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image.php?id=39afc021&no=24b0d769e1d32ca73cee83fa11d02831a8a865d070dfb053de17d9bb378224e477028cee97dceb3995152231a892a48d9994a5286523588360277b


viewimage.php?id=39afc021&no=24b0d769e1d32ca73cee83fa11d02831a8a865d070dfb053de17d9bb378224e477028cee97dceb3995152231a892a48dcdc2f72e6c785d8360277b



48화: 심판의 날, 하나.



“끼기긱-”


미국의 도시 지역이라면 열 블록 정도에 하나 있을 법한 작은 구멍가게. Dave’s Grocery라고 15년전에 쓰여진 글씨가 세월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깜빡거린다. 구멍가게의 주인인 데이브가 관성으로 내려가고 있는 셔터 게이트를 젖히고 들어오는 남자를 본다.


“닫히는 셔터를-”


데이브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닫는다. 생각해보니 그는 15년동안 단 한번도 닫히는 셔터 게이트를 받쳐올려본적이 없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간신히 올릴 수 있는 무게인데, 내려오는 것을 사람이 다시 올리기에는 너무 무거운 무게다. 


이상하다.


그가 지체하지 않고 카운터 밑의 샷건을 꺼내-


“캬아악!”


사내가 달려들어 그대로 데이브의 목을 물어 뜯는다.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속도. 데이브의 살점이 찢겨나가고 경동맥에서 얇지만 강한 힘으로 피가 뿜어져나온다. 


“어그-그아…”


목이 떨어져나갈 기세로 물어뜯는 사내. 밤의 세계에 익숙한 사람, 아니, 괴물이라면 금방 알아볼 것이다. 뱀파이어다. 아무리 광분한 뱀파이어라도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런데 이 뱀파이어는 다르다.


피를 모조리 빨아버리는 것보다 광란Frenzy의 살육 파티를 벌이는 것이 먼저다. 팔이 찢겨나가고 구멍 가게의 상품들이 피로 모조리 젖어버린다. 그의 뒤를 따라온 뱀파이어가 데이브의 다리를 물어뜯는다. 난장판이 된 가게에서 그들이 뛰쳐나와 다음 사냥감을 찾아 헤메기 시작한다. 




“미친, 개판이구만.”


그가 욕설을 내뱉는다. 이 정도의 격리 프로시져를 도시권 내에서 행해본 것은 처음이다. NWO가 지닌 미디어 및 공권력에서의 역량을 총동원해야했다. 모든 이동통신은 차단되었고 차량 통제는 물론이요 보도관제까지 시행중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클론들로 이루어진 진압부대가 들어간 상태였다. 그것도 대규모로.


“이런 씨-”


그가 허리춤에서 플라즈마 피스톨을 뽑아들어 쏜다. 골목에서 튀어나와 그에게 달려들던 뱀파이어의 머리통을 초록색 에너지 덩어리가 불태워버린다. 그 몸이 관성에 따라 형편없이 내동댕이쳐진다. 


“감독관님.”


욕설을 하긴 했지만 이미 그나 그의 부관이나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있었다.


“아 진짜!”


감독관이 다시 욕설을 내뱉으며 권총을 하나 더 꺼내든다. 봉쇄망을 뚫고 나온 뱀파이어 셋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플라즈마 피스톨이 연달아 두놈의 머리를 날려버린다.


“캬악!”


그가 놓친 한마리.


-픽.


얇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뱀파이어의 목이 아예 사라져버린다. 부관이 어느새 꺼내든 소총이 정확하게 그 목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래서, 뭐지?”


감독관이 태연하게 묻는다.


“저희측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아말감에서도 비슷한 일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그가 침을 뱉으며 에르고-드링크를 들이킨다. 문득 목이 날아간 뱀파이어를 본다. 그는 뱀파이어들을 죽여본 경험이 꽤나 있었다. 특이하게도 뱀파이어들은 죽음, 아니, 파괴를 맞이했을때 마치 시간의 역행을 겪는 듯한 반응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100년, 200년 쯤 된 뱀파이어라면 거의 대다수가 그랬다. 


그런데 이 뱀파이어는 그런 반응이 전혀 없다. 아무리 젊은 뱀파이어라도 정말 전혀 없다. 


