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해인海印
하은이 그것을 발견한 것은, 경복궁 돌담길에서였다.
돌담길은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드디어 조금이나마 시원해진 날씨. 반팔로 다니는 사람보다 가디건을 걸치거나 긴팔을 입은 사람이 더 많아진 돌담길에는 선선한 날씨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걷고 있었다. 개중에는 연인도 있고, 산책 나온 가족도 있다. 하지만 혼자 걷는 사람은 그녀 뿐이었다.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게 산책을 나와 있는 그녀.
민려는 데려다준 항구에서 밀항으로 탈출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 루트를 이용했던 하은도 들키지 않았을 정도니 그녀라면 안전하게 중국쪽으로 탈출했으리라. 그렇게 된지 벌써 이주일은 되었다.
어쨌든, 그녀가 왜 주말에 혼자 산책을 나와있는 지는 자신도 모를일이었다. 지금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괴상한 물체가 왜 자신의 앞에 나와있는지는 더더욱 모를 일이었고.
“딸깍.”
돌담길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루빅스 큐브.
-가지고 싶다.
갑작스럽게 반드시 저 큐브를 가져야한다는 욕망이 습격해온다. 하은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자마자 그것은 혼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양쪽, 각각 9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면이 마치 바퀴처럼 굴러간다. 딸깍 거리는 플라스틱과 돌이 마찰하는 소리. 큐브가 혼자서 굴러가는 기묘한 광경에도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다. 하은이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큐브가 멈춰선다.
“딸깍.”
뒤로 굴러갔다가 다시 앞으로 굴러가는 큐브. 마치 따라오라는 듯한 모습.
하은이 잠시 망설인다. 그녀가 천천히 큐브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것이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한다. 코너에서는 양쪽이 반대편으로 돌아 자연스럽게 방향을 전환하는 모습. 마치 강아지 같은 동작에 하은이 헛웃음을 짓는다.
그것이 하은을 인도한다. 돌담길을 따라가다가 왼쪽, 다시 직진 후 오른쪽. 경복궁 담장에 약간 양식이 어긋난듯한 작은 문이 있다.
이런 문이… 왜 여기 있지?
하은이 속으로 물으면서도 문으로 따라들어간다. 자세히 살펴보자, 양식이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문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되는 문이고, 경복궁과 같이 지어진 문도 아니다. 그녀가
문턱을 넘는다. 그 안 쪽은 역시 다른 양식의 담으로 둘러쳐진 길이었다. 큐브가 딸깍거리며 그녀를 인도한다. 그녀가 또 다른 문을 걸어들어간다. 조금 더 낡고, 더 오래된 양식의 문. 그 안쪽의 담장은 돌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그 안에는 사극에서나 볼법한 고풍스러운 건물이 서있다. 절과 궁궐을 반반씩 연상시키는 그 건물. 큐브가 계단 대신 낮은 주춧돌을 타고 올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악기 소리.
짤랑, 하는 소리. 처음에는 금속성이었던 그 소리가 점점 돌로 만들어진 타악기가 내는 소리로 변해간다. 마침내 귀금속이 부딪히는 낭랑한 소리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하은이 건물 안에 발을 들인다.
녹색의 자수가 잔뜩 수놓아진 비단이 살랑거린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부드럽게 움직이는 비단이 마치 녹색의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 그 안에서 풍겨오는 향이 타는 냄새가 후각을 둔하게 한다. 하은이 큐브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비단 사이로 더욱 화려한 자수가 새겨진 방석 위에 앉아 있는 인물들이 보인다.
