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킨드레드 오브 디 이스트의 하울 오브 더 데빌-타이거 다르마인 것이다.
블로그 리플레이 정리하다가 고통 얘기 나오길래 올려봄.
마호Devil-Tiger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단순한 세 가지의 이치, 즉 격정Passion, 고통Pain,
그리고 의Righteousness를 기본으로 한다. 이 단순함이야말로 수천년에 걸친 내분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 법Dharma이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백운百雲으로의 길이 상세하게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견이 있지만,
천마天魔는 이 세 가지 핵심 이치를 법으로의 여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혈경The Blood
Sutras에 기록된 슈에Xue의 이야기와 고통의 진언Mantra of Pain은 시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이 사상의 핵심을 설명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슈에는 무너진 수미산Meru을 앞에 두고 슬픔과 자기혐오로 비탄에 잠겼다. 피눈물로 얼굴을 적시며 불타는
폐허 속을 홀로 거닐던 그는 땅에서 쐐기풀을 뽑아내 온몸에 문질렀다. 손가락이 부어 더 이상 풀줄기를 쥘 수 없게 되었어도 그
자신을 향한 그의 증오는 가시지 않았고, 슈에는 손칼을 뽑아 자신의 살점을 도려냈다. 자기혐오가 극에 이르러 슈에는 칼을 자신의
얼굴에 갖다대었고, 부어오른 손가락으로 날카로운 칼날을 쥔 대아라한大阿羅漢은 더 이상 하늘Heaven께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볼 수 없도록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지워없애고자 했다. 누덕누덕 찢어진 살점 조각을 불 속으로 내버린 그때, 깜깜한 방
안으로 갑작스레 들어온 한 줄기 빛처럼 한 순간 깨달음den이 슈에에게 임했고, 아라한은 마침내 득도得道하였다.
격정
슈에는 불꽃과 격정 속에서 득도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귀人鬼또한 심오한 가르침이나 천명天命으로 인해 재래再來한 것이
아니다. 인귀는 그 자신의 마성魔性 덕에 황천黃泉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 인귀는 마귀가 되어서 무덤에서 몸을 일으키고, 천마는
자신들의 이 악마적인 본성을 완전히 포용하려 한다. 마호魔虎가 이르기를, "그리 하지 않음은 부정否定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
뿐이라. 귀인鬼人은 만선萬仙이 아님이라. 하늘의 덕목을 따르는 것에 실패한 선조들이 그 이름을 귀인에게서 앗아가 버렸노라."
"우리는 일만의 악귀惡鬼, 타오르는 감정emotion의 존재이노라!" 라고 마호라면 말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호의 철학의
핵심이니, 즉 새로운 자신의 본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heart이 사람mortal을 움직이는 것처럼, 백魄은 인귀를
움직인다. 백은 도덕과 양심에 얽매이지 않은 채 사랑하고, 증오하며, 갈망하고, 욕정한다. 귀인은 이 격렬한 성정을 자신의 뜻대로
이용할 수도, 이 성정에 벽을 둘러쌓은 채 거기에서 멀어지려고 평생을 보낼 수도 있다. 마호가 어떤 길을 택할지는 너무나도
빤하다.
백은 의Righteousness와 굶주림을 구별할 수 없는 단순한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인귀는
자신의 백에게 조종당해서는 안 된다. 허나 사람이 자신의 본능을 거부하면서 온전히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Guan
Ren또한 부정적인 영향을 감내하지 않는 이상에야 백을 거부하면서 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법들이 합리화하거나 완전히
포기하는 백을 마호는 포용하고 이용한다.
