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3년 정도 사귄 여친이 있었음. 여친도 나도 바빠서 주중엔 거의 못보고 주말에만 만나서 노는 슬픈 커플이었음. 하지만 난 여친을 만나기 전부터 같이 TRPG를 하던 팀이 있었고, 주말 이틀 중 하루는 그 팀에서 TRPG를 하는데 전부 쏟아부었음. 물론 그 팀도 융통성 있는 팀이라, 정 플레이가 안되면 한 주나 두 주 정도 플레이를 미룰 수 있는 권한이 모든 팀원에게 있었고, 매주 플레이는 주말 중 하루, 그러니까 토요일이나 일요일 둘 중 하루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 만일 팀원 과반수가 토요일 대신 일요일에 하자고 하면 일요일에 플레이를 하고, 일요일 대신 토요일에 하자고 하면 토요일에 플을 하는 방식이었음.


나는 그 팀에 들어가기 전부터 각종 단편, 단기 플레이를 목적으로 결성된 팀에서 뜨거운 맛을 너무 많이 봤던 터라 이 팀의 규칙과 팀원들에게 크게 만족하고 있었고, 웬만하면 팀의 규칙을 지키려고 노력했음. 문제는 여자친구였음. 여자친구는 이 TRPG라는 씹덕 취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나아가 주말 중 하루를 완전히 소모해야 하는 비효율적인 행위라며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을 쏟아달라고 부탁했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음. 주중에 못보는 만큼 주말에는 어디 1박 2일로 놀러가고 싶은데 남자친구는 좆같은 이상한 취미 때문에 어디 골방에 처박혀서 주사위나 굴리고 있으니 속이 안터질리가 있나.


어쨌든 나는 TRPG 외에 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주말에 하루 TRPG 하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았음. 그래서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이 TRPG라는 놀이에 대해 꾸준히 설명했고, 주말 중 남은 하루를 여자친구에게 온전히 투자하는 방식으로 갈등을 봉합하려 들었음. 한동안은 이 방식이 잘 먹혔지만, 어느 날 비극이 발생했음.


여자친구와는 거의 한 달째 만나지 못했던 어느 주말이었음. 만나려고만 들면 피치못할 사정이 발생해서 약속을 다음주, 그 다음주로 미루는 바람에 여자친구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음. 그리고 결국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기로 결정한 주말, 하필이면 그날이 TRPG 팀과의 플레이 날이었음. 역시 내 사정 때문에 TRPG 팀은 근 한 달간 플레이를 미루고 있었고,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날 반드시 참석하겠다고 공언을 한 상태였음. 두 약속 모두 반드시 지키겠노라 공언한 상태에서 약속이 겹쳐버렸고, 난 여자친구와 카톡을 하면서도 중언부언했음. 사실 어느쪽이든 약속 한 주만 더 미루자고 빌면 안 미뤄줄 사람들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꼭 지키겠다고 한 약속을 파토내는건 존나 찜찜한 일이잖음? 


근데 여친이 내가 중언부언하는걸 보고 TRPG 팀이랑 약속 겹쳤냐고 바로 정곡을 찔렀음. 나는 아차 싶었는데, 존나 날카롭게 찔러서 뭐라 둘러댈 수도 없었음. 그때 여친이 나한테 선언했음. 니가 그렇게 물고 빨고 안하면 돌아버리려고 하는 취미 나도 한번 해보자고. 그게 그렇게 재밌으면 자기도 같이 하면 되지 않느냐. 대신 하다가 진짜 씹덕 냄새나서 자기가 못참고 탈주하면 너도 같이 빠지는 조건이다, 라는 식으로 딜을 건거임.


내가 하던 팀은 씹덕 포트 걸고 오니쨩 햐얔쿠 이런거 안하고 매 플레이마다 적, 아군 할 거 없이 팔다리가 뎅겅뎅겅 날아다니는 잔혹무모한 하드코어 전쟁 판타지를 소재로 플레이하고 있었고 나는 씹덕냄새 안날거라 단언하고 플레이 날에 여친을 데려갔음. 물론 사전에 팀원에게 부탁을 했고, 다행히 이전부터 결원 보충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던 GM과 플레이어들은 모두 환영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