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분열의 시대, 셋.
공간이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찢고 뒤틀 수 있는 것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그럴만도 하다. 지금까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자신에 대한 인식이 거짓인데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마저 거짓된 것임은 당연하다. 어쩌면 세계마저도 거짓된 것이겠지. 그렇기에 이렇게 뒤틀어버리는 것이 쉬운 것 아닐까.
“...”
서향이 어두운 공간으로 빠져나온다. 어딘가의 구역질나는 거리. 공간을 찢고 나오자 마자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진다. 마침 그녀의 등 뒤에 있던 벽에 부딪혀 힘없이 쓰러지는 그녀의 몸. 손 끝을 움직여보려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아무런 감각이 없다. 인공안구가 파괴된 탓일까,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일으켜 줘.”
그녀가 명령한다. 팔에 깃든 그녀의 악마가 그 말을 순순히 따른다. 그녀의 몸이 사지의 힘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현실교란적인 힘에 의해 일으켜진다. 마치 인형이 강제로 일으켜지는 것처럼.
여긴 어디지.
이왕 현실교란자, 아니, 깨어난 자Mage라면 예전의 스승님과 동료들에게 돌아가고 싶었는데. 여기는 오더 오브 헤르메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보인다.
“정확하게 도착하셨군요.”
어두운 골목으로 밝은 빛이 비춰진다. 서향이 그쪽으로 하나만 남은 눈을 돌려쳐다본다. 그녀의 몸이 다시 한번 어색하게 움직여져 자신을 발견한 자를 향한다. 서향이 마음 속으로 속삭인다.
“날 어디로 데려온거지?”
“네가 원하는대로 네가 비슷한 자들에게 데려왔지.”
비슷한 자Nephandi들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저희와 목적이 같은 분들을 찾는 것은 항상 기분 좋은 일이죠.”
서향이 경계하지만 그녀를 찾아낸 자는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저는 펜텍스 인사부에서 나왔습니다. 자, 면접을 진행해 볼까요.”
이제, 더 이상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레인저는 대놓고 자신의 동기이자 실제적상관인 류 국장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직도 별다른 수단이 없다. 하은이 증거가 하나 더 있다고 했지만, 그걸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너무 무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더 끌어봐야 있는 증거가 없어지는 꼴밖에 나지 않는다.
“감독관님, 컨설턴트입니다.”
노먼이 보고한다. 컨설턴트란, 하은을 가리키는 것이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곧바로 그레인저의 집무실 문이 자동으로 열리며 하은이 들어온다.
“감독관님.”
“시설이 맘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예전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상당한 수준이더군요.”
하은은 사실상 MSF-44 아말감에 갇혀지내다시피 하고 있었다. 반 정도는 구금, 반 정도는 보호지만. 하지만 하은은 개의치않아하는 듯 했다.
“이미 감사부에서 절차가 진행되고 있어요.”
“아이보리 타워 차원에서 말인가요?”
“네. 최상층 감사부가 아니면 류 국장은 건드리지도 못할테니까요. 컨벤션의 고위 요원들이 참가한 합동조사부가 담당할거에요.”
하은이 그레인저의 건너편에 앉는다. 그들 사이에는 새까만 색의 홀로스크린을 겸한 업무용 데스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레인저의 손짓과 함께 홀로스크린들이 떠오른다.
“당신의 제안을 들어보기전에, 물어볼게 있어요.”
하은이 방 안을 둘러본다.
양 코너에 있는 카메라가 그녀의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다.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의 팔걸이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금속이지만, 아마도 그녀의 맥박을 탐지하기 위한 센서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이 방 전체가, 거대한 거짓말 탐지기인 것이다. 알량한 훈련 따위로는 속일 수 없는 디바이스들도 분명히 설치되어 있으리라.
“당신의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러니, 양해해줬으면 좋겠네요.”
“아뇨. 문제 없습니다.”
“좋아요. 류 국장을 고발 하는 것을 돕는 이유가 뭐죠? 봉사활동은 아닐테고.”
하은이 끄덕이더니 대답한다.
“알고 싶어서, 그리고 복수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다.
그레인저가 자신의 신경망으로 들어오는 피드를 체크한다. 고도로 훈련된 NWO 요원들도 속이기 힘든 디바이스들 마저도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징후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인저는 그녀를 완전하게 신용할 수 없었다.