모범적인 마호는 하루하루가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온전하고
굽히지 않는 열정을 품은 채로 살아간다. 득도한 마호는 마치 야수처럼 한 번에 하나씩만을 한다. 교미할 때는 교미만을 생각하고,
죽일 때는 투쟁鬪爭의 기쁨만을 느낀다. 마호는 변덕스럽고 난폭한 한 마리 야수와도 같다. 그들의 짙은 야성은 때때로 그들이 자신을
숨긴 채 인간들 사이를 걷기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혼魂이 자신의 원시적인 반쪽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마호가 자신의 백과 화목하는 방식이다. 야수의 영혼 속 격정을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그 답례로, 백은 혼, 곧 계획하는 자이자
백은 알지 못하는 만족을 얻는 방법을 아는 자의 뜻을 순순히 따른다. 마호후Howl of the Devil-Tiger는 가장
원시적이며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법가이지만 동시에 따르기에는 가장 어려운 법가이기도 하다. 백이 가진 힘에 따라 천마는
승하기도 쇠하기도 하며, 백이 요구하는 바에 굴복함은 실명의 순간Moment of Blindness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백은 반드시 의지력에 영원히 종속되어 있어야만 한다. 혼이 세운 뜻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야성이 품은 어두운 힘을 조종하여
아랫 영혼lower soul의 맹렬한 갈망을 즐겨야만 한다.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는 많은
자들이 시작해 적은 자들만이 끝마치는 일이다. 이에 실패한 귀인은 다른 온건한 진리를 찾거나 이매魑魅가 되는 운명을 맞는다.
하지만 이에 성공한 자는 인간의 탈을 쓴 폭풍으로, 그들 자신의 말로는 곧 도래할 슬픔의 시대Age of Sorrow에 세상을
불태울 격정을 품은 마의 화신으로 변한다. 슈에가 비통 속에서 얼굴을 뜯어내며 고귀해졌듯이, 천마 또한 그 격정이 크면 클수록
고귀해진다. 대아라한에게 득도의 문이 열린 것처럼, 그의 발걸음을 따르는 자에게도 득도는 열려 있다.
고통
고통을 통해 슈에는 득도에 이르렀다. 단순한 육체의 아픔이 아니라, 하늘의 은혜가 자신들에게서 거두어졌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온
극심한 슬픔이었다. 무너진 수미산을 거닐며, 그는 만선이 지은 죄의 깊이를 깨달았다. 그 죄가 너무나도 깊어 숨결이 육체를
떠나갔고, 그들은 한낱 걸어다니는 시체로써 썩어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세상이 무너져 폐허가 되고, 신선의 영화가 한 줌
재로 변했으며, 심장 바로 위에 사악이 자리한 바로 그 상황에서, 슈에는 처음으로 만물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황천의
고통 속, 일천 지옥의 학대가 밝게 비추는 그곳에서야말로 마호가 처음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다.
천마는
폭풍처럼 황천을 박차고 나왔다. 하지만 안일하게 현재에 머무르고 싶다는 욕망은 언제나 남아있기 마련이다. 만선이 탐욕에 빠져
타락하는 동안, 불구대천의 원수 염왕Yama King들은 계속해서 힘을 길렀다. 귀인의 본질 또한, 옛적 인간일 때의 생활방식에
젖어 다급한 역경 속에서도 무기력하게 머무르려 하기 마련이다. 이 안주하고자 하는 욕망에 맞서기 위해, 천마는 지옥에서 겪었던
시간을 되새기며 달콤한 잠의 유혹을 내쫒는다. "황천의 아가리에 들어가고 나서야만 비로소 쉴 수 있노니!" 마호후의 사부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부지깽이를 휘둘러 굼뜬 제자들을 깨우며 외치는 말이다.
싸움에 지고 굴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회복하는 경우는 있어도, 득도한 마호에게 성공에 안주하는 경우는 없다. 백이 인귀를 자극하지 못할 때에는 소금과 강산에 절여진
바늘이 대신 가해진다. 나태는 안주로, 그리고 결국에는 타락과 쇠퇴로 향하는 첫 걸음이니, 오직 고통만이 이 달콤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고통이야말로 일천 지옥에서 겪었던 학대를 상기시켜주는 달아오른 인두요, 자기 만족에 빠지려는 자에 귓전에 울리는
경보인 것이다. 만마에게 있어 이것보다 더 확연한 사실은 없다.
그렇기에 천마는 진정한 고통의 사절이 된다. 그들의
주위 모든 곳에서, 세상 그 자체가 타락과 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득도한 사부가 부지깽이를 휘둘러 제자들을 가르쳐야 할
때인 것이다. 마호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고통을 입히고, 그를 통해 모든 생명에게 내려진 사명을 상기시키려 한다.
마호는 단순한 새디스트가 아니다. 야만적인 방식으로 고통을 주는 것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은 영적으로도 부담될 뿐만 아니라
백에게도 힘을 실어주게 된다. 슈에는 다리가 부러지거나 칼에 찔려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선인仙人들의 파멸과 수치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그와 같이, 마호는 삶 속에서 겪는 평범한 고통이 아니라 황천 지옥의 지고한 학대를 겪으며 눈을 떴다.
