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시브 체크가 뭔지, 그리고 이걸 어떻게 다뤄야 할 지에 대해서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길래 정리글을 써 볼까 함.
5판에서는 10/20받기(take 10/take 20)가 사라지고 패시브 체크(passive check)가 생겼는데,
사실 패시브 체크는 4판부터 도입되었던 시스템임. 4판 시절에는 패시브 퍼셉션/인사이트만 존재했지만.
이 2개는 자주 쓰이는 스킬이기 때문에 5판으로 넘어온 뒤에도 주로 패시브 퍼셉션/인사이트가 자주 쓰이지만,
패시브 체크는 퍼셉션이나 인사이트에 한정된 게 아니라 모든 스킬에 적용할 수 있음.
디자이너들이 패시브 체크를 도입하게 된 계기는 예전에 내가 번역했던 글을 아래에 링크해서 대신함.
http://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rpg&no=74849
패시브 체크는 주사위를 굴리지 않고 판정 결과를 결정하기 위해 쓰임.
체크의 수정치에 10을 더하면 끝. 어드밴티지나 디스어드밴티지는 ±5로 변환함.
이렇게만 써 놓으면 기존의 take 10과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음.
take 10은 '플레이어 재량'이지만, 패시브 체크는 '마스터 재량'임.
비록 환경에 따라 사용 여부가 결정된다고는 하지만, 주사위를 굴리는 대신 take 10을 쓸 지는 어디까지나 플레이어가 결정함.
그러나, 패시브 체크의 사용 여부는 전적으로 마스터에게 달려 있음.
이 점은 3.5의 take 10 서술과 5판의 패시브 체크 서술을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드러남.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take 10은 5판에서 패시브 체크로 대체된 게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애초에 5판의 플레이는 플레이어가 행동을 선언하면 그걸 마스터가 어떤 판정으로 처리할 것인 지를 결정하는 식임.
공격이나 주문 같은 건 플레이어와 마스터 사이에 딱히 룰적으로 이견이 나올 여지가 적으니까 덜하지만,
어빌리티 체크의 경우에는 어떤 상황에서 뭘로 판정해야 할 것인지는 변화의 폭이 훨씬 넓음.
플레이어는 스킬이나 도구 숙련을 적용할 수 있느냐는 '제안'을 할 수는 있지만, 최종 결정권은 마스터가 가짐. (PHB 인트로의 예시 참조)
그리고, 결과가 20이 나오던 말던 불가능한 시도의 경우에는 판정 자체를 안 시켜버리면 되기 때문에 과거의 디플로맨서 같은 것도 안 생김.
그럼 패시브 체크를 어떤 상황에서 사용하느냐? 룰북에서는 크게 2가지를 제시하고 있음.
1. 마스터가 주사위를 굴리지 않고 판정을 하고 싶을 때
2. 반복적으로 실행하는 행동의 결과를 결정할 때
1번째는 그닥 어렵지 않은 부분임.
스크린 뒤에서 주사위를 굴리는 것 자체가, 플레이어들에게 성공/실패 여부 또는 주사위 굴림 자체만으로도 메타 힌트를 주거나,
경계심을 과도하게 안겨줄 수도, 또는 지나치게 주사위 굴림을 많이 하게 될 수도 있음.
던전에서 적 NPC가 숨어있을 때 스크린 뒤에서 스텔스 체크 하겠다고 숨어있는 적마다 일일이 주사위를 굴리거나,
PC들과 대화하고 있는 NPC가 인사이트 체크나 디셉션 체크를 꾸역꾸역 하는 상황 같은 것.
그리고, 주사위 굴림을 스크린 뒤에서 많이 하는 건 마스터가 불공정하게 게임을 끌고 간다는 인상을 주기 쉬워짐.
어차피 NPC의 스펙이나 체크에 따른 결과를 정하는 건 마스터긴 하지만, 주사위 눈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때 더 공평하다고 믿는 심리가 있거든.
