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인종: 트란실바니아의 민족들

몽골 침략 이전에 헝가리 왕국은 언어적으로 단일한 언어 사용 국가는 아니었지만, 인종적으로는 약 80% 이상이 헝가리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직 헝가리 왕국의 북부의 슬로바키아 지역에서만 헝가리어를 사용하지 않는 슬라브계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당시 헝가리 왕국의 민족성으로 볼 때는 예외적으로 트란실바니아 지역에는 여러 민족들이 뒤섞여 살았다. 오래 전부터 이곳에는 헝가리가 동부로 팽창하던 역사 과정에 참여했던 투르크계 종족인 세케이족과 페체네그족, 그리고 트란실바니아로 이주한 수많은 독일인들이 살고 있었다. 몽골 침입 이후로 헝가리 국왕인 벨라 4세는 국가 재건을 위해 많은 외래인들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250년에는 독일로부터 더 많은 독일인,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유대인들이 헝가리 왕국의 도시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트란실바니아 전역에는 약 9만 가량의 인구가 거주한다. 이들의 민족 구성은 주로 다음과 같다. (민족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유래와는 무관하게 편의상 민족으로 칭함.)


블라크족(The Vlachs; vlɑːk)

고대 다키아 왕국으로부터 이어지는 이 땅의 토착 민족인 이들은 실제로는 로마 시대에 속주민으로 살게 된 켈트족, 슬라브족 등 다양한 민족이 하나로 합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블라크족이다. 블라크들은 스스로를 다키아의 후예라고 믿으며 자부심을 갖고 살아간다. 하지만 사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블라크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블라크들은 농업, 임업, 목축업 등에 종사하며 사회 하층부를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서부 헝가리의 귀족들은 블라크족이 고대 다키아 왕국으로부터 이어지는 오래되고 고결한 핏줄이라는 믿음을 부정하고 있다. 블라크들은 힘든 삶을 살아가지만, 헝가리 왕국의 법과 질서와는 다른 자신들만의 전통과 정의를 가지고 살아간다. 특히 이들은 서부 헝가리 출신의 보야르들은 이해하지 못할 토착민의 미묘한 사회적 문제들을 조정하기 위해 촌락의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을 어른으로 모시고 중재를 받는다. 블라크들은 인근 촌락들 사이에 닥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공식적인 민회를 소집하기도 한다.


트란실바니아 색슨족(The Saxon)

이들은 색슨족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실은 신성로마제국에서 이주한 독일인들이다. 트란실바니아 색슨인들 대부분이 작센 지역에서 왔기에 작센족이라고 부르다가 와전되서 트란실바니아 색슨족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1141년에 헝가리 왕국의 게자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잉여인구를 헝가리 동부의 광활하고도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지로 이주해 식민하도록 많은 지원을 폈던 바 있다. 이러한 이주는 안드라스 2세가 튜튼 기사단을 받아들이며 더욱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이주한 많은 색슨족들은 트란실바니아 지역에 곳곳에 정착지를 세우고 도시를 발전시켰다. 소위 말하는 트란실바니아 일곱 도시는 대부분 색슨족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이들은 빈곤하고 배타적인 토착 블라크족과 달리 헝가리 왕실의 제도적 지원은 물론이고 외부에서 유입된 자원과 기술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많은 색슨인들은 헝가리 왕실과 귀족들로부터 하사받은 토지 덕분에 자영농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어떤 색슨인들은 발달한 야금술과 대장기술 덕에 광산촌을 이루어서 부를 누리기도 했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풍부한 광맥은 바로 이러한 색슨인들의 광산촌을 더욱 번영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블라크를 비롯한 토착민들은 색슨족을 외부에서 들어온 아니꼬운 이웃들로 보며 불신하고 있다. 이러한 토착민의 색슨족에 대한 반감은 아주 먼 훗날, 드라큘라의 시대까지도 이어진다.


