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분열의 시대, 넷.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희 데미지 컨트롤은 레콘키스타 작전에 쓰인 판별 기술을 철저하게 검사하였습니다. 전통적인 생물학과는 거리가 멀지 모르지만 저희는 신경 패턴과 사고 과정을 높은 정확도로 매핑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틀째의 청문회장은 약간 더 차분했지만, 핵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게 대체 지금 왜 등장하는지 모르겠군.”


비아냥. 그러나 발언자는 말을 계속한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건, 작전 자체에 쓰인 기술이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겁니다. 만약 누가 시설을 사보타주 했다면, 정말로 네판디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거죠.”


그 발언에 담긴 뜻을 즉시 알아차린 누군가가 반박한다.


“류 국장이 인과 네트워크 시설의 사보타주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오. 나는 그것보다 대체 이 펜텍스...라는 대기업이 무슨 이유로 계속 증거에 등장하는 건지 알고 싶군.”


아주 잠깐의 웅성거림.


“정말로 펜텍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는 것이오?”


“제공할 수 있는 것은 다 제공해드렸습니다. 인과 네트워크에 제공된 펜텍스의 기술에 대해서는 제공 받은 당사자들인 NWO 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시오. 당신들의 통제 하에 있는 집단 아니오?”


신경전이 계속된다.


“몇번 말씀드려야 합니까. 저희 신디케이트는 산하 조직을 NWO의 방식으로 통제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좀 더 자율적인 산하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고, 필요한 정보만을 제공받고 제공합니다.”


“그 말은 모욕적으로 들리는데?”


“모욕적인게 아니라 실용적으로 말하고 있는겁니다. 대다수 NWO의 산하 조직들은 편집증적으로 감시받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1984에나 나올-”


“지금 말 다했소?”


언성이 높아진다. 이터레이션 X와 보이드 엔지니어의 대표 격으로 나와있는 위원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담담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류 국장. 그는 상황을 우두커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니, 정말 그때 깜짝 놀랐다니까요?”


소피아와 이시야마.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마친 상태였다. 펜텍스에게서 탈취한 뱀파이어 폭주 유도 기술 분석은 완료했다. 심지어 원한다면 재현마저 할 수 있다.


“분명히 제가 경고했는데 굳이 이식한다고 하더니만 한달 뒤에 와서는 떼 달라고 하고 있는거 있죠? 이유가 더 가관이에요. 변기에 앉을 수가 없다는 거죠.”


두 사람이 웃는다. 꽤나 저질스러운 농담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가고 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군대에서 나올 법한 농담.


잠깐의 여유시간. 두 사람은 정말 잠시나마 2차 대전때의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그 때는 셋이었지만 지금은 둘이라는 것.


“아니, 그런데 이해할 수가 없구만. 그 때라면 이미 여가적 의미에서의 이식은 거의 완성에 도달했을 텐데?”


소피아가 고개를 흔들며 웃는다. 그녀가 두 손가락을 펴서 흔든다.


“아니, 그러니까 말일세.”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드는 그녀. 그러더니 손가락을 하나 더 편다. 그가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는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폭소한다. 


“세상에. 정말인가?”


“아니, 진짜라니까요?”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구-“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그레인저 감독관이 들어온다.


“아, 잘 왔어요!”


소피아가 즐겁게 웃으며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그러나 그녀가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든다. 


“이시야마 아즈마, 당신을 유니언에 대한 3급 위반 및 일련의 명령 불복종. 그리고 탈주에 대한 혐의로 체포합니다.”


방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래, 시간이 된것이로구만.”


소피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그녀의 눈에는 안타까움만이 있을 뿐.


“라이언 중위, 행운을 비네.”


그가 일어서며 악수를 청한다.


“운이 좋으면 다시 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될 수도 있죠.”


그레인저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다. 소피아가 간신히 일어나 그와 악수한다.


“갑시다, 감독관. 자비로운 집행에 감사드리오.”


그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이 방에서 나간다. 소피아는 그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정말 사면될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아는 것 이상은 그녀가 알수도, 알아서도 안되는 내용이니까.




“에이팍 소위. 다시 말하지만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거에요. 알았나요?”


“네, 감독관님.”


에이팍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했다. 지금 그레인저가 하려는 일이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위험한 것이라는 점은 빼고.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마세요.”


“알겠습니다.”


“당신의 실력은 확실하니까… 추천장이라도 남겨야겠네요.”


“감사합니다, 감독관님.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게 되면 저는 지상근무에서 빠지면 될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마지막 장비를 챙겨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시야마와, 죽은 그의 클론을 감금하고 있는 케이지도 그의 작품이다. 몇겹으로 된 케이지. 노쇠한 노인과 시체가 아니라 늑대인간 정도 되는 괴물을 감금할 법한 크고 기밀성 있는 케이지다.


“빠듯한 시간내에 만들어내느라 고생했어요.”


