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WOD 얘기가 나오면서 그간 겪었던 경험과 감상 이야기를 좀 했더니 "이런 권문세가 쟁폭도 틀딱충 새끼, 자랑질 그만하고 좀 쉽게 놀면 안되냐?" 라는 반응이 몇 개 나왔다.


뭐, 이런 오해가 나올 줄 알면서 이야기했던 거 맞다. 좆 같은 규칙을 가지고 재밌게 놀아보겠다고 처절하게 노력한 생존투쟁의 결과물이지만, 그 과정을 보여준 게 아니니 결과물만 두고 보면 틀니 딱딱거리는 고증병자의 훈수 or 쓸데없는 설정만 불려놓는 자아도취 캐릭터 씹덕질로 보일 수밖에.


그래서 오해를 풀기 위해 이번에는 그 과정을 조금 이야기해 볼까 한다. 왜 WOD는 더블크로스처럼 쉽고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없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읽는 사람들이 원한다면 찾아볼 수 있도록, 한글로 정식 번역된 V20을 기준으로 설명했다.



0. WOD와 더블크로스의 차이: 게임 규칙의 목표가 다르다



나는 4년 전쯤 더블크로스라는 규칙을 처음 접했는데, 오랫동안 해 온 좋은 팀을 만난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플레이할 수 있었다.


당연히 WOD와 더블크로스의 소재와 분위기의 유사점에도 주목했지만, WOD를 더블크로스처럼 진행하거나 규칙을 더블크로스로 컨버팅해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두 게임 규칙의 목표가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로 인해 게임에서의 장애물과 자원, 캐릭터를 규정하는 규칙도 달라지고, 궁극적으로는 참가자의 의사 결정의 형태마저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 WOD 규칙의 목표: 캐릭터의 내적 갈등을 플레이 안에서 구현하라, 비극적으로.



자, WOD 규칙을 다른 규칙으로 변환하려고 시도한 사람이 있다면, 그래서 결과물을 어떻게든 만들어 본 적이 있다면 내가 말한 게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WOD의 캐릭터 시트에는 다른 규칙들ㅡ특히 D&D를 필두로 하는ㅡ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거나, 비슷한 게 있어도 딱 들어맞지는 않는 변수(Parameter)들이 있다. 심지어 그 변수를 플레이나 판정에 활용하는 방법도 이질적이다.


가장 먼저 만들어져서 다른 세팅의 규칙 디자인의 근간이 된 뱀파이어를 예로 들자면, 배경점수(Backgrounds), 미덕(Virtues), 인간성/계몽사상(Humanity/Path)이 대표적으로 이상한 변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변수를 디자인했을까?


물론 우리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룰북에 자랑스럽게 디자이너들이 써 놨으니까. "이 규칙의 목표 음모론적인 세계를 바탕으로 고딕 펑크의 소재와 분위기를 써서 캐릭터들의 비극적인 내적 갈등을 스토리텔링하는 것입니다!"


뭔 개똥같은 소린가 싶은 사람이 많겠지만, 디자이너들은 이걸 어떻게 구체적인 게임의 형태로 구현할지 고민했다.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쓴 게 아니라 게임 규칙을 개발하는 원칙이었다는 소리다.


그리하여 음모론적인 세계/고딕 펑크의 소재와 분위기 이 두 가지는 WOD 특유의 방대한 설정과 각종 초자연적인 능력 등으로 구현되었다.


워낙 방대하다 보니 처음에 천명했던 "고딕 펑크"를 벗어난 부분도 꽤 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기조는 1970~90년대에 유행했던 서브컬처의 아이콘들과 종말론적인 시대 분위기에 맞춰져 있지.


그리고 캐릭터의 비극적인 내적 갈등, 바로 이 부분을 위에서 말한 이상한 변수들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3. 규칙의 목표를 구현하는 방법: WOD 뱀파이어에서 캐릭터의 내적 갈등을 비극적으로 구현하는 변수들 (V20 기준)



3-1. 배경점수(Backgrounds)



WOD 뱀파이어 플레이어들을 캐릭터 메이킹 과정에서 좌절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흉인 배경점수를 보자.


V20 한글판 78쪽을 보면 "배경점수는 캐릭터의 물질적 자산 및 사회적 네트워크를 정의합니다"라고 요약했고, 110쪽에서는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준다. "배경점수는 캐릭터가 가진 관계, 상황, 기회의 우월함을 나타냅니다...플레이어는 캐릭터가 어떻게 배경점수를 얻게 되었으며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적 자산, 사회적 네트워크, 관계, 상황, 기회의 우월함. 혹시 금수저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는 않는지?


내가 벌었거나 상속받은 재력, 나를 사랑하고 아껴 주는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 내게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는 인맥들, 나의 명성, 나를 가르치고 인도해 주는 스승...


슬슬 감이 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배경점수는 캐릭터의 신체와 정신에 물리적으로 직접 귀속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귀속된다. 즉 캐릭터에게 굉장히 중요한 또 다른 능력치로서 사회 안에서 캐릭터의 위치와 삶의 형태를 규정한다.