“당신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이걸 좀 봐줬으면 좋겠네요.”
그레인저가 한 홀로스크린을 손가락으로 가리킨후 가볍게 두 손가락을 벌리는 동작을 취한다. 그 화면만이 커진 상태로 다시 나타난다. 하은이 그 광경을 쉽게 식별해 낸다.
“제 기억이군요.”
하은이 끄덕인다.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무엇인가를 마시는 예언의 내용. 당연히 알고 있다. 쓰렛널과 조우 했을때 한 레지던트가 그녀의 기억, 정확히는 예언의 기억을 추출했던 것이다.
“이건 왜 보여주시는거죠?”
“그때 당신의 기억을 추출했던 장비가 류 국장 측에서 유출 된 것 같으니까요. 여기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말해 줄 건 없나요?”
“네. 없습니다.”
[에이다. 제 집무실 앞에 대기해줘요.]
[네.]
하은과 대화를 나누며 에이다에게 지시하는 그레인저. 그러나 전혀 티를 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하은에게 묻는다.
“이 기억도 증거로 제출할겁니다. 변조불가능한 파일 포맷이니 의심받지는 않을 거에요.”
“하지만 제출하려면 재암호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제가 이쪽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변조불가 포맷이면 힘들-”
“뭐라고 했죠?”
그레인저가 그녀의 말을 끊는다.
“제출하려면-”
[에이다.]
[네.]
[제압하세요.]
아무런 이의 없이 에이다가 즉각 그녀의 명령을 따른다. 문이 열리고 다섯명은 되는 클론들이 들이닥친다. 순식간에 집무실이 엉망이 된다. 좁은 공간 안에서 덤벼드는 클론들과 하은이 대치한다.
“무슨-”
하은이 클론들을 제압하려하지만 수가 너무 많다. 그녀가 무슨 수를 써보기도 전에 클론들이 그녀의 양 팔을 붙든다. 그녀의 몸에 미끄러지듯 다가온 에이다가 그녀의 목에 인젝터를 박아넣는다. 피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의식이 사라진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녀를 클론들이 붙들고 우두커니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그 모습을 보며 에이다가 묻는다.
“진, 이유는?”
“이 기억 데이터가 원래부터 암호화되어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몰라요. 저랑, 그때 만났던…”
그레인저가 말꼬리를 흐린다. 자신, 쓰렛널에 속한 레지던트, 그리고-
그때의 에이전트, 퀸란 윌로우 1세를 제외하고.
논리적인 추론 같은 것을 할 필요도 없이, 퀸란 윌로우 1세가 어떻게든 하은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이미 그에게 완벽하게 세뇌된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목적이 유니언을 무너트리려는 일임을 상기한다면 지금 발견한 것은 천운일 것이다.
-애초에 퀸란이 그것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긴 했다. 그녀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고 모든 것을 사전에 아는 듯한 움직임까지. 아무리 류 국장에게 복수를 하고 싶더라도 단순히 의지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어쨌든 검사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의무실로 옮겨줘요.”
그 말과 함께 에이팍에게 추가적 지시를 내리는 그녀.
[소위.]
[네, 감독관님.]
[신경정보 스캐너를 준비해줘요. 조작은 내가 할테니.]
[알겠습니다.]
“가죠.”
그녀의 말과 함께 클론들이 하은을 조심스럽게 옮기기 시작한다.
“...말도 안돼.”
그레인저가 거의 경악에 가까운 신음을 뱉는다.
그녀는 수면상태에 빠진 하은의 뇌를 신경망 분석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퀸란의 수작에는 쓰렛널의 기술이 쓰였을 것이 분명하므로 함부로 계몽심리학을 사용할 수는 없다. 역으로 사이코다이내믹스가 작동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신경망 분석을 통해 기본적인 정보 변조 패턴을 알아내면 어떤 방식의 세뇌가 작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레인저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어떻죠?”
“제가 잘못했을지도 몰라요.”
그레인저가 콘솔에서 손을 내린다. 차분함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음으로 인한 보류에 가깝다.
“그 정도입니까?”
에이다가 심상치않음을 감지하고 묻는다. 그레인저가 몇가지 명령을 입력하자 스크린이 바뀐다. 하은의 두뇌 스캔이 파란색과 붉은색으로 나뉜다. 붉은색의 영역과 파란색의 영역은 몇몇 군데에서만 연결되어 있을 뿐 확실하게 구분이 가능했다.
