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심판의 날, 넷.
“네, 이 시설은 이미 붕괴가 코앞입니다만.”
서향이 불타는 건물들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서향은 직통 회선을 통해 펜텍스의 이사회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통신장애로 인해 간헐적으로 홀로스크린이 흐려진다. 그들 중 한명이 묻는다.
“실험체들은?”
“악어들말입니까? 이제 필요 없게 됐습니다.”
주의깊은 사람이라면, 그녀의 말에서 즐거움을 읽어낼 수 있으리라.
“이유는?”
“찾으시는 유물의 위치를 파악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도시인지까지는 좁힐 수 있을 겁니다.”
“알겠네. 그럼 조속히 복귀하도록.”
서향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그럼 이 기지는 포기하는겁니까?”
“그렇다네.”
“그럼 연쇄 프로토콜을 시험해보죠. 한번도 제대로 시험해 본적은 없으니까요.”
이사진들이 잠시 침묵한다. 그러나 서향이 예상하던 대답을 주는 그들.
“그러도록 하게.”
홀로스크린이 꺼진다. 서향의 미소가 더욱 커진다.
“Unicorn zombie apocalypse-”
짧은 나레이션이 끝나자마자 묵직하게 흘러나오는 베이스. 이 연구시설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는 데렉은 비트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린다. 간헐적으로 있는 대피 훈련. 이 시설에서 일하는 삼백명 정도의 사람들은 깊은 지하실에 들어와 있었다. 이 지역이 사이클론이 자주 들이닥치는 곳이라 대피용의 지하실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 언제까지 하는데 이거?”
연구원 중 한명이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한다. 진짜 오질라게도 못생겼네, 하고 데렉이 생각한다. 보면 이 시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웬지모르게 못생기거나, 피부병이 심하거나 했다. 데렉도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이 시설에서는 미남에 속했다.
거기에 그는 한낱 청소부기 때문에 대피 훈련이 있으면 아무것도 안하고 돈을 받는 셈이라 이 상황이 맘에 들었다. 그가 한쪽 벽에 기대서 계속 핸드폰만 두드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커지자, 그가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킨다.
“Unicorn zombie apocalypse-”
이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가 쿵쿵대는 비트에 맞춰 고개를 조금 더 격하게 흔든다. 환상적인 하루다. 아직 인원 체크가 다 끝나지 않아서 대피 훈련이 더 길어질 것 같았다. 그가 살짝 주위 눈치를 보고는 성인물 사이트를 켠다. 어차피 벽에 붙어있어서 누가 훔쳐보지도 않을 것이다.
한참이나 보고 있었지만, 훈련은 끝날 기미가 없다. 그가 화면에 더욱 몰입한다. 링크를 클릭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순-
촤악.
뭔가 뜨끈한 액체가 그의 얼굴을 친다. 누군가 식기 시작한 커피라도 쏟은게 아닐까, 하면서 그가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어?
순간적으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피와 살.
살육과 공포.
알던 얼굴의 사람들이 미쳐 날뛴다.
다른 사람들의 목을 물어뜯고, 피를 마신다.
물린 사람들은 경련하더니, 마치 스프링처럼 튕겨올라와 똑같이 괴물이 되어 뛰어다닌다. 이백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도망다니고 저항하려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지하실은 봉쇄되어 있었다.
데렉이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겨우 인식하고나서야 일어서려하지만, 발 밑까지 흘러온 피에 미끄러져 넘어진다.
“이런 씨-”
그러나 그가 욕설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누군가가 물어뜯는다. 비명 지르는 그의 온 몸에 막 뱀파이어가 된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의 전신을 찢어 발긴다.
고통과 함께 그의 생명과 이성이 날아가버린다.
이제 그는,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괴물이 되어 피와 살을 찾아 헤멜 것이다.
뱀파이어라기보다는 좀비에 가까운 존재가 된 그의 귀에서 떨어져 나온 이어폰이 밟혀 부서지기전 마지막 소리를 내뱉는다.
