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 왜 컴퓨터 게임 같은 경우에는 시나리오 차트 쓰는 경우가 많잖아. 특정 npc를 믿느냐 의심하느냐, 배경에서 무슨 사건이 터졌을 때 어느 쪽 진영을 편드느냐, 뭐 그런 상황에서 무슨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스토리가 갈라지고 결국 엔딩도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rpg 시나리오 짤 때에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본다. 왜냐면 컴퓨터 게임은 세이브도 할 수 있고, 반복 플레이를 하며 이 분기 저 분기 다 가 볼 수 있지만 보통 rpg 시나리오는 한 번 뛰고 나면 끝이거든. 루프 시나리오도 있고, 아예 룰 적으로 시나리오를 재활용할 수 있게 만든 경우도 가끔 있다고 들었는데(구체적으로 무슨 룰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게 보편적이진 않지.


내가 생각하기에 그 방식의 일차적인 문제는, 마스터가 내부적으로 '진 엔딩 루트' '노멀 엔딩 루트 1' '노멀 엔딩 루트 2' '배드 엔딩 루트 1' '배드 엔딩 루트 2' 라는 식으로 차등을 두고 뇌내 시뮬레이션을 돌려서 그 중 가장 자기 마음에 드는 스토리 전개를 진 엔딩 루트로 삼는 경향이 있다는 거임. 이렇게 되면 보통 마스터가 너무 노골적으로 자기가 구상해 둔 시나리오 대로 플레이어들을 끌고 가려고 하고, 플레이어들은 그게 빡쳐서 판을 엎거나 일부러 트롤링을 해서 시위를 하고 결국 플레이가 터지는 흐름이 되기 쉬움. 이거야 뭐 rpg 몇 년 정도 하다 보면 다들 한두 번 정도는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겪게 되지. 갤에도 비슷한 경험을 한 갤럼들 한 둘이 아닐 걸.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보통 가장 자주 선택되는 방식이 '플레이어들로 하여금 그렇게 노골적으로 끌려간다는 느낌을 최소화하면서, 단서를 주는 npc를 바꾸는 등 온갖 우회 루트를 통해 pc들을 진 엔딩 루트로 데려간다'는 거임. 그걸 그럴싸하게 잘 하는 게 마스터의 가장 중요한 기술로 평가받기도 했고, 지금도 여전히 그걸 잘 하는 마스터가 고수 대우 받지. 마스터 입장일 때는 너무 손이 많이 가서 피곤하고, 플레이어 입장일 때는 마스터가 꺼내는 걸 구경하기만 한다는 느낌이라(그게 졸라 재미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노잼이면 어쩔거임) 내 취향은 아니지만그것도 rpg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라고 봄.


하지만 저런 식의 분기식 시나리오를 갖고 마스터링하다가 이상하게 빌런이 되는 경우가 가끔 있어. 개인적으로 가장 극혐하는 방식이기도 함. 이런 빌런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이 상황에서 이 루트로 가면 진짜 뽕이 찰 텐데' '이런 전개로 흘러가면 진짜 내 취향인데'라는 식의 욕망이 굉장히 강력함. 하지만 동시에 너무 대놓고 그런 쪽으로 진행하면 플레이어들이 항의할 거라는 것도 명확히 알고 있음.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이런 타입의 빌런들이 대신 쓰는 방법은 분기 조건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플레이어들이 조건을 못 맞춰서 다른 루트(보통 배드 엔딩 루트. 그 과정에서 pc들도 강력한 능력이나 아이템, 경험치 같은 걸 희생하거나, 중요한 관계로 설정한 npc가 죽는 꼴을 보거나 함)로 빠지면 나중에야 '사실 그 때 그 수상한 npc를 끝까지 믿었어야 함' '그 때 그 수상한 아이템을 쓰지 말았어야 함'이라고 알려 줌. 이렇게 하면 본인도 그 뽕을 못 채워서 아쉽긴 하지만, 그렇게 된 건 결국 결정적인 타이밍에 잘못된 선택을 한 플레이어들 탓이라고 책임 전가를 할 수 있거든.


