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패러다임이나 포시 짜는 게 힘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간단한 종교사회학이나 민속학 입문 책자를 보든, 혹은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를 보든 하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전에 썼던 글과 마찬가지로 내 PC로 "뭘 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M20 서문에서도 잠깐 언급됩니다. 이 게임은 "세상을 자기 의지대로 바꿀 수 있는 신과도 같은 힘을 지니게 된 사람들은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 그리고 이 힘은 그들을 어떻게 바꿀지"를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연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메이지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종류의 힘을 지닌 자들의 투쟁과 고뇌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 드라마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바로 이 부분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메이지를 하겠다고 사람을 모아보면, 일단 대다수 사람들이 마법에 매력을 느껴서 찾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은 그러한 마법을 자기 뜻만으로 휘두르는 쿨한 캐릭터를 하기 위해 왔거나요. 하지만 이렇게 오는 사람 중 "과연 PC는 자신이 지닌 마법의 힘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어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열심히 구상해오는 이는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의 힘들을 지배하는 초인 PC를 만들고 팀원들에게 인정을 받는 데 게임의 가치를 두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만약 "내 마법은 존나 쩔어" 같은 플레이를 지향하신다면 다른 게임을 하시는 게 좋습니다. 안타깝게도 WoD는 비극적 드라마를 만들고 같이 향유하는 놀이입니다. 이 놀이를 할 때는 내 캐릭터가 얼마나 멋있고 강한지를 보여주기 보다는, 정해진 주제의 태두리 안에서 얼마나 극적인 플롯 구성을 만들 수 있느냐에 중점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안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WoD는 대단히 재미가 없어질 겁니다. 왜냐하면 D&D처럼 잘 만들어진 규칙들과는 달리, WoD는 정해진 판정만 해도 빠르고 쉬운 재미를 제공해주는 게임 모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최소한의 규칙만 가지고 참가자들 사이의 합의에 따라 극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 놀이입니다. 그리고 이 놀이의 문제점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메이지 PC가 멋진 외연과 마법의 권능으로 가오를 잡는 데만 치중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마스터나 다른 플레이어들은 하품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너의 자위용 캐릭터는 잘 보았다고 해줄 수밖에요. 그러니 가급적이면 메이지를 하겠다고 모인 팀(메이지 설정으로 세일러 문 하겠다고 모인 팀 말고)에서는 이미 메이지 규칙서에서 제시해주고 있는 주제에 맞춰서 PC의 극적 장치들을 잘 갖추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과연 WoD 메이지의 비극은 뭘까요? 바로 위에 제시된 것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들의 고뇌"입니다. 이런 고뇌 따위는 들어도 뭔지 모르겠다고요? 음... 그렇다면 스케일을 훨씬 줄여봅시다. 여러분 모두 작은 집단을 통솔해본 적이 한 번 정도는 있을 거에요. 뭐 회사에서 프로젝트 팀장을 맡았을 수도 있고, 군대에서 분대장을 했을 수도 있고, 대학에서 조별 과제 조장을 했을 수도 있고, 하다못해 국민학생 때 학급위원이라도 해봤을 수 있어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조금이라도 진취적인 성향과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면 아마 이런 생각 해본 적 있을 거에요. "아 시발 좆같은 새끼들... 내 개쩌는 계획대로만 하면 존나 잘될 텐데 왜 반대하고 지랄이지? 하 참..." 네. 메이지의 고뇌는 이겁니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이, 타인(수면자든 다른 마법사든)들의 무관심과 반대에 부딪치면서, 대립하고, 투쟁하고, 독단과 오만에 젖어 변모해가는 과정에서 오는 고뇌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슈퍼맨의 고뇌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이 지닌 휘브리스와도 비슷하고요.


 이렇듯 많은 메이지들은 자신이 볼 때 지극히 훌륭하고 이상적인,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 할" 세계의 상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고 살게 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합니다. 별 생각이 없던 사람이라도 일단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얻으면 점차 세상에 대한 생각도 깊어질 겁니다. 게다가 메이지 규칙은 메이지들이 점점 세계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도록 만들 설정도 갖고 있어요. 아바타는 계속해서 메이지들에게 세상을 바꾸도록 요구합니다. 메이지가 지닌 힘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아레테는 그가 지닌 이 세계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일정 수준 이상의 힘을 지닌 메이지들이 세계에 대한 자기 비전이 없다는 건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가 됩니다. 심지어 많은 메이지들은 신입들을 받을 때마다 이니시에이트를 아주 제도적으로 시켜줍니다. 굳이 테크노크라시가 아니라도 오더 오브 헤르메스도 이러한 이니시에이트 과정으로 유명해요. 운명적으로 각성한 사람이 아닌 한, 오더의 메이지들은 각성 이전에 오래 헷지 메이지(혹은 소서러)로 지내며 헤르메스식 세계관과 철학을 익히고 헤르메스식 사상을 받아들입니다. 사실 세뇌지요. 셀레스철 코러스, 에우타나토이, 컬트 오브 엑스터시, 버베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림스피커 같은 애들도 자기들 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법을 신입에게 내재화시킵니다.


