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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 데이트, 시작.




“..세상에.”


유니언의 세이프하우스에 들어선 수현이 기겁한다. 준영이 들어오며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을 껌뻑인다. 하은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그들이지만, 이런 것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창고에 가까웠던 저번의 세이프하우스와는 달랐다. 마치 냉전 시대의 군 작전 통제실을 연상시키는 지하실. 해석 불가능한 텍스트가 흐르는 모니터, 기계음을 내는 터미널들, 일렬로 늘어서서 계속해서 돌아가는 구형의 데이터 테이프 머신. 먼지가 잔뜩 쌓인 캐비넷, 바닥에 널부러진 철제 의자, 용도를 알 수 없는 구속의자.


그러나 낡은 물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 만들어진 물건들도 있다. 지도와 그 위에 그려진 간결한 다이어그램들. 도로를 따라 그려진 화살표, 그 위에 그려진 시간표, 지도 옆에 그려진 연락용의 핸드폰 번호, 해킹을 위한 백도어 및 각종 프로토콜에 관한 정보. 편집증적으로 그려졌으면서도 그것을 보는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을법한 전술지도. 


사람이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이용하는 듯한 지도. 


그 앞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핸드폰이 울린다. 드는 것조차 거북한 매우 구식의 디자인. 수현이 전화를 받는다.


“...배수현입니다.”


“노하은이에요.”


“하은씨. 이건 뭐죠?”


하은에게서 연락을 받았을 때는 별일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그였다. 대체 유니언측의 내통자와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두 사람이 이… 작전을 짠걸까?

 

“지시사항은 다 적어놨습니다. 따라하시면 됩니다. 홍콩쪽의 시스템이니 그렇게는 어렵지 않을 겁니다. 백도어라든가 하는 사항은 그쪽 시스템에 전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이걸 어떻게?”


“모르시는게 좋을 것 같군요.”


“유니언측 사람과는 접선하셨습니까?”


“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저와 같이 있다고 해두죠.”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 그러나 수현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답을 듣는다고 해도 별 의미가 있을 것 같지가 않고, 그들의 이해를 벗어난 무엇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에 그칠뿐이라는 생각에서다.


“알겠습니다. 내일은 휴업해야겠군요.”


“만약 제가 실패하면, 도피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전화가 끊어진다.


“도피하라니, 말 참 편하게 하네.”


수현이 전화를 내려놓으며 말한다.


“형, 어떻게해요?”


“어떻게 하긴. 하자는 대로 해야지.”


“으. 역시 테키 닉값…”


“닉값 같은 소리하지 말고 준비나 해.”


두 사람이 먼지를 털어내며 구형 데이터포트에 케이블들을 꽂기 시작한다. 개중에는 정말 구식 중에 구식이라 호환이 전혀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이런 시설은 어디서 찾아낸거지, 라는 생각을 머리속에서 지워버리려는 듯 두 사람이 작업에 몰두한다.




“정우재 감독관.”


“예.”


깜깜한 방. 상급자의 상반신만이 간신히 나타난 희끄무레한 스크린. 정례화된 보고. 정우재는 이런 스타일의 보고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전투 아말감의 지휘관이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의 성과가 아주 훌륭하군.”


“감사합니다.”


“두 가지 전달 사항이 있네. 첫번째는 자네의 부관에 관한 것이네.”


스크린에 복잡한 의료 및 정비기록이 뜬다. 


“통계학적 불가항력으로 인한 그녀의 정신적 불안정이 점점 심해지고 있네. 표면적인 모습이나 정신적인 기능에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블랙 박스에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


“...”


정우재는 대답하지 않는다. 알고는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그녀는 상시 환상통에 시달리게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두뇌만을 분리하여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보관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해방된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두 번째 역시 자네 부관에 관한 것이네만, 복합형 의체에 대한 자네의 요청건에 관해서네. 상부에서는 자네의 요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어. 지금보다 조금만 더 성과를 올리면 될 것 같군.”


“알겠습니다.”


정우재가 침착하게 대답한다. 


역시.


서둘러야할 필요가 있다.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대하겠네.”


픽, 하는 소리와 함께 스크린이 꺼진다. 




“자, 봐요. 이쁘다.”


확실히 예쁘다. 민려의 표정에 만족감이 깃든다. 짙은 와인색 스커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상의. 그 위에는 다시 똑같은 와인색의 자켓. 


두 사람은 쇼핑중이었다. 도와줄 일이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하은은 홍콩에 며칠 머무르기로 한 참이었다. 마찬가지로 이유는 모르지만, 민려의 근처에 있겠다고 하는 그녀. 민려는 그녀를 재즈 클럽에 앉혀두는 대신 이 쪽을 선택했다.


“키가 크면 롱스커트로 했을텐데. 그래도 예쁘니까 됐네요!”


민려가 피팅룸에서 잠깐 나온 하은 주위를 빙빙 돌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은은 민려의 이런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다. 지금까지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피를 쫓는 괴물과 동족을 사냥하는 사냥꾼, 그리고 도망치는 동물 사이의 어딘가였다.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런 걸 입을만한 일이 없을 것 같은데요.”