“감사합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군인답네요.”


그레인저가 그의 어깨를 톡톡 친다. 에이팍이 삼키기 직전의 말을 꺼낸다. 


“감독관님은 지나치게…”


“지나치게?”


“...용감하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레인저가 미소지으며 다시 한번 어깨를 두드려준다.


“칭찬 고마워요.”




“역시, 냉전 시대의 프로시져 답군요.”


“네. 솔직히 말하자면, 제 실력으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자신과 목적이 같지 않으면 정신을 지워버린다니… 슬리퍼 에이전트도 아니고.”


수송차량 안에서 그레인저가 메스껍다는 표정을 짓느다. 그녀가 속한 유니언은, 과거부터 그러한 끔찍한 짓을 저질러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다. 최소한 그때는.


“다행스럽게도, 고도로 복잡한 프로시져라 헛점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어떤?”


“도착했네요.”


그레인저의 말에 하은 대신, 에이다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말로 대답한다.


룸 101.


물론, 모든 테크노크라틱 아말감에는 나름의 룸 101, 다시 말해 세뇌 및 심문 시설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그것과는 다르다. 룸 101의 이데아가 있다면 바로 이들이 향하는 곳일 것이다.


어느 군 시설 지하 -정확히는 그 군 시설이 유니언의 시설 위에 지어진 것이지만- 에 있는 거대한 세뇌, 심문, 그리고 감금 시설의 종합. 


이곳에 들어온 자가 나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두가지의 경우밖에 없다.



자기 자신이 아니게 되는 경우.


또는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도 그 자신이 아니게 될 수가 없는 경우.



“재밌네요.”


그레인저가 수송 차량에서 내리며 말한다. 그녀의 뒤에서 자동으로 움직이는 케이지. 회색으로 칠해진 칙칙한 케이지가 그 흉측한 외형과는 달리 부드럽게 움직이며 그녀를 따른다. 하은이 그레인저에게 묻는다.


“뭐가 말입니까?”


“한번 이곳에서 나간 사람이 다시 한번 들어오려하다뇨. 스파이 일을 하면서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이 있어요.”


“한번 침투해서 빠져나온 곳에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 라는 원칙입니까. 하지만 전 자진해서 들어온건 아니었으니까, 예외로 하죠.”


그레인저가 대답하는 대신 관리 AI를 호출한다.


“MSF-44 아말감 감독관, 진 H. 그레인저. “


단순한 소속과 성명에 즉시 반응해 소형 드론을 날려보내는 AI. 주먹만한 크기의 드론이 그녀를 따라 날며 합성음을 낸다.


“안녕하십니까, 감독관님.”


이 시설은 이터레이션 X가 가지고 있는 AI 중에서도 최고 성능인 AI가 ‘간수’를 맡고 있다. 간수이자 시설 관리인인 이 AI는 최고 수준의 보안 레벨으로 가동된다. 논리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잡혀들어간 자신들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 해킹을 시도한 VA가 몇 있었지만 예외없이 모두 실패했다. 따라서,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수’를 데려와야한다.


“상부에 보고한 대로 이시야마 아즈마, 그리고 그의 클론을 이송하기 위해 왔으니, 절차를 진행시켜 줘.”


“지금부터 신원 확인에 들어가겠습니다.”


전자음과 함께 AI의 스캐너가 그들을 스캐닝한다.


그레인저, 하은, 에이다, 그리고 그녀가 조종하는 네명의 클론. 


“2명의 요원, 5명의 클론 요원의 신원 확인이 완료되었습니다. 환영합니다.”


하은은 ‘클론 요원’으로 분류되는 모양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시스템에 분명 사망으로 기록되어 있을테지만 사망했다가 재생산되는 클론 요원들의 특성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한번만이라도 클론은 클론이라는 거네요.”


하은의 말을 무시하듯 AI가 케이지로 다가선다. 비파괴식 스캐너가 스캐닝을 완료한다. 


“상부의 신원정보와 일치합니다. 42 구역으로 향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이 열린다. 그레인저가 주위를 살펴본다. 아무런 장식도, 부수 기자재도 없다. 말 그대로 문과 복도의 역할만을 하는 곳이다. 그들이 문으로 들어선다. 즉시 내부에서 대기중인 두 명의 클론이 그들을 맞이한다.


“안녕하십니까, 감독관님. 42 구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두 클론을 따라가는 MSF-44 아말감의 요원들. 


이곳은 적막하다. 


아무것도 없고, 지나치게 깔끔하고, 공기중에는 먼지 하나 없는 느낌이다. 온통 흰색인 복도.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듯한 질감에 구역질이 날 정도다. 지하에 지어진 시설일텐데, 지하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흰색의 조명 아래로 가끔 돌아다니는 관리형 드론을 제외하고는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도에 있는 것이라고는 동일한 간격으로 배치된 문 뿐. 