“Unicorn Zombie Apocaly-”
“완전 지랄이구만.”
태스크포스의 한 요원이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쉰다. 태스크포스와 늑대인간들은 서로 뒤엉켜 사생결단을 낼 요량으로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워낙 난전이라 병력이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어느 코너에서 괴물이나 늑대인간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
쿵.
그가 복도 한쪽을 바라본다.
철문.
쿵.
그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이미 반정도 기능을 잃은 그의 경량형 하드수트가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쿵-
그와 동시에 철문이 박살나며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몰려온다. 38도보다 낮은 체온, 피와 살점을 잔뜩 묻힌 얼굴. 그들이 뱀파이어임을 직감한 그가 즉시 화염방사기를 작동시킨다.
“키야악!”
뱀파이어들의 괴성. 화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이 복도를 채운다. 시뻘건 불꽃이 복도를 향해 뿜어지며 뱀파이어들을 덮친다.
“...!”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겁내지도 않고, 불에 팔다리가 타버리는 것 조차 거리낌없다. 앞의 뱀파이어를 방패삼아 본능적으로 돌격해 그에게 달라붙는다.
열명 정도면 모를까.
몇백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뱀파이어가 있어서야 도리가 없다. 한놈이면 모르겠지만, 열놈이 자신의 몸이 박살나는 것도 신경쓰지 않으면서 팔다리를 잡아당기면 단단하게 용접된 파츠도 떨어져나가버린다.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뱀파이어들마저도 그의 하드수트에 달려들어 외장을 뜯어내고 그의 살점을 물어 뜯는다.
“아아악!”
그의 마지막 비명. 하드수트가 그를 살려내기 위해 진통제와 나노머신을 투약하지만 팔다리가 뜯겨나가는 것까지 살릴수는 없는 법이다. 그의 생명과 계몽된 정신이 사라진다.
그와 동시에, 뱀파이어의 무리에 또 하나의 뱀파이어가 더해진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잔해가 들춰진다. 곳곳이 뜯겨나간 웨더스의 하드수트가 무너진 통로의 파편을 하나씩 끌어내고 있었다. 아직도 전투가 진행중인지 산발적인 울음소리와 총격음이 들려온다. 그런 와중에서도 웨더스는 하은을 찾기 위해 무너진 지하 통로를 수색하는 중이었다.
얼마다 파편들을 헤치고 다녔을까, 드디어 파편 너머로 생명 신호가 탐지된다. 하은이라고 추측되는 사람, 또 한 명의 인간, 그리고 인간의 형태를 한 생물체. 웨더스가 마지막 잔해를 들춰낸다.
“소령님.”
잔해와 먼지를 뚫고 탈출하느라 엉망인 그들의 모습. 인혁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옆길걷기로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원하는건 찾았나?”
“네.”
하은이 손가락으로 반라나 다름 없는 남성을 가리킨다. 하드수트의 센서가 그를 스캔한다. 현실 교란적인 징후가 여러모로 다분하다. 아마도 늑대인간이나 그 비슷한 종류라고 결론내린 그가 말한다.
“가면서 이야기... 아니, 나중에 하지. 사태가 심상치 않아.”
그가 짤막하게 말하고는 앞장선다. 아무리 봐도 기묘한 조합인 그들이 웨더스가 온 길을 따라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쪽은 보아하니 인포서 출신인것 같은데.”
“그렇습니다만.”
“애인인가?”
하은은 아무 반응도 없고, 정우재는 얼굴을 찡그린다.
“말실수를 했구만.”
웨더스가 백 사장에게 연락을 취한다.
“백 사장, 작전 목표는 확보했다. 퇴출 준비는?”
“...지직…”
“정말 제대로 돌아가는게...”
그가 무전기를 몇번 치자, 그제서야 잡음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소령님, 차량은 그대롭니다. 거기까지 가는게 문제일텐데, 지금 빌딩 내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팔 여러개 달린 괴물 빼고 뭐 별거 있겠어?”
