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영국 중세사(어쩌면 중세 뿐만 아니라 영국이란 나라의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의 특징을 깜깜 세상에 맞춰 꽤 그럴듯하게 옮겨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음


 무수한 침략과 정복에 시달린 결과 다양한 문화를 가진 민족들이 위태롭게 공존하고 있고, 거기다 계급 간 대립 및 교회-왕실 간 대립 등이 더해진 결과 영국 중세사는 무수한 반란과 진압, 협상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현실에서는 그래도 시대가 지날 수록 여러 분쟁(무력 사용, 왕의 권한 활용)과 협상 과정(대헌장 수립, 의회의 확대)을 거쳐서 조금씩 융화가 진행된 반면 거머리들은 인간들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기 때문에 로마 정복 시기 포옹된 로마-브리튼 인들과 앵글로 색슨 지배기에 포옹된 앵글로 색슨인들, 데인계 뱀파이어들, 노르만 뱀파이어들, 프랑스계 뱀파이어 등이 여전히 융화되지 못한 채 서로 반목하고 있으며, 중세 잉글랜드 킨드레드들의 지배자인 '미트라'는 기독교를 혐오하고 옛 로마 정복기 당시 그러했듯 인간과 킨드레드를 아울러 자신을 신처럼 숭배하는 종교 조직을 부활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에 크리스천 킨드레드들과의 반목 또한 존재하고, 중세 뱀파이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세력인 프로미씨언 킨드레드들, 그리고 뱀파이어들의 실은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상을 가진 카이나이트 헤러시 이단 종파 등이 암약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빽 없고 힘 없는 클랜들인 로우 클랜들과 금수저 클랜들인 하이 클랜들 사이 분쟁도 건재함.


 그러다보니 뱀파이어 중에서도 존나 센 축에 드는 므두셀라 중 하나인 현 지배자 미트라조차 대놓고 권력을 마구 휘두르지 못하고 자문회의 등을 통해 각 집단들의 눈치를 봐가며 교묘하게 통치를 해야 하며 결과적으로 현실의 영국처럼 분쟁과 협상을 거쳐 통치하되 현실의 그것보다도 더욱 치열한 수싸움과 눈치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정이 꽤 그럴듯했음.


 그렇다면 이런 배경을 어떻게 갖고 놀아야 할 것인가? 그 방법을 게이머들이 직접 만들어 내야 하는 지랄 맞은 cwod의 특성 상 갖고 노는 팀들마다 방법은 달라지겠지만, 제작진이 이에 대해 짤막하게 제시한 예시들만 놓고 보면 포도원의 개들을 연상시키는 바가 있음. 흡혈귀 군주들의 가신으로서 자신들이 섬기는 군주의 휘하 봉신들의 영지를 순회하며 온갖 문제들의 내막을 파악하고 처리, 조율하고, 이따금 잉글랜드 킨드레드들의 세력이 완전히 뻗치지 않은 웨일즈 같은 곳으로 건너가 그 곳의 토착 킨드레드들과의 분쟁에 참여하게 되거나 잉글랜드 내부의 로우 클랜 반역자 및 산적들(로빈 후드!)을 상대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등장할 많은 문제들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집단들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참가자들은 중세 영국 정치사의 축소판을 체험하고 그 속에서 내리는 가치 판단 및 행동들로 인해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체험들을 해보는 것. 뱀파이어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자기 스스로 무너뜨리게 되는 상황들을 체험하는데 중점을 두므로, 브리튼 또한 그런 점에서 이런 상황들을 체험해볼 수 있는 배경 중 하나로서 적합해 보임.


 웨일즈의 반역자 흡혈귀들의 은신처를 조사히기 위해 그 지방으로 파견된 캐릭터들이 어째서 이 지역 사람들이 어째서 그토록 잉글랜드의 지배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상태에서, 혹은 산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로우 클랜 흡혈귀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민중들의 고충과 더불어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지를 이해하게 된 상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주군을 실망시킨다면 끔찍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런 사실들은 두려움을 자극할 것이며, 비스트는 그런 두려움을 더욱 부채질해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가치관을 저버리는 선택을 하게 만들 거고 그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점점 비스트가 자극하는 공포나 분노, 증오 같은 감정들에 저항하기 힘들어지며 그런 감정들은 더욱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며 흡혈귀들이 따르는 대부분의 사상(Road)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로 몰고 갈 것이 뻔하지. 이것 말고도 보다 다양한 감정적 고뇌들을 겪게 되는 사례들이 있겠지만. 이런 예도 들 수 있을듯.


 뭐 여기까지가 설정 자체에 대한 평가고, 사실 개인적으론 중세 영국보다는 다른 배경이 더 취향이라 아마 어지간한 계기가 없는 이상 이걸 갖고 놀게 되지는 않을듯. 하지만 그럼에도 중세 영국사를 다룬 자료 및 거기 참고할 문학 작품들의 양은 영미권의 위세와 국력 덕택인지 타 국가에 비해 매우 많고, 한글 번역본 또한 타 국가들의 중세 역사나 그와 관련된 서사 작품들보다 더욱 입수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에 자료 구하기가 더 쉽고, 따라서 갖고 놀기도 한결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을듯. 당장 중세 트란실바니아만 해도 그 쪽 배경 한번 파보겠다고 헝가리 중세사 관련 책 구하려고 보니까 권수도 얼마 되지도 않고 미시사를 다루는 걸로 추정되는 책은 절판에다 원 가격에 열 배 이상 뻥튀기한 되팔렘이 버티고 있는 데다 관련 논문의 상당수는 헝가리어로 쓰여졌다는 현실을 본다면야 뭐, 두 말할 필요가 있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