세케이족(The Szeklers; ˈseːkɛj)

본디 세케이족은 투르크 유목민 부족 출신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 지역의 역사에 관여하기를 반복한 끝에 이제는 토착민으로 자리잡았다. 세케이족은 유목민 시절의 호전성을 아직까지도 어느 정도 유지한 덕에 헝가리의 이슈트반 1세에게 트란실바니아에 정주할 권리와 더불어 군사적인 의무를 부여받았다. 전시가 아닐 때 이들은 주로 욥바지(Jobbăgy, 후략) 계급에 속하는 자영농들이었다. 때때로 이들은 영주를 위해 세리를 하는 등 하층민들을 다루는 일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전시에 세케이들은 트란실바니아의 지세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정예병들이었으며, 하층민들을 소집해 지휘하는 부사관의 역할도 맡았다. 모든 세케이들이 냉혹하고 잔인한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블라크인들은 세케이인들이 맡은 사회적 역할 때문에 이들을 경원시하고는 한다.


3-2. 계급: 보이보드, 보야르, 그리고 욥바지과 농노들.

트란실바니아의 신분 중 가장 높은 것은 바로 보이보드(Voivode)다. 보이보드는 본디 군벌(Warlord)이라는 뜻이었지만, 이 당시 헝가리에서는 지역의 최고 행정권을 지닌 귀족 출신 고위 관료를 의미했다. 그러나 중앙과 밀접하게 관계된 막강한 귀족인 보이보드들은 대개 자신이 맡은 지역이 아니라 국왕의 근처에 머물렀다. 보이보드들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 대리인을 보냈는데, 트란실바니아처럼 외딴 지역의 경우 이러한 관행은 특히 심했다.  실제로 트란실바니아 통치는 보이보드가 임명한 트란실바니아 출신 호족들에게 위임되는 경우가 많았다. 1270년에 임명된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는 크사크(Csák) 씨족의 매튜였는데, 그 또한 트란실바니아에서보다 슬로바키아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보이보드는 좀 더 널리 쓰이는 칭호다. 트란실바니아의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보이보드란 좀 더 고대의 의미로 독립적인 '군벌'을 가리키며, 자기 힘으로 일정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지니고 있는 자, 즉 다른 지역에서 프린스(Prince)로 불리는 자들이다. 하지만 보이보드의 칭호는 거의 모든 경우 찌미시 클랜의 카인족들 사이에서만 사용된다. 트란실바니아의 일곱 도시를 다스리는 뱀파이어들은 지배자를 뜻하는 말인 도몬(Domon), 혹은 슬라브어에서 유래한 군주를 뜻하는 말 크냐지(Kneaz)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전통은 아마도 찌미시 클랜의 군주들이 자신들의 트란실바니아에 대한 오래된 지배권을 나타내기 위해 용어를 차별화한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보야르들의 연회.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들은 주로 헝가리의 고위 귀족 중에서 임명됐기 때문에 자신이 다스리는 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보이보드들은 트란실바니아에서 오랜 세대를 살아온 전통적인 호족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이 바로 보야르(Boyar)였다. 본래 족장들이었던 보야르 가문들은 오래 전부터 상속되어 온 자기 가문 소유의 광활한 토지와 거기에 딸린 농노들을 소유했다. 트란실바니아가 헝가리 왕국에 속하게 된 이후에도 헝가리의 왕은 보야르들이 대대로 소유해온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었고, 보야르들이 자기 소유의 토지를 자식에게 상속해줄 권리도 부여해주었다.


 대신 헝가리 왕국의 지배자는 보야르에게 보이에리(Boiere)라고 하는 업무를 부과할 수 있었다. 이 업무를 부여받은 보야르들은 보이보드의 군사적·정치적 부름에 응할 의무가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은 자기 땅의 농노들을 소집하여 무장시키고 보이보드의 깃발 아래 모여야 했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정치적 안건이 있을 때면 보이에리를 부여받은 보야르들은 보이보드의 회의에 참석하여 적절한 정보와 조언을 제공해야 했다. 대신 이런 보야르들은 헝가리 국왕의 이름으로 트란실바니아의 여러 지역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주의 신분을 누릴 수 있었다. 이들은 농민과 농노들로부터 조세를 걷고, 법을 집행하며,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등의 의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재산과는 달리 보이에리는 상속될 수 없었고 오직 헝가리의 왕이나 그 대리인으로부터 부여받아야만 했다.


전시의 마질들.


