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문득 뻘글. PC가 결국 숙명적으로 파멸할 것이 암묵적으로 예정되어 있는 플레이를 할 때(혹은 아예 WOD나 COC 같이 그런 컨셉의 룰로 게임할 때) 플레이어 입장에서 그걸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에 대한 내용이다.
기본적으로 RPG에서 플레이어들은 자기 캐릭터의 성취와 승리(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는 케바케겠지만)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 컴퓨터 게임에 비해 RPG에서는 플레이어와 캐릭터 간의 거리가 더 가깝고, 보다 더 강하게 이입하기 쉬운 위치라는 이유가 대표적이지. 어느 정도 자신의 분신에 가까운 자기 캐릭터가 더 강해지고, 이야기 내에서 더 활약하고, 결국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길 바라는 욕구는 상당히 보편적임.
하지만 모든 RPG가 그런 전형적 영웅물인 것도 아니고, 영웅물을 한다 해도 마지막에 비장하게 파멸하는 비운의 영웅 같은 걸 하고 싶다거나 한 발 더 나아가 결국 그간 해 온 모든 일이 삽질이었다는 게 드러나고 몰락하는... 하지만 그 와중에도 끝까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후회 없이 최후를 맞이하거나 하는 종류의 간지를 연출하고 싶다는 식의 욕구에 이끌리는 경우가 있음. 비극 장르가 암울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고대부터 지금까지 늘 어느 정도 수요가 있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거든. 이걸 RPG에 적용한다면... 예를 들어 COC라면 ‘결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대해, 자신의 이성이나 영혼을 갈아 넣어가며 끝까지 저항하는 것 자체에서 나오는 숭고함’ ‘캐릭터야 결국 실패하고 미쳐서 죽는다 해도 플레이어가 그 과정을 플레이하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 뭐 그런 게 COC를 하며 느낄 수 있는 비극의 풍미인 거지(실제로 그런 데 역점을 두는 팀이 얼마나 되냐 뭐 그런 문제는 둘째 치고).
아무튼 뭐 그런 걸 플레이어 입장에서 하고 싶다는 뽕이 찼을 때 나 같은 경우에 어떻게 하냐면...
1)이번에는 그런 거 하고 싶다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마스터를 꼬드긴다(흔히 그렇듯 아무도 마스터를 안 하려고 하면 내가 맡는다)
이건 팀을 잘 만나야 되므로 충족하기 어려운 조건이긴 한데-_- 그래도 이런 거 자주 하는 팀은 종종 있다. 위에서 쓴 것과 같은 ‘멋진 비극’을 연출하고 즐기는데 적극적인 취향 자체가 좀 매니악하다 보니까 절대 비율은 적지만, 그래도 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모여서 하는 듯. 그런 팀 찾아서 들어가는 게 영 어려우면... 뭐 별 수 있냐. ‘오이디푸스 왕 같은 거 해보고 싶지 않냐’ ‘투린 투람바르 멋있지 않냐’ 뭐 그런 식으로 팀원들 옆구리 찔러야지. RPG로 고전 비극 제대로 하기가 어렵고 부담스럽다면 대체로 어두운 분위기에 엔딩도 좀 씁쓸한 경우가 많은 느와르물 영화나 뭐 그런 장르 뽕을 팀원들에게 채워보는 걸 시도해봐라. 고전 그리스 비극 같은 게 너무 처참해서 부담스럽다면 배드엔딩으로 끝나는 호러 영화나, 갤럼들도 거의 봤을 ‘다크 나이트’ 참고 요망. 다크 나이트 결말 정도면 좀 캐쥬얼한 플레이에서도 해볼 만한 수준의 비극이라고 할 만하지(자신은 배트맨 노릇 계속하기 힘들 정도로 다쳤고, 믿었던 사람은 타락했고,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고, 지키고자 했던 도시는 적으로 돌아섰으니). 나도 보통은 평범하게 영웅물 같은 거 하다가 1~2년에 한 번 정도 이런 뽕이 차는데... 지금 팀원들이 이런 쪽에 영 시큰둥해서 이런 거 못한 지 몇 년 됐음.
2)즐기고 싶은 ‘비극’의 성격이 어떤 건지 팀원들과 합의한다
1)의 허들을 통과했다면 축하한다. 반은 성공한 거나 다름 없다.
쨍을 예로 들자면.... 뱀파이어의 비극성은 ‘살아 있는 자들의 피를 마심으로써,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모순’ ‘한 때 사랑했던 것들이 늙고 낡아서 죽어가고 사라져 가는 걸 혼자 남아 지켜봐야 하는 고독’ ‘자신의 정신과 사고방식은 뱀파이어가 되었을 당시에 정체되어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세계가 변하는 걸 보면서 느껴야 하는 소외감과 적응의 어려움’ 등이지. 워울프의 비극성은 ‘숙명적으로 패배할 것이 예정된 전장에 나서서, 절대 이길 수 없을 적과 싸워야만 하는 비장함’ ‘그렇게 싸우고 또 싸워도 아마존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남극 빙산이 녹는 걸 막지 못한다는 절망감’ ‘어쩌면 이 모든 희생과 투쟁들이 사실은 잘못된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 ‘더없이 강대한 공통의 적 앞에서 단결해야 할 친척과 다른 부족들과도 걸핏하면 척을 지는 스스로의 분노와 오만에 대한 회한’ 뭐 그런 것들이고. 이 플레이에서 주로 강조될 만한 비극 요소들이 어떤 게 있는지 서로 브레인스토밍을 해서 4~5가지 정도 추출해 놓으면 다음은 쉬워짐.