그래서인지 3.5 시절 DMG에서는 스크린 뒤의 주사위 굴림 주작질을 용인하는 듯이 서술했었지만, 5판 DMG에서는 중립적으로 변함.
그 외에도, NPC가 주사위 굴림을 하는 것보다는 PC가 주사위 굴림을 하는 게 PC 쪽이 능동적으로 상황을 이끈다고 느끼게 하기 좋음.
이럴 때, NPC가 체크를 매번 하는 대신 패시브 체크 값을 사용해서 PC들이 하는 체크의 DC로 삼으면 주사위를 굴릴 필요가 없어짐.
가령 미리 매복하고 있는 적들을 발견하려고 할 때는 PC들이 퍼셉션 체크를 하면 그 DC를 적들의 패시브 스텔스 값으로 정하고,
NPC가 PC들을 속이려고 거짓말을 할 때는 PC들이 인사이트 체크를 하면 그 DC를 거짓말하는 NPC의 패시브 디셉션 값으로 정하는 식.
반대로 PC가 적들을 기습하려고 하면 PC들의 스텔스 체크 DC를 NPC의 패시브 퍼셉션 값으로 정하면 되지. (이 경우는 PHB에도 나와있음)
이 점을 숙지하고 있는 플레이어라면 판정 방식 자체에 딱히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어짐.
확률적으로는 차이가 거의 없고 (오히려 판정하는 플레이어 쪽이 평균적으로 아주 약간 유리해짐), 주사위로 장난질한 것도 아니니.
요약하자면, 주사위 굴림을 생략하여 템포를 빠르게 하면서 PC들이 얻는 메타게임 정보를 컨트롤할 수 있음.
물론 위에서 말했듯이 패시브 체크는 전적으로 마스터 재량이므로, 마스터가 패시브 체크를 쓰기 싫을 때는 그냥 주사위 굴리면 된다.
2번째는 흔히, 어딘가에 도착했을 때 플레이어들이 '주변에 수상한 게 없는 지 확인하면서 이동한다' 같은 걸 할 때 가장 많이 쓰임.
5판에서 이런 선언이 나오면, 패시브 체크를 쓰는 마스터는 플레이어들에게 매번 일일이 퍼셉션을 굴리게 하지 않고,
그 대신 이동하면서 배경이나 상황 묘사를 할 때 패시브 퍼셉션 이하의 DC를 가진 요소들의 정보를 모두 제공하고 시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저 선언 자체가 주사위를 굴리지 않고 패시브 체크로 받아들여져 실행된 것이지.
이 상황에서 뭔가 찾아보겠답시고 또 똑같은 선언을 하는 건 마스터가 재량껏 커트할 수 있음. 5판에서는 take 20이 사라졌으니까.
마스터가 '이 PC가 충분히 시간을 들이면 언젠가는 성공할 판정이고, 지금은 그럴 여건이 된다'고 생각하면 주사위 굴림 없이 성공시키면 되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거나 애초에 찾을 게 존재하지 않으면 선언 자체를 '아무것도 못 찾았다'거나,
'PC가 이 곳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동안 다른 이벤트가 발생했다'는 등의 합당한 이유를 들어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사족으로, '5판에서는 take 10이 없으니까 주사위 굴림 운이 나쁘면 길바닥 걷다가 엎어지는 거 아니냐?'는 사람도 간혹 있었는데,
그런 일상적인 활동의 경우에는 위와 마찬가지로 마스터가 판정 안하고 넘어가면 그만이니 그냥 뻘소리인 셈임.
그렇다면 여기서 2가지의 의문이 제기되는데,
A. 'PC들의 패시브 체크를 초과하는 DC를 가진 요소가 있다면 어떻게 하느냐?'
B. 'PC들의 패시브 체크가 높아서 함정이나 매복한 적 등의 적대적 요소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 아니냐?'
B부터 대답하자면 No임. 패시브 퍼셉션이 높은 PC가 딱히 주사위 굴림 없이 함정이나 적을 발견했다고 해서 그게 알아서 없어지는 게 아님.
