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계승, 둘.
“정말이군요.”
로라가 놀라움을 간신히 삼킨다. 그들은 고층빌딩의 꼭대기에 올라와 있었다. 세찬 바람에 로라는 몸을 살짝 떨고 있었지만 그녀의 옆에 있는 여성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신은 추위 같은걸 안 느끼나요?”
“아뇨. 춥습니다. 몸이 좀 고장나서요.”
로라가 그녀의 말을 이해해보려다가 이내 포기한다. 이 곳은 마커스의 집무실을 안전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고배율의 망원경 렌즈를 통해 마커스가 여성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는 모습이 똑똑히 보인다. 그의 취향인지 그녀는 저항 따위는 할 수 없도록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역겨워요.”
로라가 망원경에서 눈을 뗀다.
“아뇨. 더 보셔야 합니다.”
로라에게 강요하듯 말하는 여성. 로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뭔가 이상하다.
피를 빠는 것이 멈추지 않는다.
“저… 저러면…”
로라가 놀라움에 입을 막는다. 추위 그 이상의 역겨움과 공포가 허리를 타고 오른다. 여성의 허리를 단단히 쥐고 있는 마커스. 이 먼 거리에서도 여성이 피가 부족해져 창백해지는 것이 보일 정도다. 마침내 마커스가 그녀의 목에서 손을 뗀다. 그녀가 바닥에 힘없이 쓰러진다. 마치 자신을 과신하듯 양 팔을 벌리고 입가의 피를 핥는 마커스의 모습이 보인다. 바닥에 쓰러진 여성이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마도 혈액의 손실로 인해 체온이 떨어져서겠지.
그렇게 쓰러진 여성을 두 명의 남성이 방으로 들어와 끌고나간다. 그들은 마커스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한채로 허리를 바짝 숙이고 있었다. 마커스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남긴 음식을 먹어 치우려는 스케빈저의 모습.
저게 뱀파이어인가.
할머니에게서 듣긴 했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유령 같은 존재들이 있다고 듣긴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보게 될줄은 몰랐다. 그것도 경쟁사의 대주주라니.
“증거가 더 필요한가요?”
로라가 거의 던지듯 망원경을 넘겨주며 대꾸한다.
“그래도 저는 믿을 수 없어요. 그냥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 수도 있고, 이런 일이 있으면 사법당국에-”
“로라. 미안하지만 당신의 할아버지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네요.”
“...추운데 내려가면서 이야기하죠.”
허락받지 않고 올라온 장소이기에 몰래 빠져나가야 하는 그들. 그러나 이 여성은 그런 분야에 있어서는 전문가였다. 그들은 서비스 엘레베이터를 통해 바로 밑 층까지 내려온 후, 청소 직원용의 통로를 통해 손쉽게 빌딩의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건물 전체의 구조와 직원들의 움직임을 꿰뚫고있는 듯 했다.
“그건 무슨 말이죠? 제 할아버지는 어떻게 알고 있는거에요?”
“그 분은 경쟁사의 수장이 괴물이라고 판단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죽였습니다. 당신 나이에요.”
“잠깐, 대체 그게 무슨...”
“그리고 사법체계에 넘기라니, 그게 소용있을 것 같나요?”
로라가 입을 다문다. 뱀파이어를 사법체계에 넘겨서 뭐 어쩌라는 말인가? 흡혈죄 같은 것이 있을리가 없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저 빌딩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닐지 몰라도 마커스가 고용한 용병들이 가득하죠.”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한 로라의 표정. 아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이 여자에게 간신히 묻는 그녀.
“그건 왜?”
“글쎄요. 마커스 본인이 비명횡사하고 싶지 않아서? 이제 마데온 사가 어떻게 사람들을 그렇게 착취하는지 알겠죠?”
사람을 먹잇감으로만 보는 괴물이 통제하는 조직이니 어련할까. 그러나 로라는 그런 오컬트적인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별로 믿고 싶지도 않았고.
“잘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녀가 자신이 할말만 하고는 돌아선다.
“잠깐, 당신 이름은?”
“노하은. 아니면 도로시라고 불러도 돼요.”
