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 아가씨, 언제 구해줄거에요?
그런 생각이 머리속을 스쳐지나간다. 수첩을 한장 더 넘긴다. 이번에도 놀랄정도로 정교하게 짜인, 편집증에 가까운 계획이 써있겠지. 처음에는 꽤나 많이 남아있었던 수첩이 한장한장 넘어가며 어느새 마지막 장까지 별로 남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이번에는 엘레베이터의 시간차다.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건물의 엘리베이터는 양쪽의 속도가 현저하게 다르고, 비상계단은 불법영업으로 인해 막혀있다. 그녀가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 다른 건물로 뛰어내리는 동안 AP-5 아말감의 추적병력은 달팽이보다 느린 듯한 엘레베이터에 갇혀있었다.
건물 옥상을 달려 다른 건물로 또 다시 넘어간다. 건물 뒤쪽의 사다리를 타고 재빨리 내려가자 더 이상 추적하는 낌새가 없다. 다시 한번 잠시나마 추적에서 벗어난 것이다. 한장을 또 넘긴다. 비슷한 종류의 계획이 적혀있다. 웬지 아까부터 추적이 느려진 느낌이다. 정우재가 하은과 대결하는 중이라 그런 것이지만, 민려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들이 추적해오지만 한번 더 추적자들의 손아귀를 벗어난다.
밉다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애초에 지레짐작한건 자신이다. 마치 평범한 사람들처럼 쇼핑을 가고, 칵테일 바로 하은을 데려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물론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최소한 하루 정도는, 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마저도 비현실적인 희망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걸까?
처음에는 깨어난 힘에, 그 다음에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혈족들에 의해, 그 다음에는 바라는 사람에 의해 휘둘리기만 하다가 끝나는 걸까.
“...”
수첩의 마지막 장.
마지막 장에 쓰여진 문구.
주어진 핸드폰으로 linkedin.com에 접속해 첫번째 대화 상대에게 입력된 메시지를 보낼 것. 그 이후 강쪽으로 2블록 이동해, 식당 뒤쪽의 쓰레기통에 수첩과 핸드폰을 던져넣을것.
민려가 그대로 메시지를 보낸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민려가 지시에 따라 그대로 수첩과 핸드폰을 버린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쓰레기 수거차가 그 통을 수거해간다. 소음과 메스꺼운 냄새. 그러나 이미 죽어있는 민려는 불쾌감은 느낄지언정 생리적인 역겨움은 느끼지 못한다. 더 이상 그녀에게 주어진 탈출 방법은 없다. 혼자 도망가볼수는 있지만, 금방 잡힐 것이다.
대체 뭘 기대한걸까, 나는.
그녀가 벽에 기대 주저앉는다.
자신에게 평안한 날이 올리가 없지 않은가? 힘을 남용하고, 살기 위해 구차하게 괴물이 되고, 같은 괴물들을 죽여버리고 사람들의 피를 빨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사람은 자신보다 더 괴물 같은 존재다. 평범한 하루의 데이트 같은 것이 가능할리가 없다.
이용당했다, 라는건 그녀의 변명일 뿐.
쪼그려앉는 그녀. 그녀에게 드디어 AP-5 추적팀이 접근한다. 무거운 기계음. 멈춰서는 차량들. 구석구석을 훑어오는 택티컬 라이트. 마침내 그녀의 앞에 경무장 차림의 전투 요원들이 나타난다. 기관단총을 쥔 그들이 민려를 확인한다.
“통제. 목표 발견. 저항의지는 없어보임.”
“운이 좋구만, 거머리.”
그 들 중 한명이 포획장비를 들고 민려에게 다가온다. 민려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그들에게 포박당한다.
하은의 시야가 천천히 돌아온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금속. 수갑같은 것이 채워져 있다. 감촉과 부피 대비 무게를 보아 프리미움이다. 현실교란자라는 카테고리에 속한 존재가 되기전에는 몰랐다. 프리미움에 닿은 부분만이 텅 빈 느낌이 든다. 통각이 없어지고 촉각만이 존재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일어났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관통상을 입은 곳에서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출혈도 그렇게 큰 것 같지 않다. 저질량탄과 고열 코팅을 합해 관통력을 극대화하고도 살상능력은 낮춘 탄에 의한 총상. 다리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척추도 멀쩡한 모양이다. 하은이 고개를 든다.
