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수 년 전에 누군가가 얼음집에서 비슷하게 썰을 푼 걸 봤었는데..... 거기에 내 맘대로 살을 붙여 설명해 봄.
일단 TRPG 관련 크라우드 펀딩을 볼 때 생각해야 할 점은 크게 네 가지라고 생각함.
확실성 - '얼마나 펀딩에 참여할 사람을 모을 수 있는가'
펀딩 목표도 달성하지 못하면 그건 그냥 실패한 펀딩임. 근데 한국의 TRPG 펀딩은 진짜로 웬만하면 성공하긴 함.
솔까말 초창기에는 성공하면 안 될 거 같은 물건도 성공했음. 그러다보니까 사실상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했었던
모 펀딩을 빼면 실패한 사례가 딱 하나 있고, 실패가 유력한 사례가 하나 있는데 둘 다 이야기와 놀이에서 했었던
인디 TRPG 펀딩이고, 성소수자가 주요 소재가 되는 인디 룰이라는 공통점이 있음.
그러면 여기서 대략 '한국의 TRPG 팬들은 성소수자 소재 인디 TRPG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려도 괜찮을 거 같음. 텀블벅에서 막 홍보까지 해 주고도 그 모양인 걸 보면 어느 정도 뻔하지. 설마 여기에서
그런 공통점을 갖고 한국의 호모포비아 어쩌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 어쨌든 그런 소재의 문제와 얽혀 후원자를
줄이지만 않는다면 한국의 TRPG 펀딩은 확실성이 꽤 높은 편임.
건전성 -'얼마나 뻥튀기가 덜 되었는가'
기본적으로 TRPG 펀딩은 1인당 후원액이 중간가 혹은 '핵심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최저 후원액'과 얼마나 차이가
덜 나냐에 따라 건전성 여부를 따질 수 있다고 봄. 왜냐면 아무래도 고액 모금자 비중이 높게 나오면 참여 인원에
비해서 펀딩의 규모가 "뻥튀기" 되는 경향을 보이거든. 근데 불행히도 한국의 TRPG 펀딩은 대개 고액 모금자의
비중이 졸라게 높았었음. 이게 뭐가 문제인가를 일단 7800만원짜리 펀딩 하나를 들고 와서 설명해 보겠음.
판사님 저는 거머리를 키우지 않습니다.
25만원 X 160명 = 4천만원임. 그러니까 저 펀딩의 후원액 절반은 사실 고액 골라서 후원한 사람들이 내 준 거임.
이런 것이 바로 뻥튀기 되겠음. 다른 예로는 국내에서 가장 큰 TRPG 펀딩의 경우도 최고 후원액을 낸 사람들이
591명에 후원액이 20만원이니 20만원 x 591명 = 1억 1천만원 정도니까 절반쯤 냈음. 그래서 다른 종류 펀딩과
비교해 보면 후원액이 좀 많이 들어감. 국내에서 가장 큰 TRPG 펀딩은 대성공하지 않았냐고? 그야 그 펀딩은
이 뻥튀기가 문제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요소들을 충분히 만족시켰기 때문임. 이런 뻥튀기는 일단 성공한 펀딩이
다른 요소들을 만족하면 큰 문제가 안 되니까 고액 후원자들이 없어져서 펀딩이 성공을 못한다거나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면 수면 위로 쉽게 안 드러나거든. 그보다는 "성공"이라는 허울로 다른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쪽에 더 가깝고. 그럼 다른 요소들을 보자....
신뢰성 - '공약한 대로 제때 물건이 나왔는가'
일단 펀딩이 뻥튀기 됐든 안 됐든, 펀딩이 성공하면 후원한 물건을 제대로 받아야 함. 근데 이게 사실 잘 안 되는
경우가 많음. 일단 아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데는 상당한 돈과 시간이 소모되고, 그 외의 다른 작업을 하는 데도
예상보다 더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임. 해외에서도 펀딩 보상이 예정보다 늦게 나오는 게 은근히
잦다는 거 생각하면 답 나오지. 근데 그러면 진행 과정 업데이트라도 꼬박꼬박 해야 함.
근데 해외도 그렇지만 국내의 몇몇 업체는 이걸 까먹음. 삼두회야 말할 것도 없고 구르는 사람들도 업데이트는
손 놓고 있다가 TRPG 플레이 준비하는 짤 트위터에 올리고 그러다가 여기서 까이고 그랬었지. 특히 신뢰성이
중요한 이유는 일단 신뢰성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그냥 걔들은 앞으로는 펀딩할 생각을 접어야 하기 때문임.
누가 제때 물건도 안 올 게 뻔한 펀딩에 참여하겠냐? 그리고 펀딩 안 하고 책을 낼 여력이 없으면 끝장이지 뭐.