“...”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없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방음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을 수도, 누군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의 심문과 고문을 받고 있을 수도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계 이면과 인간의 인식을 넘어선 신비를 통해 시공간을 휘던 트래디션 메이지가 테크노크라시의 충실한 요원으로 세뇌되고 있을 수도 있다. 굴복않는 에테라이트가 프리미움 골격과 두뇌만 남기고 히트마크의 재료가 될 수도 있다. 


하은이 그 문을 본다.


오래전 그녀도 이 문들 중 한 곳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오리지널이. 그러나 마치 자신이 겪은 일 같다. 육체의 연속성은 없지만 정신과 기억의 연속성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영혼의 연속성까지 있을지도 모르지. 지금 이 복도를 걷는 하은은, 오리지널의 유전자와 기계의 조합을 통해 탄생한 무엇인가에 담겨있는 정신으로 부터 비롯된 자다. 


어떻게 보면 이 거대한, 편집증적으로 지어지고 완벽하게 소독된 감옥은 그녀를 담고 있던 자궁인 것이다.



한참을 걸어간다.


광경은 똑같다. 


다시 걸어간다.


똑같은 광경이 계속된다.


다시-



척, 하는 소리와 함께 하은이 멈춘다. 그녀를 따라 MSF-44 아말감의 요원들이 멈춰선다.


“감독관님, 이쪽입니다.”


안내용 클론이 재차 말한다. 그 말을 무시하듯 하은이 담담하게 말한다.


“여기입니다.”


푸욱.


붉은 피가 새하얀 벽을 적신다. 그레인저의 의수에서 뻗어나온 카본 블레이드가 클론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픽,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클론의 머리가 탄에 뚫린다. 에이다가 쏜 총탄이다.


“케이지 전개.”


위잉-


순식간에 이시야마를 구금하고 있었던 케이지가 전개된다. 순식간에 직육면체가 평면이 되어 벽을 틀어막는다. 마찬가지로 죽어버린 그의 형제의 몸을 담고 있던 케이지도 전개되어 복도를 이중으로 틀어막는다. 케이지 안에 담겨있던 시체와, 이시야마가 바닥으로 풀려난다.


“여… 여긴…”


“당신은 자유입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레인저가 우두커니 서있는 이시야마를 보며 일방적으로 고한다.


“미안해요, 당신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네요.”


그렇게 말하고서는 돌아서는 그레인저.


“경비 시스템의 히트마크가 들이닥쳐서 이 벽을 파괴할때까지 30분, 어쩌면 40분. 서비스용 터널을 통해서는 15, 20분 정도 되겠지만 그 방향으로는 아마 위협이 될만한 걸 동원할 수는 없을겁니다.”


에이다가 보고한다. 


“여기인건 어떻게 알죠?”


그레인저가 묻는다. 대답 대신 하은이 목걸이를 꺼내든다. 자물쇠 모양의 목걸이. 그것이 공중에 뜬다.


“윽…”


그레인저가 한발 물러선다. 그 목걸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이 피어오른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지금 당장 하은의 손에서 그것을 빼앗고-


“맞네요.”


어느새 나침반 모양으로 변한 옥룡이 복도의 문을 가리킨다. 하은이 즉시 그것을 다시 품 속에 숨긴다. 동시에 그걸 뺏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진다.


“대체 그건 뭐죠?”


“힌트요.”


하은이 간단하게 대답하며 다가가 그 문을 연다. 잠겨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잊을 수 없는 방이 있다. 수술대 같은 무언가. 그 위에 뻗어있는 기계팔들.


“이곳입니다. 제 오리지널이 있었던 곳이.”


이곳에서부터 역으로 쫓아가면 그들이 목표로 하고 있는 자에게 도달 할 수 있다.



AP-5 아말감의 해체, 그 이후 사라진 하은, 류 국장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을만한 사람이 딱 한명 있다. 정확히는 두명이지만.


하은을 유니언에 채용한 보이드 엔지니어, 웨더스 소령. 


그를 보좌하던 행정관, 백 사장.


AP-5이 해체되던 밤. 에이다는 총격으로 실신, 하은은 그날 밤 이후 더 이상 원래의 그녀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제정신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던 것은 웨더스 소령과 백 사장 단 둘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이 시설에 감금된 채로. 무언가 마지막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여기 뿐이다.



“알았어요. 감상에 빠질때가 아니네요. 가죠.”


모두가 뛰기 시작한다. 에이다가 조종하는 클론들이 그들을 엄호하고, 맨 앞에는 하은이 길을 이끈다.


“기억 추출용 디바이스는?”


“격리 큐브에는 개별적으로 기억 추출 장치가 장비되어 있어요. 변조불가한 포맷이니까 현장에서 편집해 류 국장에 대한 내용만 보내면 될거에요. 통신을 위한 디바이스는 준비됐어요.”