이곳은 어디일까.
공기 중에 희미한 바다 냄새가 있다. 파도소리 같은 것은 들리지 않지만 아마도 부둣가의 작은 창고인 듯 했다. 텅빈 창고에 있는 것은 의자에 묶여있는 자신과-
졌다, 라는 사실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정우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마도 NWO 출신이거나 비슷한 업종이겠지. 그렇지?”
그가 권총을 꺼내들며 말한다. 그가 권총을 다른쪽 벽에 기대있는 누군가에게 겨눈다. 하은이 그녀를 알아본다. 민려다. 희미한 빛 아래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서 둘 다 죽여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안되는 이유가 두개 있지.”
정우재가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저 사업상의 이야기처럼 이야기한다.
“네가 사용한 정지 코드, 그리고 이 거머리 년의 도주 경로를 참고해서 검색해봤다. DA 이전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더군. 지금이라면 아무도 모를법한 방법들을 말야.”
하은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 혼자서라면 정우재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민려는 사살당했을 것이다. 퀸란의 도움이 없었다면 기회조차 잡지 못했을 것이고, 이길 가능성 역시 없었을 것이다.
“넌 대체 뭐하는 놈이지?”
하은에게 묻지만 대답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애초에 알고 싶지도않고, 알아서도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인적사항이 검색되지 않고 그러면서도 멀쩡하게 민간인으로 살고 있는 전직 요원. 그 뿐만 아니라 DA 이전의 고위 NWO 요원이나 알고 있을 법한 지식들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분명히 현실교란자라고밖에 할 수 없는 힘을 다룬다.
유니언에는 알아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 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포함한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살았는지, 누가 존재하고 있는지.
하은을 상부에 넘기면 당장은 승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것들은 아마도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겠지.
그는 당장의 성과에 눈이 멀정도로 어리석지 않았으니까.
-안녕, 지휘관.
머리속을 유키의 마지막 말이 스친다. 아니, 어쩌면 어리석었을지도.
“상부에 넘길수도 없고, 그렇다고 둘 다 죽여버리면 복수가 안되지.”
그가 방아쇠를 당긴다.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비명은 없다. 민려의 복부에서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어딘가 썩어가는 듯한 피의 냄새가 작은 창고 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너희 둘 중 한명만 이 곳에서 나오게 될거다. 만약 외부의 도움을 요청했다면 말야. 그렇지 않다면 둘 다 죽겠지.”
그렇게 말하며 정우재가 민려 옆에 무엇인가를 내려놓는다. 무엇인가 액체가 들어있는 통, 그리고 작은 물건. 무엇인지는 하은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 뒤는 맘대로 해라. 이제 질렸다.”
그 말과 함께, 셔터가 닫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해진다.
하은이 창고 안을 살핀다. 빛이라고는 희미하게 들어올 뿐이고, 안에서 소리쳐봐야 도와줄 사람은 없겠지. 민려의 양 다리는 쇠사슬에, 하은은 프리미움으로 제작된 구속구가 손목과 발목에 채워져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총상의 출혈은 멎었지만 그뿐. 빈혈로 인해 의식이 멍하다. 눈에 보이는 것을 뇌가 인식하는 것마저 느리다.
탈출의 방법은 없다. 외부의 도움만을 기다릴 뿐.
“하은 아가씨.”
“...”
하은은 대답하지 않는다. 뭘 말해야할지도, 어떻게 말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말할 힘조차 없는 상황이지만.
“이젠 뭐라고 하지도 않네요?”
“미안해요.”
“진심이 아니잖아요?”
예전에 들었던 말. 그러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전혀 기력이 없다. 그녀가 맞은 것은 피가 쉽사리 멎지 않게 하는 뱀파이어용의 특수탄이다. 피가 바닥을 흐른다.
“다음에 이럴 일 있으면…”
그녀가 말을 멈춘채로 벽에 기댄다. 상처 입은 포식자. 그러나 육체의 상처 이상의 무엇인가가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냥 제발 처음부터 얘기해줄래요?”