그가 심드렁하게 말한다.
“그래도 조심… 지직…”
“백 사장? 제기랄.”
이번에는 아무리 두드려도 무전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가 투덜거리며 복도를 헤치고 나간다. 드디어 좀 넓은 공간이 나온다. 지하 로비라고 하면 어울릴만한 공간이다.
“좋아. 그럼 좀 설명을 들-”
그가 멈춰선다.
로비의 반대편에서 한 무리가 접근해오고 있었다. 아니, 그 존재를 숨길 필요조차 없다는 듯이 몰려오는 그들. 정우재가 그들 중 몇몇이 태스크포스의 EC들이 가지고 있던 장비를 걸치고 있음을 깨닫는다.
피와 살점.
“거머리들이군.”
“지금까지 보던 놈들이랑 다를 겁니다. 이성이라고는 전혀 없고 공격성만 있습니다. 불에도 겁먹지 않고요.”
하은이 예비 권총을 꺼내들며 말한다.
“불도 겁내지 않아? 좀비다, 그말인가?”
“그쪽이 더 가깝겠네요.”
동시에 뱀파이어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기 시작한다. 소령이 라이플을 수납한다. 금속성 소리와 함께 수트의 팔 부분이 전개된다.
“-위이잉-”
아무리봐도 전투용 무기라기 보다는 험지 돌파용으로 쓰일 법한 양날톱이 튀어나온다. 그가 뱀파이어 무리속으로 뛰어들며 제일 앞에 있는 놈을 베어낸다. 뱀파이어의 상체가 분리되며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쿵.
그 옆으로 거대한 무엇인가가 뛰쳐들어오며 뱀파이어를 잡아 공중에 내던져버린다. 너무나 간단하게 뱀파이어를 집어들어 반으로 찢어버리는 괴물.
“...뭔…”
웨더스가 자신의 옆에 서있는 거대한 형상을 본다. 도마뱀과 용을 섞어놓은 듯한 위협적인 형상. 힐끗 본 일행에는 더 이상 아까의 남자가 없었다. 늑대인간 같은 건가, 하고 짐작하는 그가 한마디 내뱉는다.
“어디서 이상한걸 데려왔구만.”
웨더스가 그렇게 말하며 뱀파이어들을 베어낸다. 이 로비를 어떻게든 통과해야 지상으로 나갈 수 있지만, 그 수가 너무 많다. 뱀파이어들이 그들을 지나 하은과 정우재에게까지 달려든다. 마치 둑을 넘어 흘러 넘치는 물을 연상시키는 그 모습.
“탕!”
하은이 정확하게 무릎을 쏴서 날려버린다. 정우재도 마찬가지다. 나노팩토리가 폭발탄을 뿜어낸다. 몸통에 박힌 탄이 내부에서 폭발해 관절을 파괴하면, 광란하는 뱀파이어라도 무력화된다.
“탕! 탕!”
그러나 역시 수가 너무 많다. 수십이면 모를까, 이백이 넘어가는 수다. 일곱, 여덟,아홉, 열. 저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윽-”
하은의 사각을 노리고 뱀파이어들이 달려든다. 그녀가 밀쳐져 바닥에 넘어진다. 권총을 겨누는 것 보다 그녀를 뱀파이어들이 덮치는 것이 빠르다. 포기하고 뒤로 뛰지만 수가 너무 많다. 양쪽 팔이 잡힌다.
“!”
그녀의 목을 향해 덮쳐오는 두 쌍의 이빨.
“합!”
정우재가 그들에게 달려든다. 그의 발차기가 콰직, 하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목을 물려하던 뱀파이어의 목을 완벽하게 꺾여버린다. 동시에 하은을 잡고 있던 두 놈의 머리가 폭발탄과 함께 터져나간다. 간발의 차로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정우재. 그러나 그 댓가로 자신의 사각을 내주고 만다.