“이게 뭐죠?”
“뉴런 간 정보 교환량을 나타내는 거에요. 그런데 각각의 구역은 그 내부에서만 정보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지금 노하은의 뇌는 두 명의 의식이 공존하는거죠.”
“...그런 기법은 처음 들어봅니다.”
“네. 냉전 시대때나 쓰던 기법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제 정신으로 깨어날 확률은 낮아요. 기껏해야 20% 정도. 너무 서두른 것 같네요.”
“진. 일단 기다려보죠.”
“그 이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네요.”
그레인저가 스크린을 노려보며 씁쓸하게 말한다.
-아.
하은의 정신이 깨어난다.
무엇인가 보고 있었다.
가족에 관한… 기억?
하은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 뿐이다.
그러고보니, 이상하다.
언제부터인가 자신에게는 가족에 대한 기억이 희미할 뿐. AP-5 아말감에 들어오기 전의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개조되면서 기억이 지워진걸까. 그렇다면 왜 이 기억은 남아있는거지?
“아빠!”
어린 하은의 목소리가 기억속에 퍼져나간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자신의 아버지가 보인다. 그가 다가온다. 방음이 확실해야할 유리창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린다. 아니, 어쩌면 소리가 아닐지도 모르지. 입모양과 손동작, 극도로 주의깊은 관찰을 통해 하은이 알아듣지 못하는 부분은 반복하고 강조하여 자신의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한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그.
그의 몸은 수척 하지만 그의 눈에는 초인적인 의지가 담겨있었다. 하은이 알아챈다. 그의 몸은 이미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은아.”
“아빠!”
“아빠가 항상 가르쳐줬지? 언제나, 길을 찾을 수가 있단다. 그저 주의깊게 살피기만 하면 될 뿐이야.”
길을 찾는다는 일Procedure. 그 말과 함께 안전해지는 느낌이 마음을 감싸온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간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초인적인 의지. 자기 자신의 안위 따위는 한참이나 넘어선 거대한 무엇인가를 위한 의지다.
“네. 잘 기억하고 있어요, 아빠.”
“만약에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하면 된다고 했지?”
“엄마 친구들을 부르면 돼요.”
친구들Spirit을 부른다, 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진다. 왜일까.
“그래. 네 엄마 친구들이 길을 알려줄거다.”
“아빠?”
하은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네게 마지막으로 보여줄 것이 있단다.”
그가 하은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 어떤 것에도 멈추지 말아야한다. 답을 찾기 위해서라면, 끝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이유로도 멈추지 말아야 해.”
그가 숨을 가쁘게 내쉰다.
“아빠?”
“그래,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걸 내가 직접 보여주마. 그 어떠한 경우에도.”
그가 일어난다. 그의 몸에 주렁주렁 달려있던 링겔과 생명유지를 위한 장치들이 보인다. 그의 몸은 기계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럼.”
그 한마디를 남기고, 그가 장치들을 떼어내버린다.
“아빠...”
그녀의 신음과 함께 기억이 사라진다. 연기처럼 흐려지는 장면들 가운데 누군가 걸어온다. 검은 양복의 요원. 그가 걸어오며 그녀의 기억이 흩어져버린다. 그의 머릿속에 기생하고 있는 쓰렛널의 요원, 퀸란. 그가 검은 선글라스를 벗는다.
“어떻습니까. 당신의 정신 세계가? 꿈과 무의식은 정신 쪽에 영향을 미치는 프로시져를 위한 최상의 인터페이스죠. 당신이 무엇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선글라스를 던진다. 하은의 머릿속임을 반영이라도 하듯 선글라스가 허공에서 사라져버린다. 썩어가고 짓무른 살점이 가득했던 그의 안구는 더 이상 텅 비어있지 않았다. 대신 불타는 시선을 뿜는 듯한 눈이 그녀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자신의 머릿속이? 그레인저 감독관은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은이 그를 뚫어본다.
“물론 그녀가 알아챌 것을 예견하고 있었죠. 그래서 미리 프로시져를 그 가능성에 대비해 좀 더 정교하게 해놓았습니다.”
