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현대 배경 WOD는 간간히 보이는데, 중세 배경 WOD 플레이 얘기는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안타깝다.
실제로 일 년 넘게 플레이했던 분량이라 설명이 많으니까 주의. 다 얘기할 게 아니라 내가 제일 비극적이라고 느꼈던 분량만 써본다.
1. 콘스탄티노플, 귀족, 그리스인
배경은 13세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었다(콘스탄티노플 바이 나이트라고 공식 세팅이 있는데 그거 썼다). 내 캐릭터는 젊은 나이에 제국의 고위 관료가 된 상류층 그리스인이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영향력과 인맥 덕에 높은 자리에 빠르게 올라갈 수 있었는데, 정작 그 아버지는 아들을 잘 챙겨주진 않고 차갑게 굴어서,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있는 인물이었다. 신분 높은 그리스인답게 이름이 짜증나게 기니까(Eustathios) 간단히 E라고 하겠다.
2. 4차 십자군의 침공
중세 유럽 역사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 텐데, 4차 십자군이 원래는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겠다고 출발했다가 중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개입하면서 엉뚱하게 콘스탄티노플을 쳐서 불태우고 약탈하고...완전히 개발살을 낸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대체역사 좋아하는 WOD답게 이 사건 뒤에도 베네치아의 뱀파이어들, 특히 라좀브라 클랜의 엘더 나르세스의 음모가 큰 영향을 줬다는 공식 설정이 있었다.
3. 베네치아에서 온 라틴 뱀파이어
그런데 이 나르세스의 차일드 중, "베네치아의 알폰조"라는 자가 꽤 오래 전부터 콘스탄티노플에 와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 상인으로 위장해서 곳곳에 다양한 인맥을 쌓아뒀는데 내 캐릭터인 E도 그 중 한 명이었지. 알폰조는 아직 젊어서 경험이 부족한 E를 세심하게 챙겨줬고, E는 알폰조를 마치 유사-아버지처럼 여기고 깊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182년 라틴 폭동이라고, 원주민 격인 그리스인들이 평소 반감을 갖고 있던 라틴계 사람들을 무차별로 살해하거나 노예로 팔아치우는 일이 생긴다. E는 이때 알폰조를 구하러 갔다가 그만 상대가 뱀파이어란 걸 알게 되었고, 알폰조는 피의 침묵(현대의 마스쿼레이드)을 지키기 위해 E의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해서 구울로 만들었지.
게다가 알폰조는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의 프린스가 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다가 4차 십자군의 침공을 기회 삼아, 동로마 제국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그리스계 뱀파이어들을 제거하거나 쫓아낸 거지. 그리고 E는 자기 지위와 능력을 이용해서 낮에 뱀파이어의 안식처를 찾아내서 불태우거나 말뚝을 박는 끔찍한 일을 해야 했다.
뱀파이어의 생리와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 E는 혹시 이 모든 게 끝나면 주인이 자길 풀어주지 않을까 헛된 기대를 했지만, 알폰조는 콘스탄티노플의 프린스가 되자마자 프린스의 권리를 써서 E를 자기 차일드로 만들어버렸다.
4. 비극
일단 뱀파이어가 되면, 정체를 숨겨야 하는 율법 때문에 생전의 인연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E는 전후의 혼란 속에서 포옹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가족들을 챙길 수가 없었고, 대부인 알폰조가 그런 걸 배려하는 스타일도 아니었지. 결국 아내와 아들과는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몇십 년이 흐른 뒤에, E는 자기 코테리가 차지하게 된 영역에서 다 늙어버린 아들을 만나게 된다. 심지어 E의 아들은 그동안의 고생 때문인지 반-라틴주의자 수도사가 되어서 그리스인들한테 그놈들의 물건을 사지 말고 예배도 보지 말아야 한다고 선동을 하고 있었다. 라틴 궁정에 소속된 E의 코테리는 원래대로라면 이 위험인물을 제거해야 했지만, 뒤늦게 아들을 발견한 E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른 곳으로 보내서 살려주려고 했지. 라틴 뱀파이어들을 배신하는 일에도 손을 대려고 했다.
하지만 WOD에서 일이 그렇게 잘 풀릴 리가 없지. E의 코테리 때문에 자기 영역을 뺏긴 터줏대감 격의 뱀파이어가 이런 사정을 알게 되면서 상황이 꼬여버렸다. 그놈은 제 영역을 되찾기 위해 E의 아들을 붙잡아서 프린스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프린스의 차일드인 E가 대부에게 불충하게 굴고 라틴 궁정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다른 뱀파이어들에게 알려지면, 프린스 본인의 권위에도 중대한 타격이 갈뿐만 아니라 어쩌면 E를 제거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거든.
그래서 E가 어떻게 되었느냐...자신이 배신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프린스와 프리모진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아들을 제 손으로 죽여야 했다. 마지막으로 자기 목숨하고 맞바꿔서 아들을 풀어주려고 시도는 했는데, 프린스가 먼저 눈치를 채버렸어. 그래서 도미네이트로 조종해서 죽이라고 명령했지. 결국 아들은 아버지의 칼에 찔려서 품속에서 쓰러져 죽었다.
(이 뒤로도 계속 플레이가 이어졌지만, 일단은 여기까지)
5. 감상
이 플레이 내용은 숙련자 플레이어나 텔러 한 명이 존나 쩌는 지식을 가지고 단독으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참가자들이 제각기 하고 싶은 설정이나 소재를 열심히 맞춰가면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중간에 참가자들끼리 삐걱거리기도 했고 중세의 동방 기독교 제국을 상상하는 게 쉽지도 않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깊이 몰입할 수 있었고, 아주 비극적이었고, 재미있었어. 무엇보다 다른 매체에선 절대 할 수 없는 체험이라는 게 좋았다. 소설도 안 되고, 영화나 드라마도 안 되고, 컴퓨터 게임에도 당연히 없으니까.
참고로 여기엔 E가 겪은 비극 위주로 쓰긴 했으나 사실 더 많은 내용이 있다. 여러 명이 플레이했기 때문에...원래 다 쓰려고 했는데 엄청 길어져서 포기야...
정성글은 개추
길다고 해서 긴장했는데 별로 안 길었다...
캠페인 시작할 때도 얘기했었지만, 제4차 십자군은 목표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카이로였습니다. 착오 없으시길...
ㄴ이슬람교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치자는 취지였다는 건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읽는 사람 이해하기 쉬우라고 성지 회복으로 썼습니다
캐릭터 E 시점의 이야기라 이쪽이 주인공인 듯한 느낌인데... 이런 장면할 때 다른 플레이어들은 주로 관객 포지션인지? (돌아가면서 극적인 주인공이 되는 식?) 아니면 이 캐릭터 개인의 스토리 안에서도 서로 긴밀하게 얽히는 건가?... 그러려면 꽤 까다로울 것 같지만;
ㄴ일단 포옹까지는 확실하게 주인공이었고(왜냐하면 뱀파이어 되는 비커밍은 혼자 하니까...), 아들을 살해하는 장면도 E에게 매우 중대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주인공 포지션 맞았음. 단, 전체적으로 보면 E의 사정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의 생각이나 선언도 함께 엉켜서 전체 스토리가 형성되는 식. 참고로 이 뒤엔 E 말고 다른 캐릭터가 주인공 포지션인 단독 장면이 나왔지.
스포트라이트는 매 Story가 끝날 때마다 순차적으로 돌아갑니다. 뭐, 매번 모든 플레이어들이 잘 받는 건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