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깊은 곳에서 끔찍한 존재가 꿈을 꾸며 기다리고, 인류의 위태로운 도시들 위로는 부패가 퍼지고 있다..."

(Loathsomeness waits and dreams in the deep, and decay spreads over the tottering cities of men...)

- H.P.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오늘은 오랫만에 "러브크래프트적인 공포"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진짜 뻘글"을 써 보겠음. 이 요소들은

모든 작품에 동시에 나타나지는 않을 수 있고, 반대로 여러 요소들이 한 작품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음.

뭔가 러브크래프트 삘나는 시나리오를 써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봐도 괜찮을텐데 나머지는 이걸 굳이

읽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인류(사실 서구 앵글로색슨 계의) 문명에 대한 위협

러브크래프트는 좀 많이 앵글로매니악 / 인종차별주의자여서 다른 인종들의 유입이 기존 미국 사회에 악영향을

준다고 봤고 그로 인해 문명이 붕괴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음. 이 양반 작품에서 흑인종이나

혼혈인이 별로 안 좋게 묘사되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는 거임. 근데 이게 또 단순히 외부인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이들과 결탁하는 백인들도 나오고 혹은 백인들이 외부인과는 관계 없는 이유로 고립된 생활을 하며 금기를 범해

퇴보한 괴물이 되어버리기도 함. 러브크래프트가 유색인종과 혼혈인들을 죽어라 깠지만 숲 속의 던위치 마을이

그 모양 그 꼴인 게 전부 걔들 때문이라고 하진 않은 것처럼 말이지.


하여간 러브크래프트는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붕괴하고 퇴보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고,

요새 애들은 이런 부분을 보고 그 양반이 주장하던 '미지에 대한 공포'나 러브크래프트적 공포라는 개념 전체를

이슬람포비아 같은 소재와 엮으며 혐오 운운하기도 하는 거 같은데 이런 부분만 갖고서 물고 늘어지는 게 아니라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선 맞는 말이니까) 그렇게까지 확대 해석하는 건 너무 나간 게 아닌가 싶긴 함. 그런 거

전혀 언급되지 않는 작품도 있으니까 말이지.


과학적인 / 논리적인 요소(혹은 그렇게 보이는 것)

러브크래프트적 공포의 주 요소 중 하나는 뭔가 "과학적으로 보이려고" 한다는 거임. 고딕 호러물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전통적 요소가 미국에는 별로 없으니까 그걸 다른 대체제로 메우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과학적인 개념 같은

요소를 끌어다 썼던 거지. 대표적인 예로 크로포드 틸링허스트나 허버트 웨스트, 혹은 무뇨스 박사 같이 현 시점

기술로도 불가능한 일을 하는 미친 과학자들을 들 수 있을 듯. 말이 안 된다고? 뭐 상관 없다. 20세기 초의 미국은

우생학이 인기있어서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우수한 앵글로색슨의 피' 드립을 쳤었고 나중엔 독일계 미국인들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친나치 집회하던 어메이징한 동네였었거든. 이런 정신나간 짓거리 중에는 도길의 콧수염

화가가 미친 짓을 저지른 뒤에야 중단된 거도 적지 않음.


그러니까 결국 '시나리오 배경 시대 기준'에서만 과학적으로 보이면 된다는 거야. 또한 진짜로 과학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것이면 되니까 유사 과학이나 소수 가설 같은 이상한 걸 소재로 쓰는 데도 별 지장은 없어.

이 전통은 후대 작품들에도 이어져서 신판 델타 그린은 홀로그래피 이론에 기반한 시나리오를 내고 뭐 그랬었음.


직접적인 위협

네 앞에서 네 목숨을 위협하는 그런 거임. 예를 들어서 '크툴루의 부름'에서 화자는 크툴루가 다시 깨어날 거라는

사실 못지 않게 사교도들이 자기를 죽일 것을 두려워하고, '광기의 산맥에서'를 읽은 대부분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다이어 교수와 댄포스 쪽으로 쇼고스가 달려드는 장면일 거야. 다만 코스믹 호러 어쩌고 할 때 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식으로 나오는 직접적인 위협은 가장 큰 공포의 근원이 되지만, 이게 굳이 '코스믹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임. 이 둘이 분리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혹은 코스믹의 의미를 착각하고 단순히 크고 강한

신화생물을 내서 아래 짤이 떠오를 인카운터를 만들어야 연출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묘할 수 있는 상황이

나오고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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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이지.


