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기존의 패러다임보다 반드시 우월한 패러다임으로 실증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건 아님. 하기사 그렇게 이루어졌으면 그냥 적층적인 과학 발전 모델을 쓰면 됐지, 굳이 패러다임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예를 들자면 사실 코페르니쿠스 시절 사람들 입장에서는 천동설이라는 게 허무맹랑한 게 아니라 현상에 부합하는 모델이었거든. 지금처럼 지구의 중력우물을 벗어나 지구의 공전을 객관적으로 관측할 수 없는, 그저 지표면에서 관측했을 때 천구의 중심을 기준으로 모든 천체가 빙글빙글 도는 모습만을 보는 그 시절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지구가 천구의 중심이고, 해를 포함한 다른 천체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게 현상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모델이었음. 그리고 사실 초창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오랜 관측으로 주전원 등을 추가해 오차를 줄인 천동설이나, 티코 브라헤에 의하여 변형된 천동설인 티코 시스템보다 천체의 변화와 같은 현상을 예측하는 데 우월하지도 못했음. 그럼에도 케플러 등의 천체학자들 사이에서 실증적이지도 않고, 현상을 예측하는 데에도 기존의 패러다임보다 떨어지는 지동설이 점차 받아들여진 이유는 천동설에서처럼 주전원을 가정할 필요가 없고, 어떤 천체는 지구를 중심으로 도는 데 또 어떤 천체는 태양을 중심으로 도는 등 일관적이지 못한 티코 시스템 대신 모든 천체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지동설의 그 간명함, 즉 모종의 이론적 심미성이 컸다고 함. 즉 천문학자들이 보기에 이론적으로 더 섹시했기 때문에 지동설이 점차 주류 학설이 되었다는 소리임.


 비근한 예가 뉴턴의 프린키피아에서도 나오는데, 사실 뉴턴은 만유인력에 대한 어떠한 실증적 증거도 없이 멀리 떨어진 천체 사이에서 즉각적으로 작용하는(action at a distance) 힘이 그냥(...) 있다고 가정하고 이론을 전개했음. 당연히 동 시대의 다른 과학자들은 야 공간을 뛰어넘어 동시에 작용하는 힘? 그런 게 있다고 치자고? 에미 뒤지신? 하고 반발했지만 뉴턴의 그 ad hoc 가설이 간단한 수식에서 케플러의 법칙을 전부 연역할 수 있을 만큼 심미적으로 아름답고, 중력이란 게 정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상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다는 점에서 과학자 사회에 빠르게 수용되었음.


 이러한 과학적 패러다임의 교체 과정에 비추어 볼 때 천동설을 믿는 메이지가 우주의 영적인, 물리적 중심인 지구를 천체가 박힌 여러 겹의 크리스탈 천구가 둘러싸고 조화롭게 회전하면서 소리를 내어 이룬 화음으로 우주를 가득 채운다는 그 아름다운 우주론이 단순히 우중의 속된 믿음 때문에 밀린 것이 아니라, 천체를 질점으로 간주한 채 오직 그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에 의해서만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냉막한 지동설에게 그 이론적 심미성에서 열위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패러다임에서 밀렸다는 사실에 절망하는 것이 더 쓰라리지 않을까 싶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