 그러나 모든 보야르가 보이에리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보야르들이 바로 마질(Mazil)이었다. 마질은 여전히 자기 토지와 농노를 소유한 지주였다. 대신 이들의 재산 규모는 보이에리를 수행하는 보야르보다 훨씬 적었으며, 군사적·정치적인 권리와 의무도 없었다. 대신 이들은 군대가 소집될 때면 자신의 무구와 전마로 무장하고 보이보드나 상위 보야르의 깃발 아래 모여 기병대로 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보야르의 후손이라는 뜻에서 '보야르의 뼈를 지닌 자들'로 불리고는 했다.


 여기서 더 몰락한 보야르 중에는 작은 토지만 지닌 소지주나 자영농인 라제시(Răzeşi)가 됐다. 이들은 농노가 없이 자기 땅을 가족이나 하인들과 함께 직접 일구었으며, 농노가 있다 하더라도 매우 적은 수만을 거느리고 있었다. 라제시는 여전히 지주로 농노들에 비하면 훌륭한 대우를 받았지만, 다른 보야르들에 비하면 거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


 보야르의 종류

헝가리 왕국에 대한 의무

재산 

보이에리의 의무를 지는 보야르 

법의 집행, 군대의 소집, 지역 정보 조언

넓은 토지와 부유한 재산, 다수의 농노

마질

기사로 복무

중간 정도의 토지와 재산, 보통의 농노 

라제시 

자유민과 다르지 않음 

적은 토지와 재산, 적은 농노 


 그 외에도 보야르의 핏줄이 아니면서도 작은 자기 땅을 지닌 자유농들 또한 존재했다. 욥바지(Jobbăgy)로 불리는 이런 자유농들은 자유권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경작 활동을 하며, 지주에게는 단지 지대로서 산출 농작물의 일부만을 지불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트란실바니아 토착민인 블라크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벨라 4세의 개방 정책 이후 유입된 외래 농민들이었다. 욥바지의 권리는 이주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었던 셈이다. 욥바지는 기본적으로 영주에게 예속된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원한다면 땅의 경작권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자유가 있었다. 어떤 욥바지들은 대장장이이거나, 야금인, 석공 등의 직인인 경우도 있었다.


그에 반해 농노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가 없고 보야르에게 예속된 자들이었다. 이들은 작물의 상당량을 자신들의 주인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됐다. 뿐만 아니라 농노들은 자신이 예속된 곳에서 벗어날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므로 사실상 영주에게 소유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농노는 성직에 취임할 수 없었고, 법정에서는 농노가 아닌 자유민에 대한 증언자격이 없었으며, 영주의 직영농장에 대한 부역, 삼림벌채, 곡물운송 등 다양한 노동에 동원됐다. 그 외에도 농노들은 자유민에 비해 다양한 세금을 영주의 자의에 의해 내야 했다. 예를 들어 욥바지는 자기 지역의 영주에게 정해진 액수의 보호세를 지불해야 하는 반면, 농노들이 내야하는 액수는 영주의 결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노들은 노예와는 달리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간주되었다. 이는 곧 농노들이 사유재산을 소유하거나, 자의에 따라 결혼을 할 수 있으며(물론 다른 장원의 사람과 결혼할 경우에는 혼인세를 물어야 했다), 법적으로 영주의 보호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의미했다.


3-3. 의: 그들이 입는 것

13세기에만 해도 유럽의 의복은 그다지 다양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착용되는 것은 튜닉과 바지였는데, 지역이나 신분의 차이에 따라 같은 종류의 옷이라도 그 길이나 부위적 특징 따위에서 차이가 있었다. 대개 의류는 리넨이나 양모, 가죽 등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가끔 부유한 상류층 중에는 벨벳이나, 동로마 제국에서 구해온 비단으로 튜닉을 만들어 입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중세 농노들이 착용하는 의복의 종류.


