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뻘글은 CoC의 '전통적인' 시나리오에서 잘 나오는 문명 - 인간 - 초자연체 구도에 대한 설명.

이것도 저번처럼 별로 재미는 없을 거 같은데, CoC 시나리오를 좀 전통적으로 짜고 싶으면 봐도 될 듯.


문명 - 인간 - 초자연체 구도

CoC 시나리오하면 와! 코즈믹 호러! 올드 원! 그러는데 사실 대부분 CoC 시나리오는 대개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끝남. 등장하는 인간이 피해자냐 가해자냐 혹은 둘 다

인간이냐의 차이만 있지, 순수하게 탐사자와 신화생물만 갖고 스토리라인이 정리되는 시나리오는 적어.

예를 들어서 남극 탐험물인 '광기의 산맥 너머'같은 캠페인도 초반부의 전개는 탐사자들의 남극 원정을

방해하는(물론 대부분 크툴루 신화적인 이유로) 사보타주에 맞서며 원정을 강행하는 게 중심이고 그럼.


그런데 인간은 어떤 존재냐? 사회적 존재지? 그래서 CoC 시나리오의 중심이 되는 인간도 어느 정도는

멀쩡한 인간들, 그러니까 문명 사회에 발을 걸치고 있게 됨. 그리고는 이 인간이 자신의 포지션에 따라

문명 사회 외부에 있는 진정한 위협, 썸띵 러브크래프티안한 뭔가와 협력하거나 반대로 희생을 당하며

진정한 위협이 문명 사회의 틈을 파고드는 / 혹은 이미 파고들어와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게 일반적이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구도를 '문명 - 인간 - 초자연체' 구도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봄. 그러면 이 구도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나 '우주에서 온 색채(Colour Out of Space)' 라는 고전 작품 하나로 설명해 보자.

우주에서 온 색채의 줄거리를 쉽게 요약하자면 말 그대로 우주에서 온 색채가 자기가 떨어진 곳에 살던

한 농부와 그 가족을 파멸시키고, 진실을 알아낸 주인공을 위협해 보다가 우주로 뿅 하고 사라져버렸다...

뭐 그런 전개임. 그러니까 여기에 위에서 설명했던 문명 - 인간 - 초자연체 구도를 적용하면 '인간'은

색채로 인해 파멸한 농부가 됨. 주인공은 농부의 '친구'라는 인간 관계 덕분에 초자연체(색채)에 의해서

서서히 침식되고 망가져가는 농부의 삶에 개입하게 됐고, 문명 사회와 초자연적인 공포 사이에 있었던

농부 가족이 다 죽은 뒤에는 거기에 가장 가까웠던 자신이 직접 초자연적인 공포과 대면하게 된 거임.

그리고 초자연적인 위협이 사라져서 자연스럽게 시나리오가 끝나는 거지. 이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알겠지? 그러면 이제 어떻게 저 구도를 만드는가 보자.


문명의 가장자리에 서는 누군가

방법은 간단함. 누군가를 어떤 초자연체와 연관된 상태에 두고는 그 비밀을 남들로부터 감출만한 상태,

그러니까 '문명의 가장자리'라고 봐도 될 상태로 만드는 거임. 막 고립을 추구하면서 다른 인간들로부터

동떨어진 늪지에서 혼자 산다거나, 혹은 남몰래 집에서 이상한 과학 이론을 연구해서 실험을 한다거나,

아니면 이미 미쳐서 정신병원에 가 있다거나 그런 상태로 말이지. 물론 그러다가 탐사자들에 의해서 /

혹은 자신의 행동의 결과로 그런 상태인 것이 드러나면서 자신과 연결된 '초자연적인 무엇인가'에 대한

단서를 같이 드러내게 되고, 탐사자들이 거기에 대응하는 것이 시나리오의 기본 틀이 되는 것임. 그러면

그런 계열에 속하는 여러 작품의 등장인물을 살펴 보자.


픽맨의 모델(Pickman's Model)에 나온 리처드 업튼 픽맨은 애들에게 보여주면 문제가 될 만한 그림을

그리는 걸 빼면 나름 괜찮은 화가임. 냉기(Cool Air)에 나온 무뇨스 박사는 발작을 일으킨 화자를 신속히

치료해 줄 정도로 뛰어난 의술을 갖고서 은둔 중인 의사고, 레드 훅의 공포(Horror of The Red Hook)에

나온 로버트 쉬담은 세계 각지의 풍습 등에 관심을 가지는 노신사임. 근데 사실 이들은 모두 정상이 아님.