“진짜요? 뭐하면서 놀아요?”


“안 놀죠.”


분명히 나이로 따지자면 민려가 훨씬 많을텐데,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민려가 훨씬 어린 쪽 같다. 하은이 거울 속의 자신을 본다. 영 어색하다. 피팅모델과는 거리가 멀지만 핏은 괜찮다. 민려가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세상에… 아가씨 진짜 재미없게 사는구나. 그… 회사에 있을 때는 뭐했어요? 연말에 파티 같은거라도 안해요?”


하은이 픽, 하고 웃는다. 하긴, 군 정보국도 연말에는 친목 도모를 위한 작은 파티를 열거나 하지 않는가? 민려는 그런걸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거랑은 좀 거리가 먼 회사여서요.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만 전담하는 부서가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 다니는 회사는 어차피 은행이고.”


생각해보니 할로윈에 만난 민려는 할로윈을 만끽하는 듯한 복장이었다. 자연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뱀파이어의 삶에도, 그냥 존재하기만 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확연히 구분된다. 유한하지 않은 삶에도 카르페 디엠이라는 격언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요?”


민려가 살짝 웃는다. 


“나중에 그럼 제가 여기저기 데리고 갈게요. 불만 없죠?”


하은이 끄덕인다. 솔직히 말하면, 진지한 대답은 아니다. 그럴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고. 그러나 민려에게는 그 정도로 충분한 모양이었다.




“유키.”


“감독관?”


감시 임무 중이던 유키가 즐겁게 묻는다. 의체임에도 불구하고 천진난만한 그녀의 표정은 진심이 가득 느껴진다. 의존증세가 결합된 것이기는 하지만.


“뭐해?”


“저번에 말하던 AI! 거의 다 만들었어. 아마 내일쯤이면 학습을 마치고 감독관 핸드폰에 인스톨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아. 나랑 똑같다구?”


진심이 훤히 드러나는 얼굴로 싱글벙글 웃는 그녀.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AI의 인터페이스, 다시 말해 인간형의 홀로그램을 허공에 만들어낸다. 유키보다 약간 작은 크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체보다는 생몸의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다.


“나 그대로 자랐으면 이렇게 생겼겠지?”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홀로그램이 눈을 뜬다.


“안녕, 감독관!”


똑같이 쾌활한 말투다. 정우재가 고개를 흔든다.


“80% 닮았다고 그랬나?”


“90이야, 90!”


신나게 말하는 그녀. 그 뒤로 홀로그램이 한손을 들어올리고 발표하듯 말한다.


“90이라구, 감독관!’


그 모습을 보며 정우재가 이마에 손을 짚을 뻔 한다. 유키가 키득키득 웃으며 홀로그램을 종료시킨다. 그런 그녀에게 무엇인가 내미는 정우재.


“홍콩 출장이다.”


“홍콩?”


정우재가 주는 사진을 받아드는 유키. 그 사진에는 예전에 놓친 거머리가 선명히 찍혀있었다. 유키가 혀를 내밀며 쾌활하게 말한다.


“홍콩으로 도망갔구나. 누가 제공한거야?”


유키가 사진을 들고서는 빙글빙글 돌린다. 그녀의 손가락 위에서 완벽한 평형을 유지한채 돌아가는 사진.


“그 동네 아말감 첩보다.”


“진짜? 별일이네?”


정우재가 끄덕인다. 동아시아쪽 아말감들은 상호협력이 제대로 안되기로 유명하다. 정보공유까지 해주었지만, 그 이상의 협조를 구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기껏해봐야 도심 근처의 인파 통제나 보도관제 및 증거말살 정도겠지.


“어쩔 수 없지. 전세기 내서 가지 뭐. 전투팀이랑 같이.”


유키가 신나는 표정으로 끄덕인다. 정우재가 준비 사항을 지시하기 위해 클론 요원들을 호출한다. 그러면서 사적 용도의 핸드폰을 꺼내드는 그.


[이번주는 출장이에요. 다음주에 봐요. 미안합니다.]


잠시 뒤, 답장이 돌아온다.


[잘 갔다와요. 스트레스 받으면 언제든지 얘기해도 돼요.]


[그럴 일 없길 바래야죠. 고마워요.]


그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 단순한 육체적인 파트너라고 할 수는 없는 상태였다. 약간이나마,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런 감상에 빠져있을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잡념을 떨친다. 




뱀파이어와의 데이트에서 제일 어색한 점이라면, 뭔가 먹는 때일 것이다. 


“웃기죠?”


“뭐가요?”


“술 마시지도 않으면서 여기 앉아 있는게요..”


민려가 그렇게 바 밖의 창문을 바라본다. 두 사람은 다른 테이블과는 조금 떨어진,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 옆에는 오늘 산 옷들이 잔뜩 들어있는 쇼핑백 몇개가 놓여있었다. 


“...당신들은 안취하나요?”


