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고아.
깨어난 자Mage. 권능을 휘두르는 자들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세상을 예전과 같은 프레임으로 볼 수 없게된 자들, 이라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스스로의 현실과 모순되는 다수의 현실. 더 큰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정진. 다른 자들과의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대결.
말로는 멋지지만, 그 싸움을 실제로 체험하는 자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너무 큰 사건을 벌이면 귀신 같이 쫓아오는 테크노크라틱 유니언, 호시탐탐 도시 내의 영역을 노리는 뱀파이어들, 미련을 쫓는 유령, 반인반수의 생물인 늑대인간, 현실을 근본부터 뒤엎어버리는 머로더,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고자 하는 -그 정의마저도 각자에게 다르지만- 네판디, 그리고 자신의 현실 인식을 억누르고자하는 현실 그 자체와 다른 메이지들까지.
승천을 위한 전쟁이 멈추었다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다. 단지 그 양상이 바뀌었을 뿐.
승천 전쟁이라는 것은 두 진영이 나뉘어 싸우는 회전 같은 것이 아니다. 모든 깨어난 자는, 다른 깨어난 자들의 적이다. 같은 진영에 속해있다하더라도 서로의 시각을 인정할 수는 있되 체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승천 전쟁이란 모두가 모두와 싸우는 엉망의 전장이다. 수없는 메이지들이 서로의 현실을 투영하고자 하는 전쟁에서 죽어나가거나 끝까지 살아남아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항상 그 둘 중 하나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세번째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 전쟁에서 눈을 돌리고 평범함으로 돌아가는 것.
마치 지금의 하은처럼.
“감사합니다.”
창구 너머의 고객에게 통장을 돌려주는 하은. 그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작은 은행에서 행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몇달전 시작했기에 직급은 겨우 계장. 선배들 중에는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점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묵묵하게 업무를 볼 뿐이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다음 고객을 맞는 하은. 그녀가 굳이 은행을 선택한 것은 역설적으로 유니언의 눈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 조직에 들어가면 바로 눈에 띌 수 있고, 대형 은행이나 증권사, 아니면 대기업 같은 곳도 마찬가지다. 옛날이면 모를까, 경력이 명확하지 않은 그녀가 그런 곳에 쉽게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런 작은 은행이라면 오히려 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쉽다. 그들의 감시망 안에는 들어와 있으되, 그들이 적극적으로 감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유니언에 들어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일에 몇번이나 휘말려 버린 그녀. 어린 나이에 죽을 위기를 몇번이나 경험하고, 유니언의 감시를 피해 도피 생활을 한 적도 있다. 끝내 자아를 빼앗기다시피한 전투병기로 개조된 채로 지낸 경험까지. 그러나 그런 일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점은, 그녀가 클론이라는 사실이다.
“동그라미 친 곳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몇가지 양식을 내밀며 말한다. 그녀의 손목에 드러난 흉터. 잘려나간 손을 재생시킨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화상 흉터가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는 목 뒤부터 등까지 선명하게 나있다.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아무리 소피아라도 오리지널의 몸을 완벽히 재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옷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은 멀쩡하게 회복된 상태다.
오리지널의 몸안에서 클론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녀. 그래서 혼자 살고 있을 모친에게도 돌아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니니까.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오늘의 업무도 종료된다. 한가지 특별한 점이라면 그녀는 단 한번도 업무상 실수를 한 적이 없다. 사람과 관계된 것이라면 모를까, 문서처리 등 무언가의 ‘규칙’이 있는 일이라면 절대 틀리지 않는 것Resonance이 그녀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야근을 하는 날이 거의 없었다. 지점 문이 닫히고 업무를 처리하는 행원들.
그렇다고 해도 특별한 일은 없다.
반복,
반복,
반복,
그리고 반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현실의 프레임에서의 반복일 뿐.
반복,
반복,
반복,
그리고-
“반복! 반복! 그리고 반복!”
과거의 언젠가. 훈련 교관이 우렁차게 외친다.
그러나 군인화교육에서 볼 수 있는 위협적인 외침보다는, 강조의 외침이다. 도복을 입은 몇 명의 훈련생들이 그의 구령에 맞춰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곳은 테크노크라틱 유니언의 새로운 계몽된 요원을 길러내는 훈련소 중 하나다. 물론 이런 식의 군사훈련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보리 타워에 들어갈 계몽과학자들을 모아놓는 예비 교육기관, 기계공학자를 길러내는 엔지니어링 스쿨, 미디어 및 여론 조작 방법을 훈련하는 스파이 기관 등 다양한 훈련기관이 있다. 그 중에 하은이 들어와 있는 이 곳은 말 그대로 군사적 훈련만을 가르치는 기관이다.