픽맨은 구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걔들을 모델삼아 그림을 그리다가 나중에는 아예 인간을 때려치고

구울이 되고, 무뇨스 박사는 기괴과학을 바탕으로 억지로 살아 움직이는 사후 십수 년 된 시체고, 쉬담은

외국인 사교도들을 지원하던 사교도임.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은 자신들의 비밀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한동안은 잘 감추었다는 거야. 그러다가 구울 사진이 유출되고 / 육체가 한계에 달한 상태에서 냉동기에

문제가 생기고 / 수상한 외국인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얼마 없는 재산을 탕진하는 게 친척들의 눈에 띄는

그런 이유로 이들이 사실 문명의 가장자리에 있는, 정상이 아닌 상태의 인물임이 드러나면서 본격적으로

CoC 시나리오로 다룰 이야기가 - 이들의 비밀을 밝혀낸 뒤에 이들 또는 그 뒤에 있는 초자연적인 공포가

일으키는 문명에 대한 진정한 위협에 맞서거나 다른 골칫거리를 처리하거나 혹은 도망을 가는 이야기가 -

진행되었던 거지.


초자연적인(?) 공포

그러면 이제 문명 - 인간 - 초자연체 구도에서 초자연체를 다룰 시간이지? 간단히 말해서 룰북이나 서플,

시나리오에 나오는 적당한 신화생물을 꺼내 채우면 되는데.... 이게 요새는 사실 좀 많이 묘하다. CoC에서

요새 잘 나오는 문제점 중 하나가 고인물들이 괴상한 상황을 보고는 지금까지의 플레이 경험을 바탕으로

"아 이건 OO의 짓이겠군요 ㅎㅎ"하고는 바로 그 OO라는 신화생물에 대한 대응책들을 준비해 온다는 거임.

"아, 딥 원! 훌륭한 사격 과녁이지!" 하고 난입해서는 기관총으로 쏜다거나 "형체없는 자손...! 전기, 전기가

필요하다..." 뭐 이렇게 말이야. 간단히 말해서 데바데 생존마놈들이 살인마 데리고 노는 거 생각하면 된다.

쉽게 말해서 러브크래프트가 말했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많은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는 굉장히

퇴색되어 버렸고, 그만큼 다양한 대응수단이 탐사자들 손에 쥐어질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거임. 그 덕분에

초자연체가 등장할 때의 효과가 생각보다 훨씬 줄어들 수 있게 됐음. "오늘은 '호수 실종 사건' 시나리오를

할 게요"하면 '호수.... 실종.... 룰북.... 글라아키!"하고 대략적인 적이 딱 떠오르고 뭐 그렇단 이야기야.


그래서 ToC 시나리오 중 하나는 '원작에서의 이 신화생물의 특성은 너무 뻔해서 바꿨음 ㅋ'라며 손을 봤고

'이름없는 공포들(Nameless Horror)'은 아예 듣도 보도 못했을 신화생물을 만들어냈고 며칠 전에 펀딩을

시작한 스티기언 폭스의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은 "유감! 사실 신화생물의 짓이 아니었습니다!"

드립을 칠 수 있는 시나리오 모음집을 표방하고 그러면서 초자연적인 공포의 근원들을 감추고 바꾸는 수를

써 가며 이런 고인물들을 통수치고 초자연체의 등장 효과를 유지하려고 노력함.


또 다른 방법으로는 위에서 말한 '문명 - 인간 - 초자연체'의 구도를 활용해서 그 가운데 끼어 있는 '인간'을

초자연체 편으로 돌리고 초자연체가 직접 나서는 대신에 이 협력자(들)을 활용해서 탐사자들을 방해해 보는

시나리오도 있음. 이 분야에선 음모론 끝판왕인 구판 델타 그린의 미-고와 Majestic-12 같은 친구들을 예로

들 수 있겠지. 솔직히 우워어거리며 달려드는 물고기 닮은 놈들보다 글록 18으로 너를 벌집핏자로 만들려는

(맛은 책임지지 않고) 검은 양복 입은 요원이나 눈이 뒤집혀서 너를 잡아다가 내장을 꺼내서 '새 주인님'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국 끓여 먹으려는 너네 미친 가족들이 훨씬 더 무서울 수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이렇게 내는 애들의 경우 탐사자들 손에 완전히 죽게 하는 거도 좋긴 한데 때로는 사실 안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여운을 남기는 것도 괜찮음. 이게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장기 플레이에

걔들을 다시 써먹을 기회도 얻고 그러는 거거든.


3줄 요약

CoC의 "전통적인" 시나리오는 문명 - 인간 - 초자연체 구도로 대개 해석이 됨.

대개 정상적인 삶과 조금 다른 삶을 사는 캐릭터를 채워넣어서 구도를 짜게 됨.

초자연체(신화생물)도 요새는 꽤 많이 뽀록나서 나름대로 대안이 연구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