마치 사극에나 나올 것 같은 새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붓으로 서예를 연습하는 남자. 그가 쓴 글자가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꿈틀거린다. 그가 손을 놓자, 이제는 붓까지도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며 글자를 그려나간다. 그가 무릎을 꿇은채 천천히 글을 읽는다. 그가 읽는 부분의 글자가 희미해지며 서서히 사라져버린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스스로의 피부 위에 자수를 새기고 있었다. 흰 실이 새어나오는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간다. 자유롭게 날아가는 동양화풍의 새. 그 옆에는 그 광경을 묘사한 한시가 수놓아져있었다. 붉게 물든 실이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선명하게 빛나는 듯 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마찬가지로 ‘수놓아진’ 것이었다. 그녀가 하은을 눈치채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수놓아진 실이 마치 살아있는 사람의 눈, 코, 입처럼 움직인다. 하은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지만 가까히 다가가 이야기를 걸거나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닳고 닳아 매끄러워진 나무바닥을 구르는 큐브. 이제 큐브는 플라스틱이 아니라 닳은 돌과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색도 2가지 색밖에 없다.
하은이 좌우를 살핀다. 인간인지 아닌지 모를 모든 존재들이 큐브가 굴러지나갈 때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을 소유하고 싶다’라는 욕망이 하은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솟아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원래 하던 일에 몰두 하기 시작한다.
하은의 시선이 계속해서 비단 사이를 훝는다. 인간이라기에는 너무 기괴하거나, 너무 오래된 듯한 존재들. 그 중에는 한눈에 봐도 뱀파이어 -그것도 기괴한 기교를 연마하는 부류의- 인 자들도 있었고, 마치 유령처럼 흰 소복을 입은 채 구슬픈 흐느낌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정 중앙으로 다가갈 수록 낭랑한 악기 소리가 커진다. 큐브가 하은은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유도한다.
금속이 부딪히는 청명한 소리.
조선시대의 편종을 연상케하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여인. 종 중 어떤 것은 금속으로, 어떤 것은 옥으로, 어떤 것은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로 유리로 만들어진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에서도 각자의 재료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소리가 아름답게 울려퍼진다. 그녀가 하은을 눈치챈다.
“게 있느냐?”
그녀가 누군가를 부른다. 동시에 대체 어디에 숨어있었던 것인지 작은 난쟁이들이 조용하고 빠른 발걸음으로 집결한다. 그들은 모두 녹빛의 동양풍인 예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손님 오셨다. 안내해드려라.”
“예, 마나님.”
그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나서 하은의 앞에 모여든다. 그들이 마치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듯 차례차례 서로의 몸 위에 올라서서 비탈길을 만든다. 그 기묘한 비탈길을 따라서 큐브가 굴러올라가기 시작한다. 큐브가 지나간 부분의 난쟁이들이 위치를 바꾸어 마치 계단 같은 모양을 만들어낸다. 하은이 그들을 밟고 올라간다. 살과 피가 아닌, 단단한 돌의 느낌. 하은이 한발자국을 올라갈 때마다 그녀가 지나온 부분을 받치고 있었던 난쟁이들이 계단을 타고 올라 위쪽의 계단을 만들고 그 것을 받치기 위한 발판이 된다. 그녀가 2층으로 올라서자 그들이 서로를 타고 내려가더니 순식간에 비단 사이로 사라진다.
2층은 훨씬 더 차분한, 그러면서도 더 신비한 분위기다. 나무 기둥이 아닌 나무 그 자체가 기둥을 대신하고 있고, 화려한 비단 대신 딱딱한 나무 칸막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무가지에 달린 등이 은은한 녹색 빛으로 빛난다. 나무 칸막이도 질서있게 배치된 것이 아니라 마구잡이였다. 곳곳에 나무 책상과 의자, 그리고 글씨가 쓰이다 만 한지가 널려있었다.
촤륵,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칸막이들이 갑자기 제멋대로 움직인다. 질서 있게 움직여 꽤나 큰 사각형이 되어 하은을 둘러싸는 칸막이들.