지속성 - '펀딩 이후에도 펀딩 대상에 대한 호응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가'
펀딩은 성공했고, 보상도 왔다고 치자. 근데 그래서 이걸로 겜하기는 함? 안 할 거라면 그냥 스팀 라이브러리
게임 하나 늘린 것하고 별 차이 없지 않냐? 위에서 본 국내 최대의 TRPG 펀딩은 지속성 부문에서도 엄청나게
강력한 모습을 보였음. 그래서 저렇게 고액 후원빨로 펀딩이 뻥튀기가 됐음에도 충분한 풀이 확보되면서 딱히
손해봤다는 느낌은 안 주니까 별 말이 안 나오는 거임. 그런데 다른 펀딩을 보면..... ㅊㅇㅁ 라인 정리 이야기
나오니까 누메네라라는 썰이 돌고, V20이나 DoF 등은 그냥 말하기도 싫은 수준 아니냐? 물론 얘들은 모두 다
펀딩 당시에는 '성공한 펀딩'이었다? 누메네라 같은 경우 보상 챙겨주다가 적자를 봤다고는 하지만 그건 보상
과정에서의 문제인 거고. 펀딩 모금액 자체는 분명히 성공적으로 모금됐음.
그러니까 뭔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여지가 있냐 없냐가 중요한데, 그런 게 없으면 펀딩한 내용물은 그걸로 끝임.
분명히 저기 바다 건너에는 컨텐츠가 더 있지만 국내에 안 나오는 상황에서 내 손에 쥐어진 컨텐츠만 가지고서
만족할 수 없다면 뭐 거하게 낚인 셈 쳐야지. 판사님 물론 저는 V20나 누메네라 펀딩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펀딩은 계속된다
그러면 TRPG 출판사들은 왜 펀딩을 할까? 그야 영세한 출판사들 입장에서 짧은 기간에 현금과 흥미도 모두를
확보할 수 있는 쉽고 편한 수단이니까 하는 거임. 좀 심한 예로 수 년 전에는 레비아탄즈(Leviathans)라는 신작
보드게임이 펀딩하다 취소된 적이 있는데 왜냐면 저거 펀딩한 업체가 카탈리스트 랩이었고.... "니들 돈 많은데
굳이 펀딩해야 하냐" 누군가가 물어보니까 "이런 게 다 광고 효과라서 하는 거임"하고 정직하게 답해 줬다가
애들이 불타올라서 펀딩을 접고 입 씻은 거임.
근데 반대로 여기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이야기가 됨. 펀딩하다 계산 잘못해서 진짜로
망할 뻔한 카오시움 같은 경우는 일단 돈 문제를 해결한 후에는 작정하고 딴 건 몰라도 이제 TRPG 책 같은 건
펀딩 안 할 거라고 공지하고 그랬음. 물론 보드 게임은 TRPG 책 같은 게 아니니 펀딩함 ^^ 근데 얘들이 사실
한국 TRPG 출판사들보다는 훨씬 사정이 좋음. 그러니까 지금 펀딩 안 하고 자력으로 계속 책 낼 능력을 가진
TRPG 출판사는 국내에 딱 하나 뿐임. 이번에 소도-와루도 들고서 새로 이쪽 업계에 진출한 애너하임 코리아.
혹은 예전에 초여명이 그랬듯이 근성으로 돈을 모아서 출판하던가...... 근데 그러기에는 확실히 좀 그렇겠지.
3줄 요약
펀딩에 대해서 몇 가지 체크해 볼 점이 있다고 봄.
근데 사실 그런 거 다 만족하는 사례는 흔치 않음.
애너하임 코리아 말고는 펀딩을 계속 해야 할 거임.
오래간만에 와보니까 어디서 많이 본 글이...
넵 누군가님
티알클 새비지월드는 펀딩 없이 냈고, 초여명도 아포칼립스 월드랑 피아스코 등은 펀딩 안 하고 냈지. 펀딩이 없다고 꼭 책을 못 내는 건 아님. 다만 대형 라인을 지금 스케일로 런칭하기 어렵고, 자금 회수에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뿐... - dc App
그러니까 가끔 단권 내는 건 몰라도 그렇게 '계속' 낼 수는 없단 거지. 내가 좀 오해하게 쓴 것 같군. 어쨌든 그런 면에서 니알랏토텝의 가면들 국문판에 대해서도 하드커버 세트 원가가 130달러로 책정된 미친 책을 어떻게 국내에 낼지 좀 걱정 됨.
소나무도 능력은 있지 않음? 펀딩은 본문의 레비아탄즈처럼 홍보 때문에 한거고
ㄴ'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