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심심해서 쓰는 뻘글이다. 특별한 주제는 없으니 무시해도 됨.



RPG를 하다 보면 가끔 내가 "배째라식" 이라고 지칭하는 플레이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부정적인 어감의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이 사람들이 뭐 라그나거나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평균 이상의 기량을 지닌 플레이어가 더 많다.


그런데도 내가 이 사람들을 싸잡아 묶어 말하는 건 매우 기묘한 RP스타일을 취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상황 : 야밤에 불침번을 서고 있는 상황에서 지각 체크에 성공, 누군가가 이곳에 활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챔. 그리고 그 순간 화살이 발사.



여기서 일반인들이라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요" "엄폐물 뒤에 몸을 숨겨 막아요" "소리를 쳐 일행을 깨워요" 같은 선언을 하겠지. 혹은 좀 더 도전적인 사람들이라면 "날아오는 화살을 그대로 손으로 낚아채봅니다" 같은 RP를 할 수도 있을 테고.



하지만 이 배째라 유형들은 다르다. 이 사람들은 저 상황에서 바로 이렇게 RP를 치기 시작한다.



["아닌 밤중에 쥐새끼들이 숨어들어왔군."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하게 드러난 윤곽을 보고 비릿한 웃음을 짓습니다. "하지만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그리고 상대가 화살을 날리면, 그 궤도를 읽어 살짝 몸을 기울여서 피해요.]



RP를 못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감각있게 잘 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저런 행동을 해서 뭔가 룰적 이득을 받아가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아직 화살을 피하는 체크가 이루어지기 전이라는 점", 따라서 저 시점에서 저 대담한 회피 시도가 성공할지 안 할지는 모른다는 점이다.


만약에 저렇게 대사를 쳐놓고서 회피 체크에 실패해 화살에 맞기라도 하면? 이미지 스타일 간지 모두가 심각하게 구겨진다. 따라서 보통 정상인이라면 자기 캐릭터의 멋짐을 과시하는 RP는 회피 체크까지 성공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배째라 유형들은 그러지 않는다. 그랬다간 지각체크에 성공한 부분을 RP할 타이밍을 놓친다는 게 이유다. 그래서 저렇게 한껏 분위기를 잡고 무모한 도박판에 몸을 내던진다. 관련 수정치가 높으면 모르겠는데, 가끔은 수정치가 낮은 경우에도.




만약 여기서 체크가 실패했는데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스터에게 따지고 든다면 그건 라그나다. 예전 예시글에도 있었지.


하지만 이 유형들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 쪽팔림에 비명을 지를 수는 있겠지만, 현실을 부정하진 않고 그에 맞춰 RP를 한다. 


우연적 요소 (나뭇가지가 방해되어 제대로 몸을 피하지 못했다든가) 를 결부시킨다든가, 코믹한 성향이 좀 있는 캐릭터면 약간 개그씬 느낌으로 연출한다든가. 혹은 RP를 아예 안해버리고 피해만 적용하고 턴 엔드를 눌러버리는 경우도 있지.


한편, 한술 더 뜨는 놈들은 아예 그 실패까지 연출의 일부로 편입시키기도 한다. 예컨대 [@그런데 그 순간, 그 화살을 자신이 피하면 뒤에 있는 동료들이 맞을 것임을 눈치채고 오히려 몸을 날려서 맞아줘요.] 라든가. 이쯤 되면 그 무한한 후까시력이 놀랍기까지 하다 ㅋㅋ



전술했다시피, 배짱꾼들은 라그나가 아니기 때문에 딱히 심각하게 경계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치들이 이렇게 행동함으로서 노리고자 하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암만 멋진 RP와 지문으로 분위기를 잡는다 한들 다이스에는 영향을 줄 수 없다. 내가 굴리는 주사위의 값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성공/실패를 판정하는 마스터의 심리상태에는 압박을 줄 수 있다. 만약 저걸 d20 체크라 가정하면 주사위가 2, 3 이따위로 나왔으면 볼 것 없이 실패겠지만, 7, 8 등 뭔가 높지는 않은데 아주 낮지는 않은 애매한 수치가 나왔다면?


이때 사디스트가 아닌 마스터는 "애매하면 성공" 이라고 판정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왜냐면 앞에서 저런 RP를 했고, 따라서 그 상태에서 가차없이 실패 처리해버리면 PC들의 자존심을 구겨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PC들을 곯리면서 홍낄낄거리는 유형의 마스터는 해당사항 없음)


이 경향은 특히나 마스터링을 잡아본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마스터들에게 자주 보인다. 저렇게까지 RP했는데 실패시키면 "왠지 큰일날까봐 무서워서" 그냥 성공 처리 시켜버리는 것이다. 특히 난도 비공개를 쓰는 마스터라면 더더욱 그런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그리고 배짱꾼들은 바로 이러한 심리적 빈틈을 노린다. 게다가 더 질이 나쁜 건, 이렇게 해서 성공하면 뭔가 RP를 되게 잘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자연히 이들은 기세를 타서 더 비슷한 짓을 하게 되고, 여기에 말린 마스터는 더 많은 성공을 내주게 된다. 악순환(?)의 탄생이다.




나쁜 놈들... 이라 칭하기엔 좀 뭣한 것 같다. 사실 이들은 딱히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비겁한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더 많은 성공수는 이들이 실패했을 때 페널티를 더 크게 짊어지는 댓가로 받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억울할 것도 없다.


허나 정말로 경지에 이른 놈들은 위에서 예시를 들었다시피 그 실패마저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능숙하게 처리해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왠지 계속 자기만 압박에 말려들면 좀 억울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혹은 괜히 실패 띄우면 상대가 삐질까봐 전전긍긍해한다든가.


근데 사실 이러한 유형은 연출을 먼저 하고 주사위를 나중에 굴리는 그 스릴감을 즐기기도 하기 때문에, 심적 부담은 결국 온전히 마스터가 짊어지게 된다. 사실 배짱꾼들의 진짜 문제점(?)은 이거다. 괜히 애먼 마스터만 더 신경쓰이게 만든다는 것. 상대가 베테랑이 아닌 초보자라면 더더욱.


이 글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 이 글을 읽는 초보 마스터들은 앞으로 이런 유형을 만나면 괜한 배려를 하지 말고 못넘었으면 못넘은대로 자신있게 실패 판정을 던져주도록 하자. 저렇게 던지는 사람들은 리스크는 다 감안하고 있으며, 일부는 오히려 실패를 더 좋아하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