그리고 그 칸막이들 사이에서 한 소년, 그리고 한 소녀가 나타난다. 소년 쪽은 긴 머리를 정갈하게 땋아 전혀 흔들리지 않게 하고 있었지만 소녀쪽은 그저 묶기만 했을 뿐. 그러나 두 사람 다 살짝 창백한 피부와 그에 대비되어 붉은 입술과 살짝 핏기가 도는 눈을 지니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안쪽에는 현대적으로 개량한 한복, 그 위에는 다리 옆쪽이 갈라진 두루마기 -한복이라기 보단, 마치 서양식의 코트를 연상시키는 듯한- 를 입고 있었다.
큐브가 데굴데굴 굴러 그들 사이를 통과해 나무 칸막이 사이로 사라진다. 이제 보니 그 모습은 큐브라고 하기에도 뭐한, 마치 삼국 시대 시절의 장난감 유물 같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칸막이 사이로 사라지는 큐브에 고정되어 있던 소년소녀의 시선. 그러나 그들이 떨치듯 고개를 다시 돌린다. 두 사람이 정확히 똑같은 보폭과 걸음걸이로 하은 앞으로 다가 온다. 척,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양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인다.
“...?”
아무 말도 없이 다짜고자 그런자세를 하는 이들을 내려다보는 하은. 그녀보다 작을 정도로 어린 소년소녀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여긴-”
옷이 펄럭이는 소리. 소녀의 다리가 반원을 그리며 하은의 머리카락을 스친다. 하은이 반사적으로 그녀의 발차기를 피해내자마자 이번에는 소년이 낮게 정권을 찔러온다. 다시 한번 피한다. 빠르다. 인간 이상의 속도. 이들이 인간 이상의 무엇인가임을 파악한 하은이 재빨리 뒤로 물러선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틈을 주지 않는다. 선풍처럼 휘둘러지는 소녀의 후리기, 그 뒤를 따르는 소년의 장타. 하은이 그의 손목을 살짝 쳐내며 흘려보낸다. 힘 자체는 그렇게 세지 않다. 그것을 파악한 하은이 큰 동작으로 덤블링을 하며 뒤로 뛴다.
“합!”
소년의 수도. 하은이 아슬아슬하게 피한다. 그 다음은 소녀의 날라차기. 빗겨내려고 하지만 어깨쪽을 스쳐지나가며 타격. 양쪽에서 둘러싸인 하은. 몸을 돌리며 날아오는 회축과 또 한번의 정권. 정권은 흘려보내고 회축은 다리를 사용해 커팅한다. 두 사람이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차기와 찌르기로 공격해온다. 완벽한 하모니와 박자.
“읏-”
하은이 신음을 낸다. 무릎차기는 피해냈지만 찌르기가 순식간에 수도가 되어 그녀의 어깻죽지를 강타한다.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하은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내려찍기. 그리고 방어조차 못하게 하려는 듯 정권. 내려찍기는 피했지만 정권이 복부를 친다.
“-!”
입술을 깨물며 하은이 뒤로 밀려난다. 그녀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다시 서로의 옆에 선다. 소년은 양 손을 등뒤로해 뒷짐을 지고 한쪽 다리를 굽힌채 다른쪽 다리로만 선다. 소녀는 양쪽 다리를 벌려 단단히 땅에 딛은 채 그녀를 향해 주먹을 날릴 듯한 자세를 한다.
“합!”
또 한번의 기합. 소년이 먼저 들어온다. 손은 전혀 쓰지 않은채 오직 다리만을 이용해 바람처럼 찔러들어오는 발차기. 그 바깥쪽 궤도에서 빠른 속도로 내질러지는 소녀의 주먹.
이건 무술이 아닌데…?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도 하은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이건 무술이 아니다. 분명 두 사람의 화합은 완벽하고, 웬만한 수준으로는 몇합도 버텨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움직임에서는 적을 제압하기 위한 의도나 살기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 우선되는 느낌이 든다.
거의 예술에 가까운 정도의 움직임. 딱딱 맞는 박자. 아름다운 곡선.