“알겠습니다. 편집은 맡기겠습니다.”


한참을 뛰어간다. 


“이제 오른-”



철컹.



그 순간, 모든 시설의 불이 꺼진다.


그레인저가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삐- 하는 꺼진 조명의 신음만이 들릴뿐.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모두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안다. 하은의 경우는 직접 겪어보았고, 그레인저는 종종 목격한 적이 있었다.


“제법이군.”


어두운 복도에, 방향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감정이라고는 담겨 있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에서는 연민이나 공감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설마 내가 모를거라 생각한건 아니겠지.”


류 국장이다.


한참전부터 이미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고 이곳에 함정을 심어놨다는 말인가.


어쩌면 지금까지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었다는 것 자체가 함정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강화된 안구를 지니고 있는 에이다 뿐이다.


“에이다. 클론 하나만 빌려줘요.”


즉시 클론 하나가 그레인저의 통제로 넘어온다. 에이다보다는 미숙하지만 감시정도라면 할 수 있다. 잠깐의 불편한 느낌이 지나가자 클론의 시야가 연결된다. 마치 눈을 네, 다섯개 가지고 있는 느낌. 자신의 눈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새롭게 확장된 시야는 명암 비가 무척 낮은 흑백 화면 같다. 


“안 보이는 상태로 길을 찾을 수 있겠나요?”


“그건 힘들것 같습니다.”


하은의 말에 그레인저가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다.


“위치를 드러내는 건 좀 그렇지만 어차피 여기가 저격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니까요.”


그녀가 외투를 벗어던지고 의수를 들어올린다. 의수 내부의 체액을 대신하는 나노머신이 분자구조를 재배열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내부 에너지가 공급된다. 서서히 그녀의 팔이 빛나기 시작한다. 복도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밝긴 하다.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동하죠. 따라잡힐때까지 얼마 걸리지-“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옆에 있는 문이 열린다. 


마치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아니면 시설내의 통로를 이용한 것일까-, 이곳에 도달할 줄 알았다는 듯한 모습으로 류 국장이 걸어나온다. 언제나처럼이다. 정부 요원들이나 입을법한 위압적인 정장, 몰개성함이 눈에 띄일 정도로 그 인상을 기억하기 힘든 얼굴, 가까이서 관찰해야 동아시아인이라는 것을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의 윤곽, 감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표정. 그가 선글라스를 벗는다.


“이건 필요 없겠군.”


선글라스 뒤에 숨겨진 극히 평범한 눈매. 요원들의 눈에서 보이는 굳건한 의지, 현실 교란자를 말살하겠다는 살의, 지적 깊이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선글라스를 벗기 전에는 도저히 시선을 맞추고 있을 수 없을 듯한 그의 눈은 그 어떤 특별한 느낌도 주고 있지 않았다. 마치 눈은 시각만 제공하면 충분하다는 실용적인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레인저와 에이다가 하은을 보호하듯 류 국장과 그녀 사이에 선다. 


“포기하면 이곳에 가두는 걸로 끝내주지.”


“그럴 생각은 없어, 류 국장. 곧 청문회 재개되지 않나?”


“너도 거기 있어봐서 알겠지. 그런 자리에는 있을 필요가 없다. 내가 없어도 알아서들 하겠지.”


“청문회 대상이 너인데?”


류 국장은 대답하는 대신 손을 들어올린다. 


“글쎄.”


그가 손을 튕긴다. 선글라스가 하늘을 난다.


-픽.


“챙!”


류 국장이 번개같이 뽑아든 소음 권총이 총탄을 뿜는다. 탄이 경화된 의수의 외피에 맞고 튕겨나간다. 그레인저가 뛰쳐나가 류 국장에게 카본 블레이드를 내려친다. 


“...!”


살짝 기울어진 그의 양 손이, 블레이드를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끼워진 특수 재질의 글러브. 


“내가 아무런 준비도 안 해왔다고 생각한건 아니겠지.”


그의 킥이 그레인저를 찬다. 그에게 달려드는 두 클론. 그가 가볍게 나이프를 글러브 바깥 면으로 흘려보낸다. 그에게 파고드는 또 하나의 클론을 어깨로 받아 넘긴다. 킥이 회전하며 그 다음으로 달려드는 클론의 턱을 차례로 가격한다. 뻗어오는 손들을 흘려보내고, 에이다가 조준한 권총과 자신 사이에 교묘하게 클론을 놓아 사격을 방해한다. 양쪽에서 잡히자 마자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낮추며 계산된 움직임으로 앞으로 몸 전체를 회전시키며 가슴께를 차버린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카본 블레이드를 겨드랑이 사이로 빗겨낸다. 그의 손에 들린 권총이 하은을 향한다.


-픽.