“도로시, 당신은 대체 뭐하는 사람이죠?”
하은은 대답하지 않고 큰길가로 나간다. 코너를 돌아서는 그녀.
“잠깐!”
로라가 그녀를 쫓아서 큰길가로 나간다. 하은의 뒷모습. 그녀의 옆으로 밝은 헤드라이트를 킨 덤프 트럭이 지나간다. 눈부심에 잠깐 눈을 찡그리는 로라.
“...?”
그러나 눈을 다시 떴을때, 하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참으로 제멋대로의 여자라는 감상 밖에 들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몰레티 씨.”
몰레티가 화상 스크린 앞에서 끄덕인다. 통신의 반대편에는 NWO 소속이라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는듯한 요원이 앉아있었다. 몰레티가 안경에 내장된 VDAS로 그의 프로필을 훑는다. NWO 측의 강경파 행동대장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듯한 인물이다.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NWO가 테크노크라시를 지배하고 다른 컨벤션은 그 부속이라고 생각하는 아니꼬운 타입이다.
“그레인저 감독관, 자리를 마련해줘서 감사합니다. 요즘 잘되고 계시는걸 보니 기쁘군요.”
그레인저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끄덕인다. 빈말, 아니, 조롱이라는 것을 안다. 흔한 일이다. 다른 요원들이 쾌속 승진하는 동안 그레인저는 10년동안 제자리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이보리 타워가 군사력을 가진다는게 말이 안된다는 항의에 따라 단독 아말감으로 분리되어 나오는 바람에 단독으로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게된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동기’들이나 ‘후배’들에 비하면 한참 뒤쳐진 상태였다.
거대한 모노리스 안에서는, 이렇게 그 밖에서 벌어지는 것과 똑같은 신물나는 정치극이 매일 벌어진다.
“오디엔 사의 경쟁사 마데온에 대해선 알고 있으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죠. 은근히 운율이 맞는 이름들입니다만.”
“그쪽 대주주가 뱀파이어라는거 알고 계셨습니까?”
“글쎄요.”
몰레티가 약간 딴청 피우듯 말한다.
“마데온 사의 대주주는 마커스라고 하는 뱀파이어입니다. 만약에 모르셨다면… 신디케이트의 레이더에 지금까지 걸려든지 않은게 신기하군요.”
상대방이 그의 미묘한 어투를 감지한 것인지 마찬가지로 살짝 공격적으로 말한다.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저희 측에서는 이번에 그 뱀파이어를 제거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몰레티 씨의 협조가 필수적이죠.”
“물론 이번 M&A 딜과 그 회사가 관련이 있는 건 알지만, 무슨 협조를?”
화상 스크린에 마데온의 본사가 있는 건물이 띄워진다. 건물 곳곳에 시뻘건 점들이 보인다.
“설마 건물 안에 사병이라도 두고 있는건 아니겠죠?.”
“맞아요. 심지어 뱀파이어와 결탁한 다른 초자연체도 있더군요. 마법사 부류를 포함해서.”
옆에서 보고 있던 그레인저가 거든다. 몰레티가 당연하다는 듯 반응한다.
“그리고 그들을 고용하는 돈줄은 마데온사의 초과이익에서 나온다, 그거군요.”
“건물 내부는 아예 염탐조차 힘들어요. 현실교란적인 방어막이 잔뜩 쳐져있고, 도심인데다가 언론사도 근처에 두 군데나 있어서 노출 없이 사살하는 것이 거의 불가-”
“맞습니다.”
그녀의 말을 거만한 태도로 자르는 NWO 요원.
“그래서 협조의 내용에 관해서입니다. M&A에 관한 소식은 들었지만, 그걸 성사시켜야 돈줄을 끊고, 그래야-”
“미안하지만 협조는 힘들것 같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몰레티.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몰레티가 심드렁한 태도로 말한다.
“그깟 뱀파이어가 뭐가 그렇게 중요한지 모르겠군요.”
“무슨… 몰레티 씨, 미안하지만 그 뱀파이어가 얼마나-”
“신디케이트가 그걸 모를것 같습니까?”
