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많은 종류의 피곤한 플레이어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론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요' 류의 플레이어들이 가장 짜증나고 피곤하다. 명확한 이유조차 없이 그저 '재미있을 것 같아서'가 얼마나 맥빠지는 대답인지. '이건 정말 재밌을 것이다' 처럼 확언하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대체 어떤 형태의 요구인가? 보통 다음과 같다.



1. 재미있는 컨셉 같아서요

- 스테레오 타입에 벗어나는 것 자체를 '재미있음'으로 여기는 이들이다. TRPG를 하는 이들은 보통 어떤 식으로든 '클래스' 혹은 '직업'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근육이 우락부락한(힘 스탯이 높은) 파이터, 넝마같은 갑옷을 입은(중갑이 아닌 갑옷을 입은) 바바리안, 창백한(지능 수치가 높고 건강 수치가 낮아보이는) 위자드 등등... 하지만 이런 스테레오 타입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높은 힘 스탯을 바탕으로 딜 쭉쭉 뽑는 파이터는 플레이어 본인도 재밌고 파티원들도 그의 강함에 의지할 수 있다. 그리고 창백한 안경 멸치남(=위자드)이 적의 AOE를 피해 바바리안 뒤로 숨는 것을 탓하는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목숨을 건진 위자드가 다음 턴에 펼칠 마법이 바바리안의 희생을 벌충하고도 남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스테레오 타입'을 적극적으로 타파해보려는 이들이 앞서 언급한 '재미있는 컨셉 같아서요' 플레이어들이다. 기껏 주사위를 굴려 배분할 스탯을 지능과 지혜에 전부 꼬라박는 '파이터'(여기서 기괴하고 변태적인 아키타입들을 언급하는 이들은 없으리라고 생각함), 역시 자신의 스탯을 힘과 민첩성에 전부 꼬라박은 '위자드' 같은게 그런 창의력 대장들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파이터는 적의 공격을 피해 파티원의 뒤로 몸을 던지기 일쑤이고, 위자드 또한 질세라 최전선으로 달려나간다. 물론 신나게 터져나가기 일쑤이고 말이다. 그렇게 파티가 전멸하면 멋쩍게 웃음을 터뜨리는 창의력 대장들. 과연 그 컨셉은 재미있었고, 플레이 또한 재밌었는가? 좆같을 뿐이지.




2. 재미있는 선언 같아서요

- 평범한 '루니'들이다. 중요 NPC와 중요한 교섭을 진행하는 와중에 'NPC가 눈앞의 지도에 집중하는 동안 그 NPC에게 XXX한 짓을 합니다' 같은 다채로운 바리에이션이 있을 수 있다. 바리에이션이야 참으로 다채롭지만 이유를 물어보면 천편일률적이다.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대화 또한 천편일률적이다.


'왜 재상의 전언이 담긴 두루마리로 자신의 겨드랑이를 닦는다는 선언을 하신다고 했나요?'

'걍 재밌을 것 같아서요'

'왜요?'

'재밌지 않나요?'

'어떤 부분이 재밌나요?'

'아니, 웃기잖아욬ㅋㅋ 존나 개 진지빨고 두루마리 넘겨줬는데 존나 아무렇지도 않게ㅋㅋ'

'아뇨 별로 안 웃길 것 같은데요. 재상 면전에서 그러면 재상이 존나 빡쳐서 걍 경비병 있는대로 긁어모아서 파티 공격하겠죠.'

'아;'

'왜요?'

'아니 ㅋㅋㅋ 걍 웃자고 한소리인데;; 걍 취소할게요. 걍 얌전히 가방에 두루마리 넣은걸로 할게요;;;;'

'전 진지하게 하는데 A님은 너무 선언을 막 하시는 것 같네요.' <- 이 대사는 보통 끝까지 치고 엔터를 눌러 입력하기 전에 삭제하곤 한다.