클론의 팔이 그 사이를 막는다. 잠깐의 경직. 에이다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가슴께를 가격한다. 그의 몸이 뒤로 밀리며 대기하고 있던 클론의 팔에 붙잡힌다. 그러나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그에게 달려드는 클론의 몸을 타고 오르듯 배, 명치, 목 순으로 차버린다. 그 반동으로 그를 잡고 있던 클론이 뒤로 밀려난다. 그 때문에 그의 팔을 붙잡으려던 클론들의 손이 빗나간다. 마찬가지로 그를 잡고 있던 클론이 바닥에 쓰러질 뻔 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가 몸을 뒤틀며 벗어난다. 잠깐이나마 공중에 뜬 그가 바닥에 착지한-


“!”


척,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양 손에 하은의 손목이 잡힌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나이프. 류 국장의 얼굴에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아주 희미한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거의 예상하지 못했음이 틀림 없었다. 


“실력이 늘었군.”


그가 하은을 차내기 전에 그녀가 간신히 뒤로 물러난다. 포위된 그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클론의 어깨를 짚고 뛰쳐 오른다. 공중에서 바닥을 향한 그의 몸. 그 움직임을 활용해 클론의 팔을 꺾어버리며 반대편에 착지한다.


“...”


그의 시선이 하은을 주시한다.


“그레인저, 네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되겠군. 기밀 시설에 현실교란자를 들이다니.”


그가 한발자국 내딛는다. 


“노하은.”


“왜 나죠?”


“그걸 찾으러 이곳에 온게 아닌가?”


에이다가 그들 사이에 끼어든다.


“진, 가세요.”


“...”


그레인저가 하은의 손을 잡아끈다. 그녀도 지체하지 않고 복도를 달린다. 류 국장과 에이다가 대치한다. 언제 집어든 것인지 그가 선글라스 -야시경의 기능을 내장한- 를 쓴다.


“당신의 속임수는 저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국장님.”


사실이다.


전투형 클론인 에이다에게는 웬만한 수준의 심리전은 통하지 않는다. 내부 장기까지 손상을 입지 않는 한 활동할 수 있고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어마어마한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 계몽되지 않은 그 어떤 인간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류 국장이 장기로 쓰는, 어둠 속에서의 습격에 대처할만큼의 야간시야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물론 류 국장의 능력도 인간의 한계에 달해있다.


그러나 아주 기술적인 의미에서, 그는 초인은 전혀 아니다.


클론이 조금 상해를 입긴 했지만 히트마크 수준이라도 되지 않으면 육박전에서 전투형 클론 다섯기를 상대해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교란자라면 모를까. 지킬 것이 없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준비해오신게 몸 뿐만이라면 제가 이깁니다. 이 정도 넓이의 복도에서라면.”


그러나 에이다는 자신의 말에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청문회 대상은 어디로 간거요?”


청문회장은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세상에, 얼마나 얕보였으면.”


조롱에 가까운 말, 질문, 비난, 잡담, 침묵. 


“시간 낭비로군.”


청문회 시간이 다가오지만 아직도 류 국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인해 제 시간내에 결정이 내려지지 못해 몇십의 사람이 죽어나갈지도 모르고, 수십만 달러가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을 써서 류 국장을 끌어내리거나, 아니면 그러한 시도를 방해할 수만 있다면 괜찮은 것이다. 자신들이 살피는 사람들의 안위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들은 모두 개인이고,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니까. 


물론 그들은 모두 유니언의 요원이다. 그들의 행위에는 항상 대중을 위한다는 이유가 붙으며, 붙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서로의 방식 뿐만 아니라, 서로의 존재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유일한 방향이라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다른 자들 위에 올라서야 한다. 


동기는 다를지 모르겠으나 결과는 같다. 


그곳에서, 유니언의 단단한 결속에 희미한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있는 균열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일지도.




“거의 다 왔습니다.”


그 말과 함께 하은이 오른쪽 길로 들어선다. 잠깐 달리자 두 사람 앞에 으스스한 광경이 나타난다. 투명한 재질의 직육면체 안에 갇혀 있는 사람. 마치 물 속에서 그대로 얼어버린 사람 같다. 그의  머리에는 전극이 부착되어 있고, 팔에는 영양을 공급하는 모양인지 각종 관이 부착되어 그의 몸속으로 액체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앞에는 그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기기들이 작은 소음을 내며 수감자의 상태가 정상임을 표시한다. 그 한가운데에는 모니터가 달린 작은 단말이 있다.


수감자를 관리해 거의 반영구적으로 살려두고, 그 와중에 모든 기억을 변조 불가한 포맷으로 추출하여 증거로써 보관하는 곳. 


유니언에 대한 반역, 명령 불복종, 권한 남용, 다른 요원에 대한 정당하지 않은 적대 행위등 유니언의 요원들도 범죄를 저지른다.