“...거머리가 된지 얼마 안됐다, 그거지.”


그가 무릎을 꿇고 날아간 목을 감싸고 있던 옷 깃을 살핀다. 빵 부스러기. 그것도 얼마 되지 않은 것. 얼마 안된 정도가 아니라, 한시간전, 아니, 삼십분 전만해도 인간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가 알기로는 이 정도로 빠르게 뱀파이어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가 일어서며 말한다.


“각성제부터 챙겨둬.”


“예?”


“아마 지금부터 한두달은 한숨도 못잘거다. 그리고 딴놈들이 채가기 전에 저지력 높은 총기부터 전부 챙겨놓고. CQB용 무기도 좋다. 굳이 하이퍼테크는 아니어도 돼.”


“알겠습니다.”


그의 부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물자 확보에 착수한다. 감독관이 다시 바닥에 침을 뱉으며 말한다. 


“곱게 은퇴 하기는 글렀구만.”




몇 주 전.


“우웅-”


하은이 무장 밴의 엔진이 내는 진동을 느낀다. 웬만한 전투 아말감이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을만한 위장용의 밴. 그 안에는 원래 고화력의 디바이스를 잔뜩 갖추고 있거나 지휘 통제 시설이 있어야하지만 지금 웨더스 소령과 하은이 타고 있는 밴은 그렇지 않았다. 있기야 했지만 최신식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최근의 통신 프로토콜과 호환이 되는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원래라면 내구연한이 지나 폐기해야 하는 밴을 빼돌려 온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밴을 타고 막 룸 101 시설을 빠져나온 참이었다. 


“백 사장, 탈출했다.”


“...지직… 네. 암호화 채… 지직… 변조가…”


“그래도 오늘은 소리가 나서 다행이구만. 평소에는 잡음밖에 안나는 고물 통신기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가 통신기를 텅텅 두드린다. 하은이 그의 옆자리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그에게 묻는다.


“언제부터 풀려나신거죠?”


“글쎄다. 유니언 외부 인원에게 발설할 의무는 없지… 라고 말하면 좀 너 같나?”


웨더스가 평소의 그처럼 말하며 악셀을 밟는다. 그의 경량 외골격은 이미 백팩에 수납되어 뒷자리에서 덜컹거리고 있었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가 무심하게 운전하며 말한다.


“단지 전투 인원이 급하다는 이유로 널 끌어들이는 바람에 네 인생이 이렇게 됐군.”


“아닙니다.”


“그래?”


“만약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그 나름의 괴로움이 있었겠죠.”


덜컹, 하며 엔진이 잠깐 큰 진동음을 내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모든 선택에는 그 길만의 고통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애들은 다들 철학자구만.”


그가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10분 정도 끊긴다. 그들은 어느새 조금씩 교외 느낌이 나는 지역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선택 얘기가 나온 김에 말이지, 혹시 여기서 내리고 싶다면 내려도 괜찮다.”


“네?”


“넌 나보다 똑똑하고 대학도 다녔으니까 그 디바이스가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네.”


잘 알고 있다. 


민려. 뱀파이어의 본능에 따라 자신을 물어죽이는 일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불태웠던 뱀파이어. 그녀를 누군가 그 상황에서 구해 냈다는 의미. 거기까지는 유추할 수 있었다. 불타고 난 흔적이 없었던게 아니라 애초에 흔적이 생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리고 왜?



“멀쩡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냥 누워있는 시체일 뿐이야. 우리도 명령 받고 보관하고 있는 거니까.”


“보관하는 이유는 뭐죠?”


“그 뱀파이어를 깨우라고 명령받았기 때문이지. 물론 지금까지의 시도는 전부 실패했지만.”


그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말한다. 


“명령말입니까? 소령님은… 탈주자 신분인게 아닙니까?”


“아니. 하지만 소속을 밝히기에는 좀 그렇다고 해두지.”


그가 운전대를 돌리며 묻는다. 원래대로라면 누가 이걸 운전할 필요도 없이 자동 운전 시스템이 알아서 하고 있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공식적인 지원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AP-5 아말감에 있을때는 그냥 관리대상 중 하나였는데… 그 뱀파이어가 뭔가 중요한 비밀이라도 알게 된건가?”