어딘가 포기한 듯한 그녀의 말. 그녀가 총알을 맞은 곳을 누르지만 상처는 너무 천천히 아물고 있었다.
“...”
하은이 흐릿한 정신으로 창고를 살핀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 민려가 무엇인가 말하지만 하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민려를 시켜서 수갑을 풀거나 하다못해 다리가 묶여있는 의자다리를 자르면 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또 다시 그녀를 이용할 뿐이지만, 그 생각이 가책에 미치지는 못한다.
“혹시-”
하은이 고개를 간신히 들고 민려에게 무엇인가 지시하려한다. 그러나 어두운 창고속에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은, 무언가 다른 것이 되어 있었다. 민려가 마치 포식동물처럼 네발로 기어온다. 그녀의 상처에서는 너무나 많은 피가 흘러나와, 그녀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지치고 상처 입은 것은 그녀의 굶주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정된 철제 의자에 단단히 묶인 하은. 그녀의 상처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피의 냄새.
굶주린 뱀파이어의 앞에, 움직일 수 없는 먹이가 있다.
“먹자.”
그녀의 야수성Beast이 속삭이는 듯하다.
“아… 안돼, 싫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는 지 깨달은 민려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정신을 차린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있는 먹잇감의 유혹은 너무나 강하다. 하은이 무엇인가 말하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괴물의 욕망 뿐.
“왜? 널 미끼로 이용한 년이잖아. 그리고… 아주 맛있는 것도 알잖아?.”
민려가 고통스런 얼굴로 스스로를 벽으로 몰아 붙인다. 마치 하은에게서 도망가려는 듯이.
안돼, 안된다고.
절대 안돼.
절대로, 절대-
“크아아!”
그녀가 괴성을 지르며 하은에게 달려든다. 이빨이 목덜미에 박힌다. 생살을 찢고, 끈적한 무엇인가가 흘러 나온다. 신선한 철의 냄새. 생명이 빨려 나간다.
그 와중에도, 하은을 침범해오는 쾌락만은 야속할 정도로 선명하다.
민려가 자제 하며 마셨던 때와 달리, 지금은 온몸의 피가 빨려나가는 느낌이다. 철저하게 결박 당한 상태에서 유린당한다. 의식이 몽롱해지고 몸이 비어간다. 하복부에서부터 뱀처럼 몸을 감아올라가는 쾌락. 타고 올라갈 때마다 신경을 불태우는 듯한 강렬한 감각.
그녀가 원해진다.
원해지고, 원해지고, 원해져서.
그녀의 생명마저 빼앗길 정도로.
이성이 날아가버리는 듯 하다. 빈혈 상태의 뇌는 죽음 앞에서 커지는 번식의 욕구와 단순한 쾌락을 구분할 만큼 기능하고 있지 못했다.
“하… 아앗… 아… 아아… 더… 더…”
대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다. 하은의 의식이 쾌락에 몸부림치는 단순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만 쾌락과 몽롱함에 파묻혀버린다. 그렇게 떠는 하은을 껴안은채 민려는 피에 정신 없이 탐닉한다.
피.
피.
피-
더 많이.
더.
더 많-
“!”
민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굶주림이 가시자 그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간신히 인식 할 수 있었다. 피가 너무 많이 흐르고 있었다. 민려가 황급히 다가가 그녀의 목덜미를 핥는다. 상처가 서서히 닫혀-
“!”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나는 민려. 먹어버리고 싶다. 전부, 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영혼까지 모조리 삼키고 그 쾌락과 죄악감에 젖어 버리고 싶다.
안돼.
안돼.
안돼. 절대 안돼. 안돼. 안돼. 안된다고. 안돼. 안돼.
민려가 드디어 깨달았다.