3)자신이 완전히 이입할 수 없는, 하지만 플레이 가능할 만큼 사고방식과 행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든다
이건 평소에 영화나 소설, 드라마 같은 거 엔간히 봐뒀다면+그런 거 볼 때 특정 캐릭터에게 이입하지 않고 전체 스토리를 더 많이 따지는 취향이라면 쉽다. 나야 뭐 어떤 플레이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나 자신과 캐릭터를 어느 정도 분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지만 비극 플레이를 할 거면 특히 더 중요함. 너무 플레이어로서의 자신과 밀착된(그게 가치관이건 뭐건) 캐릭터를 만들면 자기 캐릭터의 안위에 지나치게 민감해지기 쉽다. 진짜로 철저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그게 잘 안되더라고.
예1)전에 구쨍 워울프 플레이 준비하며 구상한 캐릭터. 미국 서부시대 배경으로 전원 유럽 출신 워울프들로 캐릭터를 만들어서는 신대륙 워울프들과 싸우면서 호전성이나 편협성 같은 워울프의 대표적인 악덕을 주로 부각한다는 주제 하에... 마지막엔 결국 자신의 그런 태도를 후회하게 되는 흐름으로 가되 그 때까진 ‘용맹하고 나름 영웅성도 있지만 결국 그런 악덕에서 자유롭지 못한 캐릭터들의 비극을 즐긴다’는 취지의 플레이였어. 내가 만든 캐릭터는 독일제국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지크프리트를 비롯한 고대 게르만 영웅들의 무용담을 듣고 컸으며 이 신대륙에서 독일 이민자들로 이뤄진 자기 킨포크들이 살아갈 삶의 터전을 만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 물론 후반부에는 그런 자신을 후회하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덤으로 세월이 흐른 뒤(메타적으로는 엔딩 시점에서) 조국의 동포들이 레벤스라움 어쩌고하면서 나치에 열광하는 모습 보며 젊은 시절의 자기 모습을 겹쳐보고 통곡하는 장면 같은 것도 구상했었고.
이런 캐릭터는 당연히 한국인 성인 남성인 나로서는 완전히 이입할 수 없지. 하지만 동시에 ‘낯설고 위험한 땅으로 이주해 온 동포들을 지키고 위험한 환경과 야만적인 적(이 경우에는 미국 원주민)과 싸운다’는 기본적인 얼개는 그동안 내가 본 수많은 이야기에서 숱하게 다뤄져 왔고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같은 부분에 대해선 플레이 내 상황에 맞게 소화해서 반영할 수 있을 만큼 배경 지식이 쌓인 상태였거든. 결국 플레이는 못해서 아쉬웠지만.
예2)전에 COC하면서 만든 캐릭터. 1920년대 미국에서는 정말로 보기 드문 부자 흑인으로, 백인들의 천대에도 불구하고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이 강한 캐릭터였음. 하지만 그 자부심이 좀 안 좋은 곳을 스쳐서, ‘내가 성공한 건 전부 내가 노력한 덕이고 다른 흑인들은 멍청하고 게을러서 성공 못한 거다’고 여기거나 ‘흑인인 내가 백인 놈들 사이에서 성공하려면 믿을 건 돈 밖에 없다’고 여기는 등 탐욕스럽고 냉혹한 인간이라는 설정이었어.
당연히 흑인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나로서는 완전히 이입 못하지. 하지만 동시에 ‘주류 사회에서 소외받는 소수자 출신으로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자신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독하고 악랄하게 구는 인물상’ 역시 이런 저런 이야기에서 자주 다뤄져왔거든. 예를 들어서 드라마 ‘각시탈’의 주인공 이강토라거나(초반 시점 한정). 그 외에도 유태인 경찰이라거나 뭐 이런 스타일의 캐릭터가 나오는 작품은 많고 그런 캐릭터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냐... 뭐 그런 데 대해 패턴이 좀 파악되어 있었고. 플레이 상에선 흑막의 의도를 알아내고 멘붕한 채 다른 PC들과 함께 간신히 도망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엔딩에서는 결국 예의 성격을 고치지 못해 적을 여럿 만들었고 결국 KKK단원에게 암살당하는 걸로 끝났다. 키퍼가 엔딩에서 각자 캐릭터가 어떻게 됐는지 직접 묘사해도 된다길래... ‘COC를 한다면 역시 적당한 타이밍에 미쳐서 죽어야 제맛이제!’ 생각하고 있었는데 본 플레이에서 그렇게 고생한 느낌이 별로 없어서+키퍼가 밑밥을 깔아주길 기다리다가 결과적으로 너무 캐릭터가 안 움직이게 되서 내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묘사함.
쓰다 보니 생각보다 길어지기도 하고 나가봐야 할 시간이 가까워서... 일단 여기서 끊음. 나머지는 더 보고 싶다는 갤럼 있으면 써보지 뭐.
좌절감 넘치는 세상이라 그런지 1번이 제일 어려워
하나부터 열까지 크게 공감. 그리고 내가 비극적 결말에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뽕이 차는 것도 거리감 잡는 게 익숙해서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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