그녀가 이곳을 거친 것은 벌써 먼 과거의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은 생생하다. 이미지 뿐만 아니라 훈련의 내용마저도.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오는 훈련생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곳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훈련소와는 상당히 다르다. 우선, 훈련생이 교관보다 적다. 교관 한명에 수십명의 훈련병이 붙는 일반 군사훈련소와는 달리 이곳은 훈련생 한명에 교관, 의료진, 그 외 교육에 필요한 인원이 수십명씩 배정되어 있다.
훈련 중에 당하는 부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팔이 잘려나가도 이삼주 안에 수술은 물론이고 재활까지 완료해서 다시 훈련 코스에 넣어줄 의료진이 대기하고 있다.
영양관리? 마찬가지다. 근육이 붙어야 할 몸이 영양 부족에 시달리지 않도록 완벽한 식단을 제공한다.
훈련 프로그램? 획일적인 훈련 프로그램이란 없다. 모든 훈련은 개인의 경험과 신체조건에 맞는 훈련 절차를 짜내는 카이론 AI를 통해 만들어진 개인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실시된다. 시설 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같은 루틴을 도는 훈련생들을 한군데 모을수는 있어도 모든 훈련 프로그램은 서로 다르다.
청소 같은 일상적인 일 역시 전혀 할 필요가 없다. 아침에 훈련을 나가 저녁에 들어오면 마치 입소 첫날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훈련생들은 그들이 무슨 조직을 위해 일하는 지도 모른다. 일종의 PMC들이 합작해 설립한 훈련시설이라고만 짐작할 뿐. 이런 분야에 대해서 아는 훈련생들의 경우는 이런 스케일의 훈련 시설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들이 단순한 PMC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아님을 짐작하는 정도다. 그러나, “유니언” 같은 단어는 어떤 교관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최소한 그들이 그 단어를 알 정도의 권한이 부여될때까지는.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조직이 온갖 편의와 완벽한 훈련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대신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훈련에 불만 없이 참가하는 것.
“다시!”
또 다시 자세가 반복된다. 일반적인 군 훈련소에서 장애물 코스를 돌기 위해서는 인원수 때문에 한사람이 한시간에 한번 돌아도 많이 도는 수준이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말 그대로 끝없는 훈련이 계속된다.
반복.
몸이 기억했다고 할 수 있는 레벨이 될 때 까지 끊임없이 동작을 반복한다. 괴물들을 상대로는 망설일 시간이 없으니까. 그들에게 계몽된 자의 기준에서도 무술의 대가가 되라고 기대하는 자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공격해들어오는 졸개들을 뿌리치고 하이퍼테크 디바이스를 사용할 정도까지의 시간을 벌라는 의미는 있다.
단순한 무술 뿐만 아니다. 특수부대원이나 배우는 중장비 조작부터 시작해서 자물쇠를 따는 훈련까지 갖은 잡기 역시 수십번씩 반복하며 배우게 된다.
“다시!”
그렇게 반복이 계속된다.
반복,
반복,
반복,
반복-
“-12500원입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편의점 포스기가 소리를 낸다. 하은이 계산이 끝난 봉투를 들고 편의점을 나서려는데 인사불성이 다된 덩치 큰 취객이 들어온다.
“야!”
다짜고짜 알바생에게 소리를 지르는 그.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아, 거!”
그가 아무렇게나 소리지르더니 계산대 위에 놓여있는 물건들을 손으로 쓸어버린다. 어디에서나 있는 일상의 골칫거리다.
“소, 손님!”
“그만 하세요.”
하은이 취객에게 다가가 조용히 이야기 한다.
“넌 뭐야!”
그녀에게 손을 뻗는 취객. 엉성하기 그지없는 그의 손이 그를 제지하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다. 척추반사에 가까운 반응으로 하은이 움직인다. 그녀의 머릿속에 훈련소에서의 교관의 우렁찬 외침이 재생되는 것 같다.
“하나, 상대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노리고 안쪽의 손날을 세웁니다! 둘, 가장 약한 부분을 노려 순간적인 힘으로 손목을 뺍니다!”
하은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인다. 잡힌 그녀의 손이 평평하게 회전하고 다른 손이 홱, 하고 그 손목을 잡아당겨 손을 빼낸다. 힘 자체는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한점에 집중되었기에 충분하다. 취객이 그 덩치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런 움직임에 균형을 잃을 뻔 한다. 그가 다른쪽 손을 뻗어 이번엔 하은의 머리카락을 잡아챈다.