“윽-”
그에게 달려드는 뱀파이어의 손톱에 옷이 찢어진다. 또 다른 뱀파이어가 그의 어깨를 할퀸다. 깊은 자상에서 피가 튄다. 피맛을 본 뱀파이어가 더욱 광분하며 그들을 향해 달려든다.
위잉-
웨더스의 양날톱이 뱀파이어들을 전부 두 동강 내버린다. 깊은 부상을 입은 정우재가 무릎 꿇는다. 피가 그의 방검 기능을 다한 그의 수트를 검게 적신다.
“여기서 다 죽겠구만.”
그들 앞에서 뱀파이어를 막아내고 있는 모콜레. 그러나 그마저도 역부족이다. 그의 팔에 다섯이나 되는 뱀파이어가 기어올랐다가 나가떨어진다. 팔이나 다리 하나가 찢겨나가도 살점을 탐하며 계속 달려든다. 할퀸 자국 하나 따위는 별 문제가 안되겠지만, 그게 수백개가 되면 저 정도의 덩치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
-문이 있다.
청소 도구함, 아니면 기계실 문 같은 것일테지. 하지만 상관 없었다. 문이기만 하면 된다.
“소령님!”
그가 그쪽을 가리킨다. 설명할 시간이 없다는 표정에 웨더스가 즉시 그 쪽으로 달려간다. 하은이 정우재의 상처를 살핀다. 너무 깊고, 출혈이 너무 심하다.
“괜찮아요?”
“괜찮긴… 니미.”
정우재가 흐려져가는 의식을 부여잡고 간신히 욕설을 내뱉는다. 그들을 덮쳐오는 또 하나의 무리. 하은이 그를 부축하지만, 피하는 것은 무리다.
“!”
모콜레가 거대한 몸집이 무색하게 뱀파이어들을 떨치며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아키드 형상에서 순식간에 인간의 형상으로 돌아오는 그. 달라붙어 있던 뱀파이어들이 붙잡을 것을 잃으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곡선을 그리는 그의 움직임. 착지하기도 전에 그가 다시 아키드 형상으로 돌아온다. 굵은 꼬리가 바닥을 휩쓸며 하은과 정우재를 덮치는 무리들을 전부 넘어트려버린다.
“어서!”
그가 굵은 목소리로 외치며 뱀파이어들을 향해 입을 벌린다. 뿜어져나오는 산성 액체를 뒤집어쓴 뱀파이어들의 피와 살이 녹아내린다. 그 잔해를 넘어 또 다시 뱀파이어들이 몰려온다.
“빨리 해라!”
웨더스가 외치며 달려나가 그에게 합류한다. 뱀파이어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크게 톱을 휘두르며 녹아내린 다리로 기어오다시피 하는 뱀파이어들을 하드수트로 밟아버린다.
“기다려요.”
하은이 문 옆에 정우재를 기대놓는다. 그가 하은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다. 몇번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위험하지 않나…?”
“죽는 것보단.”
하은이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찾는다.
이 세계는, 규칙의 엮임이다.
문과 벽은 그 규칙을 위해 존재한다.
벽이 있고 문이 있음으로 인해 갈 수 있는 길이, 갈 수 있는 규칙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규칙과 섭리가 먼저 있는 것이다. 벽과 문은 그 섭리를 이 세계에 재현하기 위한 매개에 불과하다.
퍼즐 조각이 있고 퍼즐을 푸는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푸는 규칙과 문제라는 개념을 형상화 하기 위해 퍼즐이 있는 것처럼.
엿본다.
그 섭리를 관장하는 존재Spirit와 그 존재들을 관장하는 더 거대한 존재Incarnae를. 그들이 관리하는 질서를 훔친다. 그들의 거의 전지한 시선이 놓치는 사각을 파악해 그 안에 발을 들여놓는다. 한 장소는 그 옆과 연결되어있어야 한다는 거리의 섭리에, 욕망의 섭리를 덮어씌운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문을 연다.