 대부분의 자유민과 농노들은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살았다. 13세기부터 유럽의 많은 이들은 머리를 감싸는 가죽 코이프나, 두건 등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트란실바니아 지역에는 아직 이런 모자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으므로 어떤 이들은 여전히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기도 했다. 튜닉을 입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튜닉은 단순한 리넨으로 만들었고 이렇다 할 장식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또한 이들은 호스라고 하는 몸에 딱 붙는 바지를 입었다. 샌들이나 신발은 가죽으로 만들었고, 더 가난한 이들은 나막신을 신었지만, 좋은 가죽으로 만든 장화는 흔치 않았다. 자유민들은 모두 자신의 단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단도는 식사를 비롯한 일상 전반에서 폭넓게 사용되는 유용한 도구였다. 그러나 농노 중에는 자기 단도가 없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트란실바니아 여성의 전통복장.


 귀금속 공예품은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보야르 외의 계급은 그런 호화로운 사치품을 갖기에는 너무 가난했다.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들 나름의 장식물을 만들었다. 야생화를 따서 실에 메단 장식품들을 집 천장에 걸어두거나, 나무를 깎아서 손목에 끼울 팔찌를 세공하기도 했다. 다양한 색의 염료를 구할 수는 없어도, 사람들은 각자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수준의 염료를 구해 옷을 물들여 입었다. 특히 트란실바니아와 몰다비아 지역은 화사한 색깔의 전통의복으로 유명했다. 이는 아마도 인접한 동로마 제국과 투르크, 그리고 북쪽의 중앙아시아에서 온 유목민족의 영향으로 보인다.


3-4. 식: 그들이 먹는 것.

마을 주민들의 식사는 주로 호밀, 보리, 또는 잡곡으로 만들어진 검은 빵과 야채 수프 냄비에서 떠낸 콘파나티쿰, 치즈 약간 또는 식사를 부드럽게 마무리할 응유 한 사발 정도였다. 매일 야채 수프를 끓여 먹기도 했는데, 주로 배추를 넣고 끓였다. 여유로운 집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달걀을 식단에 추가할 수 있었다. 고기는 자주 먹을 수는 없었지만 이따금 식탁에 오르는 일도 있었다. 대개 육류는 소금으로 건조하여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으로 사용되었다. 간혹 영주에게 사냥세를 내면 합법적으로 꿩, 토끼, 사슴 등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냥세를 내지 않더라도 불법적으로 사냥을 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물가에 접한 지역에서는 생선도 식단에 포함됐다. 당시에 비버나 개구리는 '생선'의 일종으로 간주되었기에 수도사들의 별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식량이 부족할 때는 물푸레나무 껍질을 뜨거운 물에 푹 고아서 먹거나, '지붕 밑의 토끼(고양이)', 참새 등을 잡아먹기도 했다.


 음식의 종류가 한정되었던 만큼 식사에 사용되는 식기의 수도 적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용도 단도를 휴대했고 스푼도 아주 보기 드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생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던 시절인 만큼 가장 자주 활용된 식기는 바로 자신의 손이었다. 포크는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유럽에서는 기묘한 물건에 속했다. 포크는 오랜 옛날부터 존재하기는 했지만, 식기가 아니라 주방기구로 사용됐다. 포크는 비잔틴 제국에서 정도에서나 10세기경부터 아주 간혹 식기로 사용되었다. 16세기가 되면 이따금 문헌상 포크를 사용하는 서유럽 귀족들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는 19세기 말에도 영국 해군에서는 규율과 남성다움을 해친다는 이유로 포크의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다고 한다.


3-5. 주: 그들이 사는 곳.

어떤 촌락들은 고대 로마 정착지의 유적 위에 건설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마을들은 한두 세기 전에야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촌락이라고 해봐야 다섯 채 가량의 민가들이 모인 정주지가 광대한 숲과 계곡 사이사이에 서로 떨어진 채 존재하는 산거정주(dispersed settlements)를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세대마다 따로 떨어진 채 고립되어 거주하며, 촌락과 촌락을 오가는 데는 며칠이 걸릴 수도 있다. 이곳 거주민들의 대부분은 농노다.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그저 목재통을 만들거나 쟁기를 고치는 정도의 기술을 지닌 공인(工人)들이 소수 존재할 따름이다. 많은 촌락들이 신부가 없을 정도로 작기 때문에 신부와 수도사들은 촌락에서 촌락을 오가며 성사를 치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문맹이며, 지역 보야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과 자신들의 소박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 외의 다른 일에는 별다른 관심 없이 살아간다. 신부들은 주로 다른 신부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아 임명된다. 신학을 정식으로 배운 이들은 많지 않고, 심지어는 문맹인 신부들도 존재한다. 이 시대에는 아주 학식이 높은 이들도 묵독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트란실바니아 외딴 촌락의 민가.