몰레티가 살짝 짜증난다는 투로 던진다.
“그럼 왜-”
그 요원이 그레인저의 말을 끊어버렸듯 몰레티도 그의 말을 자르고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느쪽이 이득인지 말입니다.”
“네?”
몰레티가 막힘없이 말한다.
“당연히 저희는 놈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의 사업적 수완은 말하기 고깝지만 대단한 축에 속합니다. 흡혈귀 놈 치고는 현대 세계에 대한 적응력도 대단하죠. 다른 놈들은 쉽게 안변하는 캔디 공장같은거나 하고 앉아있거든요.”
그가 시계를 들여다보며 컨퍼런스 콜 전에 읽고 있던 책을 거의 내던지듯 책상에 내려놓는다. The Art of War, 이라고 써있는 표지가 아무렇게나 구겨진다.
“저희측에서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감수하면서 도심내에 타격팀을 투입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곳에 쓰일 수 있는 돈을 그 회사 하나를 사면서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돈이면 얼마나 많은 사업을 벌일 수 있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미안하지만, 지금 말은 우리쪽 재원을 써서 그쪽 부담을 덜어달라는거 아닙니까?”
“그래도-”
NWO 측 요원이 당황한다. 아마 이 반응을 듣게될 그의 상관 역시 당황할 것이다. 아무리 신디케이트와 NWO가 상시 경쟁 관계에 있더라도 이 정도로 직설적인 표현은 매우 드문 일이다.
“거기에 그 돈을 가지고 마데온 사를 잡아먹어봐야, 그 돈은 현재 알게모르게 중소 규모의 주주를 형성하고 있는 버추얼 어뎁트들에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뱀파이어를 죽이는데 찬성하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물밑에서 거래를 진행할 수 있는 자들이라고는 그들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가상현실 분야는 컨센서스 성립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문제죠. 미안하지만, 저희 신디케이트는 VR 사업에서 버추얼 어뎁트에게 조금도 주도권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민감한 시점에 그들에게 자금을 공급하는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죠.”
그레인저가 그의 말을 들으며 곰곰히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그와 그레인저는 아예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 그레인저는 현장에서 뛰며 괴물들을 죽이는게 주 업무였지만 몰레티의 경우는 새로운 생활방식을 대중의 삶에 도입하고, 그 방향이 트래디션에게 유리하지 않도록 조정하며 거의 평생을 살아왔기 떄문이다. 그가 어릴적의 치기로 자경단 활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레인저의 지휘 하로 들어올 일도 없었겠지.
“그럼 이만.”
NWO 요원이 뭐라 반론을 제기하기도 전에 몰레티가 통신을 끊어버린다. 확실히 무례한 행동이다.
“몰레티, 당신 치고도 좀… 후폭풍이 성가신 수준 아닌가요?”
“글쎄요. 대충 보아하니 윗선에서 시키는 일은 끝내주게 잘하지만 그게 전부인 놈이겠군요. 기껏해야 자기 상관 레벨에서 귀찮게 구는 정도겠죠.”
그레인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몰레티 본인이 감당할 수 없었다면 그런 식으로 통신을 끊어버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정중하게 요청했다 하더라도 들어주지 않았을 겁니다.”
몰레티가 확고한 말투로 덧붙인다. 그레인저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한다. 안나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마데온 사, 그리고 그 뱀파이어에게 이익이 될 만한 행위에는 찬성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을 볼때, 앞으로 그를 처단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 질 것이다. 트래디션 메이지와 인간 경호원들을 뚫고 말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단순한 고용 비용으로만 따지면 신디케이트가 그들을 매수할 만한 돈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매수될 자들이었으면 이렇게 문제가 까다로워지지는 않았겠지.
“몰레티, 미안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지 않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
몰레티가 즉각, 그러나 최소한의 친절은 유지한 채로 대답한다.
“M&A에 대한 찬성 여부에 관한 이야기라면 됐습니다. 당신도 뉴스는 읽었을테고, 저도 별로 마음을 돌릴 예정은 없으니까요.”