소령이 묻는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은이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자신이 보낸 증거들로 인해 테크노크라시의 분열이 시작될 것이다. 


원래는, 그것으로 족했다. 


자신이 빠져든 거대한 미로를 자신의 손으로 빠져나왔다. 그 것으로 족했다. 자신의 생각Paradigm을 끝까지 몰아붙여, 정말로 그 끝을 보았던 것이다. 죽으려는 것도 나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는 그렇게 해야 모든 일이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각을 들어야만 왜 이런 일이 일어 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죽는다면, 그날의 진상이 미궁에 빠져버린다. 그녀가 모든 정보를 흘렸다는 것을 알아도, 왜인지 알 수 없으니까. 유니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남는 것이 낫다. 그 위신 때문에라도. 그레인저 감독관의 말 대로다. 오늘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이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된다. 



그것 뿐이었다.


오늘로 끝났어야 하는데,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야하는 이유가 생겨버린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는게 이상하다.



“네 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다만, 감상적인 태도는 접어라. 그럼 내리지 않는 걸로 알지.”


“...네.”


“제발 클록킹 디바이스가 잘 작동했으면 좋겠구만.” 


그가 거칠게 가속한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밴이 위를 향한다. 마치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괴상한 모습. 마치 투명한 언덕을 타고 올라가는 듯 했다. 


“꺼지면 진짜 큰일일거다. 아마 공역에서 격추당할거야. 그것도 그냥 군용기한테 말이지.”


웨더스의 말과 함께 자동차가 클로킹 장치를 키고 있는 소형 수송기 안으로 들어간다. 후방 램프가 닫히고 수송기가 덜컹거리며 이륙한다.


“...밖에서는 안들릴거다. 아마도.”


그가 될대로 되라는 듯이 말하고는 팔짱을 낀다.


“그리고 무선 조종이니까 추락해도 각자도생이야.”


그가 정말 어색할 정도로 유창한 한국어로 말한다. 갑자기 옛날로 돌아온 느낌이 든다.


“옛날 같네요.”


“그래. 하지만 쉽게는 돌아갈 수 없을거다.”




영원한 잠 같다.


아니, 그런 것 같은게 아니라 실제로 영원한 잠이겠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런 욕구도 들지 않는다. 평온함도 없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자각만이 간신히 있을 뿐이다.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그랬지.



정말 오랜만에 아끼고 싶은 존재를 만났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으로 희생에 가까운 무모한 짓을 했다. 스스로의 본능과는 반-



깨어나야 해.


유일한 그녀의 의지가 솟구쳐올라온다.


아직 자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 죽지 않았다. 다시, 한번만 더 보고 싶다. 한-



자각이 다시 사그라든다.


한조각 남은 그녀의 자각이 다시 한번 끝없는 부재의 공간으로 빠져든다.




하은이 무심하게 냉동 포드를 내려다본다. 인간을 보관하는데 쓰는 생명 유지형 저온 냉동포드가 아니라 물건, 동물성 재료, 또는 시체를 보관하는데 쓰는 종류다. 백사장이 틀린 종류의 포드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건 시체나 다름 없으니까. 다만 움직이는 시체일 뿐이다.


“...”


불타 없어져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얼굴이 보인다. 


민려.


볼때마다 항상 고혹적인 표정, 언제나 누군가를 유혹하는 듯한 표정.


그러나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흉내내는 연극 같은 삶이 아니라 삶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삶. 그녀의 유혹은 유혹이 아니었겠지. 유혹이 아니라 갈구였다. 뱀파이어들의 정치적인 게임에 장기말로 이용되면서도 예전의 열정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삶을 갈구하던 것이 그녀였다. 


유혹의 행위, 고혹적인 표정과 차림. 그 모든 것은 그녀에게는 살아있음의 증거다. 아니, 증거의 그림자라도 좋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부여잡을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가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몸을 내던진 것이다. 


그녀의 몸은 반 이상이 없어져 있었다. 몸의 한쪽은 아예 불타 사라져있다시피했고, 다른 쪽도 별로 다르진 않았다. 사람의 사지가 불탄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절단면은 생물체의 한 부분보다는 마치 나무토막 같은 느낌을 주는 모습. 밑에서부터 불이 붙은 것인지 우습게도 머리카락은 밑에서부터 반 정도까지 밖에 불타지 않았다. 