 비록 트란실바니아 곳곳에 정주지가 있기는 하지만 크게 성장한 도시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촌락들은 진창으로 둘러싸인 몇몇 민가가 초라하게 모여있는 수준이다. 오직 10여개 정도의 도시만이 눈여겨볼 정도의 크기를 지니고 있다. 트란실바니아의 많은 도시들은 최근에야 비로소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고 14세기에 들어서나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들 중 주요한 일곱 도시는 고대 로마나 다키아 시대부터 존재하던 터에 트란실바니아 색슨인들이 다시 쌓아올린 것이다. 일곱 도시는 일곱으로 분할된 각각의 독립적인 영역들을 총괄하는 중심점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트란실바니아의 촌락에는 약 30명에서 200명 사이의 인간들이 정주하나, 이들 일곱 도시은 1000에서 3000명 가량의 정주 인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성벽 내의 도시는 매우 좁다. 길가에는 늘 사람이 득실거리고 소음은 심각하다. 상·하수도가 없었으므로 도시 생활은 비위생적이었으며, 도시의 땅값은 비쌌기 때문에 건물들은 윗층으로 올라갈 수록 걸문이 길쪽으로 튀어 나왔다. 그리하여 번성한 도시들의 경우에는 길에서 하늘이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은 도시 안에서 가축을 키우거나 텃밭을 가꾸기도 했기 때문에, 거리에서는 온갖 오물 냄새가 진동했다.


중세 일반 가정의 집안 풍경.


 집의 지붕은 건초를 얹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온전히 벽돌로 지어지는 집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도시에서조차 석재로 건축되는 건물들은 공공기관이나 소수의 대성당 정도가 고작이었다. 농민들은 돌과 나무로 기초를 세우고, 지붕 위에는 마른 풀을 얹은 초가 움막집에서 살았다. 일반적으로 3대가 한 집에서 살았으며, 아들이 여럿인 집에서는 아들들의 가족까지 함께 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한 가구의 실제 머릿수는 10명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집에는 방이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가족은 함께 바닥에 누워서 잤다. 추운 가을이나 겨울에는 이렇게 함께 모여자는 것이 체온을 나누기에 유리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하기 위해 염소나 양 같은 가축까지도 집 안에 들여서 같이 자기도 했다. 이 탓에 부주의한 젊은 부부는 갓난아기와 같이 자다 실수로 아기를 눌러죽이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는 벽난로도 없고 제대로 된 굴뚝도 없었으므로 집에서는 요리와 난방을 모두 집 중앙의 화로를 통해 처리해야 했다. 좁은 집에 대가족이 모여 살다 보니 자다가 굴러서 화로라도 엎는 날에는 집은 물론이고 가족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화로로부터 나오는 연기와 그을음도 문제였다. 원시적인 연기 구멍에 환풍을 의존하던 겨울이면 집 안을 소용돌이치던 연기 때문에 눈물이 흘렀다.


3-6. 일상: 그들이 사는 법.

트란실바니아 농노들의 일상은 주로 보야르에게 소작료를 바치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란실바니아의 토질은 그다지 비옥하다고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못되며, 그나마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고르고 개방된 땅은 제한적이다. 토질만이 아니라 토지의 경작 또한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돌덩이를 뽑아내고, 거친 땅을 깊게 팔 수 있는 보습(Plowshare)은 이 시대에는 트란실바니아에 아직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각 세대는 집 근처에 약간의 경작지를 가지고 가축의 분뇨를 비료로 삼아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땅의 양분이 다해서 더 이상 작물이 잘 자랄 수 없게 되면 다른 토지로 옮겨서 경작한다. 인구가 적은 곳에서는 두 개 정도의 경작지로도 번갈아가며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큰 촌락의 경우에는 서너 개의 경작지로 이포제나 삼포제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는 한다. 삼포제의 경우 경작지는 크게 셋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곳에는 여름 곡물인 보리, 귀리 등을 심으며, 두 번째 곳에는 가을에 파종하는 겨울 곡식인 밀, 호밀 등을 심고, 마지막 세 번째 곳은 한 해 동안 휴작을 하는 것이었다.


