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RP라고 안 하고 캐릭터 어필이라고 썼냐면 내가 RP라는 표현(그리고 거기 추가되는, '캐릭터의 개인적 성향과 가치관, 사고방식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중요한 시나리오 진행에는 별 역할 안 하는 양념'이라는 뉘앙스의 인식)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원래 전문직 캐릭터를 그럴싸하게 묘사하는 건 어려움. 당연히 니가 그 전문직이 아니니까. 물론 애스디 아재 같은 사람한테 '연구자 캐릭터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묘사를 해보세요' 하면 잘만 하겠지만-_- 하지만 고증 엄근진하게 따져서 소설이나 시나리오 쓸 게 아니고, 적당히 즐기는 선에서는 대충 그럴싸해 보이게 꾸밀 방법은 많다.


일단 '의사 캐릭터'하면 주로 어떤 면모를 보여야 할지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 안색이나 체온, 상처 부위 등을 살피고 언제 어디서 어떤 무기에 다쳤는지(혹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쭈르륵 읊고, 온갖 전문용어 쫘르륵 쏟아내면서 수술하거나 약 처방하고ㅇㅇ 돈을 밝힌다거나, 감정적으로 냉혹하다거나 하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성격이고 플레이 내에서 주로 드러날 만한 보편적 요소가 아니니 논외로 하고. 일단 보통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걸 알아먹기 힘들다는 게 1차적인 벽임.


그래서 내가 어떤 방법을 썼냐면.... 우선 마스터에게 '환자가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아내는 게 딱히 시나리오 상 중요하지 않다면 그런 디테일 묘사는 내가 지어내서 하게 해달라'고 꼬드겼음(거 왜 까칠한 NPC에게 정보를 얻어야 하는데 그 NPC가 무슨 병이 있다거나 해서 의사 PC가 그걸 알아보고 치료해주는 대신 정보를 얻는다' 정도의 상황 있잖아). 일단 마스터가 ㅇㅋ하고 나자, 슈퍼닥터 K와 닥터 하우스를 정주행했음. 슈퍼닥터 K의 카즈야는 필요하면 다른 의사들과 협력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솔플을 하고(그리고 파티에서 각잡힌 의사 캐릭터는 보통 하나고) 장비 다 갖춰진 수술실에서 수술하는 장면보다 현장에서 개쩌는 기술과 임기 응변으로 해결하는 장면이 많아서  베낄 부분이 많고, 닥터 하우스는 전문용어라나 수술 도구 같은 게 많이 나와 이미지를 잡기가 편하고 워낙 환자들 상태가 다양해서 응용하기가 좋음. 다른 의학 만화나 드라마도 많긴 한데 블랙잭은 좀 지나치게 판타지 농도가 높고, 의룡은 전원 의사들로 이뤄진 수술팀 이야기라 RPG에 즉각 써먹기 좀 애매함.


그래서 플레이에 환자가 나오지? 그런 종류의 묘사는 내가 지어내서 하기로 했으니까


1)마스터가 교통사고를 당한 환자라는군

2)슈퍼닥터 K에 교통사고로 장파열을 일으킨 환자 에피가 나왔지?

3)거기 나온 묘사, 베끼자!


를 거쳐서 "상태가 안 좋군... 범퍼에 치여서 장파열을 일으키는 바람에 내출혈을 일으키고 있고, 거기다 날아가면서 땅에 부딪쳐 좌완이 골절됐어. 다행히 단순 골절이니 그 쪽은 우선 부목만 대어놓고, 복개해서는 복강 안에 고인 피를 빨아내야 해. 흡입기가 없으니 거기 너(다른 PC) 진공청소기 좀 갖다 줘. 수혈을 하는 동시에 파열 부위를 절제하고 남은 부위를 이어 붙여야겠어, 바이패스는 끓는 물로 소독한 고무호스로 대체하고..." 운운하는 대사를 치면서 주사위를 굴림. 이 정도만 해도 그럴싸해 보인다. 거기 추가로 전문용어를 좀 더 끼얹고 싶으면


https://www.hallym.or.kr/ptp118.asp


여기 나오는 거 대충 2~30개 골라서 메모해놓고 상황별로 대강 적당해 보이는 거 골라 적당히 떠들면 됨. 거 왜 밤마녀 보면 비행기 부품들 이름 이거저거 실려 있잖아. 참가자 대부분은 2차 대전 때 소련군 전투기에 대해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어. 그 대신 이거 보고 "무슨무슨 부속이 모자라니 좀 쌔벼와야겠음" "부품 뭐뭐가 상태가 안 좋아" 정도 대사 정도라도 칠 수 있게 해 놓은 거고... 비슷하게 링크에 나온 용어들 대강 꿰어 맞춰서 썰을 풀면 됨. 이상할 거 같다고? 뭐 어때, 너랑 같이 플레이하는 팀원 중에 의료업계 종사자가 얼마나 있겠냐. 걍 딱 듣기에 '오 좀 의사 같다' 같은 삘만 줄 수 있으면 됨. 헐리웃 영화만 봐도 우주에서 과학자가 특이한 천체 현상을 설명하는데 천체 물리학 용어가 아니라 졸 뜬금 없는 심리학 용어를 쓴다거나 하는 거 있잖아. 하지만 문외한이 보기엔 있어 보임. 대강 그 정도 삘만 낼 수 있으면 RPG에서 적당히 분위기를 내 가면서 놀기엔 충분하다.



당연히 나도 중세 치료사나 산파들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에 대해선 이미지가 쥐뿔도 없음(그런 걸 좀 디테일하게 다룬 접근성 높은 매체가 없으니까). 마스터 치료 스킬 굴릴게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