를 위함일까? 그러나 지금 기술적인 요소를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최상의 선택이다. 의식이 제거된 의체는 노하은이 사망한 증거로 제시한다. 네판디에 대한 대응은 생포 후 후처리Gilgul이지만, 이미 죽어버리거나 식물인간이 된 자에게 길굴 절차를 실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상부에 넘길 것 없이 그대로 처리해버린 것으로 하면 된다.

후에 문제가 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는 걸어볼만한 도박이었다.


“좋은 소식이네요.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감독관님. 굳이 그렇게 하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레인저가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에이팍 소위, 지구에서의 싸움은 움브라에서의 싸움과는 많이 달라요. 알아야 하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몰라야 하는 것을 모르는 것도 중요하죠.”

“감독관님?”

“모르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은 요원의 의식을 오리지널의 몸으로 옮겨주세요. 재건 성형 같은 건 소피아에게 부탁할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에이팍이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방에서 나간다. 잠시 후, 이번에는 몰레티가 들어온다.

“몰레티.”

“그레인저, 몸은 좀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다리와 배 위쪽이 분리된 느낌이긴 해요.”

“뭐, 실제로 분리되는 것보다 느낌만 받는게 좋겠죠.”

헛웃음. 그러나 몰레티는 그레인저가 굳이 통신망을 쓰지 않고 집무실로 요원들을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간파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최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쨌든, 무사히 복귀해서 다행입니다. 신나는 것도 좋지만 아무래도 감독관 직은 좀 무섭더군요. 그래서, 뭔가 알고 싶은 일이라도?”

“네. CCTV 데이터를 복구해봤어요. 전투 보고는 올려야 되니까요. 영상을 보니 리퍼비쉬된 히트마크가 마네킹으로 위장된 채 숨겨져 있었던 것 같아요. 작동 코드를 준 게 당신인가요?”

“…그렇죠.”

어딘가 개운하지 않은 대답.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아닙니다. 사실 좀 놀라는 중입니다. 그곳이 그렇게 중요한 시설도 아니었는데 아무리 리퍼비쉬 된 거라고 해도 히트마크가 배치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마네킹이라니… 언제 들킬지도 모르는 위치였을 텐데요.”

“건설 당시의 데이터를 찾아보면 되지 않나요?”

“그게 문제입니다. 디멘셔널 아노말리 전후에 지어진 시설이라 데이터가 상당수 망실된 상황이라… 뭐, 굳이 필요하다면 복구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레인저가 끄덕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레티는 굳이 찾아볼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만약 복구한 재고 데이터에서 히트마크가 배치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라는 생각일까. 그렇다면 하은의 행위는 더 이상 계몽과학의 프레임 내에서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아뇨, 역시 모르는게 나을 것 같네요. 알아봐야 이 시점에서는 아무 도움도 안될테고.”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몰레티가 질문을 이어간다.

“그래서 하은 요원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요. 어떤 의미에서든… 그녀는 더 이상 유니언에 남아있을 수 없겠죠.”

“그렇군요.”

몰레티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은 양.”

정신이 번쩍 든다. 하은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다. 새하얀 빛.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의체가 완전히 교체된 것일까?

아냐.

아니다.

하은이 생소한 감각을 느낀다.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스스로의 체온을 느낀다. 더 이상 HUD 메시지가 보이지 않고, 작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던 증폭된 센서 입력도 없다.

“감독관님?”

“이제는, 더 이상 당신의 감독관이 아닙니다.”

그레인저의 목소리가 선고하듯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기억이 홍수같이 밀려들어온다. SC-2 임플란트가 더 이상 없기에 그녀를 옥죄고 있던 것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유니언 이전의 삶. AP-5 아말감. 교관The Man.

뱀파이어와 늑대인간들의 도움을 받아 도피하던 자신. 자신을 기절시키던 류 국장. 웨더스 소령은 어떻게 됐지? 백 사장은? 사고의 기억. 아니, 뭔가 이상하다. 사고의 기억은 어딘가 맞지 않는다. 시간 순서도 잘못 됐어. 의체. 왜 의체가 된거지? 아냐. 의체가 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나는…


-나는, 가짜다.


자신의 존재를 찍어누르려 하던 오리지널.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에이다의 말.


스스로의 이해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몰레티의 충고.


싸움.

죽음의 순간에서 떠올린 실마리. 승리, 아니, 생존.

인형.

돌아오기 시작하는 기억, 그리고… 감정.

“미안합니다.”

“저… 저는…”

하은이 미약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신의 목으로 스스로 말하는 것이 너무나 오래된 탓일까.

“당신의 의식을 오리지널 쪽의 육체에 전송했어요.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라면 금방일거에요.”

새하얀 빛 속에서 보이는 그레인저의 실루엣.

“이제 당신은 유니언 내에 존재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하은이 간신히 묻는다.

“말 그대로에요. 미안하지만 그 이상은 알려줄 수 없어요. 가능하다면… 이제 평범하게 살아줬으면 좋겠어요. 그 정도 조치는 해줄게요. 일어나면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거에요.”

“류 국장님과 관련된 일입니까?”

“…그래요. 그 정도는 알아도 괜찮겠죠.”

“똑같군요.”

하은이 미묘한 감정을 담아 말한다. 그레인저가 잠시 말을 멈춘다. 그녀의 말이 맞다. 류 국장의 행위. 사람을 멋대로 클로닝 하고, 마음을 부수고, 기억을 바꿔버린다. 그레인저가 하는 일도 본질적으로는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합리화할 수 있다는 점일까.

“미안해요.”

하은은 대답하지 않는다. 지금 뭔가 말해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마치 잠드는 것처럼, 그녀의 의식이 흐려진다.



“없군.”

한 노인이 아직도 폴리스 라인이 이곳 저곳에 쳐져 있는 쇼핑몰을 멀리서 망원경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찾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형제여. 더 이상 이런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겠네.”

그가 망원경을 눈에서 뗀다. 한숨을 쉬는 그. 그가 힘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만약 MSF 아말감의 일원이 그를 보면 즉시 총알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이시야마와 똑같이 생긴 모습의 그. 살짝 더 늙어 보인다는 점을 제외하면 쌍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시야마 아즈마와 그는 서로의 클론이니까.



세 클론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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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난 아바타(Shattered Avatar, 북 오브 시크릿 P.77): 5포인트 메릿.

어떤 메이지들의 아바타는 '조각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그러한 메이지는 항상 내면의 일부분이 텅 빈것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합니다. 아바타의 '조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다른 메이지의 아바타로 환생했을수도, 패러독스 렐름이나 타 차원에 감금되어 있을 수도, 아니면 다섯마리의 용이 지키는 나무에 달려 있는 열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본래 메이지는 아바타 백그라운드를 캐릭터 메이킹 이후에는 성장 시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메릿을 가진 메이지는 아바타의 '조각'을 얻을 때마다 아바타 백그라운드를 1도트 씩 성장시킬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도 아바타는 5도트 까지 밖에 성장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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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스토리 아크도 끝.

분량 조절 대실패. 그나마 줄이고 줄여서 이 정도...

여기까지 왔으니 궁금하신 것 질문 받습니다. 워낙 메이지가 추상적인 룰이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으실 것 같고... (저 자신도 쓰면서 헷갈림) NHE에 관한 것이어도 좋고, 메이지에 관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질문은 답변해드리고 모아서 다음편 뒤에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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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연성을 강화하기 위해 (망할 길굴) 설명을 추가 하였습니다. ㅇㅇ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