표정은 평온했다. 평온하다기보다는 마치 표정을 움직이는 근육이 전부 멈춰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불타지 않은 한쪽 얼굴은 굉장히 핼쑥했다. 말라붙어가고 있는 모습. 체내의 피Vitae가 고갈 된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바로 뱀파이어들이 가사Torpor라고 부르는 상태다. 뱀파이어의 강인한 생리로도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게 되면 죽은 듯한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여러가지 실험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상태에서 깨어나려면 반드시 체내에 피가 있어야 한다.


“피를 공급했는데도 꺠어나지 않는겁니까?”


“백 사장?”


“보통 이 상태에 빠진 뱀파이어들은 피가 보충되어야 깨어납니다만…”


그가 보관 포드에 연결된 혈액팩을 가리킨다. 


“뱀파이어들의 생리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게 많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백 사장이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는 하은이 처음의 그를 봤을때마다 수척해져 있었다. 몸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마음을 조여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펜텍스의 정체를 웨더스 소령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 때문이겠지. 


“우리와는 다르게 이들에게는 다방면의 약물 처방 같은게 필요가 없죠. 하나면 족합니다.”


“한마디로 피 하나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된다는거지. 속편한 구조구만.”


소령의 말에 백 사장이 패널을 두드리며 말한다.


“프로제니터들이 수많은 연구를 해봤지만 결국 결론은 하납니다. 이들은 피만 있으면 된다는거죠. 인간의 피가 안되면 다른 뱀파이어의 피를 쓴다던가. 헌데 지금까지 제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뱀파이어들의 피를 써봤습니다만 깨어나질 않는군요.”


“뱀파이어들의 피 말입니까?”


백 사장이 대답 대신 그의 신경 통신망에 연결된 포드의 디스플레이를 불러낸다. 내부의 에너지 반응을 보여주는 그래프다. 


“피를 투입할 때마다 보여주는 반응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더 잠재력...이 높은 피일 수록 더 높은 반응이 나오죠. 하지만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가 ‘잠재력’이라는 단어를 말할때 멈칫한다. 분명, 현실 교란자 또는 테크노크라틱 유니언에서 인정하지 않는 부류의 기준임이 분명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있나요?”


백 사장이 머리 한쪽을 긁적이며 말한다. 


“보존 프로시져의 결과겠죠. 아무리 뱀파이어라도 이 정도로 몸이 불타면 소생할 가능성은 없을겁니다. 일단은 상태 유지라도 해놓고 보자, 라는거죠. 우리도 그냥 넘겨받은거니까 자세한 상황은 모르고.”


그렇게 수척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했다. 그와 하은은 민려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랐다. 그는 민려를 철저하게 물건, 연구 대상으로 취급한다. 하은은 괴물들에 대한 그의 적대감이 세뇌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아마 그도 젊었을때는 인포서로 활동한게 아닐까. 


“이 피들은 어디서?”


“어디긴 어디겠습니까, 하은씨. 펜텍스 놈들한테서 빼돌린거죠.”


“백 사장님과 소령님이 직접?”


“아니. 우리가 그런 첩보 공작 전문가일리가 없잖나? 이래저래 손 써본거지.”


그녀가 잠시 그래프를 쳐다보더니 다시 묻는다.


“잠재력이라는건 뭐죠? 헤르메틱이나 쓸 것 같은 단어네요.”


하은은 헤르메틱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현실교란자여서가 아니다. 그들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동의할 수 없어서다. 서로 엮여져있는 세계, 그 매듭을 풀고 엮어 새로운 패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자신들이 생각하는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하은은 그들에게 동의할 수가 없다. 


“펜텍스 쪽의 분류다. 그게 뭔지는 정확히 몰라. 놈들의 현실교란종으로서의 강력함을 나타내는 척도겠지.”


하은이 고개를 젓는다.


“아뇨, 그게 아닐겁니다.”


“무슨 말이죠?”


