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글을 써볼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글을 쓸 시간이 안 나서 못쓰고 있었습니다. 원래 쓰고 싶었던 글은 "그럼 ㅈ같은 WoD를 실제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였는데, 너무 길어질 내용 같아서 주제를 바꿨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제는 WoD Dark Ages: Vampire에서의 Road입니다. WoD Dark Ages: Vampire(이하 DV)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단연 Road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Road를 아는 사람은 적고, 알아도 챙기는 사람은 더욱 적더군요. 그래서 간만에 DV를 다시 하게 된 것을 계기로 간단히 Road에 대해 썰을 풀어볼까 합니다.


1. Humanity와 Road - Road란 무엇인가?

VtM에는 소위 Humanity라고 하는 수치가 있습니다. Humanity는 한 뱀파이어가 얼마나 인간적인 감정에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척도를 의미합니다. 뱀파이어들은 죽은 몸뚱이의 포식자로 살아가는 밤이 길어질수록 인간의 감수성을 잃어갑니다. 이는 뱀파이어가 되면서 인간적인 사회관계를 더 이상 예전처럼 구축해나갈 수 없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생리적으로 인간과 달라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뱀파이어의 저주에 의한 소위 Beast라고 하는 야수적 본능 때문이기도 하지요.


 Humanity가 높은 뱀파이어들은 여전히 인간처럼 느끼고 다른 인간의 감성에 쉽게 공감하거나 이입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다운 감수성"을 유지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지요. 이들은 이미 죽은 육신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산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Humanity가 낮은 뱀파이어들은 점차로 타인의 고통게 무감각하고 냉담해집니다. 이들은 곧 포식본능과 이기적 타산성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 됩니다. 얼마나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Humanity가 낮은 뱀파이어들은 정말로 시체와 유사한 상태가 되어갑니다. 피부는 창백하고, 딱딱하며, 차가워지고, 점차로 내면의 Beast에게 쉽게 주도권을 빼앗깁니다. 심지어는 활동할 수 있는 시간도 점차 줄어들지요. Humanity가 낮은 뱀파이어들은 많은 시간을 시체처럼 죽음과도 같은 휴면 상태에서 보냅니다.


 이러한 변화는 매 순간마다 체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 충격적인 사건들을 경험함에 따라, 그리고 자신은 아직 인간이라고 믿던 내면의 정체성과 신념이 부서질수록 Humanity는 천천히 감소합니다. 그에 따라 뱀파이어의 성격이나 분위기도 변화해가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많은 뱀파이어들은 깨어나 무심코 본 거울 속에서 너무도 낯선 괴물을 발견하고 자신이 얼마나 겉보기에도 섬뜩한 존재가 됐는지를 깨닫습니다. 살아가는 의미를 잃고 본능에 굴복하여 피비린내나는 삶을 살아가는 뱀파이어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대개 이런 것입니다. Humanity를 완전히 상실한 뱀파이어는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조차 잊습니다. 그런 자들은 많은 경우 피에 대한 갈증과 공포심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와이트(Wight)가 됩니다. 와이트의 운명을 피하고 싶은 뱀파이어들은 싫으나 좋으나 자기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 애씁니다.


 DV의 Road는 바로 이러한 VtM의 Humanity를 대체하고 있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Road=Humanity는 아닙니다. Road는 Humanity에 비해 더 종교적이고 존재론적인 개념들로 이루어집니다. Road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Cainite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이 이 세계에서 어떠한 위치에 속한 존재이고, 왜 이러한 상태에 처한 것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무엇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막연한 불안과 혼란 속에서 피로 물든 밤을 지내다 보면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결국 미치고 맙니다. 그렇기에 VtM의 뱀파이어들이 Humanity에 괴로워하는 것처럼 DV의 뱀파이어들 또한 Road에 집착합니다. Road는 뱀파이어가 어디서, 왜 생겨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정체성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Road는 중세 뱀파이어들의 철학이자, 신앙이며, 삶의 방식인 셈입니다.


 예를 들어서 Road of the Beast를 따르는 뱀파이어들은 모든 Cainite는 포옹을 받은 순간부터 Beast를 존재론적 본성으로 갖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Road of the Beast를 걷는 뱀파이어들은 자신들이 걸친 인간적 육신과 정신구조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야수와 가까운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이들은 배고프면 사냥하고, 강한 우두머리에게는 머리를 조아리고,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자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새로운 본성에게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자연스러운" 존재 양태에서만 Beast의 발작 없이 안정된 상태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VtM 기본 규칙서에 나왔던 말처럼 "A beast I am lest a Beast I become"인 셈입니다.