분명 육체적인 고문은 주저하는 인간을 설득하고, 영적인 잠에서 깨울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산 자들의
심장은 깨달음이 찾아오기 오래 전 그같은 고통을 버텨내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또한 황천의 학대를 겪었던 자들을 깨달음이 올 때까지
고문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기에, 육체적인 고문은 즐거이 시간을 보낼 수단으로의 가치는 있어도, 교훈을 내릴
수단으로 쓰이기에는 너무도 빨리 가치를 잃기 마련이다.
득도한 마호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단순한 육체적
고통을 훨씬 초월하는 고통을, 바로 영혼의 고통을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가한다. 잿물에 신경을 담그는 것도 고통일찐데, 버림받은
데에서 오는 비통한 공허함이나 손쓸 수도 없는 절망감에서 오는 슬픔은 얼마나 더 큰 고통일런가? 가장 위대한 고문가는 희생자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다. 다만 예술의 경지에 달한 균형 감각을 통해 비탄과 파국을 안겨 줄 뿐이다.
불의Unrightous한 영혼들조차도 마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극단적인 수단이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물론, 천마가
그러한 상황까지 몰렸을 때를 포함해서) 용루龍淚를 통달한 자는 백을 통해 죄인의 영혼 자체를 공격하고, 고문하며, 심지어는
영혼을 삼켜버릴수조차도 있다. 그렇기에, 마호와 마주하게 된 신神은 큰 두려움을 안을 수밖에 없다. 수백년에 걸쳐 쌓아온 깨달음이
적호赤虎의 눈길 한 번에 끝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의
슈에는 크나큰 슬픔에 갈기갈기 찢겨진 마음을 안고 불타는 수미산의 폐허에 섰다. 한때 눈부시게 빛났던 현자는 이제 얼굴 없는
마물, 걸어다니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그가 속했던 세상은 부서진 돌더미가 되었고, 그 세상을 무너뜨린 것은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니라 만선이 섬기던 바로 그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지위도 숨결도 빼앗긴 슈에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치심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바로 그때 슈에는 깨달음을 얻었다. 얼굴이 없어졌음에도, 심장에 새겨진 사악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을
빼앗겼음에도, 슈에는 아직 존재하고 있었다. 하늘은 만선을 멸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만선을 이전과 다르고, 이전보다 조금 더
못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수미산이 무너지면서 세상 그 자체가 바뀌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끝갈 데 없는 오만임을, 슈에는
깨달았다.
세상과 세상이 원하는 바는 바뀌지 않았다. 오직 세상 속에서 만선의 위치만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비록 슈에가
걸어다니는 시체, 피를 빨아먹는 마물로 변했을지라도, 세상 속에서 자신이 걸어갈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아래를 바라보며 타락을 계속해서 결국에는 황천의 군주의 종이 될 수도, 타락에서 벗어나 장엄하고도 세련된 마물이 될
수도 있었다.
만선으로 돌아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을 바라는 것은 마치 주정뱅이가 엎지른 술을 바라보며 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이 부족하다 여겨져 좌천당한 관리라 해도, 새로운 자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원래와는 다른 부문에서
더욱 높이 발돋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이, 슈에 또한 이 새로운 위치를 받아들이고 그 위치에서 최고가 되는 것으로 다시
한 번 하늘의 영광을 입을지 모른다. 쉬운 길은 아니나, 불가능한 길도 아니었다. 자신이 이제 마물이 된 것이라면, 가능한 한
최고최악의 마물이 되어 모든 방면에서 자신의 마성을 떨치면 되는 것이었다. 깨달음을 쫒는 것은 올바른 사고방식을 가진 생물에게
지워진 마땅한 의무이기에, 슈에는 자신의 방식대로 깨달음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하늘과 사람의 눈에 자신이 혐오스러운 괴물로
비칠지라도, 그는 다시는 지혜와 자기개선의 길에서 눈을 돌리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리하여 슈에는 득도했고, 그가 자신의 실패를
감싸안았을 때 그의 죄책감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그래서 전에 하자던 캠페인은 대체 어떻게 된 것?
스케줄 좀 조정되면
무협지의 마교같은 새키들이네
쉬에 저양반은 진짜 상반되는 깨달음을 어떻게 5개나 깨달은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