그의 옆으로 눈부신 조명이 생겨난다. 마치 취조하는 듯한 모습. 하은이 자신의 몸이 철제 의자에 묶여 있음을 깨닫는다. 그때의 ‘교육’을 떠오른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어느새 그들은 취조실을 연상케 하는 작은 방에 있었다. 잠겨있는 철제의 문, 역광의 조명, 조용한 방,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의자, 책상, 묶여 있는 자, 묶어 놓은 자.
“지금부터 교육이 시작됩니다. 당신이 동의 하지 않을 경우, 당신은 사라지게 되죠.”
“그건 무슨 말이지?”
“아마 지금쯤 그레인저 감독관은 당신의 두뇌에 두 정신이 깃들어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죠. 당신이 하나의 의식으로 깨어나지 않으면 저를… 아니, 우리를 처분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가 조명을 등지고 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만은 그대로 보이는 것 같다.
“저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뿐입니다. 당신이 저에게 동의하던가-”
하은이 그의 말을 이해한다. 그에게 ‘동의’하면, 그것이 트리거가 되어 마음의 모든 부분을 내주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와 정신적으로 하나의 개체가 되는 것이다.
“-아니면 당신이 사라지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녀의 의식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퀸란이 대체하겠지.
“당신의 선택 역시 명백합니다. 자, 당신의 목적을 바꾸십시오. 저의 목적에 동의하십시오.”
그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기록 번호 19-NWO-44-12, 내사 건에 관한 청문회를 실시하겠습니다.”
내사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벌써 청문회라는 이름으로 류 국장에게 공개적인 모욕을 주기 위한 심사과정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레인저가 제출한 증거들은 아이보리 타워의 내사과에서 충분히 심사된 상태였다.
그러나 그레인저 본인마저도 그 증거가 불충분함을 알고 있다. 레콘키스타의 중단은 그냥 우연, 하은의 오리지널 -그리고 최근의 서향- 의 네판디로의 타락 역시 확실한 직접 증거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이시야마에 대한 조력 제공이 있지만 펜텍스에 대한 정보를 얻기가 힘들어 역시 증거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 계몽과학적인 수단을 동원해 인과를 엮어봐도 마찬가지다.
“...”
어쨌든 고발은 형식상이나마 익명이기에 그레인저가 딱히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레인저가 청문회장에 모여있는 요원들을 둘러본다.
정말로 류 국장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거라 믿는 자는 아무도 없는 듯 하다. 심지어 그레인저 자신마저도 회의적이다. 이제는 더 이상 그의 ‘보호’ 아래 있고 싶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기에 그녀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는 것이지만. 여기 모인 자들의 목적은 둘 중 하나다. 자신의 정적인 류 국장의 입지를 깎아내리거나, 아니면 그러려는 자들을 방해해 류 국장의 호의를 얻는 것이다.
“AP 심포지움의 감독관, 류 국장에 대한 고발이 있었습니다. 류 국장, 네판디와의 협력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기계음으로 변조된 음성. 류 국장이 어두운 조명 아래서 조용히 고개를 흔든다.
그레인저가 그 광경을 보며 생각에 빠진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유니언에서 높이 올라갈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원래부터도 인적, 물적 피해를 최소화 하며 단편적인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은 높게 평가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감각이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지금 이곳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이용당한다면 모를까.
“AP-5 아말감의 해체는 확실히 절차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월권 행위는 아니지 않소?”
“이곳에 질문을 하러온건지 변호를 하러 온건지 잘 모를 일이군요.”
냉소적인 말이 오가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그녀가 여기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마 여기서 자신을 보호해줄 아군, 다시 말해 류 국장의 정적에게 빌붙지 않는다면 커리어는 물론이고 목숨마저 위험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류 국장, 펜텍스에 대해서 아는 사항은?”
“위원님들이 더 잘 아실걸로 압니다. 레콘키스타 작전 당시 제게 맡겨진 대상과 관련이 있었습니다만 그 이상은 모릅니다.”
“이시야마라는 작자를 지원하던 회사에게 시설을 넘겨준 이유는?”
“DA 이후의 구조조정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 시설은 쓰이지 않아서, 예산 절감 차원에서 타 부서에게 넘겼습니다. 행정 절차 자체는 AI에 의해-”
증거가 있을리가 없지.