보통이라면 순식간에 계몽과학적인 방법으로 증거가 수집되고 판결이 내려지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의도적인 증거의 파기, 범죄가 아닌 사상의 차이로 인한 투옥, 계몽과학으로도 찾아낼 수 없는 극도로 교묘한 연관성 등으로 인해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런 자들은 예외없이 이곳에 수감된다. 더 정교한 프로시져가 개발되거나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는 경우 다시 한번 결정이 내려지고 수감자는 풀려나거나 처형된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풀려난 자는 사실상 한명도 없지만.


말 그대로 종신형, 아니, 영구적인 형벌이라 하면 적당할까. 그런 격리 큐브가 백개는 넘게 늘어서 있다. 이곳은 독립된 시스템인지 큐브 밑에서 비춰지고 있는 백색의 조명이 복도를 기분 나쁘게 밝히고 있었다.


“...들어보긴 했지만, 처음보네요.”


이곳의 존재는 당연하지만 비밀이 아니다. 이곳에 수감된 자들 중 수십년 동안 갇혀있는 자들도 있으니까. 방종한 요원들에게 경고의 의미도 있다.


“서두르죠.”


하은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레인저가 의수를 재조정해 발광하는 외피의 빛을 소거한 뒤 그녀를 따라간다. 




또 놓쳤다.


류 국장이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몸을 뺀다. 한번 잡히면 다시 빠져나가기 힘듬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의 패턴을 파악한 에이다가 클론을 동원해 그를 둘러싼다. 다방면에서 들어오는 체술. 그러나 막거나 뒤로 피하는 대신 그가 옆으로 몸을 뺀다. 


벽이 열린다. 아니, 문이 열린다. 에이다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그가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서는 방 안으로 사라진다. 문이 신속하게 닫힌다. 클론이 손을 뻗지만 이곳에 있는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일순간, 어떻게 이 상황을 풀어가야 할 지 생각해내지 못한다. 어떻게 쫓아야-


“윙-”


그가 들어간 문이 아니라, 오른쪽 문이 열린다. 에이다의 뒤쪽이다. 


-픽.



“윽-”


총탄이 그녀의 어깨를 꿰뚫는다.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다시 문이 닫힌다. 그는 몸만 온 것이 아니었다. 이 시설의 제어권한을 가져 온 것이다. 그것으로 이길 수 있다, 라는 에이다의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다. 이제는 시간을 얼마나 끌 수 있느냐에 달렸-


-위잉.


다른 방향의 문이 열린다. 클론들이 그 방향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바로 사격한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도 없다.


다른 문이 열린다. 역시다. 하나가 닫히고, 두 개가 열린다. 몇 초동안 사방의 문들에서 그런 패턴이 반복된다. 


순간이지만, 그녀의 감시망에 사각이 생겨난다.


픽, 하는 소리와 함께 아찔해 진다. 어떻게 할 새도 없이 그녀가 쓰러진다. 그녀가 사격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그녀의 뒷쪽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류 국장이 걸어나온다. 클론들이 지시를 기다리는 듯 우두커니 서있었다. 클론들과 연결이 끊기고, 몸에 아무런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척추를 관통당하고, 저전압탄에 의해 충격 받은 신경 통신망까지 망가진 것이다.


“...!”


그런가.


이게 바로 도시전설에 가까운, NWO 고위 요원들의 전투력인가.


네명이나 되는 전투형 클론을 데리고, 본인마저 전투형 클론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완벽하게 패배했다. 얼마 버티지도 못했다. 그녀가 간신히 보조 신경으로 이어진 팔을 움직여 류 국장을 겨누려 한다. 그러나 팔이 부들부들 떨릴뿐, 가슴께로 올라가지조차 않는다.


“절 죽이고 가셔야할 겁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는 발악.


“자네의 끝간데모를 충성심은 알 수가 없군.”


그렇게 말하며 류 국장이 나이프를 꺼낸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무릎 위를 내려찍는다. 다른쪽 무릎도 마찬가지로 관통당한다.


“윽…”


이제는 정말 저항조차 할 수가 없다. 전신마비나 다름없는데다가, 보조 신경을 이용한다 해도 양 다리는 불구가 되었다. 거의 전신을 교체하는 수준의 대수술이 필요할 것이다. 그녀가 간신히 고개를 들어 묻는다.


“왜 끝내지 않죠?”


“자네의 맹신적인 충성심을 써 먹을데가 있기 때문이지.”


“당신에게 충성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절대로.”


그녀가 문들 중 하나를 흘겨보며 말한다. 저 안에 끌려간 자들처럼 세뇌될 경우에 처하면, 바로 두뇌에 내장된 자살 호르몬을 몸 속에 흘려보낼 것이다.


“자네들은 내 말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군.”


그렇게 말하고서는 그가 자리를 뜬다. 에이다가 의식을 유지하려하지만 생명유지를 위해 서서히 몸의 기능이 하나씩 셧다운 된다. 그녀가 고개를 떨군다. 복도가 어두워지고, 류 국장의 기척마저 사라진다.