백 사장이 피곤한듯 충혈된 한쪽 눈을 누르며 말한다. 그는 언제나 야근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분명 그는 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신경통신망을 통해 행정 업무 및 물자 조달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노출을 최대한 숨겨야 하는 그들의 신분을 생각하면 물자 조달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잠재력이 아니라 아마 세대라는 개념에 가까울 겁니다.”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 같은?”


웨더스 소령의 물음에 하은이 끄덕인다.


“그건 어떻게 알지?”


하은이 펜텍스의 뱀파이어 폭주 프로젝트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부모’, 다시 말해 뱀파이어들의 계보도에서 더 높은 곳에 있는 뱀파이어의 피를 이용하면 그 자식뻘의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광란시킬 수 있다. 


“...그래서 펜텍스 놈들이 이런 물건을 다루는 거구만. 좀비 아포칼립스라도 벌이려는건가?”


 소령이 혀를 끌끌 대며 바닥을 한번 찬다.


“소령님.”


“음?”


“이제 이해가 갑니다.”


“...”


소령이 팔짱을 낀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바뀐다. 


“우리 두 명이서 할 수 있는 일이야 그것 뿐이겠군.”


그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를 나눈다. 백 사장이 다시 한번 패널을 띄운다.


“하은씨, 이 추세선을 보시면 알겠지만…”


패널에 세대와 반응의 정도가 재정렬된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샘플들로는 부족합니다. 지금보다 최소 10, 11단계 정도는 높아야해요.”


“그건...”


백사장이 한쪽 손을 패널에 얹으며 말한다.


“글쎄요. 뭐, 너무 올라가는건 아닐까 합니다만.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뇌 한조각 남은 사람을 살려내는거나 마찬가지인 꼴이라고 하더군요.”


“내가 뱀파이어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 오래된 뱀파이어라면 공룡시대에나 살던 놈들 아닌가?”


소령이 표정을 찌푸리며 말한다.


“이쯤되면 이 뱀파이어가 뭘 알고 있는지가 궁금해지는데. 무슨 대량살상병기 패스코드라도 가지고 있는건가? 그럴 위인으로는 안보였는데.”


“...”


하은이 그녀를 내려다본다.


“어쨌든 너도 몸과 마음을 추스릴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


그런 그녀를 보며 소령이 말한다. 그가 하은의 어깨를 툭툭 친다.


“쉬어라. 우리도 며칠, 길면 몇달 동안 안 들키게 숨어있어야 하니까.”


“잠깐 여기 있어도 되겠습니까?”


하은의 요청에 두 사람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피해준다. 하은이 어두운 조명 아래 우두커니 서있었다. 대기모드로 들어간 포드가 내부 조명을 푸른 색으로 전환한다. 하은이 포드에 양 손을 대고 고개를 숙인다. 


다시 한번 민려의 모습을 살핀다. 그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왜 그랬을까.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어땠을까. 


그녀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었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하은 자신이 그 상황이었다면.


그녀가 우두커니 포드 안을 들여다본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하은이 인터페이스를 열고 포드를 개방한다. 안에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와 그녀의 허리를 훝는다. 차갑다.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꺼낸다. 손가락 끝에서 살짝 피를 낸다.


그녀의 입술에 피를 떨어트린다.




-아.


그리운,


그리운 존재가 느껴진다. 그 편린 뿐이지만.


그리운.


아니,


간절한.


손을 뻗어서 잡고 싶은.



그러나 다시 의식이 침잠한다.


그런 그리움으로도 이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움직여야.


하는-


ㄷ-




“...”


아무런 반응이 없다. 뭘 기대한걸까. 그녀에게 그랬었지.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반드시 구해줄게요, 하고. 그랬었다. 물론 그것마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었으니까. 거짓말, 거짓말, 그리고 거짓말. 지독히 실용주의적인 거짓말. 어찌나 실용적이었는지 그 말을 할때까지만 해도 자기 자신마저도 그것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 말을 진심으로 믿어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은은 영원히 좁은 항구의 창고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하은 누군가가 대신 불타야했던 그 창고에. 




“벌써 격리해야 하는 소도시가 14개로 늘었군요.”