 그런데 실제로 플레이를 시작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내 PC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세계의 상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이다"라는 점을 안 짚어줍니다. 제가 메이지 PC에 대한 설명을 요구해서 들은 가장 많은 답은 이거였습니다. "음, 그냥 전형적인 XXX(Tradition이나 Craft 이름) 메이지에요." 애석하게도 그런 건 없습니다. 이 말은 전형적인 기독교도와 비슷합니다. 물론 Tradition이나 Craft에 따라서 거기 속한 메이지들이 일정한 이상과 철학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것만으로 PC의 꿈과 희망과 이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해줄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도들은 사랑과 자비가 충만한 천년왕국의 도래를 꿈꿀 겁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기독교적 정신과 교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기독교도가 된 계기 및 기독교도로 살아가는 동기(의식적이든 아니든)가 저마다 다르므로, 기독교도로서의 고뇌도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메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소속된 Tradition이나 Craft가 대략적인 철학과 신념의 방향성은 제공해줍니다. 하지만 결국 핵심적인 세부사항은 PC의 개인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내 의견이 없는데 다른 사람과 의견 차이가 날 수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많은 이들이 메이지를 플레이하면서 부딪친 문제점이자 Revised 판본이 지닌 최대의 결함이기도 했습니다(Revised는 이미 Traditions가 패배하고 망한 시점이라 투쟁물보다는 생존물 성격이 강했음). 메이지 PC가 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어줄 희망과 비전이 없으면 그가 싸울 이유는 지극히 축소될 수밖에 없습니다. 메이지를 다른 이능물과 차별화시켜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인 대립과 투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PC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이상적 세계의 상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면, 당연히 메이지들간의 사상적 대립과 투쟁도 극적 흥미와 긴장감을 많이 잃어버릴 겁니다.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오만한 믿음과 신념이야말로 메이지 PC와 그의 드라마를 구성해주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셈입니다. 내 사상이 없으면 다른 사상과 충돌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내 사상과 남의 사상이 팽팽하게 대립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내 사상과 비전이 (적어도 팀원들이 볼 때는)합리적인 구석을 지닌 납득할 수 있는 근거들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메이지의 메타플롯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실은 그런 이유입니다. 다른 WoD 라인들도 마찬가지이기는 합니다만, 메이지는 특히나 거품이 심한 설정 탓에 정작 실제 플레이에서는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잡기가 십상입니다. 이 글을 작성하는 도중 네이버 카페에 위시송님이 올려주신 글처럼, 실제로 안 쓸 설정에 몰두하는 것은 낭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차적인 설정에 메달리다가 실제 플레이에 필요한 설정을 고민 안 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가 됩니다. 바로 이러한 주객전도로 인해 PC들은 메이지의 가장 매력적인 드라마에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결국 많은 메이지 크로니클이 애매모호한 초능력자 활극물을 찍다가 폭발사산하고 맙니다.


 별 계획 없이 늘 생각하던 이야기를 늘어놓다보니 좀 난잡하게 이야기가 진행됐습니다. 글이 두서없이 길어진 관계로 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메이지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사상들 사이의 대립을 다룬다.

*메이지인 PC는 자신의 사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해야한다.

*플레이의 내용은 PC와 그의 사상이 현실의 장벽과 다른 사상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겪는 변화와 고뇌에 중점을 둔다.

*그러므로 PC가 지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과 신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서술해주지 않고 막연하게 얼버무리면 드라마가 나올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대립의 드라마를 빼놓고 메이지를 할 바에야 위자드나이트나 드레스덴 파일즈나 더블크로스를 하는 것이 낫다.


 메이지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제어 중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M20에서 Introduction에 큼지막하게 박아놓은 이 게임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입니다. 이 희망은 막연히 보다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바로 자신이 세상을 더 낫게 바꿀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그러나 고결한 바람입니다. 여러분들도 세계의 미래를 결정지을 사상적 대립과 투쟁을 다루는 이 메이지라는 게임을 하실 거라면, 혹은 이미 하고 계시다면, 한 번 정도는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시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내 PC가 가진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과 신념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 희망과 신념에 대한 사상을 과연 다른 팀원들도 흥미롭게 받아들여줄까? 이 부분에 대해 팀원들과 함께 생각해보시면 보다 재미있는 메이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