그런데 현실과 마찬가지로 캐릭터의 삶이 성립하려면 자신을 사회적으로 지지하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 자존감과 자아의 목적을 제공할 배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군거 본능을 제거하지 못하며, 사회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독을 달래 줄 친구나 연인에 대한 갈망, 편안하고 고급스럽고 안전한 안식처 또는 가축물의 필요성, 타인의 관심과 환호를 원하는 마음, 적절한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정신적/물질적 방황 등등...


그러므로 캐릭터는 이처럼 소중한 배경점수를 잃을 위기에 처하면 어떤 식으로든 날카롭게 반응하며, 반대로 얻을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으려 한다. 내적 갈등을 외부로, 배경점수를 놓고 벌어지는 외적 갈등으로 바꿔서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저런 거 다 필요없다는 먼치킨 쿨병환자 플레이어라도 최소한 세대 점수에는 환장하지 않던가? 자기 캐릭터를 포옹하기로 선택한 대부를 매번 7세대 아니면 6세대로 설정하지 않던가? 기회만 되면 디아블러리의 대상을 찾거나 텔러한테 내보내달라고 조르는 플레이어/캐릭터를 나만 자주 본 게 아니라고 믿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WOD 뱀파이어의 배경점수는 캐릭터의 내적인 갈등을 발생시키고, 외부 현실에서의 캐릭터의 사회적 위치와 삶의 형태로 구현하는 변수라고 할 수 있다.



3-2. 미덕(Virtues)



V20 한글판 78쪽에서는 "미덕은 캐릭터의 영적, 윤리적 강인함 혹은 나약함을 드러냅니다."라고 설명하며, 119쪽에서는 "미덕 특성은 캐릭터의 삶에 대한 관점을 정의합니다. 캐릭터의 윤리 법칙을 형성하며 자신이 선택한 도덕성에 얼마나 헌신하는지를 나타냅니다." 라고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삶에 대한 관점. 이거 다른 말로 하면 바로 가치관이다. D&D에도 나오는 그 가치관 말이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치있고 옳은 것이고,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그런가를 판단하고 정당화하는 관점의 총체. 그런데 D&D와 다른 점은 WOD가 이것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눠서 규정했다는 것이다.


인간성을 따르는 캐릭터의 미덕은 다시 양심(Conscience), 자제력(Self-Control), 용기(Courage) 변수로 나눠서 각각 도트 등급을 갖게 되고, "강인함 혹은 나약함"이라고 요약했듯이 등급에 따라 캐릭터의 특성도 정해진다("무정함", "금욕적", "대담함", 그리고 의지력 수치까지). 심지어 여러 판정에 이 수치를 직접 쓴다.


왜 그랬겠는가? 미덕 역시 캐릭터의 내적 갈등을 발생시키는 요소이며, 외부 현실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판단할 때 쓰는 중대한 기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인간들 절대 다수는 돈을 원한다. 돈을 공짜로 주겠다고 하면 안 받을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돈을 얻겠다고 총을 들고 은행에 가서 금고를 털지는 않는다. 그 행동이 왜 옳지 않은지 설명하고, 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관점이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범죄를 저지르면서 겪게 될 위험에 대한 공포도 작용한다.


그러나 돈에 대한 갈망이나 필요가 우리의 양심과 자제력, 공포를 넘어설 만큼 강해질 때, 우리들 중 몇몇은 총을 들고 은행을 터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캐릭터의 내적 갈등이 직접 행동을 통해 외부로 구현되는 순간이며,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인간성이 떨어지거나 오르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미덕은 등급 또는 판정을 통해, 내적 갈등의 모든 순간에 직접 작용하도록 디자인되었다. 자제력이 낮은 자는 참지 못하고 수상해 보이는 은행원을 쏴버릴지도 모르고, 양심이 높은 자는 그 행동에 회의를 느껴 배신할지도 모른다. 경찰에게 포위되었을 때 용기가 부족한 자는 총을 내던지고 벌벌 떨며 항복할 것이다.


한마디로 미덕의 수치에 따라, 그리고 그 수치를 쓴 판정에 따라 행동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WOD 뱀파이어의 미덕은 캐릭터의 내적인 갈등을 발생시키고, 외부 현실에서의 캐릭터의 행동을 결정하여 구현하는 변수라고 할 수 있다.



3-3. 인간성(Humanity) 또는 계몽사상(Path)



V20 한글판 78쪽에서는 "인간성/계몽사상: 이 특성은 언데드로서의 삶에 대한 캐릭터의 관점을 나타냅니다."라고 하며, 309~311쪽에 걸쳐 "뱀파이어의 저주는 캐릭터의 도덕적 본성을 쇠퇴하게 하기 때문에 캐릭터의 인간성은 이 게임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인간성은 뱀파이어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지켜주는 내면의 가식입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끝났다면 인간성/계몽사상은 D&D의 가치관 같은 공수표 규칙과 별 차이 없었을 것이나, 그 뒤에 보면...