테크노크라틱 유니언의 회의라고하면 아주 어두운 조명이 켜진 음침한 방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다르다. 초자연체 격리를 전담으로 하는 격리 아말감이나 아예 세계에서 제거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전투 아말감들의 연합 회의. 어두운 방 대신 깔끔한 도장의 전투 통제실이, 읽을 수 없는 암호코드 대신 직관적인 숫자와 전술 정보가 흐르는 홀로 스크린이 있다. 양복을 입은 비밀요원들도 있지만, 군복이나 경찰복과 비슷한 복장을 입은 요원들이 더 많다. 


“완전 개지랄입니다. 상부 개새끼들은 정치놀음이나 하고 앉아있고!”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누군가가 전투 통제실을 박차고 나간다. 그의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한 긴급 퇴출작전에 뛰어드는 것이다. 아말감 지휘관들마저 전부 전투에 투입될 정도다. 이미 이 아말감들의 역량은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다. 


“15번째 입니다. 미국 남부.”


그 가운데서 임시로 정보 통제를 맡고 있는 한 요원이 합성음으로 말한다. 이터레이션 X의 일원임이 분명해보이는 그는 두개골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전자두뇌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는 서로 다른 아말감들의 통신망과 전투정보 시스템을 거의 수동으로 통합하다시피하고 있었다. 그가 9가지의 다른 정보 포맷을 통해 모든 아말감들에게 정보를 전송한다. 


“왜 대도시에는 일어나지 않는거지? 뱀파이어들의 밀도가 제일 높은 곳인데?”


“그럼 가능성 하나는 제외입니다. 이 현상이 뱀파이어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자연적인 질병 같은게 아니라는거죠. 만약에 그렇다면 대도시부터 일어났을겁니다.”


정보 교환과 교류도 이뤄지고 있었다. 시설 어딘가에서는 없는 자원을 모조리 쥐어짜 좀비처럼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에 대처하기 위한 임시장비들이 급조되는 중이었다. 


“위잉-”


“아, 그레인저 감독관.”


지휘 통제실로 그레인저가 들어선다. 그녀와 면식이 있는 한 감독관이 그녀와 악수한다. 그녀가 반정도 마비된 의수 대신 생몸 쪽의 손으로 악수를 받는다. 그녀가 통제실에 있는 요원들을 둘러본다. 아는 -호의적인 방향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은 정치적인 이유보다 현실교란자를 처치한다는 임무에 충실한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인류를 지킨다는 명분에 제일 충실한 자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도 괴물과 마녀들이라면 질색을 하는 것이 그들이다. 


헤르메틱 출신인 그레인저가 여기에서 환영받을리가 없다.


“최근에 부상당했다고 들었는데?”


그레인저가 끄덕인다.


“그럼 정보 쪽을 부탁하오.”


“안 그래도 그 쪽을 맡으려 했어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죠.”


그녀가 데이터 칩을 건넨다.


“이건?”


“지금 일어나는 일에 관한 정보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뱀파이어들의 폭주가 점점 심해질겁니다.”


“이미 그쪽보다 저희가 저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을겁니다.”


그레인저가 고개를 젓는다.


“아뇨, 그 정도가 아닙니다. 이 일을 일으키는 기술을 저희 아말감이 확보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걸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만 원리는 간단합니다. 그리고 누가 하는지도 알고 있죠. 도움이 될겁니다.”


“이분은?”


그레인저의 옆으로 걸어오는 늙은 남자.


“이시야마 박사입니다. 제가 이 기술의 작동 방식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뱀파이어들을 저지하는 것보다 이짓을 벌이고 있는 놈들을 추적하는게 더 중요합니다.”


급작스런 정보 제공. 그러나 그레인저를 맞이한 감독관이 당황하지 않고 즉각 다른 감독관들을 소집한다.


“그 외에 필요한거라도?”


“그 놈들을 추적하려면 유니언이 가지고 있는 뱀파이어들에 대한 모든 위치 및 신상 감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그거야 이미 수집중이지.”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안내한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


탈리아가 확신한다. 


만약 데미안의 예언 중 틀려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예언이다.


“데미안.”