-그렇구나.
하은이 한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그 틈을 타서 다시 들어오는 두 사람. 이번에는 소년이 다시 손기술, 소녀가 다시 발차기다.
완벽한 박자. 기술보다는 춤에 가까운 움직임.
이들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만의 춤을 추고 있을 뿐.
타격음과 함께 하은이 소년의 주먹을 간신히 막아내고 소녀의 발차기를 흘려보낸다. 이들이 다시 태세를 정비하기 전, 공격의 목적이 아니라 순전한 교란의 목적으로 한박자 앞서 뛰쳐드는 하은. 자세나 위치로 보아 이들에게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완벽한 박자를 방해당한 그들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하은의 발차기를 가볍게 피하는 그들. 그러나 완벽한 그들의 안무가 깨진 탓일까, 두 사람의 반격은 피하기 훨씬 쉽다.
이번엔 시간차로 공격해들어오려하지만 오히려 하은이 더욱 빠르게 그들 사이로 뛰어들며 그들이 공간을 확보하고 박자를 따르는 것을 방해한다. 또 다시 방해받은 그들의 움직임이 순간이지만 주춤한다. 하은의 돌려차기가 소녀쪽을 내려치고 그 힘을 이용한 손날이 소년의 목을 노린다. 그녀 자신이 거대한 곡선이 되어 두 사람 사이를 가른다.
이제 춤은 그녀의 것이었다.
동시에 그녀가 자신의 몸을 이끄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그녀의 리듬을, 그녀의 몸이 그려내는 직선과 곡선을, 그녀의 몸이 표현하는 박자는 그녀가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녀가 그려내는 것을 따라가며 완벽하게 만드는 무엇인가.
그녀의 몸 주위에 희미한 실루엣이 나타난다.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아름답게 춤추는 여인.
하은이 그녀의 인도를 따른다. 마치 그녀가 교관의 인도를 따르는 것처럼.
“하압!”
소녀와 소년의 기합. 그러나 이미 무너진 그들의 춤은 하은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하은이 뒤로 덤블링하며 동시에 돌려차기로 두 사람의 몸을 차낸다. 나가 떨어진 그들이 명백하게 동요하는 표정으로 일어서서 달려든다. 소녀가 소년의 어깨를 밟고 뛰어 올라가 큰 동작으로 공중에서부터 내려 찍어오고, 소년은 연달아 정권을 찔러오려는 듯 달려든다.
이미 정박이 깨져버린 그들의 춤. 하은이 자신의 페이스를 늦춘다. 정박은 엇박이 되고, 우울한 단조는 경쾌한 장조가 된다. 내려찍기가 형편없이 빗나가고 갈곳을 잃은 주먹이 하늘거린다. 하은의 낭창한 돌려차기가 소녀의 복부에, 그것을 발판으로 삼은 주먹이 소년의 가슴을 친다.
“으악!”
그들이 처음으로 비명을 지른다. 겁에 질린 어린이의 그것에 가까운 비명. 하은이 부드럽게 착지하는 동안 그들은 공중을 날아 나가떨어진다. 가볍게 다시 자세를 취하는 하은과, 그녀에게 겹친 아름다운 무희의 실루엣. 그 실루엣이 단정한 자세로 돌아온다. 소년과 소녀가 약간 씩씩대는 표정으로 일어선다.
“그만!”
물이라도 잘라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깐깐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나무 칸막이들이 옆으로 밀려나고 그 사이로 새하얀 수염이 성성한채 흰 두루마기를 걸친 노인이 걸어온다. 수염뿐만 아니라 눈썹과 머리카락도 새하얗다.
“사부님!”
두 사람이 황급히 그의 앞에 다가선다. 예를 갖춘 그들. 그러나 표정은 딴판이다.