이들은 참으로 좆같은 참피들인데, 이들은 이렇게 GM이 합리적으로 그 좆같은 '선언'의 이유를 물어보고, 합당한 근거를 들어보고, 그 선언을 받아들여주려 노력하는 '인내심'을 자신의 '선언'을 막는 GM의 횡포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나아가, 그 합리적인 질문과 인내심을 플레이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자신의 유쾌한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옹졸함'으로 받아들여, 그 원한을 가슴 속 깊은 곳에 간직한다는 것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보통 플 중에 갑자기 탈주한다든가, 갑자기 플레이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식의 수동 공격성으로 발현되곤 하는데 역시 좆같은 건 매한가지다.




3. 좆같은 컨셉

재미있는 컨셉과는 조금 궤를 달리하는 좆같은 플레이어들이다. 물론 이들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좆같은 컨셉을 잡는다는 데서 그 맥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좆같은' 컨셉은, 직업적 클리셰를 완전히 깨뜨리려는 '재미있는 컨셉'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진짜 '좆같은' 컨셉을 잡지는 않는데, GM이 보기에 참으로 좆같기에 '좆같은 컨셉'으로 지칭되곤 하는 것이다. 이 '좆같다'는 상당히 모호한 형용사인데,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해보자면 '쓰잘데기 없는 것에 고집을 부리는'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바드'를 조종하는 플레이어가 있었다. 이 친구는 '오르간' 을 연주하는 바드였다. 플레이 시작 전에 다들 우려했다. 혼자 운반할 수 있는 류트나 만돌린이 낫지 않냐, 기타는 어떠냐, 등등의 설득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고, '(최소한 근력캐 혼자 들 수 있을 법한)풍금' 정도로 타협보자는 최후 통첩까지 깔끔하게 무시하던 플레이어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자신이 일본 여행 갔을 때 어느 성당에서 들었던 오르간 소리가 너무나 감명깊었고, 이번 플레이를 통해 그것을 구현하고 싶다는 (좆같은) 똥고집이었다. '아 꺼져 개씨팔련아' 하고 일갈하지 못한 나는 더이상 플레이가 늘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르간'과 그것을 운반할 대형 수레와 거기에 딸린 말까지 그냥 줘버리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 바드는 전투에는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안시켰다. 인카운터가 시작되면 나는 '수레에 실린 오르간을 수레에서 내리기' '운반이 용이하도록 분해된 오르간을 조립하기' '오르간 조율하기(3턴 소모)' 식으로 바드를 끊임없이 고통받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나와 그 바드의 대결과도 같았다. 물론 그 플레이어는 부당하다며 발버둥쳤지만, 그의 똥고집에 역시 지쳐있던 다른 플레이어들은 '오르간 설치'가 GM의 사적 보복이 아닌 '현실적인 규칙에 근거한 하우스룰의 도입'이라며 나를 감싸주었다.


사실 그가 악전고투하며 오르간을 설치하고 조율까지 끝낼 때쯤엔 전투가 거의 마무리되었고, 바드는 전력을 다해 설치했던 오르간을 다시 분해하고 적재하는 반복작업에 다시 동원되곤 했다. 그리고 그 플레이어는 대휴식이 보장된 마을에 들어갔을 때 '예배당을 찾고 거기에 오르간을 설치해 마을 사람들을 위한 오르간 콘서트'를 열겠다는 발악에 가까운 선언을 반드시 했는데, 나는 보통 한 줄 정도의 대사(마을 사람들은 XX의 연주에 감동했고, 집으로 돌아가 잠들었습니다.)로 그의 선언을 처리해주었다.


사족이지만, 이 바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플레이에서 탈주했고, 나는 새로운 바드를 공급받아 캠페인을 끝마치는데 성공했다.


어쨌든 이 '좆같은 컨셉'을 버리려 들지 않는 플레이어들 또한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라는 얄팍한 생각에서 머무르고 있는 좆같은 플레이어들인 것이다.



2줄 요약


플레이어용 : TRPG는 팀플레이니까 컨셉이든 선언이든 적당히 눈치보면서 하고 좆같은 똥고집 부리지 말자.

마스터용 : 좆같은 낌새가 느껴지는 플레이어는 반드시 좆같은 짓을 하니까 잡아두고 플레이 중에 고문하든가 그 전에 내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