민려가 소리내어 웃는다. 반정도 비워진 하은의 잔과 달리, 그녀 앞의 잔은 그대로였다. 그 안에 든 붉은 색의 칵테일. 민려가 잔을 들어올려 살짝 흔든다. 얼음과 함께 찰랑거리는 칵테일.


“우리들을 잡아가서 그런건 연구 안하고 뭐한대요?”


“그러게요.”


어색하다.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을 해본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니언에 들어온 이후에는 이럴 여유라고는 전혀 없었다.


“어쨌든, 오늘 골라준거 입고다녀요.”


“네. 고마워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하은. 민려는 화려한 옷 말고도 평소에도 입고다닐 수 있을 만한 옷을 몇벌 골라놓았다. 지금 하은이 입고 다니는 옷은 철저하게 기능성 중심이라 그저 평범한 정도였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제가 뭘 도와주면 돼요?”


민려가 묻는다. 하은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민려의 말보다 창 밖의 광경에 더 신경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은 아가씨?”


그녀의 물음과 함께, 갑자기 하은의 표정이 바뀐다. 지금까지는 민려에게 끌려다니다시피하면서도 평소처럼 무표정에 가까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그녀가 진지한 표정으로 돌변한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세 대의 새까만 헬기가 있었다. 헬기들이 다가오며 창문 너머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가 커진다. 그녀가 핸드폰을 확인한다.


[움직임 확인. 주의할 것.]


세이프하우스에서 AP-5 아말감의 움직임을 훔쳐보고 있을 수현의 메시지다. 하은이 일어난다.


“...하은 아가씨?”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눈치챈 민려. 하은이 품속에서 작은 노트와 핸드폰 하나를 꺼내서 민려에게 준다. 그리고는 명령하듯 말한다.


“여기 쓰여진대로 도망가요.”


“네?”


민려가 당황하며 노트와 핸드폰을 받아든다. 하은이 일방적인 태도로 말한다.


“제 친구들이 도망갈 수 있게 도시 시스템을 해킹해 줄거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민려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도와달라는건, 미끼가 되어달라는 말이라는 것임을.


“도와달라는게 이런 말이었어요?”


하은은 대답 대신 핸드폰으로 작전 개시를 지시하는 문자를 -물론 VA들의 로테로 보호받는 채널을 통해- 보낸다. 그리고는 시간을 확인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들은 하은 -그리고 퀸란- 이 짜놓은 타임 테이블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민려도.


“말씀드리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퀸란이 머릿속에서 속삭인다. 민려의 표정에는 머뭇거리는 것이 확연하다.


“지금부터 68초내에 도망가지 않으면-


“지금부터 68초내에 도망가지 않으면 계획이 전부 망가져요.”


재촉하는 하은. 그녀에게는 처음부터 선택지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어딘가 원망이 담긴 눈으로 민려가 일어난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반드시 구해줄게요.”


“...”


민려는 대답 없이  출구로 향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하은 역시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돌입.”


지시와 함께 문을 박살내고 들어오는 AP-5 아말감의 요원들. 위장 프로시져까지는 홍콩 쪽 담당 아말감이 지원해주지만, 전투와 추적은 모두 AP-5 아말감의 몫이다. 혹시 그 와중에 피해가 나거나 예상 외의 비용이 발생하면 그 비용은 모두 AP-5 아말감에서 대야한다.


어두운 방 안쪽으로 택틱컬 라이트가 비춰진다. 방을 훑지만, 아무도 없다. 중소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사무실 뿐. 다섯의 전투 요원이 들이닥치지만 방 안에는 퇴근한지 오래인 회사원들의 자취만이 있을 뿐이다.


“통제부, 아무도 없습니다.”


“뭐?”


“수색중입니다만, 아무것도.”


그들이 즉시 초소형 드론을 띄워 사무실 곳곳을 수색한다. 분명 이곳으로 목표가 숨어들고 있는 것이 CCTV를 유용한 감시망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움직임도 탐지되지 않는다. 그것을 보고 받은 정우재 감독관이 전술 통신망을 통해 그들에게 지시한다.


“현장에서 철수하고, 담당 아말감 커버업 팀에게 인계하도록. 추후 명령을 기다릴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즉시 그들이 드론을 회수하고 방에서 철수한다. 택틱컬 플래쉬라이트로 가득찼던 방이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진다.




정말이네.


민려가 살짝 놀라며 건너편 건물에서 사무실을 수색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훔쳐본다. 노트에는 잘못 표시된 주소, 라고 적혀 있었다. 감시망으로 민려를 포착하는 것까지는 성공 했지만 주소가 행정오류로 인해 잘못 등록되어 있는 바람에 엉뚱한 곳에 들이닥친 것이다.


이런건 어떻게 알아낸거야, 라는 의문을 가질 새가 없다. 민려가 노트를 다음장으로 넘긴다. 어디로 어떻게, 그리고 지금 시간을 기준으로 몇분내로 도망가라는 지시가 상세히 써있었다. 손글씨로 써넣은 지시사항이 빼곡하다. 스파이기관의 요원보다는 음모론자가 쓴 것 같다. 꺼림칙함을 느끼며 민려가 다음 장소를 향해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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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 (ii)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