 심지어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사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야수의 삶"인지에 대해 연구하기도 합니다. Road of the Beast의 하위갈래인 Path of the Hunter를 따르는 뱀파이어들은 사냥과 포식이야말로 야수적 삶의 핵심이라고 여깁니다. 반면 Path of the Nomad는 굳이 야생에서 짐승처럼 살아갈 필요 없이, 문명에 길들여진 나약한 삶의 방식만 부정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Path of the Nomad를 따르는 뱀파이어들은 문명을 피해 떠돌아다니는 삶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한 Path of the Grey Hunter는 "야수적 삶"의 외연보다는 내포에 집중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문명이야말로 뱀파이어에게 가장 최적화된 사냥터입니다. 도시에서 인간들을 유혹하고, 유인해내서, 효율적으로 사냥하는 것. 그리고 다른 뱀파이어로부터 인간들이 많이 모이는 사냥터를 사납게 지켜내는 것 또한 "야수적 삶"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2. Road의 필요성 - 이런 걸 대체 왜 쓰는가?

위에서 예로 든 Road of Beast를 통해 알 수 있듯이 Road라는 것은 Cainite의 존재론적 자기규정입니다. 물론 "시발 내가 왜 이런 거나 하고 있어야 해?"라고 하실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Road는 상당히 재미있는 주제이자 소재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WoD의 뱀파이어는 기본적으로 "어느 개인이 뱀파이어가 되며 겪는 변화와 고뇌"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고뇌는 주로 "뱀파이어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잔혹한 행위들"이 "인간 시절의 정서와 도덕율"과 충돌하면서 촉발됩니다. 따라서 뱀파이어들이 겪을 고뇌를 구체적으로 스토리텔링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뱀파이어가 인간이던 시절 지니고 있던 정서와 도덕율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중세 유럽을 살아가던 많은 이들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던 축 중 하나는 기독교였습니다. 중세인들의 정서와 도덕율 중 많은 부분은 기독교적 담론들 속에서 확립됐습니다. 따라서 중세 뱀파이어의 고뇌를 다루기 위해서는 우선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믿음을 갖고 살던 어느 인간이 뱀파이어가 됐을 때의 충격을 상상해야 합니다. 영혼이 저주를 받아서 산 송장이 된다는 상황은 분명 오늘날의 사람들보다는 중세인들에게 훨씬 더 실제적이고도 끔찍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DV의 뱀파이어들이 이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상황을 해석한 이론이 바로 Road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의 흉물스러운 존재를 설명하고, 기독교 세계관 내에서 자기가 속할 자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봐도 좋습니다. DV는 기본적으로 어두운 시대, 미신이 지배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들은 인간으로 살다가 어느 날 괴물로 변모하여자신들이 처한 이 새롭고 저주받고 부자연스러운 상태에 놀라고 무서워하는 이들입니다(Introduction과 Chapter 1과 Chapter 8에 따르면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Road를 배제한 채 DV를 진행하면 어떻게 될까요? 영성에 대한 의식이 어느 때보다 강했던 시대에, 신에게 저주를 받은 괴물이 된 데 대한 존재론적인 고뇌의 상당부분을 생략하고 진행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굳이 Road를 배제하겠다면 그 또한 존중해야할 취향이겠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DV의 축을 이루는 중요한 주제이자 소재를 하나 빼놓고 진행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3. Road의 활용법 - 어떻게 쓰는가?

사실은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주제이자 소재라고 해도 스토리텔링할 방법을 모르면 쓸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DV의 모든 Road들을 관통하는 단일한 스토리텔링 방법론을 직관적으로 설명하기란 무척 힘든 일입니다. 많은 Road들이 서로간에 상이한 믿음과 생활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Road를 따르는 어떤 인물이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스토리텔링이 요구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생 동안 고향에서 10마일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농노 아낙 출신의 Road of Humanity를 따르는 겡그렐 뱀파이어와, 출산 중 아내와 자식이 둘 다 죽어서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성지순례를 떠났다 포옹된 신앙심 깊은 젊은 기사 출신의 Road of Kings를 따르는 말카비안 뱀파이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크게 다를 겁니다. 그리고 그 세상 속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다르겠지요. 이들을 단지 중세 유럽인 출신의 뱀파이어라는 공통점만 가지고 비슷하게 굴리는 건 큰 실수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최소한 Road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규범화된 도움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WW는 한참 Dark Ages 시리즈를 찍어내던 시절 주요한 다섯 Roads를 다루는 설정집들을 낸 적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서적을 게임 규칙상의 도움을 받기 위해 사는 일은 결코 없으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Road에 대한 설정상 이해와 스토리텔링 지침을 얻기 위함이라면, 저는 다섯 권 모두를 추천합니다. 사실 제가 여기다 씨부리는 이야기보다는 이 책들을 정독하시는 게 실제 플레이에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책 사서 보세요"라고 하고 끝내기는 조금 그렇네요.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다섯 가지 주요 Roads에 대한 개략적 설명 및, 이 Roads를 걷는 뱀파이어들의 스토리텔링에 참고가 될 예시 작품들 및 도움말을 조금 찌끄릴까 합니다. 그렇지만 그게 지금은 아닐 것 같군요. 이미 많은 분량을 써서 슬슬 글 쓰기가 지겨워지기 시작했거든요.


 다음에 이어서 글을 쓴다면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다섯 주요 Roads 및 그것들의 스토리텔링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왠지 중요한 시점에서 잘라먹고 도망치는 것 같군요.


 그럼 여러분 모두 이만 총총...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