“하나, 양 손으로 상대방의 손을 잡습니다! 둘, 반대쪽 발을 빼며 그대로 몸 전체를 숙입니다!”
하은이 자신의 앞머리를 잡은 취객의 손을 감싼채로 그대로 몸을 재빠르게 숙인다. 마찬가지로 힘은 훨씬 세지만, 한쪽 팔의 힘이 몸 전체의 힘보다 셀수는 없는법. 그가 그대로 균형을 잃으며 빠르게 몸을 빼는 하은에 딸려 가며 자기가 떨어트린 물건을 밟고 앞으로 넘어진다. 그가 일어날 수 없게 어깨 한쪽을 강하게 밟는 하은.
“경찰 부르세요.”
그녀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로 머리카락을 툭툭 털며 알바생에게 지시한다.
“아… 그… 네!”
하은이 일어나려고 끙끙거리는 취객을 본다. 자기에게 살기를 가지고 달려든 것도 아닌데다가 인사불성이었으니 망정이지, 잘못하면 쓸데 없는 문제에 말려들 뻔 했다.
“...휴.”
기계몸에서 생몸으로 돌아와도, 옛날의 반사적인 기억은 아직도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의체보다는 훨씬 약하고 비효율적이지만 이편이 훨씬 낫다. 아니, 생각해보니 이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이 기억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의 것이 의체에 전송되고, 다시 오리지널의 몸에 덮어씌워진 기억이니까.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현기증이 나고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다.
원룸. 작은 방.
따로 큰 집을 가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는데다가 그럴만한 돈도 없다. 직장에서 가까운 곳에 방을 잡느라 그다지 큰 방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큰 방을 가질 필요도 없었기에 불만은 없다. 그녀가 트레이닝 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짐으로 향한다.
5천미터 달리기로 시작되는 나름의 운동 루틴. 그러나 유니언에 있을 때에 비교하자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운동을 계속하는 그녀. 지루하기 그지 없는 일상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 지루함에 감사할 지경이다. 최소한 자기 의지에 반해 멋대로 몸이 바뀐다던가 의지를 제한받는 일은 없으니까.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그녀.
모든걸 혼자해야한다. 돈을 버는 것부터 가사까지. 그래도 그 편이 좋다.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꺼린다. 알려지는 것이 싫다. 정확히는 알려짐으로 인해 유니언의 감시망에 드는 것이 싫다.
집에 들어온다. 욕조 하나 없는 화장실에 들어간다. 샤워기를 틀어 뜨거운 물을 머리부터 끼얹는다. 따뜻하다. 세면대의 거울에 비추어지는 자신의 몸. 여러모로 다져진 그녀의 신체. 그러나 그 모양보다 몸이 자신의 생각대로 잘 움직여준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예전의 의체는 당연히 스스로 관리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은 운동이나 식단관리를 통해 케어해줄 필요가 있다.
샤워를 마친다. 목 뒤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어깨까지 기른 머리가 마르려면 한참 걸린다. 아무 장식도 없는 헐렁한 잠옷을 입고 침대 위로 올라간다. 어제 읽다 만 책을 읽을까, 아니면 자격증 공부를 할까 고민한다. 잠시의 고민 끝에 노트북 책상을 당겨 자격증 책을 올려놓는다. 공부에는 막힘이 없다. 명확한 규칙이 있으면 확실히 쉽다. 예전과는 달라진 무언가Resonance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명확한 규칙에 의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 암기라면 예전과 똑같다. 오히려 단순 암기의 경우에는 의체의 외부기억장치에 의존했던 버릇 때문에 어색한 느낌마저 들었다.
“딸깍.”
한시간 정도의 공부. 책상을 침대 밑으로 치우고 불을 끈다. 눈을 감고 이불을 덮은채 잠든다.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이다.
목숨을 던져 괴물과 싸우는 일도 없고, 음모에 휘말려 자아를 잃는 일도 없고, 총에 맞아도 상처 하나 입지 않는 의체가 되는 일도 없는 말 그대로 평범한 일상이다.
그녀가 잠든다. 내일도 아무런 일도 없길 바라며.
번화가. 하은이 거리 뒤쪽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손에 들린 쇼핑백이 흔들린다. 그녀가 들어서는 곳은 한 모텔이었다. 신분증을 보여주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걷는다. 그녀의 시선에 복도의 비상구가 보인다.