“-펜텍스 자체는 신디케이트 분들이 더 잘 알지 않소? 사실 이 사안에 두 번이나 등장하긴 했지만 류 국장이 큰 관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
그레인저를 비롯해 타 컨벤션의 요원들은 알지 못하지만, 이번에도 SISD에 의해 펜텍스에 대한 정보는 철저하게 차단되고 있었다. 하나의 네판디를 색출하는 것보다, 다수의 네판디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렇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은 인정할 수 없군요. 자산 재배분을 주장하신 것은 신디케이트 쪽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닙니까? 류 국장은 그 기조에 충실히 따랐을-”
그레인저가 청문회장을 둘러본다.
청문회는 NWO와 신디케이트의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네판디와의 연루 의혹이라든가 하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류 국장을 향한 질문은 10분 전부터는 나오지도 않고 있다. 그 역시 10분전부터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채 우두커니 다른 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레콘키스타 작전의 취지 자체를 부정하시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네판디의 소행으로 인과 네트워크 및 판독장치가 파괴되지 않았다면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웅성거림까지. NWO 출신의 고위 요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류 국장에 대한 청문회는 해당 이슈와 철저하게 분리해서-”
누군가가 그의 말에 즉각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잘은 모르지만, 신디케이트 측의 고위 요원일 것이다.
“그게 가능할리가 없지 않소? 나는 다른 사안은 모르지만, 페이즈 2에서 1종 오류가 발생한 것을 알고 있소. 일부 보조요원들이 사실은 네판디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더군.”
“뭘 말씀하시고 싶으신겁니까?”
“뭐, 굳이 지적하지는 않겠소만… 나도 개인적으로 류 국장에게는 별 혐의가 없다고 믿고 있소. 헌데 NWO측 분들의 말을 보아하니… 혹시 그때의 작전 실패에 대해 뭔가 숨기고 싶-”
“그런건 없습니다. 대체 여기까지 와서 왜 그런 말을-”
그레인저가 아예 귀를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네판디를 제거한다, 라는 진영 불문의 최우선 순위 목표가 아니었다면 이들이 DA 이후 그 정도로 협력하는 일 조차 없었을 것이다.
“정회하겠습니다.”
무거운 기계음이 울린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추후의 스케쥴은 위원 여러분께 개별적으로 배부될 것입니다.”
모두가 일어선다. 일어선 자들 중에는 동료들과 큰 소리로 이야기 하며 간접적으로 듣고 있을 자신의 정적들에게 윽박지르는 자들도 있다. 그와는 정 반대로 자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듯 눈 깜짝할새에 사라지는 자도 있다.
그레인저가 류 국장을 올려다본다.
그는 아무런 표정 없이 그레인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생각을 바꾸지 않는지 모르겠군요. 왜 생각을 바꾸지 않죠?”
퀸란이 묻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쩌면 몇초밖에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몇년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며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제일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단순한 머릿 속의 공간인데도 불구하고 지친다. 지치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자신이 희미해지는 것 같다.
붙잡는다.
자신의 이름을, 정체성을.
“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당신이 사라진 자리에 제가 들어갈 뿐.”
“20대 여자 흉내라도 내게?”
“오, 이런. 제가 왜 못한다고 생각하시죠? 다만 그런 쪽의 취향은 전혀 없는데다가 당신의 능력을 개발해주는데 관심이 있어서입니다.”
“헛소리.”
“제 목적은 당신의 목적보다 우선하며, 그 중요도도 높습니다. 당신의…”
그가 잠깐 말을 멈춘다.
“...마인드 실딩은 분명히 놀랍습니다. 당신이 유니언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정확한 목적은 알 수가 없군요. 하지만 저희 두 사람의 목적이 같은 방향이긴 할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희가 여기까지 왔을리가 없죠.”
“나도 저항 정도는 할 수 있어.”
“물론입니다. 당신의 목적을 들여다보고 바꿀 수 없다면 당신 자체를 바꿔버리는 수밖에. 어쨌든 시간이 충분하진 않으니 말이죠.”
그가 다시 한번 강요한다.
“자, 그렇다면 동의하십시오.”
하은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동의하십시오.”
“류 국장.”
“그레인저.”
두 사람이 마주쳤다. 아니, 마주쳐준거라고 해야겠지.
