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끝나고 한산해진 김에 문득 생각나서 푸는 늑대 이야기. 부제는 알피지의 나비효과에 관해서.
대충 지금으로부터 5년 전, 내가 창회에 막 가입했을 때 있었던 어떤 캠페인의 이야기임.
창회는 테라니아라는 자작세계관을 쓰는데, 이중에서 아브노르라는 지역이 있음.
이 지역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충 중세 이탈리아 비스무리한 반도에 수많은 도시국가들이 난립하고 있는 지역인데, 즈그들끼리 사이가 무척 나빠서
허구헌날 병사 소집해 영지전 벌이고 치고박고 싸워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한국은 발뒷꿈치도 못쫓아가는 그야말로 트루 헬반도였음.
그런데 이중에서 레드하트라는, 대충 저 지역에서 가장 크고 짱쎘던 영지 하나가 타협을 제안함.
"갈매기 협약" 이라고 해서, 협약 안에 속한 영지들끼리 평화를 유지하고 + 동맹이 공격받으면 같이 도와서 공격하는 협정을 맺자는 것.
그런데 야심차게 시작한 이 협정은 의외의 암초를 만나게 되는데, 협약의 상징으로서 아브노르에 있는 어떤 영산의 정상에 갈매기 깃발을 꽂는 의식을 행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건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절단은 전멸, 원래 보냈던 깃발도 실종되는 사태에 빠진 것.
이런 불길한 일이 일어나자 협약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귀족들이 나타나고, 결국 레드하트는 다시 2차 사절단을 짜고
문관들만 보냈던 저번 사절단 대신, 베테랑 전사들로 이루어진 사절단을 구성해 그들에게 깃발을 맡겨 들려보냄.
이 "2차 사절단" 이 바로 캠페인의 PC들.
그런데 이 마스터가 약간 게이밍적인 재미를 지향하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베테랑 전사" 라는 설정인데도 레벨이 2레벨이었음.
만약 E6같은 세계관이었으면 2렙으로도 충분히 베테랑이라 칭할 수 있겠지만, 저긴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는점. 2레벨이면 고대로 쪼렙이야.
추측하기로, 아마 캠페인 진행하면서 보상으로 레벨업을 팍팍 줘서 성장의 재미를 느낄 수 있게끔 일부러 스타팅을 낮게 잡은 것 같은데
의도야 어찌됐든 간에, 이 낮은 레벨 설정이 하필이면 1회차부터 꼬여서 대참사를 불러버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위험에 대해서도 인지한 채 떠났을 파티가, 튜토리얼 격으로 낸 야밤의 늑대 습격 조우에 전멸해버렸던것ㅋㅋㅋㅋ
무슨 템플릿으로 보정 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늑대였음. CR 1짜리 늑대. 기습의 잇점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론 CR 1짜리 세마리가 다.
그런 CR 1 네마리한테, 2레벨 파티 다섯명이 분투 끝에 결국 전부 쓰러지고 전멸해버려 간신히 구출된거임.
이유를 이야기하자면 일단 당시 참여자 다섯 중 셋이 초보였던데다, 남은 둘의 시트 역시 그다지 최적화되어있다고 말하기 어려웠고,
지각체크에 실패한다든지 중요한 공격이 빗나간다든지 늑대 특유의 트립에 당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운도 그다지 좋지 못했음.
원래 패파는 저렙조우일수록 약간 운빨좆망 경향이 있는데, 그걸 그대로 보여준거지. 여하튼 이겼어야 할 조우였는데 전멸하고 펑.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음. 마스터는 계속 캠페인을 돌렸고, 이후 이어진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음.
2차 사절단의 실패로 갈매기 협약에 대한 회의는 더욱 짙어지고, 예정된 수순으로 귀족들의 대거 이탈이 발생함. 그리고 그 중에서는 레드하트의 가장 큰 우방이자 마찬가지로 대형 영지 중 하나였던 아이언포지도 속해 있었음.
2차 사절들은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아이언포지로 찾아가 영주를 만나고, 그를 설득하려 함. 그런데 영주는 한사코 일행을 만나길 거부했고
일행은 조사 끝에 그의 딸이 폐병에 걸렸으며 어떤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약을 제공하는 댓가로 협약 탈퇴를 종용했다는 사실을 알아냄.
여기에 추가 조사로 마법사가 제공한 "약"이 사실은 폐병의 진짜 원인이었다는 것까지 밝혀내고, 영주를 설득하려 하지만
영주는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그 마법사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그들을 추방함.
결국 일행은 영주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전설의 힐링소드(타인을 치유하는 검사? 직업. 창회 구 홈브류)의 유해가 있는 던전으로 향하는데
이 임무에서도 또 실패해버리고 ㅋㅋㅋㅋㅋ 결국 다섯 멤버 중 둘이 희생해 간신히 목숨만 부지해 나오는 것으로 끝남.
여기서 캠페인 1기 종료.
캠페인 2기는 저 1기 종료로부터 몇년이 지난 후에서 시작.