트란실바니아의 경작지.


 농업에 한계가 있었기에 이곳의 많은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염소나 양을 기르는 목축업에 종사했다. 그 탓인지 트란실바니아의 민담에는 유난히 목동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봄이 되면 결혼을 안 한 젊은 남성들은 자기가 사는 촌락의 염소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간다. 트란실바니아의 산악지는 중턱에 오르면 완만한 구릉지가 너른 들판처럼 전개되는데, 이런 곳을 오가며 염소들에게 풀을 먹이는 것이다. 이곳의 산들은 매우 높기 때문에, 어떤 목동들은 일단 산에 올라가면 계절이 바뀌기 전에는 촌락으로 돌아가지 않기도 한다. 이런 목동들은 산 위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지내다 가을이 되고서야 집으로 돌아가고는 한다. 이처럼 산 위에서 고독하고 외로운 생활을 하기에, 목동들은 자주 범죄에 노출되거나, 반대로 그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 지역에는 한 지역의 목동이 그의 가축을 노린 다른 두 지역의 목동들에게 살해되는 민담이 오래 전부터 전해오고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굶주린 뱀파이어가 목동을 노릴 수도 있는 법이다.


양과 염소에게 먹이를 먹이고 돌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과에 속한다.


 사냥은 이 지역의 중요한 식량조달 수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직접 발로 뛰면서 숲을 뒤지고 야생동물을 찾아 사냥한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었다. 카르파티아 산맥은 유럽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산맥이며, 울창한 숲과 무수한 계곡들이 지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곳을 함부로 돌아다니다가는 어떤 사람이라도 조난을 당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도 이 지역에는 거대한 곰이나, 사나운 늑대 무리 등의 위험한 맹수들도 숲 속을 배회하고는 한다. 함부로 숲으로 들어갔다가는 어느 순간에 사냥꾼이 사냥감이 될지 모르는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사슴 같이 예민하고 민첩한 생물을 잡는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사냥은 덫을 놓아 짐승을 잡는 방식이다. 동물들이 자주 돌아다니는 것으로 확인된 몇몇 지역에 덫을 설치하고 돌아갔다가, 시간이 지난 후 돌아가 덫을 확인하는 것이다. 늘 무언가 잡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덫에 잡히는 동물들은 대개 멧새, 토끼, 여우 따위의 작은 것들이다. 하지만 이따금 늙은 곰이나 특별히 머리가 좋은 여우 따위가 나타나서 인근 지역의 덫을 모조리 작동시켜서 사냥을 망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역을 위해 모인 농노들.


 그 외에도 농노들은 영주직영지(demense) 경작, 가옥이나 성벽의 수리, 벌목, 개간 등 다양한 노동에 동원됐다. 이런 부역은 일반적으로 일주일 중 3일 정도였다. 일요일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농민은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의 절반을 영주에 대한 부역으로 제공했던 셈이다.


 하지만 영주의 권리보다 중요한 것은 촌락공동체의 관습이었다. 물론 영주는 농노로부터 부역과 각종 공납을 마음대로 요구할 권리가 있었으나, 지역의 관습은 이를 억제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정해진 것은 관습화되어 영주권으로도 마음대로 인상하거나 새로운 요구를 하기 힘들었다. 영주의 입장에서도 지나친 요구나 수탈, 또는 부당한 재판권 행사 등으로 지역 공동체 자체가 마비되거나 붕괴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으므로, 관습을 존중하는 것이 안전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습에는 수확이 끝나면 누구의 경작지에서든 떨어진 이삭을 주울 수 있다거나, 촌락의 목초지에서는 공동으로 가축을 방목할 수 있다거나, 소택지에서의 고기잡이나, 주변 숲에서 벌목을 해서 땔감을 구할 수 있는 권리 등이 있었다. 심지어는 경작지에 심는 곡식의 종류, 파종과 수확의 시기도 모두 관습에 의해 정해진 것들이었다. 이처럼 관습은 농민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규정했으며, 그들을 둘러싼 자연적 제한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부정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