“상부에서의 네 평가는 아주 좋다. 너라면 나의 비호 없이도 꽤나 높은 곳에 올라 갈 수 있을거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게 아니야. 왜지?”
“뭘 묻고 싶은지 모르겠군.”
“왜냐고 물었어.”
그레인저가 류 국장을 쏘아본다. 그가 기복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가끔 의심이 가지 않나?”
“뭐가?”
“우리가 걷는 길에 대해서 말이야. 물론 쓸데없는 철학 이야기를 하자는게 아니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관점에서의 이야기다.”
그레인저가 한발자국 물러서서는 대답한다.
“잘못된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항상 생각은 하고 있어.”
“물론이다. 너는 헤르메틱의 분파에 속해있을 때도 그랬겠지. 우리가 길을 바꿀때는, 우리가 가는 길이 잘못되었다고 느낄때 뿐이다.”
그의 말이 조용한 복도에 울린다.
우리Mage, 라는 말은 알겠다.
그렇다면 길, 이라는 건 무슨 말이지.
“네가 문학을 전공한 줄은 몰랐는데.”
“그 뿐만 아니다. 유니언은 다른 자들의 길마저 바꿔놓곤 하지. 사실 그게 우리 전문이기도 하다.”
그레인저가 한발자국 더 물러선다. 그의 말은 예고다.
자신이 어떤 짓을 벌일가에 대한.
“하지만 다른 자들의 길을 바꿀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의, 유니언이 가는 길을 바꾸지 않을 이유도 없지.”
“대체… 그게 무슨…”
“그리고 이미 늦었다.”
“늦었다니?”
“이미 모든 계획은 실현된거나 다름없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겠지.”
그레인저가 눈을 부릅뜬다. 반신반의하고 있던 그녀도 드디어 확신을 가진다. 동시에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녀가 조용하게, 그러나 어딘가 발악하듯 대답한다.
“내가 막겠어.”
“그러지 않는게 좋을거다, 진 그레인저. 그럴 수도 없을테-”
그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레인저가 의수를 휘두른다. 카본 블레이드가 튀어 나오며 위협적으로 그의 목을 노린다.
금속이 단단한 것에 부딪히는 소리, 스파크.
류 국장이 어느새 꺼내든 권총의 슬라이드가 그녀의 블레이드를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이건 네 경고로 알도록 하지.”
그의 담담한 말에 그레인저가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재빨리 물러선다. 그녀가 말없이 뒤돌아서서는 자리를 뜬다. 코너를 돌아가기 전, 그녀가 뒤를 돌아본다. 류 국장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자, 동의하십시오.”
‘교육’이 끝에 달해가지만, 하은은 답하지 않는다.
잘 수도 없고, 쉴 수도 없다. 머릿속임에도 불구하고 허기짐은 고통이 되어 그녀를 죄어온다. 몽롱한 정신 속에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녀가 간신히 눈을 돌려 자신의 팔을 본다. 주사가 꽂혀 있다. 자백제? 각성제? 알 수가 없다. 잠에 들려는 순간 물방울이 그녀의 이마에 떨어진다. 수면 박탈의 수단. 이곳에서 잠에 들면 어떻게 될까. 깨어나는 걸까? 그런 질문을 가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고통이 습격한다.
“으… 으윽… 으…”
주사가 꽂힌 부분부터 온 몸이 불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퍼져나간다. 수면 박탈의 상태에서 엄습하는 고통은 아프다기보다는 극도로 불쾌하다.
“...”
고통이 잦아든다.
말 그대로 한계다.
“...쯧쯧.”
그가 책상 위의 회색 버튼에 손을 가져간다. 꿈이 되었든, 마음의 투영이 되었든, 정교하게 설계된 프로시져를 통한 환영이든, 머릿속에서만 만들어진 환상은 반드시 의미를 가진다. 아마도 저 버튼을 누르게 되면 이 과정이 전부 끝날 것이다.
하은의 정신은 지워지고 텅 빈 두뇌는 퀸란의 정신이 채우게 되겠지. 이미 그녀의 기억을 엿본 그이기에 흉내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미 당신의 정신은 충분히 약해졌습니다. 대체 무얼 원하는건지, 지금 뭘 하려는건지 알 수가 없군요.”
대답할 힘이 없다.
정말로 입을 열었다가는 그것만으로도 탈진해 기절할 것 같다.