청소도구함 대신, 새까만 암흑이 열린다. 아찔함이 그녀를 흔들어 놓는다.
취익-
그것을 포착한 웨더스가 하드 수트의 뒷면으로 이젝트한다. 마지막 무리를 밀어낸 모콜레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다. 네 사람이 자폭하는 하드수트가 뿜어내는 거대한 폭염을 뒤로 하고, 새까만 허공으로 뛰어든다.
-아.
역시.
들키지 않을리가 없다.
섭리를 관장하는 존재의 시선이 하은을 꿰뚫어본다.
“아악!”
껍질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 미간부터 척추까지 모든 것이 산산조각나는 느낌. 그녀의 몸을 이루는 질서가 헝크러진다. 네 사람의 길을 이끌어야할 그녀의 의지가 찢겨져버린다. 그녀의 생각이 흘러야할 길이 부서지고, 그녀의 피가 흘러야할 길이 파열되고, 그녀의 의지가 나아가야할 길이 흐려진다.
다잡는다, 라는 의지 같은 것으로 해결 되는 문제가 아니다. 오만함Hubris의 댓가가 그녀의 존재 자체를 파괴하고 있었다.
버텨야-
그러나 그 생각마저도 없어진다. 그녀는 섭리에 찢겨, 섭리에 녹아버리는 작은 조각이 될 것이다.
버-
그 생각의 파편이 사라지기 전.
누군가가 그녀를 감싸 안는다.
강대한 존재의 시선을 가로막고, 산산조각난 그녀의 존재를 그러모아 하나로 묶어준다. 부서진 상처는 남아있지만 조각이 아닌 하나로 돌아온다. 하은의 정신, 육체, 그리고 영혼이 하나로 다시 엮인다.
누가…?
정말 오래, 아주 오랫만에 느껴보는 따뜻함.
미안하구나.
속삭임이 들려온다.
가려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은 그것 뿐. 하은이 그 속삭임을 뒤로 하고 훔친 길을 열어, 모두를 토해놓는다. 감각이 없다. 무언가를 구토해내는 것을 느끼며 그녀가 정신을 잃는다.
“감독관님.”
MSF 아말감의 관제 AI 노먼이 그레인저를 호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의 MSF 아말감은 감독관 대리인 몰레티와 그의 준군사조직 출신 보좌관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노먼?”
혹시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본 업무에 지장이 생긴것이 아닌가, 했지만 차라리 그 편이 나을 뻔 했다.
“에페메라 작전이 감독관님 산하로 이관되었습니다.”
각성제의 부작용 때문에 뭔가 잘못 들은건 아닌가 하는 생각부터 든다.
“그 작전에 대한 정보분석은 담당자들이 따로 있을텐데?”
“아닙니다, 감독관님. 에페메라 작전의 담당자가 감독관님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전 담당자, 류 국장의 사전 지시에 의해서입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정보가 그녀의 VDAS에 스크롤 되기 시작한다. 당황스럽다. 지금까지 그 작전의 전모를 파헤치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하은의 클로닝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빼고는.
그런데 지금와서, 자신에게 그 작전 자체가 위임되었다니.
[데이터 로딩 완료. 브리핑 재생.]
“이름은?”
VDAS가 증강현실로 한 남성의 모습이 나타난다. 류 국장과 너무나도 비슷한 인상을 풍기는 남자. 심지어 말투도 비슷하다. 어떻게 해야할지 잠시 망설인다. 이것은 류 국장의 음모인가? 아니면 그녀를 해하려는 정치적 라이벌의 술수? 내전의 불똥이 그녀에게까지 튀는걸까?
그러나 그녀의 호기심, 그리고 만용이 그녀를 떠민다.
“너는 브리핑용 AI인가?”
“이름은?”
“...그레인저. MSF 아말감 감독관.”