*기운(Bearing): 캐릭터의 인간성/계몽사상 등급이 높을수록 캐릭터가 다른 사람들에게 특정한 "느낌"을 줌. 관련 판정에도 보너스/페널티로 들어감.


*기상 규칙: 인간성/계몽사상이 높을수록 매일 밤마다 잠에서 빨리 깸.


*가사동면 규칙: 인간성/계몽사상이 높을수록 가사동면 기간이 줄어듬.


*미덕 판정: 인간성/계몽사상이 너무 낮으면 미덕 판정 주사위를 깎아버림. (예: 인간성이 2점이면 용기가 5점이라도 판정할 때 2개밖에 못 굴림)


*생김새: 인간성/계몽사상이 너무 낮으면 기운(Bearing)이 반영되어서 한눈에 봐도 괴물처럼 보이고 섬뜩한 느낌을 줌. 즉 인간들 틈에 섞이기 어려워짐.


*NPC로 전락하기: 인간성/계몽사상이 0이 되면 더 이상 플레이어 캐릭터로 사용 불가.



굉장하지 않은가? 게임에서 변수 하나가 이렇게까지 플레이에 영향을 주고, 또 그 영향이 치명적인 경우는 거의 찾기 힘들다. D&D로 따지면 주 능력치 정도일까? 아니, D&D도 이 정도는 아니다. 캐릭터 시트를 뺏는 규칙 같은 건 없으니까 말이다.


더블크로스의 침식률이 다소 유사한 기능을 하지만, 침식률은 오히려 올라가면 캐릭터가 가진 이능력을 강력하고 멋지게 확장하는 측면이 있어서 전투를 할 때 13시대의 고조 규칙처럼 작동한다. 하지만 인간성은 캐릭터의 초자연적인 능력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고, 더블크로스처럼 급격하게 오르거나 내리지도 않는다.


대체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여기까지 지루함을 참고 읽어온 사람들이라면 금방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WOD의 목표가 어떤 성격을 갖는지 짚어보겠다.


V20 한글판 14쪽의 "테마와 분위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핵심 테마는 "야수가 될까 두려워 차라리 야수가 되노라"이다.


309쪽에서는 "V:tM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 중에 하나가 바로 자신의 영혼을 지키고 야수성의 손아귀를 피하려는 뱀파이어의 갈등입니다."라고 설명한다.


345쪽의 스토리텔링 파트에는 "V:tM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권능과 영원한 삶에서 비롯되는 인간성과 괴물적 충동 사이의 갈등을 다룹니다."라고 써 있다.


그리고 인간성이야말로 이러한 목표, 즉 캐릭터의 내적 갈등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눈에 보이는 외적 형태로" 구현하기 위한 가장 노골적인 변수인 것이다.


외부 현실에서의 갈등 상황은 [배경점수]를 통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발생한다. 상황 안에서는 [미덕]이 다른 설정들과 함께 작용해서 캐릭터의 행동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런 플레이의 결과로 퇴행 판정을 하게 되어 [인간성]이 떨어지면(V20 한글판 7장 참조), 캐릭터는 진짜로 괴물이 되어간다. 섬뜩한 기운을 온 몸에 휘감고, 어둠이 깊어진 후에야 깨어날 수 있으며, 이타적인 행동을 상상하거나 스스로의 욕망과 공포를 자제하지도 못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WOD 뱀파이어의 인간성은 캐릭터의 내적 갈등과 외적 투쟁의 결과를 나타내는 동시에 캐릭터의 비극성을 외부 현실에서 구현하는 변수라고 할 수 있다.



4. 결론: 게임의 목표의 차이는 게임 규칙의 차이, 그리고 게임 플레이 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이것으로 WOD가 더블크로스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충분히 설명한 것 같다.


WOD의 설정과 규칙을 이리저리 깎아내거나 생략함으로써 더블크로스와 유사한 형태로 만드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게 플레이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다. V20 한글판 361쪽에 보면 "규칙보다는 이야기 우선: 이야기가 규칙 때문에 억압되어선 안 됩니다. 이야기의 질을 높이고 플레이어에게 더 큰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면, 규칙은 원하는 대로 조정해도 됩니다."라고 한다(Golden Rule). 실제로 그렇게 플레이하는 팀도 많다.


하지만 WOD의 원래 목표와 그 목표를 구현하는 방식에 매력을 느끼는 팬들에게는, WOD의 방식을 지나치게 많이 변형한 규칙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WOD는 WOD고, 더블크로스는 더블크로스다. 나는 각각의 규칙을 기획한 디자이너들의 의도를 존중하며, 어쨌든 그들이 나보다 훨씬 더 많이 고민하고 테스트하며 규칙을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그 결과물이 항상 적절하거나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WOD 규칙 대부분은 책을 주의깊게 읽고 의도에 맞게 사용하면 아주 재미있는 플레이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 팀은 새로운 팀원에게 이런 방식을 따라 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WOD의 새로운 플레이 방식을 원한다는 것은, 결국 새로운 목표를 원한다는 것이다.


새 팀을 만들어라. 그리고 새 목표에 맞게 규칙을 바꿔서 즐겁게 플레이해라. 아무도 막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