-그녀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설계도가 그려진다. 이곳에서 싸우게 된다면 자신이 유리하게 쓸 수 있을만한 요소, 잠긴 문과 열린 문, 장식품, 자신의 키로는 쉽게 들어갈 수 있지만 덩치 큰 사람들은 쫓아올 수 없는 곳, 힌트,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 소화기의 위치, 상대의 시야를 가리는데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조명 스위치, 패턴, 그리고 실마리, 조명이 상대의 눈을 정확하게 비추게 될 각도와 거리, 열쇠 구멍에서 추측해내는 열쇠의 길이, 미로의 지도, 실마리, 힌트, 그리고 또 다시 지도와 실마리, 그 길이의 열쇠로 찌를 수 있는 신체 부위, 깨뜨리면 날카로운 칼이 될 수 있는 화분, 위쪽의 작은 창을 통해 복도 안을 감시 할 수 있는 범위, 눈치채지 못할 인공적인 암시, 또 하나의 실마리, 복도를 주파 할 수 있는 시간,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음의 정도, 문을 통해 들리는 소리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 그리고 실마리, 그리고-
그만. 여긴 그런걸 하러 온게 아냐. 그리고 그런걸 하고 싶지도 않고.
하은이 멈춰서며 고개를 강하게 좌우로 젓는다.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을 폭주하던 사념들이 사라진다. 작게 한숨을 쉬고 이마를 문지르는 그녀.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가 중간의 방으로 들어간다.
“왔어요?”
“네. 불 꺼줘서 고마워요.”
현관등의 희미한 빛이 모텔방 안을 비춘다. 적당히 괜찮은 방이다. 침대에 먼저 와서 앉아 있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씻을래요?”
“몸만 씻고 올게요. 먼저 씻었죠?”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 하은이 짐을 내려놓고 혼자 욕실로 들어간다. 뜨거운 물이 하은의 몸을 적신다. 뜨거운 물에 생각이 녹아내렸으면 하는 바람. 잠시 뒤, 뭉게뭉게 피어나오는 수증기와 함께 하은이 배스타월로 몸을 닦으며 나온다. 화장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연기와 빛. 실루엣뿐이지만 하은의 몸이 드러난다. 남자가 그녀를 잠시 쳐다보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권한다.
“와요.”
“네.”
하은이 침대에 앉은 남자를 향해 다가온다. 하은이 그의 품에 안긴다.
쾌락에 감싸여, 그녀가 잊는다. 아니, 잊으려 몸부림친다.
모텔에서 먼저 나온 그녀. 좋은 남자다. 그러나 서로가 이 이상의 관계는 바라지 않고 있다. 그저 피학, 그리고 가학적인 취향이 서로 맞으니 만나는 것 뿐.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을 찾을 수는 있었지만 그 뿐이다.
하은은 모텔에 들리기 전에 백화점에 들려 위스키 한병과 옷 몇벌을 사온 참이었다. 같이 마실 사람도 없지만, 어차피 다른 사람과 술 마시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니까. 모텔에서 같이 마실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생각해보니 옷을 사봐야 만날 사람도 없는 상황이다. 헛웃음을 지으며 지하철에서 내려 어두워진 길을 걷는다. 은행 ATM 지점을 지나가는 그녀. CCTV가 보인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CCTV의 범위에서 벗어나 걷는다.
조금만 더 걸으면 집이다.
허하다.
재미가 없다고 하는 말로는 부족하다. 자극이 부족하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는 사람이 롤러코스터를 타봐야 별로인 것과 똑같다. 그래도,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왼쪽으로 틀고, 조금 더 걷다가, 학교 담장을 끼고 다시 오른쪽으로-
“...”
한숨을 쉬는 하은.
그래, 왜 안나타나나 했지.
하은의 앞에 제발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형상이 서있었다. 마치 정부의 요원을 연상시키는 복장의 위압적인 남성의 모습. 교관The Man이다. 하은이 주위를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인간의 질서에 대한 갈망과 두려움이 섞여 만들어진 질서의 정령Incarnae.
그래, 알고 있다. 테크노크라틱 유니언의 방식으로는 이들은 존재해서는 안되거나, 아직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차원의 존재이다. 당연하지만 하은은 ‘정령’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생각도 없고, 유니언의 생각을 따를 이유도 없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손에 들고 있는 쇼핑백 만큼이나, 교관의 존재도 현실적이니까. 만약에 주어진 문제의 답을 엿볼 수 있다면, 그 답지를 지키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존재들일 것이다. 어쩌면 이 세계라는 거대한 미스터리의 파편을 하나하나 엮어가는 존재들일지도 모르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며 하은이 묻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거의 짜증이라고 할만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이번엔 뭐죠?”