“만나서 반갑네, 그레인저 감독관. 그렇네, 지금으로서는 나를 AI라 간주해도 좋네.”
그레인저가 침착하게 묻는다.
“당신을 어떻게 믿지?”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은 준비되어 있지 않네.”
과연.
작전 진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을 담은 인격의 축소판인가.
“작전의 목적은?”
“아포칼립스 급 시나리오의 방지가 이 작전의 목적이라네. 1999년도에 있었던 것 이상의 시나리오가 예상되고 있지.”
아포칼립스 급 시나리오?
아포칼립스 급 시나리오는, 당연하게도 인류의 종말이 예상되는 대 재앙을 의미한다. 이미 유니언 내의 몇몇 예측 전문가에 의해 그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었다.
“다시한번 확인하는데, DA 급의 시나리오 이상을 말하는 건가?”
“그렇다네.”
류 국장은 사보타주의 일환으로 이 작전의 시행을 막고 있었던 건가? 아니, 그렇다면 왜 내게 작전권한을 이양한거지? 이것마저도 속임수인가?
“어떤 종류의?”
“확실하지는 않지만, 뱀파이어가 중심이 되는 사건이라 추측되네.”
누가 이 작전을 입안했든지간에, 엄청난 예지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를 비롯한 연합 아말감의 감독관들은 뱀파이어의 폭주 빈도가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하면, 유니언의 역량으로도 막기 힘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레인저가 자신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차분하게 정보를 받아들인다. 이것이 류 국장의 역공작일 가능성은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조금의 정보라도 없나?”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은 준비되어 있지 않네.”
그레인저가 툭툭, 하고 발을 찬다. 무슨 질문을 물어야할까.
“뱀파이어가 중심이 되는 사건임은 어떻게 알지?”
“해당 질문에 대한 답변은 준비되어 있지 않네.”
무슨 질문을 물어야 할까. 어떤 정보도 없다. 어떤 사건일지, 어떻게 막아야할지도 알 수 없다. 어떻게 알아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럼 누가 막기로 되어있지?”
즉시 형상의 옆에 푸른색의 실로 엮인 듯한 아기의 형상이 나타난다. 아기가 자라 어린이가 되고, 어린이가 자라 학생이 된다. 그리고 학생이 자라 여자가 된다. 그레인저가 그녀를 알아본다. 홀로그램이 그녀의 생각을 읽듯 대답한다. 그리고 그의 대답이, 그녀를 더 큰 혼란으로 몰아넣는다.
“이름은 오하은, 또는 그와 유사한 이름을 가진 여성이네.”
얼마나 자고 있었을까.
하은이 깨어난다.
“...”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
흠칫, 하고 놀란다. 침대에 누워있다, 라는 감각이 없다. 그에 수반되는 푹신함이나 편안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대신 ‘쉬고 있다’라는 사념만이 느껴질 뿐. 침대, 그것이 주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이 이루는 관념이라는 과정은 없어지고 관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조심하게.”
하은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그녀가 구해낸 모콜레다.
“오마르라고 불러주게.”
“...장수라는 뜻이 있는 이름이네요.”
“원래 알고 있었나?”
하은이 고개를 흔든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냥 오마르, 라는 단어에 담긴 뜻이 아니라 그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그의 이름이 다른 이름이었어도 똑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매개다. 담긴 섭리를 대표하는 것이 이름.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렇다.
“까마귀Corax들에게 자네 같은 자들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지.”
하은이 조용히 그의 말을 듣는다.
“가이아의 섭리가 아니라 자신의 섭리를 이 세계에 강요하는 자들 말일세.”
하은이 서서히 그의 존재를 느낀다. 그의 인간으로서의 형상, 그 밑에 숨겨진 파충류의 형상은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 그의 존재, 그 근간을 이루는 섭리가 느껴진다.
기억.
그것도 아주, 아주 오래된 기억.
