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게 3년 전 이야기라는 것에서 소름을 느끼고

그 사이 내가 한 게 군생활밖에 없다는 것에서 두 번 소름을 느끼고




암튼, 당시 턀갤에서는 왠지 해리포터 떡밥이 돌고 있었고(정확한 이유는 기억 안 남, 기억 안 나기로 했음)

그 떡밥에 편승하여, 누군가가 해리 포터 세계관을 바탕으로 우울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간단한 자작룰을 만들었음.

니코틴 걸즈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거 같은데, 순혈주의 쩌는 마법세계 분위기를 사교점이라는 걸로 구현했고 뭐 그랬다.



아무튼 그 플레이의 테스트 플레이를 나랑 또 다른 턀갤럼 한 명이서 신청해서 했었다.

다른 플레이어는 올리밴더 가문 출신의 신출내기 정의광 오러 여성이었고,

나는 리버풀 출신의, 마법 세계에도 머글 세계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호그와트를 때려치운 다음 밀수에 종사하다 잡혀온 머글 혈통.

아즈카반에 들어가는 것만은 막으려고, 사법 거래에 응해 살인 사건 해결에 협력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시작했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수사극처럼 흘러갔어. 증거를 추적하고, 유력한 관계자 집에 오러 신분으로 들어가고, 나는 투명 망토 쓰고 뒤따라 가서 잠입하고.

이 순혈 아가씨에게 쿠바 리브레를 한 잔 사 주고. 영장도 없이 용의자 집에 침입하고. 미친 듯이 순간이동을 반복해서 용의자를 쫓은 다음,

빌어먹을 순혈 쓰레기 놈의 불알에다가 리덕토 주문을 갈기고, 피해자인 여자와 아이를 구해냈다.


평이한 추리물 시나리오의 흐름이었다고 할 만한 거였지.



그리고 대망의 엔딩 굴림(단편이라서 남은 사교점을 니코틴 걸즈처럼 쓰기로 했었음)에서...




우리가 애써 구해냈던 여자는, 내가 IRA에게 팔아치우려고 모아 놨던 총으로 내 눈 앞에서 자살했고

순혈 아가씨가 애써 보호했던 어린애는, 사실 죽먹자와 협력하고 있었고 전후에 죽먹자들이 대거 풀려나는 데 기여했지.


우리가 간과했던 하나의 모순점. '어린애'라는 이유로 자세히 보고 넘기지 않았던 암시들.

그걸 놓친 대가가 우리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긴 거야.




나랑 같이 플레이했던 사람은, 꽤나 엔딩에 납득 못 하는 느낌이었다. '예전이었으면 화냈다'라고까지 했으니.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같이 후일담을 정리하고 있던 나는,

카타르시스로 전립선 오르가즘에 가까운 걸 느끼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뭐, 그 당시 내가 무간도 막 본 참이라 느와르 뽕이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있고,

내가 별 생각 없이 북아일랜드 드립 쳤던 게 기막히게 회수가 된 거라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있고,

그냥 내가 원체 비극, 고구마 내성이 높고 암울한 엔딩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건 내가 이걸 '배드 엔딩', 즉 '내가 여기서 이런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내 선택을 통해 나한테 어울리는 결말을 맞이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 그랬던 거 같다.

제임스 본드를 동경하는 머글 태생 시궁창 인생이, 앞뒤 안 가리고 여자 한 명 구하겠답시고 달려들면

이런 결말이 어울리는 게 아닐까, 그런 느낌이었음.




근데 이번에 아랫글 보니까, 그 때 같이 했었던 플레이어 분께서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 것도 같음.

그 플레이어 분은 같혀 있는 애한테 꽤나 동정적인 게 분명했고, 그 아이를 구하는 걸 굿 엔딩으로 여겼을 거거든.

그런 와중에서, '사실 그 애가 범인이나 다름 없어', '애초에 선인은 없었고 이 애를 구했기에 정의는 실추되었어'라고 말하는 건

플레이어의 선택 때문에 굿 엔딩에 닿을 수 없었다는 식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함.


실제로 몇 달 후에, D&D식 전투와 보상 스토리에서 이런 암울한 뒷설정 위주 플레이를 진행하면 고구마 한 소쿠리인 건 둘째치고

이야기가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간다는 것도 느낀 게 사실이고.




근데 이건 묻고 싶다. 분기 시나리오에서 '굿 엔딩', '배드 엔딩'을 정하는 건 대체 누구인 거야?

나처럼 구한 사람이 눈앞에서 자살해 죽는 걸 좋아하는 변태야 드물 테지만, 왕당파와 공화파 중 한 쪽을 밀어주는 거라면?

플레이어가 멸치면 왕정복고가 배드 엔딩이고, 플레이어가 알통 굵으면 단두대가 배드 엔딩인 거 아냐?

애초에 내 경우처럼 플레이어 두 명이서 서로 취향이 달라서, 같은 엔딩에다 대고 반응이 다르면?

있지도 않았던 '더 좋은 굿 엔딩으로 향하는 분기'를 플레이어가 찾으면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으면???



사실 'D&D에서', '장편 플레이에서', '평범한 취향의 소유자들끼리' 같은 수식어를 붙이면,

분기 시나리오는 문제가 있다고 해도 될 것 같음. 내가 괴상한 취향의 소유자인 게 맞으니까.


근데 그냥 분기식 시나리오가 안 된다고 해 버리면,

대체 어떤 식으로 시나리오를 설계해야, '내 캐릭터에게 어울리는 합당한 결말', 트루 엔딩으로 갈 수 있을지 감이 안 잡힌다.

물론 이건 내가 실력이 모자라서겠지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분기를 만들어 주는 거라는 게 내 생각이라.




그니까, 사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하는 게 맞는 거 같음.



'플레이어가 원하지 않는 엔딩을, 마스터의 취향을 이유로, 억지로 떠먹이지 마라.'

'그것이 좆같은 결말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