“...!”


그레인저가 거의 욕설을 내뱉을 뻔 한다.


“웨더스 소령의 격리 큐브가 여기인게 분명한가요?”


“네.”


그 격리 큐브는 비어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어야 할 백 사장의 격리 큐브도 비어있다. 투명한 물질이 가득 차있어야할 금속제의 프레임 안에는 기억 추출용의 디바이스가 허공에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탈옥? 아냐, 그럴리가 없다. 혼수상태로 유지되는 죄수들이 탈옥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탈출하죠.”


하은이 제안한다. 지나치게 신속한 그녀의 결정에 반대하기라도 하듯 그녀가 격리 큐브로 다가간다. 그녀가 단말기를 두드린다. 놀랍게도, 기록들은 멀쩡했다.


“아뇨, 추출된 기억들은 그대로 여기 있어요.”



누군가 탈옥 시켜준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이 기억들을 지워버렸겠지. 그럼 대체-



“정말입니까?”


“네.”


그레인저가 단안경 모양의 VDAS를 꺼내 착용한다. 허리에 매달린 소형 단말의 케이블이 큐브의 단자에 연결된다. 


“됐어요!”


류 국장의 흔적을 쫓고나서, 처음으로 무언가 해냈다는 듯 그레인저가 탄성을 뱉는다. 추출된 모든 기록이 멀쩡했다. 순간적으로 살펴본 다중 다감각 썸네일이 이것이 웨더스 소령의 기억임을 알린다. 레콘키스타 작전 막바지의 기록인것이 틀림 없었다.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은은 류 국장이 쫓아오는 것을 경계하며 복도쪽으로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그레인저가 즉시 기억을 추출한다. 그 옆으로 달려가 마찬가지로 백 사장의 기억까지 옮겨온다. 그녀가 허리춤의 단말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즉시 그것이 홀로그램 프로젝션으로 허공에 인터페이스를 띄운다. 두 사람의 기억이 어지럽게 떠오른다. 그레인저가 기억들을 살피기 시작한다. 하은이 그녀의 손 동작을 유심히 관찰한다. 편집 작업에 돌입하는 그녀. 그녀의 손동작은 재빠르다. 아주 직관적으로 제작된 인터페이스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런 고성능의 데이터 인터페이스로 처리하기에도 양이 너무 많다.


“기억이 너무 많아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네요. 우-”


픽, 픽, 픽.



털썩.



그레인저가 바닥에 쓰러진다. 어느새 그녀를 겨누고 있는 하은의 소음 권총에서 희미한 화약 냄새가 퍼져나온다. 회복된지 얼마 안된 그녀의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있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이번엔 바이브로 나이프가 그녀의 의수 어깻죽지에 꽂힌다.


“윽-”


그녀의 비명이 멈추기도 전에 이번에는 다리에 다른 나이프가 꽂힌다. 


“뭐… 하는…”


하은이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끌고가, 격리 큐브 안에 늘어져 있는 기억 추출 장치를 그녀의 머리에 부착한다. 혼미해지는 정신 가운데 그레인저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유추해낸다.


“아.. 안… 안돼…”


그러나 입가에서 피가 흐르는 그녀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가 없다. 너무나 간단하게, 그레인저의 몇년치 기억이 단말로 전송되어 변조 불가능한 포맷으로 저장된다. 하은이 그레인저의 단말을 가져가 그녀의 기억마저 추출해낸다.


“안…”


그레인저의 신음을 무시하고 그녀가 홀로그램 스크린을 띄운다. 


“이렇게 하는 거였죠.”


그녀가 손을 움직이며 기억을 편집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느리지만, 곧 빨라진다. 변조는 불가능 하지만, 그 가운데의 기억을 잘라내는 것으로 매우 단순한 편집은 할 수 있다.



백 사장이 말하는 펜텍스의 정체, SISD의 은폐 공작, 펜텍스라는 거대한 네판디의 조직을 신디케이트가 조직적으로 숨겨왔다는 사실을 기록한 기억이 제일 먼저다. 따로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웨더스 소령의 기억에서 백 사장이 웨더스 소령에게 사실을 털어놓던 순간만 포함하면 간단했다.



“당신… 처음부터 류 국장과 한패…?”


“아뇨. 지금 류 국장이 여기에 온다면 아마 저부터 죽이겠죠. 그리고 저는 그가 네판디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전혀 관심 없습니다.”


“뭐…?’



그 다음은 레콘키스타 작전의 핵심 디바이스, 인과 네트워크의 제작에 펜텍스 -SPD- 가 적극 협력했다는 증언이다. 이 역시 간단했다, 백 사장이 보던 SPD가 조달한 부품 목록의 데이터와 SISD 고위 임원과의 긴급한 통화에 관한 기억만 보내면 되니까.