그녀가 꿈의 예언자, 데미안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의 주위에서 현실 그 자체가 물결친다. 공간이 물결치는 것이 아니다. 경계가 무너진다. 물리 법칙의 자리를 상상력과 생각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규칙이 대신한다. 현실에 있었던 사물이 희미해진다. 누군가가 그것을 보면 나타나고, 보지 않으면 사라진다. 떨어지던 물감이 눈송이처럼 육각형 결정을 이룬다. 캔버스의 천이 뻗어나가 바닥을 덮는다. 중력 그 자체가 모든 물건에서 뻗어나왔다가, 다시 사라진다. 


탈리아가 손을 뻗는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가볍게 느껴졌던 공기가 수은처럼 무겁게 달라붙어온다. 그 다음 순간, 공기를 비롯한 모든 것이 고체가 되며 그녀를 공중에 고정시킨다. 심지어 폐에 들어찬 공기 마저도 그대로 굳어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숨을 쉬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숨을 쉴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 공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탈리아.”


탈리아의 생각대로 이 공간이 움직인다.


꿈과 그림.


두 사람의 패러다임의 근간이 되는 두 개념.


그 두가지가 섞인다. 이제는 데미안이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 적을 필요도, 탈리아가 그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다시 그려낼 필요가 없다. 두 메이지의 정신이, 패러다임의 체화가 경계를 잃는다. 데미안의 꿈에 그려진 예언이 공간 그 자체로 화한다.


문제는 그리는게 아니다. 그려진 것을 고정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데미안!”


“...미안합니다.”


데미안은 이제 누가 봐도 머로더의 경계에 서있었다. 이제 그는 거의 항상 꿈의 세계에 빠져들어가 있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는 듯이. 이제 그에게는 꿈, 그리고 꿈이 비춰주는 미래의 모습이 현재의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그의 신체도 이제 별로 의미가 없었다. 그가 다시 탈리아가 그려낸 모습을 단단한 하나의 이미지로 굳힌다.


“내보내줘.”


“네.”


탈리아가 등 뒤에서 떠밀리는 것을 느낀다. 모든 것이 부드러운 그 세계에서, 절대 부서지지 않는 물리 법칙의 세계로 떠밀려나온다. 탈리아가 자신의 형태를 유지시키고 있는, 자신의 몸에 그려진 형형색색의 무늬가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이런 보호가 없다면 그녀는 자신의 물감처럼 데미안의 꿈에 녹아버릴 것이다.


“탈리아. 괜찮나?”


프라빈이 그녀를 부축한다. 그러나 그녀가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바닥에 떨어진, 그녀가 꿈에서 끌고 나온 캔버스를 향해 손을 뻗는다. 프라빈이 그것을 주워 그녀에게 들려준다.


끔찍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그려진 구상화는 아니다. 그런 그림으로는 그녀가 그려내야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 격한 패턴으로 그려진 붉은 파도. 추상적으로만 그려진 패턴임에도 불구하고 즉각 이해할 수 있다. 폭주하는 괴물, 그것도 피를 갈구하는 괴물들.


세계가 멸망한다.


피를 갈구하는 자들이 미쳐간다. 그 수를 불린다. 하나였던 것이 둘이 되고, 둘이었던 것이 넷이 되고, 넷이었던 것이 여덟, 다시 열 여섯, 그리고 서른 둘로. 마침내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수는 백만, 천만이 된다. 원래라면 스스로의 수를 관리해야할 자들이 미쳐간다. 그 파도를 몰아가는 거대한 힘이 있다. 모든 것을 이루는 셋Triat 중 하나Wyrm. 


“...”


너무나 거대한 규모의 무언가.


차라리 끔찍한 악몽, 잘못된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이런 것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프라빈. 이번에야말로 내가 잘못됐길 바래야겠어.”


프라빈이 강인한 눈빛으로 그녀를 붙잡는다. 유타나토스의 수많은 처형자들 중에서도 그는 특출난 편에 속한다. 그가 지닌 의식용 나이프에 탈리아의 물감이 튀어있었다.


“탈리아. 우리가 막을 수 없다고 포기해선 안되지.”


“...그렇다면 막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지.”


탈리아가 무겁게 말한다. 


“그래. 막을 수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되는거다.”


프라빈이 그의 나이프에서 물감을 닦아내며 말한다.


==

마지막 스토리 아크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