그녀가 다시 한번 흠칫 놀란다. 그 기억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느끼자마자 숨이 막히는 것 같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자네가 보는 섭리는 가이아께서 마련하신 섭리에 어긋나지 않네.”
이해할 수 없는 말임에도 하은은 가만히 경청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섭리를 침범하는 다른 섭리마저 꿰뚫어볼 수 있겠지.”
하은이 자신의 눈에 손을 가져다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에서야 알아차린다. 그녀의 시각은 차단되어 있었다. 눈가리개인지, 붕대가 감긴 것인지, 안구가 적출된 것인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 라는 것을. 이 상태에서라면 설령 눈이 가려지지 않았어도 시각 그 자체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각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녀에게서 없어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시각, 후각, 촉각, 청각, 미각, 그 어떤 감각도 없다.
그러나 오마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말에 담긴 관념이 그녀에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말과 생각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 그 자체, 섭리 그 자체가 그녀의 존재를 울린다.
“알은 품어야하는 것이지, 깨고 무엇인가 꺼내야하는 것이 아니야.”
하은이 그의 말을 이해한다. 아니, 들을 수 없는 그녀로서는 그가 정말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어쩌면 필담을 나누고 있을 수도 있고, 약물 같은 것을 통해 전달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뜻은 생생하게 전달된다.
더 이상 무리하면, 그녀는 섭리를 꿰뚫어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섭리에 녹아버리던가Paradox, 가는 곳마다 모든 껍데기와 형상을 벗겨내는 존재Marauder가 되어버릴 것이다.
하은이 침대에서 일어난다.
“...”
일어난다는 감각이 전혀 없다.
자신이 서있다는 감각 역시 없다.
그러한 감각 대신 움직일수 있다, 라는 관념만 있다. 춥다는 감각 역시 없다. 멈춰간다는 관념만이 있다.
“자네가 제 정신으로 돌아와야, 내가 엿본 기억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일세.”
그러나 하은에게는 그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대신, 관념이 흐른다.
탈출.
마지막, 그리고 종결.
그에 선행되는 회복.
-현실에, 스스로를 붙잡아놓는다.
그 관념이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다. 그녀가 발걸음을 옮긴다. 아니, 거리를 좁힌다, 라는 개념을 체화한다.
-누군가 있다.
그 작은 감각만으로도 정우재의 정신이 맑아진다. 언제나 그렇듯, 아니, 유니언에서 가르쳤듯 옆에 놓여있는 권총을 번개처럼 집어들고 침입자를 향해 조준한다. 부상당한 부위에 감긴 붕대가 희미한 불빛을 받아 흰색으로 어둡게 빛난다.
“미안해요.”
“아, 진짜.”
그가 허탈한 듯이 권총을 내려놓는다. 웨더스 소령 일행이 있는 곳은 예산부족으로 인해 경계를 위한 시설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언제 괴물들이 침입해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부상까지 겹친 상황에 그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은이 이곳으로 그들을 데려온 이후, 두 사람은 줄곧 회복중이었던 것이다. 그가 하은의 눈에 붕대가 감겨 있음을 깨닫는다.
하은의 실루엣이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는 어둑진 얼빛에 가녀리다.
“왜? 그리고 꼭 존댓말로 해야겠어?”
하은은 대답하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가 권총을 침대 스탠드에 내려다놓는다.
문이 닫기고, 둘 사이에 바스락거림이 오간다. 하은이 정우재를 본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몸의 형상, 목소리의 높낮이, 거기서 느껴지는 감정, 그 어떤 것도 그녀의 감각에 들지 못한다. 대신 관념이 있다.
결의.
그리고 닻, 이라는 관념.
다른 사람과 그는 다르다.
두 사람은 몸을 섞었고, 서로 피 흘리며 싸웠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고, 눈 가린 애정을 주었다. 몸정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구했고, 그도 그녀를 구했다. 왜 그랬을까, 이해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해해야할 일도 아니다.
