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좀 길게 썼다가 WoD 종자들은 엄근진이라는 얘기를 듣고 괴로워서 다 지웠습니다...
Blood Treachery(이하 BT)는 워낙 괴작이라 알 사람은 다 알 시나리오집입니다. 하지만 WoD의 시나리오 중에서도 이 물건은 실용성이 가장 떨어지면서도,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물건 중 하나입니다. 왜냐고요? 이거 희곡으로 쓰였거든요... 실제로 이 내용을 어떻게 돌리라는 건지에 대한 지시문이 별로 없습니다. 저도 처음 샀을 때는 짜증났을 정도였어요. 이게 시나리오집이야 소설이야? 아마 이거 쓴 놈들은 "여러분 WoD 설정으로 연극 하세요"라는 느낌으로 냈던 건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BT의 시놉시스는 대략 이렇습니다.
도이세텝의 함락 후 오더의 메이지들은 자신들의 피해 상황 및 산재한 문제들을 정리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그랜드 트리뷰널을 소집합니다. 그런데 아주 묘하게 시기가 겹찬 탓에 여기서 뱀파이어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문제의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오더의 중요한 한 마법서가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세상에서 오더의 마법이 작동하지 않기 시작함에 따라 이 마법서에 쓰인 위대한 소환의 의식이 더 이상은 효과를 발휘하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오더 메이지들은 라틴어로 번역된 판본이 아니라 에녹어로 쓰인 원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이 원본을 트레미어들이 오더로부터 분리독립할 때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더가 모여서 뱀파이어 얘기를 하다보니 더욱 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린 카발 중 한 명이 뱀파이어들에게 납치되서 포옹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방글라데시에서 어느 뱀파이어(..?)가 초자연적 재앙을 불러일으켜 대량학살을 벌였으니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거기에 힘을 위해서는 다소 무모한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하우스 티탈루스 메이지들은 뱀파이어의 피를 탐해서 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끼어듭니다. 이렇게 뱀파이어들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쌓이고 쌓이다 보니 오더는 결국 뭔가 이상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뱀파이어과 싸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소 괴랄합니다.
놀랍게도 오더는 진지하게 트레미어 클랜이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지존의 자리에 앉아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더는 메이지들 사이에서도 자기들이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트레미어 클랜은 원래 오더의 메이저 하우스 중 하나였으니까 당연히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최고일 거라는 겁니다. 지존 마법사+뱀파이어=지존 뱀파이어. 그래서 얘들은 방글라데스에서 라브노스 3세대가 벌인 파괴를 승천 전쟁의 일환으로 생각합니다. 테크노크라틱 유니온도 개입했었으니 오해할 수도 있기야 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오더는 결국 인류의 진정한 수호자이자 선지자인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새로운 승천 전쟁의 적이 나타났다고 천명합니다. 바로 트레미어 클랜을 정점으로 하는 뱀파이어들 말입니다.
BT의 내용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프닝들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더와 오더의 뒤틀린 반영인 트레미어의 대립을 통해서 오더의 휘브리스를 보여주는데, 꽤나 웃기면서도 실제 플레이에서 메이지의 주제로 생각해볼 만한 주제의식(특히 휘브리스)들을 툭툭 던집니다. 그런 점에서 BT는 메이지, 그 중에서도 특히 오더를 하실 분들은 한 번 정도 봐두면 좋을 책인 듯합니다.
아래는 BT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본문이 희곡의 형식이므로 저도 비슷하게 써 보겠습니다.
*상황 - 결국 트레미어 3세대가 오더 오브 헤르메스의 마스터들이 모인 자리에 나타나서 대면한다. 하지만 오더 마스터인 길모어는 겁먹지 않고 트레미어의 죄를 조목조목 따진다.
로드 길모어: 너희는 범죄자이자 악마숭배자들이다. 너희는 살인, 길굴, 그리고—
트레미어: 지금 와서 800년이나 지난 죄의 책임을 묻겠다는 건가?
로드 길모어: —그리고 방글라데시에서 수백만의 무고한 인명을 학살한 잔악행위의 책임이 있다.
트레미어: 방글라데시? 난 그런 건 듣지도— 아... 알겠군. 자네는 그 불쌍한 라크샤사가 스스로 불러일으킨 몬순 속에서 죽어간 작은 전쟁을 말하고 있는 모양이군. 내가 알기로 그는 깨어났을 때 완전히 통제불능의 상태였네. 하지만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그 얘기를 해야 하는 거지?
로드 길모어: 왜냐면 네놈이 그 "라크샤사"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트레미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길모어를 응시한다.
갑자기, 그는 웃기 시작한다.