함정은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라 해체 또는 우회해야 하고,
매복한 적을 찾아냈으면 싸움을 걸어 쓰러뜨리거나, 싸움 없이 말로 설득해보거나, 아예 피해서 돌아가는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해결되는 것임.
그렇기 때문에 PC들의 패시브 체크가 지나치게 높으니 장애물의 가치가 사라진다는 건 그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게다가 5판은 PC가 자력으로 스킬에 몰빵해서 스킬 수정치를 막장스럽게 올린다는 거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시스템이라 크게 걱정 안 해도 된다.
A에 대해서는 아래에 예시 링크를 하나 첨부함.
http://dmsworkshop.com/2017/09/08/dd-tips-using-passive-skills/
1. 로그가 주의하면서 복도를 걸어간다고 선언했고,
2. DM이 그걸 받아서 패시브 퍼셉션 결과가 포함된 배경 묘사를 했는데
3. 위저드가 DM의 묘사에서 수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복도 바닥의 특정 지점을 지적,
4. 패시브 퍼셉션으로 DC를 뚫지 못한 채 복도를 걸어가던 로그가 위저드의 경고를 받아서 해당 지점을 조사하겠다고 하자
5. DM이 로그에게 인베스티게이션 판정 기회를 줬음.
물론 이건 하나의 예시일 뿐이고 세부사항이나 방식은 마스터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패시브 체크 시스템을 쓴다고 해서 능동적인 판정이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라는 뜻임. 다만 좀 더 주의깊은 사고와 선언이 필요해질 뿐이지.
인사이트를 비롯한 다른 스킬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음.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서 반복적인 행동을 할 때도 패시브 체크를 쓸 수 있다.
가령 절벽과 낭떠러지가 많은 험준한 산을 오랫동안 오른다던가, 파도 속에서 수영을 해서 바다를 몇 시간 동안 건널 때는,
굳이 이동하는 시간의 분량만큼 애슬레틱스 판정을 하지 않아도 마스터 재량에 따라 패시브 체크로 처리할 수 있지.
커다란 도서관에서 며칠 동안 필요한 자료를 찾거나, 하루 종일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탐문조사를 할 경우에도 각각의 패시브 체크를 사용할 수 있고,
며칠 동안 야생을 돌아다니면서 길을 찾거나 식량으로 쓸 만한 걸 구하는 작업도 매번 주사위를 굴리는 대신 패시브 체크로 결과를 알려줄 수 있음.
5판 룰북에서는 패시브 체크 외에도 룰링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 부분들이 제법 많은데,
이건 개발자들의 말에 따르면 테이블과 마스터마다 게임을 굴리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이견이 생길 수도 있는 부분의 룰링을 어떤 방향성을 정해놓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라고 함.
위에 적어놓은 것도 내 개인적인 의견을 정리한 것뿐이고, 패시브 체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안 쓰면 그만인 일이니까.
그렇지만 패시브 체크에 대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들이 턀갤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자주 보이길래 정리해 봤다.
모쪼록 5판 굴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음.
결국 DC 넘는 함정 있을까봐 단어 하나마다 의심암귀 되는건 똑같은거 아니냐?
상용 어드벤처의 묘사 내용을 보면 함정이 있을 법한 포인트 후보를 미리 두세개 정도 깔아줌. 위의 예시를 읽어봤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경우는 아예 대놓고 떠먹여준다. 이건 패시브 체크 안 쓰는 시절에도 그랬음.
묘사하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함정 같은 숨겨진 요소에 연관시켜버리는 마스터는 어느 시스템을 갖다줘도 플레이어가 의심암귀 생기게 만들게 된다. 시스템이 아니라 마스터의 문제니까 근본적으로 막는 게 불가능하거든. 패시브 체크에서 개선된 건, 이런 문제점을 봉쇄한 게 아니라 (애초에 시스템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함) 숨겨진 요소를 찾는 데에 필요한 체크의 수를 줄이고 과정을 단순화시킨 거임.
정보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