그렇게 얘기하며 몰레티가 자리를 뜬다. 그가 남긴 책. 그 위에 “Art of War”라는 제목이 선명하다. 그레인저가 그 책을 내려다보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도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할머니.”
“로라, 왔니?”
안경을 쓴 채 안락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안나. 이 순간만 떼놓고 보면 IT 전문가와는 매우 동떨어진 모습이다.
“혹시 M&A 이야기를 할거라면, 됐다.”
그녀가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로라는 고개를 흔들며 안락 의자 반대편의 소파에 앉는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게 아니에요. 할아버지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왔어요.”
안나가 책을 내려놓는다.
“할머니가 얘기해주신 괴물들을 봤어요. 마데온 사의 최대주주가 뱀파이어라는거, 알고 계셨나요?”
로라는 ‘뱀파이어’라는 말을 꽤나 머뭇거리며 꺼내들었다. 매우 흥미롭다는 듯이 대답하는 안나.
“그래. 언제 알아내나 했다.”
안나가 책을 내려놓는다. “손자병법”이라는 제목이 꽤나 어색하게 다가온다.
“어떻게 할거니?”
“...”
로라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평범한 식당. 새로운 손님보다는 단골 손님에 의지하기에, 사람이 없는 시간에는 아예 없다 시피하다. 아무리봐도 이런 식당보다는 말끔한 레스토랑에나 있어야할 복장의 로라가 들어선다. 어차피 손님이라고는 한명밖에 없기에 그쪽으로 다가간다. 며칠전 자신에게 뱀파이어를 보여주었던 하은이 앉아있었다. 로라가 그녀의 반대편에 앉는다. 고무와 플라스틱의 중간 재질 같은 느낌의 싸구려 의자가 불편할 지경이다. 식탁 위에는 차 한잔, 음식이 올려져있었을 접시, 그리고 종이들.
“계획을 짜고 있는 건가요?”
“네.”
대체 어디에서 구해온 걸까. 자신을 하은, 아니면 도로시라고 불러달라는 이 여성은 건물의 설계도가 분명해보이는 수십장의 도면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그 위에는 붉은색의 펜으로 그려넣은 선들이 있었다. 그 옆에 초단위로 쓰여있는 시간표시.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 그녀가 계획한 나름의 침투경로가 아닐까.
“어디 정보기관 출…”
자신의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는, 마치 영화에나 나올법한 계획을 짜고있는 여성. 그렇다면 그녀는 아마도… 테크노크라시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겠지. 그렇다면 너무 깊게엮이지 않는게 좋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들은 바다. 자신이 테크노크라시에 속해 있던지 아니던지간에.
“쉽진 않을겁니다. 안에는 뱀파이어들 뿐만 아니라 용병, 현실교란자, 구울 같은 놈들이 잔뜩이니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초자연체와 관련된 단어를 꺼내는 그녀의 말에 로라의 머리가 멍해지는 듯 했다. 아마도 그녀는 괴물과 칼을 맞대고 싸우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말하지는 못하겠지.
“그럼 안되겠네요.”
로라가 하은 앞에 앉으며 말한다. 하은이 계속 작업을 진행하며 묻는다.
“뭔가 방책이라도?”
“...네.”
하은의 펜이 멈춘다. 그녀가 작업을 내버려두고 로라를 본다. 표정변화는 없지만, 흥미로워하는 것은 분명했다. 로라가 명령조로 말한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내가 하라는 대로 해줘야겠어요.”
“울프맨 수트라도 입게요?”
로라가 대답하지 않은채 한참이나 하은을 쳐다본다. ‘울프맨’이라는 단어는 안나가 어릴때 단 한번, 그것도 실수로 이야기 해주었던 단어다. 할아버지와 관련있는 단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지금까지도 듣지 못했고 몇몇 버추얼 어뎁트들에게 부탁했을 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만화책이나 영화의 제목인게 아닐까, 하고 막연한 추측만을 해왔을 뿐.
그런데, 이 여자는 그 단어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보다 할아버지에 대해서 더 잘 알고 계시겠네요.”