그러면 서로 피곤해질 뿐이고, 이러다 탐사자 몇 명이 좀 '일찍' 죽거나 아예 전멸해버리면 이걸 어떻게 수습할 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거임. 물론 '우주에서 온 색채'의 전개처럼 코스믹한 뭔가를 내놓았다고 해서 굳이 그걸로

다 죽이겠다는 전개로 가야할 필요도 없음(사실상의 탐사자 포지션인 아미는 딱히 구체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리면 될 듯). 따라서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위협의 강도에 대해서는 조절할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좀 있다는 거야. 물론 클라이맥스까지 가고 나면 솔직히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됨. 영화 죠스에서도 후반부 되니까

그때까지 잘 버티던 주인공 일행 중 하나가 죽잖아? 원작에서는 둘이던가?


진짜 코스믹한 것

그러면 대체 뭘 가지고 '코스믹'하다고 해야 할까? 아마 너네가 절대로 플레이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캠페인인

"아자토스의 자손(Spawn of Azathoth)"을 갖고 설명해 보겠음. 이 캠페인은 대략 아주 긴 주기로 네메시스 혜성이

태양 근처를 지나가는데, 그 때마다 그 영향으로 지구의 생태계가 박살이 난다는 "네메시스 가설"에 근거하고 있음.

물론 현실에서는 예전에 근거 없는 설로 정리됐지만, 어쨌든 이 가설은 위에서 설명한 "뭔가 과학적인 것"에 해당됨.

그래서 우리 탐사자들은 이 미친 혜성이 언젠가(한 수백 년 뒤) 태양 근처에 나타나서 인류를 갈아버리게 될 6번째

대멸종을 유발한다는 것에 대해서 알게 되는데.... 이딴 상대에게 1920년대 탐사자들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물론 인류가 대기권 돌파도 아직 못 해 본 시대에 그럴 방법 따위는 없겠지?


그러니까 쇼고스 몇 마리 굴러나오는 거 따위가 아니라 이렇게 이해하기 어렵고 혹은 이해했을 지라도 그것에 대한

대응이 불가능한 무엇인가와의 대면을 통해서 인류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으로 인한 좌절과

무력감을 직접적으로 직면하는 데서 코스미시즘이 완성되는 것임. '광기의 산맥에서'도 코스미시즘이 클라이맥스에

달하는 순간은 쇼고스를 대면할 때가 아니라 올드 원들을 '그들은 다른 시대에서 다른 질서를 따라 살았던 인류였다.

(They were the men of another age and another order of being.)'라고 인식하는 부분이야. 주인공이 자기네

인간보다 훨씬 더 우월했던 그들의 몰락과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쇼고스들에게 죽어나간 모습을 보고 인간도 언젠가

이들과 똑같이 몰락해 사라질 운명임을 깨닫고 자기 동료들을 죽였음에도 그들을 동정하게 되는 거지. 근데 이런 거를

직접 다루기가 안 쉽겠지? CoC에서도 그러다보니까 이렇게 진짜 코스믹하게 다룰 소재를 깊게 다루는 시나리오는

따져보면 별로 없어.


그럼 여기서 누군가는 "그럼 증기선에 배빵 맞은 크툴루는 이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 거 아니냐"고 질문할 게 뻔하니

미리 답하자면 그 부분에서 주목해야 할 건 증기선 배빵이 성공한 뒤의 내용이야. 비록 크툴루의 육체는 일시적으로

손상되었지만 그 손상은 크툴루에게는 무의미한 것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묘사가 나오거든. 그 덕분에 20세기

중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 이게 대개 "크툴루는 핵 따위로 안 죽어"로 설명 / 묘사됨. 이렇게 '현대 무기가 먹히지

않고 사람들을 미치게 하며 돌아다니는 거대 괴수'로 묘사된다면 증기선에 배빵당한 문어보다는 좀 더 코스믹하게

보일 수 있겠지?


3줄 요약

'러브크래프트적인 공포'는 몇 가지 요소들이 섞여 구성됨.

그러다보니 사실 이거는 코스믹 호러와 완전 동의어가 아님.

그러므로 굳이 코스믹해 보이는 요소에 집착할 필요는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