협약에서 탈퇴한 아이언포지는 결국 전쟁 끝에 크림슨이라는 영지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들의 주도 하에 평화와 이상보다는 무력과 공포를 기반으로 한 제 2차 갈매기 협약 (강제) 이 결성되고
이 크림슨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이 각 영지들로부터 견제 멤버들이 보내져, 이들이 2기 PC로서 반도를 오가며 활약을 하게 됨.
2기 팟은 1기에서 붙잡지 못했던 마법사가 온갖 이간질과 공작, 술수를 부려오는 와중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그녀(여자임) 를 추적,
대규모 영지전이 벌어진다든가 그 와중에 PC 중 하나의 아버지가 전사한다든가 언데드로 부활해한 1기 PC들과 싸우게 된다든가 하는 오만가지 비극 끝에 간신히 그녀를 붙잡아 사살하는데 성공함.
그런데 알고보니 이 마법사는 먼 과거의 악역 집단인 "흑기사단" 이라는 존재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진짜 흑막으로 이 모든 사태를 배후조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일행은 다시 추격-격전 끝에 부활한 흑기사 "제로섬" 을 찾아내 쓰러뜨리는 데 성공, 아브노르에 불던 전쟁의 바람을 종식시킴.
여기까지가 캠페인 2기의 이야기.
머 그래서 일단 저 캠페인 자체는 2기까지만 진행되고 끝났는데, 아브노르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음.
저때 마각을 드러낸 "흑기사단" 이라는 단체는 이후 후속 캠페인에서 메이저 빌런으로 등장, 호시탐탐 아브노르를 노려오기 시작해
흑기사단이 승리한 평행세계로부터 역으로 침공해오려 한다든지 거대 공중요새를 건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끝없이 등장함. 얼마나 많이 나왔으면 나중가면 별명이 아예 흑켓단임 흑켓단.
그리고 여기에 다른 마스터가 도입한, 사악한 대지신을 모시는 "블러드어스" 라는 단체가 추가되며 졸지에 3파전 구도가 형성되고
이를 정리하기 위한 32화짜리 파이널 캠페인의 엔딩에서 마침내 모든 음모를 깔끔히 분쇄하는데 성공, 실패했으면 반도 자체가 증발하고 수백만명이 죽을 수도 있었던 위기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함.
저기에 이르기까지 세션 갯수를 정리하면 대략 100개 안팎쯤 될까? 마지막 가면 레벨도 18레벨로 초 하이파워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1화에서 사절단이 늑대에서 전멸하면서 태어나게 된 이야기인 거시다.
나중에 내가 저 캠페인 진행한 마스터에게 물어본 적 있었음. "만약 늑대한테 거기서 안 졌으면 어떻게 됐어?" 라고.
그랬더니 아마 지금보단 훨씬 더 가벼운 내용이었을 거라고 하더라. 원래는 깃발 들고 가는 로드트립물 비슷한 게 될 예정이었다고 함.
더군다나 메이저 악역인 흑기사 역시 분위기가 딥다크해져가면서 추가된 것이니, 원안대로였으면 아마 나오지 않았을 거라고도 했음.
즉 빈말이 아니라 저 늑대들은 정말 대륙의 운명을 바꾸었던 것이다. 평화가 도래해가는 세계에서 북두의권급 막장 세계로.
이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내가 RPG하면서 본 초기 전개의 나비효과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사실 저거 돌린 마스터가 탈갤에서 악명 높은 창회 대수령임. 그리고 얘는 저 파이널 캠페인 엔딩 낸 뒤에도 너무 길게 에픽하게 흘러간 이야기에 미련이 남았는지 DLC 계획을 꺼내오면서 본편보다도 길어진 사족을 돌렸었고.
그런데 이 사족 부분이 생각보다 평가가 좋지 못한 채 부진하자 애가 점점 더 예민해짐. 그러다가 PL 중 하나가 슬슬 자기 캠페인에 집중 안하고 다른 캠페인에 더 관심가지는 면모를 보이자 폭발, 그쪽으로 쳐들어가 대규모 팀간 분쟁을 벌였음.
여기서 상대팀 마스터였던 게 지금 탈갤에도 있는 모 고닉인데, 이때당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얼마 후 대형사고를 터뜨리게 되고 카페를 나감.
그런데 이 사고의 처리 과정에서 대수령이 약간 폭압적으로 일처리를 했었던 것이 하필 로그로 고스란히 저장되어 남았고
이후 약 반년쯤 뒤 다른 계기로 벌어진 청문회에서 공개되어 대형 죽창으로 작용, 그대로 대수령을 탄핵하는 계기로 작용함.
그리고 그걸로 오랜 세월 이어져왔던 대수령 체제가 끝나고 지금의 창회로 넘어오게 됐고.
즉 저 늑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륙뿐만 아니라 그 세계관이 속한 RPG 카페의 운명마저 바꾸어놨다고도 말할 수 있음.
정말 대단한 늑대새끼들임.
기승전 수령. 방심하다 당했다
대수령 소리좀안나게해라
마지막부분 때문에 비추드립니다
수령님?
ㅇㅁ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