“그렇습니다만. 그건 그렇고, 당신은 뱀파이어를 죽이는데 쓸만한 기술이라도 있나보죠?”
“사람 때리는 방법 같은건 못배웠어요.”
“안타깝네요. 당신 할아버지는 당신 나이때부터 범죄자들을 때려잡고 다녔는데. 사실 지금도 그렇죠.”
또 다시 아찔해지는 느낌을 억누르고 로라가 태연하게 말한다.
“...그 얘기까지 해주는 걸 협상 조건에 포함해야겠네요.”
“좋습니다. 제 일을 덜어준다면야 그 정도는. 그래서 제가 할 일은 뭐죠?”
“당신은 그냥 유유히 걸어들어가서 마커스와 그 충신들만… 제거 하면 됩니다.”
로라가 말꼬리를 흐린다. ‘제거’라는 단어를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제거의 내용은?”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그럼 죽이는 걸로 하죠.”
로라가 다시 한번 정신을 다잡으며 간신히 끄덕인다.
“정말 괜찮습니까?”
하은이 묻는다.
“전 멀쩡해요.”
“그걸 묻는게 아닙니다만. 당신이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을 맡기고 있는 건지 아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커스가 뱀파이어라고 하지만 그에게는 연인도 있고, 그에게 의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죠?”
“그는 사람을 죽이는 취향은 없습니다. 조사해봤지만, 그날 그 여자도 죽지 않았고요. 그냥 이용할 뿐.”
로라가 검지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린다. 어딘가 신경질적인 동작.
“다시말해, 어찌보면 그는 피를 먹는 것만 제외하면 그냥 좀 악독한 사업가에 불과하-”
“알았어요. 명확하게 정하죠. 죽이세요. 가능하면 증거를 남겨서.”
그 말에 하은이 로라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녀를 들여다보는 것은 하은 뿐만이 아니다.
“이 아가씨, 역시 몰레티의 손녀 답군요. 그의 아들과는 아마 전혀 다를겁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할아버지를 넘어서는… 실용적인 강경파가 될겁니다.”
하은의 눈을 빌린 퀸란이 속삭인다.
“그가 피를 빠는 괴물이든, 사람이 만든 AI든,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든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이 아닌 존재가 사람이 만든 시스템에 기생하는게 맘에 안든다는 얘긴가요?”
로라가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아뇨.”
하은의 얼굴에 흥미로워하는 표정이 살짝 떠오른다.
“그럼?”
“그를 죽여도 처벌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죠.”
이쪽도 지독한 실용주의자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하은이 끄덕인다.
“그리고 저는 당신 같은 기술은 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종류의 기술은 많이 지니고 있어요. 최소한 이 상황에서는 당신의 기술보다는 유용하리라고 장담하죠.”
하은이 펜으로 한두번 책상을 두드린다. 마치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표정. 잠깐의 침묵 후, 그녀가 설계도들을 정리하며 말한다.
“기대해보죠.”
EMT 사와 오디엔 사의 주총날.
물론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미 불화설이 퍼진 날부터 지금까지 폭락이라고 할만한 수준으로 가격이 떨어진 양 사의 주가를 보면 했다. 주주총회는 맹한 분위기였다. 당연한 일이다. 양쪽 회사의 대주주인 몰레티와 안나간의 불화가 그냥 루머에서 그치지 않고 사진까지 찍힌 마당인데. 만약 두 회사간의 시너지가 없다면 결국 VR 시장은 마데온에게 넘어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몰레티, 저희측 요원들에게서 항의가 꽤 심하네요. 나중에라도 좀 변명하는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어요.]
아말감 통신망으로 그레인저가 메시지를 전달한다. 몰레티가 핸드폰에 연동된 통신망으로 대답한다.
[미안하군요.]
“...오래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표결 결과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합병건에 대한 표결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오늘 주주총회에 참석하신 주주님 중 제 2안-”
[그런데, 그레인저 감독관.]
[네.]
[제가 협조를 못하겠다고는 말씀드렸지만, 합병에 반대한다고는 누가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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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다음부터두 로그 탭으로 있으면 몰아서 볼수있는데 아쉬워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