“사부님… 져.. 졌습니다…”
“이런게 어딨어요! 전-”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들고 있는 나무 지팡이가 두 사람의 머리를 연달아 때린다. 거의 악기에 가까운 수준.
“아, 아야야!”
두 사람의 비명. 그러나 노인이 혀를 차며 다시 한번 지팡이를 휘두른다.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둘의 정수리를 치는 지팡이.
“예끼, 이놈들아! 졌으면 진거지, 뭐 그래 말이 많으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층 전체를 울리는 듯 하다. 두 사람이 어찌할 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다.
“뭐해, 이것들아! 차 내와야지!”
“네..넵!”
황급히 달려가는 두 사람.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와 하은에게 고개를 숙인다.
“처음뵙겠소이다. 내 제자들이 큰 실례를 범했구려. 워낙 혈기 왕성한 아이들이라 아무리 혼내도 저렇게 날뛰더이다.”
“별로 혼내는 것 같지 않으시던데요.”
노인이 헛헛헛, 하는 웃음 소리를 내며 웃는다. 그가 만면에 미소를 띈 채 대답한다.
“그렇소. 사실은 내가 목숨보다 아끼는 아이들이라 그렇다오. 소개가 늦었구랴. 벽우라 하오. 사람들은 우 노인이나 그냥 대감님이라고 부르지.”
“노하은입니다.”
“반갑소이다. 보아하니 옥룡이 그대를 인도한듯 하구려.”
옥룡이 무엇인지 묻기도 전에 나무 칸막이들 사이로 사라졌던 큐브가 굴러온다. 그것이 우 노인의 발치에 멈춘다. 큐브의 조각 위에서 더 작은 조각이 솟아나고, 그 위에서 다른 조각들이 솟아난다. 완벽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옥색의 조각들이 생겨나며 하나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한다. 뒤쪽으로 솟아난 것은 꼬리가 되고, 밑으로 뻗어가며 큐브를 들어올렸던 부분들은 다리가 된다. 앞으로 솟아나는 머리가 갈라지며 입을 벌린 용의 형상이 된다. 어느새 그것은 말 그대로 옥으로 된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록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는 동양계 용의 모습이지만 그 섬세함은 이루말할데가 없었다.
하은은 문득 저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우 노인이 용을 집어든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내가 목숨만큼 아끼는 것이지.”
그의 손위에서 옥룡이 방금 전과 반대로 안쪽으로 수축하기 시작한다. 꼬리의 첨단을 이루고 있던 조각이 먼저 더 큰 조각안으로 사라지고, 똑같은 방식으로 팔, 다리, 머리가 사라진다. 이내 옥룡은 허공의 점이 되어 사라져버린다.
그가 불만스럽게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친다.
“이것들아, 뭐해!”
“네, 사부님!”
다다다다, 하는 발소리와 함께 아까의 소년과 소녀가 달려온다. 그들의 손에 들린 찻주전자와 찻잔. 우 노인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칸막이들 사이로 단촐한 방석이 날아와 내려앉고 나무바닥에서 키작은 분재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옆으로 넓게 퍼진 그 분재의 가지들이 서로 뭉치기 시작하며 평평해진다. 어느새 그곳에는 분재의 줄기 위에 얹힌 작은 찻상이 있었다. 그 위에 재빨리 찻잔과 주전자를 놓는 두 사람.
“이쪽에 있는 아이들은 예령, 예랑이라 하오. 남자아이 쪽이 예랑, 여자아이 쪽이 예령이라오. 이놈들아, 인사드려라!”
“아,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예끼, 이놈들아!”
버럭 소리지르는 우 노인.
“선생님이 뭐냐, 선생님이!”
동시에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같이 지팡이가 이마를 친다.
“그, 그럼 뭐라고 불러드립니까 사부님! 선생님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협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아가씨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좀 이상하-”
지팡이의 청아한 타격음이 다시 울려퍼진다.
“이놈들아! 아예 안붙이면 되지 않느냐! 썩 물러가거라!”