트레미어: 통제한다고? 지금 스스로 뭐라고 지껄인 건지나 알고서 하는 말인가? (중략) 너희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잔악행위나 범죄에 대해서 떠들고 있지만, 지금 내게 보이는 것은 그저 오더가 책 때문에 사람들을 죽여대고 있는 모습 뿐이다.
"놀랍게도 오더는 진지하게 트레미어 클랜이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지존의 자리에 앉아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더는 메이지들 사이에서도 자기들이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트레미어 클랜은 원래 오더의 메이저 하우스 중 하나였으니까 당연히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최고일 거라는 겁니다."
존나 법뻔뻔들 다워서 뿜었다
역시 트레미어가 3세대 중에 제일 부지런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복지는 안챙겨주는구나
트레미어는 오더 출신이면서도 제정신 박혀 있네.
다단계 피라미드원들....
트레미어도 고생 좀 오래 하면서 그나마 후회도 하고 제정신 박았지만, 결국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하는 짓 보면 아직 정신 못차린 것.
그림에서 맨 왼쪽에 다소곳이 죽어있는(?) 아이가 괜히 예뻐보이네요.
ㄴ히익 시간텍섹러...
그런데 그래도 트레미어가 자기네들에서 떨어져 나가 자리잡은 벰파이어 분가란 건 알고 있구나.
라브노스 안테딜루비안은 99년 6월에 사망하고, BT는 2000년 1월에 벌어집니다. 정확히는 그랜드 트리뷰널에서 하우스 쿼지토르가 선전포고하는 게 2000년 1월.
그리고 아마 방글라데시에서 문제를 일으킨 라브노스 안테딜루비안은 자파사수라일 거 같긴 합니다만... 애초에 라브노스는 시조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해서 3세대 후보가 몇 명 됩니다. 일설에 따르면 라브노스 클랜의 시조는 3세대가 아니라 2세대라고도 합니다.
주제에서 조금 벗어난 이야기기는 합니다만... 라브노스들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3세대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는 다크 에이지에서 제가 자주 써먹는 소재 중 하나입니다. 라브노스들의 로드 오브 패러독스의 여러 갈래들 중 어느 길을 걸을지 선택할 때 흥미로운 이야기거리가 되거든요.
헤르메스는 아르스마기카 전관예우란 걸 빼고 딱히 어센션이란 주제에 들어맞는가 굉장히 회의감이 듭니다. 사상적으로 미래관이 완전히 결여된 느낌. BT보고 확인사살한 느낌이었죠.
저는 오더가 트레디션의 성격 중 한 축을 이룰 정도로 중요하다고 보고, 특별히 어센션 워에 부적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센션 워는 세상을 얼마나 새롭게 바꿀 것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더 낫게 바꿀 수 있느냐기 때문이지요. (완전히든 부분적이든)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파벌도 적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컬트 오브 엑스터시는 근본적으로 만유재내신론자들이고, 드림스피커는 범신론자들이며, 버베나도 페이거니스트들이지요. 현대에 와서 이들이 현대적 방법론이나 사상들을 부분적으로 수용해서 변한 점이 있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이들은 트래디셔널리스트들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인 조직인 트래디션을 대표하는 게 오더고요.
다만 실제로 세계를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인 타협책을 갖고 있는가에서는 오더를 위시한 많은 원리주의자 트래디션이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은 맞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야말로 2nd부터 줄기차게 트래디션에게 던져지는 딜레마였지요. 지금이 잘못됐는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넌 암흑기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이 문제를 두고 트래디션들 사이에, 그리고 꼴대 메이지와 얼라 메이지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들은 어센션 워에서 꽤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그래서 넌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싶다는 거야? 그게 지금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어?"라는 질문은 플레이어/PC에게도 던져지는 것이고요.
그점에서 더더욱 존재가치가 없는 것이죠. 차라리 과거회귀라고 했을 때 트래디션마다 나름대로 대안사회와 그에 따른 가치관이 존재하죠. 그런데 헤르메스는 이미지만 있고 아무 것도 찾을 수 없고요. 자기잘난 맛에 사는 헤르메스에게 딜레마란 건 너무 과분한 표현같습니다.
저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다른 트레디션들이 추구하는 패러다임이 서로 차별화되는 방향성이라면, 오더가 지니고 있는 방향성 또한 다른 트레디션들과는 차별화되는 유의미한 것입니다. 그렇게 자주 거론되는 Perfection 말입니다. 인간들이 세상의 비밀과 법칙들을 파악하여 더욱 고등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믿음은 막연하게 느껴질 수는 있어도 의미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최소한 대부분 트레디션들 만큼의 의미는 있지요. 저는 인간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심지어는 신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더욱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은 오더에게서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