교관이 길 옆의 중학교 담장 너머, 그의 시선이 우뚝 서 있는 체육관 옥상에 고정되어 있었다가 이내 하은을 향한다.
“...미안하지만, 이젠 그런 일 안해요.”
하은이 무심하게 말하며 그의 옆을 지나치려 한다.
“5명이 죽는다.”
그 말에 하은이 우뚝 멈춰 선다.
“그 중 3명은 학교 폭력을 주도하는 학생이고, 2명은 그에 동조하는 학생이다.”
하은이 고개를 젓는다.
“...어떻게 하라는건지 모르겠네요. 구하라는거에요, 아니면 말라는 거에요?”
하은이 교관을 향해 돌아선다. 그는 말이 없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라는 말을 쓰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들의 처벌은 정당한 절차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원하는게 뭐죠? 그런 질서가 괴물에 의해 어지럽히는걸 막으라고요? 괴물을 죽이고 사람들을 지키라고요? 그건 유니언이 알아서 하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관은 대답하지 않는다.
“난 충분히 했어요. 괴물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지켰잖아요. 그러다가 나까지 괴물이 될 뻔 했어요.”
하은이 의체 시절의 자신을 떠올린다. 기묘하게도 의체일때의 자신은 괴물들과 싸우기는 했어도 대중을 지키는 임무에 투입된 적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은의 말은 어딘가 공허하다. 자기 자신마저도 설득하지 못할 정도로.
“또 그렇게...”
가자.
그녀의 인형Avatar이 속삭이는 듯 하다.
재밌는 퍼즐일것 같으니까.
그 말에 하은의 결심이 흔들린다. 그 사이에 교관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은이 한숨을 한번 쉬더니 담장을 넘는다. 쇼핑백까지 들고 있는데도 그녀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날래다.
담장 너머에는 꽤나 오래된 체육관이 서있었다. 그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짓는 듯, 포크레인이나 뭔가가 실린 덤프트럭이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는 공사 현장이 보인다. 하은의 시선이 거의 버릇이라도 된듯 사방을 훑는다. 하은이 공사 현장에 남겨져 있는 사다리를 가져온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 언저리에 간신히 닿는 사다리. 조심스럽게 올라가는 그녀. 옥상에는 두 명의 남성이 쓰러져 있었다. 숨조차 쉬지 않는 모습. 죽은 것이 분명했다. 하은이 시체를 살핀다.
“...세상에.”
몸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광경. 몸 전체가 피부부터 분해되기 시작해 젤리처럼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아직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뼈가 약해진 피부를 뚫고나오고, 눈 같은 약한 부위는 이미 액체가 되어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목덜미, 아니, 목덜미처럼 보이는 것에는 일종의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하은이 조심스럽게 그것을 빼낸다. 플라스틱 치고도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수준의 말끔함. 유니언의 생물병기를 담은 용기임이 틀림 없었다. 그녀가 주사기를 빼내고 나서도 몸이 녹아내리는 일은 계속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들은 사다리도 없이 옥상까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온거지?
하은이 그들의 소지품을 살핀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핸드폰. 그러나 공산품이라기에는 너무 특이한 디자인이다. 하은이 그것을 자세히 관찰한다. 핸드폰의 이어폰 단자에서 작은 거미 같은 것이 기어나온다. 주위를 살피는 듯한 모습의 거미. 마치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 거미가 서서히 부스러지며 조각난다. 하은은 예전에 이런 종류의 물건을 본적이 있었다. 도시의 늑대인간들이 운용하는 괴상한 종류의 기술이다.
누군가 늑대인간들에게 접근해 기습적으로 주사기를 꽂아넣었다, 는 상황.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하은이 즉시 옥상을 둘러보지만 아무런 흔적이 없다.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흔적을 찾는 것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늑대인간을 속여 기습할 수 있는 존재라면 맨몸의 하은이 외부의 도움 없이 알아챌 수 있을리가 없다. 하은이 옥상의 가장자리로 다가가 내려다본다.
과연, 체육관과 담장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에 몇명의 학생들이 보인다. 이 늑대인간들은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이젠 학교 폭력까지 해결하라는 건가? 하는 생각. 그러나 몇초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이 바뀐다.
누가 가학이고 누가 피학이죠. 중요합니다
ㄴ 하은이가 피학일거 같은데 - dc App
변절한 남파공작원 같은 하은씨의 일상 - dc App
피학... 가학..? - dc App
그간의 모습으로 보아 하은이가 M일것으로 추정 - dc App
헐 더 맨 인카르나 급이엏어?
M20 기준으로 토템 스피릿은 인카르나 급이라고 되어있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