“ㄴ..네, 사부님!”
그들이 잔뜩 겁먹은채로 뒷걸음치며 칸막이들 사이로 사라진다. 칸막이들 역시 겁먹은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여 두겹의 벽을 만들어 두 사람을 둘러싼다.
“차는 좋아하시오?”
“즐길만한 여유가 없어서요.”
“허허. 그것 참 안됐구려. 자, 앉으시오.”
그가 별 예의를 차리지 않고 앉는다.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소이다. 어차피 요즘 누가 다도를 배우겠냐만은.”
하은이 어떻게 앉아야할까, 하다가 왼쪽으로 다리를 모아 옆으로 앉는다.
“생각해보니 나도 다 잊어버렸구려. 예전에는 차를 따르기전에 찻잔을 먼저 데운다 뭐다 했던것 같은데.”
그가 찻주전자를 들어 하은의 잔에 차를 따라준다. 한때는 새것이었을 찻잔이지만 이제는 고풍스러운 옛것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른다.
“드시지요.”
하은이 약간 망설이다가 찻잔을 들어올린다. 향이 그녀의 마음을 감싸온다. 향만 맡아도 평온해지는 듯한 느낌. 한모금을 마시는 그녀.
“그렇소이다. 단순히 아무런 자극이 없다고 해서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오. 평온함은 부재의 상태가 아니라 추구해야할 하나의 방향이 아니겠소?”
그가 말하며 찻잔을 내려놓는다.
“어쨌든, 이곳의 소개를 해야겠구려. 이곳은 녹궁Green Court이라 하오. 나란한 길Parallel Path의 한곳이이요. 숨어지내야하는 자들Supernatural이 동쪽에서 들어오기 위해 으레 거치는 곳이지. 요즘 시대에는 이곳을 지나지 않는다면 낮에는 산에 굴을 파고 지내야 할 지경이라오. 어찌나 도시가 넓어지는지.”
그가 고개를 들어 하은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 뿐만 아니라 신神들의 질서를 유지하고, 나름의 사회를 지켜나가는 것도 예로부터 우리의 일이었다오. 물론 음지를 벗어난 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지만. 소저도 알고계실것이오. 우리가 숨어지내는 자들 사이의 질서를 유지한다면, 숨어지내는 자와 보통 사람들 사이의 질서를 유지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체는 뻔하다.
“그래서 여기로 부른 것이오. 땅의 길을 걷는 자들Technocratic Union이 요즘 부쩍 강경해졌더군. 심지어 우리가 예의 주시하던 서방의 거머리들이 통채로 사라지는 일까지 있었소. 그래서 그들의 동향을 알만한 자들을 불러모으고 있지.”
조용한 공간에서 그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하은은 그의 말을 경청하며 자신이 어떤 곳에 와있는지 실감한다.
“그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 홀로 살 수는 없지 않소이까? 가끔은 서로 도와야하는게 우리 같은 자들의 숙명이라오.”
이곳은 괴물들의, 괴물들에 의한, 그리고 괴물들을 위한 공간인 것이다. 그 자리에 자신이 와있다는 것은 하은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무리라는 의미.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차 한모금을 더 마신다.
“좋아요. 먼저, 절 어떻게 찾은거죠?”
“내가 찾은게 아니라오. 옥룡이 찾은거지.”
우 노인이 옥룡을 들어 찻상 위에 살짝 내려놓는다.
“이 물건은 가야할 길을 찾아주고, 길을 잃은 자들을 인도하는 물건이라오. 그리고 새 주인을 찾고있는 물건이기도 하지. 소저가 이곳에 온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오, 이 옥룡의 뜻이지.”
그가 씩 웃는다. 하은이 문득 그의 찻잔을 내려다본다. 차는 전혀 줄어있지 않았다.
“어쩌면 그대가 새 주인이 될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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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 마님은 누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