“...”
정말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로 퀸란이 말한다.
“당신 만큼이나 타인에게 서투른 사람은 몇명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 때문인지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만은 정말 뛰어나군요.”
그가 조명의 그림자 속으로 물러난다.
“즐거웠습니다, 요원.”
선고하듯 말하고 버튼을 누르는 퀸란. 동시에 조명이 꺼져버린다. 희미한 퀸란의 실루엣이 그녀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럼-”
팟.
하은이 서서히 눈을 뜨고는 문을 바라본다.
실물 크기의 아주 정교한 마네킹. 아니, 인형이라는 편이 더 어울릴 것이다. 하은 자신을 닮은 모양의 그것Avatar이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선다.
“이런, 이런. 뭘 꾸미고 있나 했는데 겨우 그거였습니까.”
퀸란이 조롱하듯 말한다.
“물론 당신이 제가 만들어놓은 프로시져를 해체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하지-”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인형이 무엇인가를 바닥에 던진다.
전선, 회로, 전자 장비.
인형이 벽으로 손을 가져간다. 없어야할 스위치가 생겨나 있었다.
스위치가 올라가고, 갑자기 불이 켜진다.
“뭣-”
어둠 속에 숨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던 그의 모습이 밝은 빛 아래서 드러난다. 항상 어둠과 혼란스러운 조명 속에서만 있던 그의 모습이 처음으로 완전히 보이기 시작한다. 하은이 그때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퀸란 자신도.
그는 너무 늙었다.
너무 유약하다. 속임수, 음모, 기습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자신이 드리운 실에 걸린 인형들이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더욱 무력할 뿐.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난다. 그의 손 끝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 이게 어… 어떻게?”
자신이 실패할거라고는 전혀 생각하니 못했던 듯, 그가 경악의 비명을 지른다.
“부… 분명 조건화는 완벽했을텐데! 왜 네가 아니라 내가!”
그가 발악한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은 그였다. 하은을 구속하고 있던 철제 의자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사라져있었다. 그녀가 일어선다. 더 이상의 고통과 피곤함은 없다. 그러나 퀸란의 모습은 허망하게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왜!”
그의 한쪽 눈이 사라진다. 다른 쪽 눈에 담긴 경악이, 점점 놀라움으로 바뀐다.
“당신의 말이 맞아.”
퀸란이 뒤로 넘어진다. 그의 한쪽 다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당신의 프로시져는 해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어. 하지만 당신이 놓친 점이 없을리는 없으니까.”
퀸란이 그녀를 올려다본다. 경악의 표정이 더욱 심해진다.
“생각해보니까… 하나 있어서.”
퀸란이 무언가 깨달은듯한 목소리로 외친다.
“그… 그렇… 그렇군!”
그가 놀라움의 탄식을 내뱉는다.
“그렇게 된거군! 그렇게 된거야! 아, 아하하! 우하하하!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군!”
그가 광기에 찬 말을 외친다.
“그렇게! 그렇게 된거야! 그렇-”
그가 사라진다.
허망하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육체는 물론이고 정신 마저도.
“진. 막 깨어났습니다.”
“천만 다행이네요.”
그레인저가 급히 의무실로 향한다.
“청문회는?”
“난장판이에요. 청문회를 하러온건지 컨벤션간 알력다툼을 하러 온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의무실로 들어서는 그레인저와 에이다. 소피아가 하은의 몸에 영양제를 주사하고 있었다. 며칠간 전혀 활동이 없었던 그녀의 몸은 조금 수척해보였다.
“정신이 들어요?”
“네. 감사합니다.”
하은이 이마를 짚는다. 아직도 정신이 멍한 상태다.
“알아차리시지 못했으면 지금쯤 저는 없었겠죠.”
“다행이네요. 당신의 도움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니까.”
“내사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 모양이네요.”
“생각하는 것보다 더요.”
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가 담담하게 말한다.
“그럼 죄수를 탈옥시키러 가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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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 통증으로 조금 늦었습니다.
이제 10화 정도 남았겠네요.
동의하십시오.
동의(동의 안함)
끝나가는구나
동의 안함에 동의한건가여
하은 아버지 ㄷㄷ - dc App
퀸란 지 혼자 알고 사라지네 ㅡㅡ - dc App
퀸란은 대체 뭘 알아낸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