테크노크라틱 유니언, 정령, 미래, 뱀파이어의 피, 클론으로서의 정체성, 그녀의 원본, 기억, 운명, 괴물, 예언. 현실의 두 땅에 발붙이지 못할 것에 둘러싸인채 걸어왔던 그녀의 삶. 평범한 삶과 너무나 유리된 그러한 것들은 그녀 본인마저 현실에서 유리시켜버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현실감을 그녀에게 새겨준 존재는 그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닻이다.
그녀가 현실에 내린 닻.
“할 말있어?”
그러나, 그 누구도 그녀를 증언할 수 없다. 그렇기에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머릿속에 의미가 울린다.
사랑하지 않아요.
“누구? 그 뱀파이어 말인가?”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단지 침묵을 지켜서가 아니다. 그의 머릿속에 대답의 부정이라는 관념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은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의미일 수도, 자신도 알 수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뜻은 명확했다. 소리와 언어와 생각을 넘어서.
정우재는 그제서야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흔히 황혼Twilight라 부르는 상태의 언저리에 있었다. 그녀가 쓰는 현실교란적 수법의 기저에 깔린 생각과 관념이 현실을 덮어씌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그녀를 현실에 붙잡아두지 않으면 그녀는 곧 미친 존재가 되어 이해받지 못한채 이 세계를 떠돌게 될 것이다. 우습게도 그 점에서는 계몽된 정신과 현실교란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그가 묻는다.
“너, 붙잡아줄 사람은 있나?”
그 말이 바닥의 무늬 사이를 기어 곡선을 휘오른다.
그녀가 침대로 다가와 그 옆에 앉는다. 그녀가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는다.
따뜻함이 있다.
관념이 머릿 속에서 밀려나고 감각이 돌아온다.
비현실이 현실감에 자리를 내준다.
그녀가 더욱 가까워진다. 하은의 온기가 그를 휘감는다. 그는 거부하지 않는다. 하은이 그를 탄채로 그를 쳐다본다.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속삭임이 흐른다. 의미가 아니라, 말이, 그리고 소리가.
“채워줘요.”
그는 거부하지 않는다.
그의 움직임이, 그의 존재가 하은을 비현실에서 끌어낸다.
그가 하은을 채워간다. 그럴 수록, 관념이 사라지고 감각이 돌아온다.
길, 여정, 목적, 종결, 같은 관념이 점점 녹아내린다. 녹아내린 사고의 덩어리가 쾌락, 불안, 고통, 애정, 죄책감, 기억, 그리고 수많은 감각과 감정의 파편으로 굳어진다.
“-고마워요.”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거칠다. 옛날처럼,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임 하나 하나에서 오는 쾌락. 목적, 수단, 여정, 그런 것들이 증발하더라도 그녀는 공허하지 않음을 일깨워준다.
“...아.”
움찔거림. 그녀가 작은 신음을 흘린다.
그를 껴안는다.
그것만으로, 그녀가 황혼Twilight에서 깨어난다.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사랑도, 애정도, 고마움도, 미움도, 그 어느것도 아닌 침묵이. 오직 숨결과 체온, 그리고 그에 따르는 현실감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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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콘 좀비 아포칼립스는 실제로 있는 곡입니다: BORGORE & SIKDOPE - Unicorn Zombie Apocalypse (Original Mix)
악플
(대충 적당한 악플)
멋져요
정사씬 너무 야해서 너무 좋아
“Unicorn zombie apocalypse-” - dc App
하은이 서향처럼 되부렸어.. 라고 생각했더니 그거 해서 치유 ㄷㄷ - dc App
서향 섹시해.. 그리고 실제로 있는 곡이었다니 ㅋㅋ - dc App
하은이 어떻게 해야할지 잠시 망설인다. <- 이 부분 오타 같아요 - dc App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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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가 아니라 좀비라니 ㄷㄷ
....혹시 류국장이 아빠임?
ㄴㄴ 그것은 아님 ㅎㅎ
ㅌㅅ이 이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