왜 정우재가 그 물건들을 두고간 것인지. 하은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어떤 방식으로 복수하고 싶었는지. 조금 더 있으면, 자신의 손으로 하은을 죽여버리게 될 것이다. 그래도 다 마셔버리자, 시체로 만들고 혈족으로 일으키면 되잖아, 라는 무책임한 유혹이 그녀를 감싼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거부한다. 자신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그녀가 정우재가 두고 간 통을 들어올려 뚜껑을 연다. 머리 위로 들린 통에서 무엇인가 콸콸 쏟아진다. 진득히 흘러내리는 듯한 불쾌한 느낌을 주는 휘발유의 냄새가 창고 안에 가득 찬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하은이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닫는다. 언제 의식을 잃어버릴지 모른다. 혈액의 부족으로 인해 시야는 희미하고 까맣다. 입을 열지만 마른 목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지금 목소리가 나온다하더라도 그녀를 어떻게 말려야할까.
민려의 온 몸이 휘발유로 젖는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민려가 손을 떨며 몸을 숙인다. 그녀가 발언저리에 놓여진 작은 금속 물체를 들어올린다. 작은 금속성 소리와 함께 라이터의 뚜껑이 열리며 작은 불꽃이 피어오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빛이 민려의 얼굴을 비춘다.
휘발유에 녹아내린 마스카라가, 마치 새까만 눈물 같다.
“구해주겠다고 했잖아요.”
역시, 구차한 말이다. 애초에 서울에서 쫓길 때 살려준 것도 하은이었으니까. 그녀가 서서히 손에서 힘을 빼며 간신히 입을 연다.
“그럼, 잘있어요. 하은 아가씨.”
그 말과 함께, 라이터가 민려의 손을 떠나 땅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땅에 부딪히기도 전에, 하은의 의식이 어둠속으로 떨어진다.
“하은씨.”
“...”
하은이 깨어난 곳은, 좁은 창고도 유니언의 감옥도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익숙한 남자의 형상이 있었다.
“되도록이면 마주칠 일이 없길 바랬는데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글래스워커의 일원인 김인혁. 민려를 통해 하은이 도움을 요청한 대상은 그였다. 그는 하은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있으니까.
“여긴?”
“병원입니다. 과다출혈로 쇼크사하기 전에 저희가 데려왔죠. 안심하셔도 됩니다. 여기라면 추적당하지 않습니다.”
하은이 자신의 옆구리에서 올라와 목 근처의 상처를 덮고있는 붕대를 느낀다. 더 큰 상처를 입은 것은 관통상을 입은 몸 쪽일텐데. 이상하게 그쪽의 상처만 아직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상처는 금방 나을 겁니다. 대체 그런 곳에서 뭘 하고 있었던거죠? 불내고 자살이라도 하려고 했습니까?”
“저 뿐인가요?”
“네?”
하은이 마른 입을 열어 묻는다.
“찾은 건 저뿐?”
“네.”
인혁의 대답.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늦었던 모양이다.
“국제전화 좀 부탁드립니다.”
김인혁이 그의 핸드폰을 넘겨준다. 그들만의 ‘마법’을 이용해 추적에서 보호받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상대방 쪽이 보호받고 있을 테니까. 하은이 국제전화를 건다. 얼마 있지 않아, 배수현이 전화를 받는다.
“배수현입니다.”
“저에요.”
“하은씨? 살아있었습니까? 대체 어떻게 된거죠? 이제 예전처럼 추적도 없고-”
“일은 끝났습니다.”
하은이 무겁게 그의 말을 끊는다.
“당분간은 유니언이 한국에서 활개치고 다니지는 못할겁니다. 다시 그렇게 될 수도 있지만,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네요. 세이프하우스는 파기하세요.”
잠시 뒤 수현의 대답이 돌아온다.
“알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그럼.”
짧은 통화, 그리고 그들간의 짧은 협력 관계가 끊긴다. 그녀가 핸드폰을 돌려주며 말한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얼마든지요.”
김인혁이 끄덕인다.
“아마 겨울이 지나면 퇴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은이 끄덕인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채로, 그녀가 다시 잠에 빠져든다.
그리고, 겨울이 지났다.
아무도 하은을 쫓아오지 않았다. 영어로 소통하는 간호사와 의사들은 그녀의 신원에 대해 일체 묻지 않았고, 경찰이나 유니언의 요원이 들이닥치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치료받으며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텅 빈 겨울을 보냈다.