“테크노크라시는… 아주 복잡한 퍼즐이에요. 동시에 위태위태하게 유지되고 있는 퍼즐이기도 하죠. 한 조각만 뽑아내면, 모두 아름답게 풀리는… 그런거죠.”


그레인저가 경악한다.


혼미한 정신 가운데서도 간신히 그녀에게 말을 건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을…”


기침. 그레인저가 피를 뱉어낸다.


“죽지는 않을거에요. 일부러 그런 부위만 상처입혔으니까.”


나노머신이 관통되지 않은 부위를 통해 들어오며 그녀의 출혈을 막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마지막은 그레인저의 기억이다.


쓰렛널. 보이드 엔지니어가 숨기고자 하는 사실. 


유니언의 세뇌를 역이용 할 수 있으며, 움브라에서는 그들보다 진보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 그들의 존재가 밝혀지면 보이드 엔지니어가 쓰렛널의 존재를 숨겼다는 사실에 대해 추궁하려는 자들이 넘쳐날 것이다, 어쩌면 지구에 쓰렛널이 침투해있을 수도 있다는 의심까지 불러올지도 모른다. EDE로 변질된 과거의 통제부Control부터 쓰렛널에게 점령된 오토크토니아까지, 그 모든 사실이 유니언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을 모조리 추출한다. 



그레인저가 드디어 깨닫는다.


하은은 퀸란의 프로시져를 해제한게 아니었던 것이다.


지구상의 유니언을 ‘재구성’한다는 그의 목적과, 유니언이라는 거대한 퍼즐을 풀어낸다는 하은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니까.


그렇다면, 기생한 정신 쪽이 떨어져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이 허무하게도, 하은이 망설임 없이 그레인저가 미리 준비해놓은 프로토콜을 통해 즉시 전송을 시작한다.




“모욕적인 일이오! 유니언의 고위 요원들을 이렇게 불-”


류 국장이 출석하지 않은 청문회에서는 또 다시 여느때와 같은 대립 구도가 세워지고 있었다. 


“정식으로 사과를 요구-”


일순간, 청문회장이 조용해진다. 개별 위원들에게 각각 연결된 데이터 회선으로 일련의 증언들이 전송되고 있었다. 변조불가한 포맷의 추출된 기억. 다름 아닌 룸 101에서 전송된 기록이다. NWO를 비롯해 유니언 내 최고 심문 시설인 만큼 분명 누군가가 익명으로 핵심적인 증거를 전송한 것이라 모두가 기대하는 듯 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길 바라며.


그러나 그 증거는 한쪽에만 유리한 증거들이 전혀 아니었다.


“이게…”


“잠깐, 이게 무슨 소리요!”


“펜텍스가 네판디의 소굴이라는 것이 정말이오? SISD 기관의 출석을 요구하오!”


목소리들이 점점 커져간다.


“잠깐, 여기는 류 국장에 대한 청문회입니다. 지금의 기록은 다른 절차를 거쳐 논의해야-”


“무슨 소리요! 지금 당장 신디케이트 측 고위 요원들의 답변을 들어야-”


“그보다 류 국장 이야기로 돌아가야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까지의 증거를 보면, 네판디가 개입한게 분명한 레콘키스타 작전을 중지시키려 한 AP-5 아말감을 류 국장이 해체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제가 보기엔 오히려 NWO측 요원들이야 말로 저희에게-”


“모욕이오!”


청문회장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군데군데 일어나 고성을 지르는 자들, 냉정하게 이야기하거나 다른 요원을 말리려하는 자들, 심지어 무기를 꺼내드는 자들도 있다.


“이 쓰렛널이라는 집단이 변질된 유니언의 요원들이라는 것이 사실인지 꼭 알아야-”


“당신들이 알아봐야 움브라 내의 전투에는 쓸모가-”


“말 다했소?”


균열이 더 커진다.


상호간의 몰이해, 불신, 경쟁 심리, 지배욕, 반발심, 그 모든 것이 비밀 세 방울로 넘쳐 흐른다. 곧 이 정보는 모든 컨벤션과 아말감으로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통제하는 세계의 모든 곳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가능성은 언제나 있어왔다. 단지 발현하지 않았을 뿐. 


균열에 못을 내리쳐 쪼개지게 만들 일이 없었을 뿐.



테크노크라틱 유니언.


정의로운 것이 아닌, 정의를 규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조직.




그 안에서,


내전이 시작 된 것이다.



===


다음 화(47화)로 분열의 시대 편이 종료됩니다.


유니언의 내전 양상과 심판의 날 시나리오로 이어지는 간략한 스토리가 나올 것이고, 그 다음 화부터 심판의 날 시나리오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심판의 날을 끝으로 NHE는 완결이 나겠네요. 어쩌면 본편에서 설명하지 않은 몇가지 요소를 위해 몇편정도 더 외전이 있을지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