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렐이냐 에버론이냐 그레이호크냐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D&D 세계의 대전제는 마법과 초자연적 능력이 평범한 종류의 기술보다 우월하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잖아. 당장 PC들만 해도 저렙 구간에서는 평범한 모험용 장비(밧줄, 갈고리, 공구함 등)를 쓰다가 레벨이 오르면서 마스터워크, 알케미컬 아이템 사용 비중이 늘어나고 10렙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이런 것들은 전부 상위호환적 효과를 가진 원더러스 아이템으로 대체되고.


내가 오래 전부터 별로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이 이거다. 마법이 지나치게 강하고 만능이면서, 그 마법을 막는 수단도 전부 마법임. 내 취향은 좀 더 평범한 기술이 마법을 비롯한 초자연적 능력과 나란히 병존하고, 고레벨 구간에서도 그런 평범한 수단이 여전히 나름의 가치를 갖고 있는 거임. 디비네이션계 고급 주문은 범위가 존내 넓다거나, 멀리서 안전하게 적진을 살필 수 있다거나 하는 점에 있어서 우월하지만 디테일한 정보는 알 수 없고, 진짜 고급 정보는 스파이(보통 로그나 스카웃이겠지)가 직접 침투해서 지근거리에서 확보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물론 기본 룰만 가지고도 세계 설정이나 뭐 그런 걸 통해서 어느 정도 비슷하게는 할 수 있음. 내가 마스터링할 때 자주 쓰는 설정은, 같은 성직자라도 디바인 스펠 캐스팅 능력이 있는 클레릭은 숫자가 적고 또 디바인 스펠을 쓸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가 신에게 더 총애받는건 아니라는 거임. 클레릭이나 팰러딘도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정말로 신의 뜻에 맞는지는 확신하기 어렵고(커뮨 같은, 직접 신에게 기도해서 의사를 묻는 종류의 주문은 전부 금지하고). 신이 디바인 스펠을 내려주는 건 어디까지나 그 신의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는 여러 수단 중 하나고, 평범하게 교리에 충실하고 교단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게 최소한 교단 내에서는 더 높게 쳐지고. 이렇게 하면 비교적 평범한 기술과 사회 제도가 PC들로 대표되는 강력한 개인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지.


하지만 설정을 그렇게 하고, 실 플레이 상에서도 그런 걸 강조하는 것 이상으로... 평범한 기술과 사회 제도가 PC들에게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강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걸 살릴 만한 룰이 있었으면 싶음. 그런데 애초에 D&D는 '중세 유럽 닮은 판타지 세계에서 무장한 유랑집단이 괴물을 때려잡고 강해지며 부와 명성을 얻는다'는 게 근본 전제인 이상, 그런 면을 살리기가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