“여기는 왜?”
인혁이 묻는다.
아직 쌀쌀한 날씨.
물론 한국의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막 퇴원한 하은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그녀와 민려가 갇혀있던 창고였다. 하은이 셔터를 올린다. 약해진 그녀의 몸으로도 야속할 정도로 가볍게 올라가는 셔터. 안쪽은 전혀 청소되지 않은 상태였다.
민려가 있던 쪽의 벽은 온통 새까맣게 탄 자국으로 가득했다.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불에 휩싸인 뱀파이어가 폐쇄된 공간에서 미친듯이 벽에 몸을 긁어대는 모습을. 그 와중에도 하은만은 피하려는 했던 듯, 하은이 묶여있던 쪽에는 아무런 자국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창고이기에 하은을 질식시킬 정도는 아니었던 듯 했다. 공기가 통하는 장소이기도 했고.
“잠깐만 혼자 있게 해주세요.”
인혁이 아무말 없이 창고 밖으로 나선다.
그녀는 실패했다.
아니.
실패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자유다. 정우재의 말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진심이었다. 하은이나 민려를 둘다 죽이는 것은 복수가 되지 못하고,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은 그의 앞길을 막는 일이 된다. 따라서 그는 이 작전에 관한 모든 자료를 파기하고 후속 부대에게 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의 성과는 충분하고 더 이상의 성과를 낼 이유, 다시 말해 ‘가족’이 없으니까.
과거의 흔적에 쫓길 필요가 없는 하은은 이제 정말 평범한 사람처럼 살 수 있다.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간에 추적해오려는 시도를 인혁이 알아챘을 것이다.
그녀는 성공했다.
더 이상 유니언에게 쫓기지도 않을테고 조용히만 지내면 된다.
그러나…
아주 희미한 상실감이 느껴진다.
해변에서 발견한 예쁜 조약돌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방을 청소하고 나니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느낌.
그 정도의 희미한 상실감이.
희미한.
희미해야하는.
희미했으면 하는.
그런 상실감이 느껴진다.
이것을 몇백배로 늘려놓으면 정우재가 느끼는 기분이겠지, 라는 생각이 든다. 우스운 일이지만, 핸드폰을 꺼내 그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아무것도 와있지 않았다. 왜 확인하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을 덮어버린다. 그와 공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두 사람에게는 무엇인가의 부재만이 남았을 뿐이다.
하은이 민려가 서있었던 곳을 내려다본다.
뱀파이어가 죽으면, 원래의 ‘나이’대로 돌아간다. 인혁이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는 것은, 결국 정우재의 말이 맞았다는 이야기겠지.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는 그녀.
그녀의 옆으로 인혁이 다가온다.
“불은 당신이 지른게 아니군요.”
인혁의 질문에 하은이 끄덕인다.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은은 대답 없이 초점 없는 눈으로 창고를 나선다.
왜.
왜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아니, ‘여기’라는건 어디일까. 물리적인 장소, 심리적인 장소, 사람들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유니언과 자신과의 관계.
유니언과 엮이기 시작한 이후의 삶.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거대한 모노리스의 그림자.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결론이 명확해진다.
테크노크라틱 유니언이라는 거대한 퍼즐을, 반드시 풀어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의미, 어떤 행동, 어떤 결과로 나타나든지 반드시.
반드시.
하은의 정신 깊숙한 곳, 퀸란이 미소짓는다. 일련의 행위와 ‘조언’을 통해 그녀를 원하는 상황에 몰아넣고 원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원히 달아나기만 했겠지.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적시에서의 조언 뿐이다.
인과와 음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
짧아요.
다시 그레인저 감독관 및 유니언으로 포커스가 돌아가겠습니다.
감시.
통제.
말살.
테크노크라시.
하은이가 끝으로 몰려버렸네, 클론도 네판디가 되버리는거임?
NWO는 대체 머하는 곳이길래;;
감시... 통제... 새앙쥐 조합...
와 지렸다
ㅠㅠ - dc App
유키는 죽이고 민려는 먹버하는 마성의 여자 노하은 ㄷㄷ
아낌없이 주는 퀸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