당연히 플레이어들 입장에서는 개소리지. 선택을 하려면 그 선택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이해득실을 저울질할 수 있어야 하는데 최소한 그 당시에는 합리적인 결정이었건 말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비효과로 온갖 개좆 같은 꼴을 겪어야 하거든.

그런데 그런 빌런들은 플레이어가 그렇게 항의하면 '마스터로서 정답을 대놓고 알려줄 수는 없다' '조언을 해주면 플레이어들의 자유의지를 침해하게 된다'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주장함.


당연히 이 논리에는 엄청난 구멍이 있어. 그런 논리대로라면 플레이어들은 마스터의 모든 묘사, npc의 모든 대사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려 하고 마스터의 진의가 무엇인지 심사숙고한 끝에 무엇이 사소한 결정이고 무엇이 중요한 분기인지 눈치를 까서 마스터가 준비한 '정답'을 알아맞춰야 하며 그렇게 못하면 배드 엔딩 루트를 타도 어쩔 수 없는 거거든. 빡세기도 하고 너네는 이게 진짜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이라고 납득할 수 있냐?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정보격차 때문에 시야가 좁아져서 선택의 여지가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 정도로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서, 배드 엔딩이어도 비교적 순한 맛으로 끝나고 pc들이 희생해야 하는 것도 비교적 적었다고 치자고. 그렇다 해도 마스터가 임의로 지정한 숨겨진 조건을 캐치 못해서 플레이어들의 의도나 노력을 투자한 게 대부분 무가치해진다는 건 변하지 않거든. 마스터가 별 생각 없이 묘사한 걸 플레이어들은 중요한 떡밥이라고 생각하고 파고드는 경우 많이 봤지? 그런데 이런 타입의 빌런들은 플레이어들이 그러는 걸 굳이 막지 않음. 플레이어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거니까. 하지만 결과도 내놓지 않음. 자기는 애초에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은 거니까(아니면 다른 루트에서만 작동하는 떡밥이었다거나). 좀 더 악질적인 경우에는 중요한 떡밥처럼 보였지만 사실 아니었다는 결과를 내놓는 동시에, 헛된 노력을 하는 바람에 막을 수도 있었던 나쁜 일이 다른데서 터졌다거나 하는 식으로 압박을 가함.


여기까지 읽었으면 '아니 그럼 마스터는 시나리오의 반전을 어떻게 꺼내야 하냐'라는 의문을 당연히 가질 수 있을 거임. 이 부분부터는 내 생각인데, 반전이라는 건 영화나 소설, 만화에서나 중요한 거고(반전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종류의 작품들도 많고 그 중에서도 명작은 많지만 일단 이 경우는 제끼고) rpg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봄. 정 반전을 꺼내고 싶으면 판정에서 실패했을 때 꺼내도 되고(요즘 나오는 룰들은 판정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꼭 캐릭터에게 나쁘다는 법은 없고 성공했더라도 반드시 유리하게 된다는 법은 없다는 식으로 판정 결과 해석의 다양성을 넓히는 데에도 신경을 쓰지). 플레이어의 개입에 대해 개방적인 스타일의 팀이면 플레이어가 자발적으로 '이 부분에서 너무 쉽게 풀리면 좀 재미가 없으니 뭔가 의외의 사실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제안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도 보편적인 방식은 아니고... 그것보다는 반전이 나올 만한 상황일 때 '이 상황에서 절대로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종류의 반전으로 뭐가 있겠냐'고 플레이어들에게 물어봐서 진짜 에러에 해당하는 걸 걸러낸 다음 앞에서 나온 미회수 떡밥을 재활용해서 제시하는 방법을 추천. 물론 진짜 어이 없는 선언을 해놓고서는 어떻게든 내 캐릭터가 손해 안 보는 방향이었으면 좋겠다 뭐 이 지랄을 하는 플레이어는 갈궈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