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플레이 시작 전에 만나 여친에게 팀에서 굴리는 룰의 기본 사항을 대강 알려줬고, 같이 시트를 짰다. 여친은 여러 직업과 종족을 대강 살펴보더니 땀내나는 말근육 야만전사를 제작했다. 캐릭터 이름도 내 이름을 외국인스럽게 (ex) 이병건 -> 병거니우스) 꼬아서 써놓은거보니 자기 남친 비슷한걸 만들어서 굴리고 싶었던 것 같음. 여튼 캐릭터 시트를 보니 괜히 뭉클해져서 정말 재밌는 경험을 만들어주리라고 다짐했음.


플레이가 시작되자 나만 그런 생각한게 아니었구나, 하고 또 한번 뭉클해졌음. 팀원들 모두 내가 여자친구와 TRPG 팀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걸 알고있었고, 팀원의 여자친구에게 정말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해주리라고 생각하고 있는게 틀림없었음. 자기한테 스포트라이트 안오면 약간 시무룩해지는 쿼터 찐따 팀원 한명도 내 여친에게 스포트라이트 될만한 건덕지를 전부 몰아주려고 했고, GM도 인카운터 때 주사위 좀 안터져도 뚝배기 쉽게 터뜨릴만한 잡몹 무더기를 내 여친 PC 쪽으로 몰아줘서 여친이 신나게 주사위를 굴리게 해줬음. 그리고 꽤 오래 전부터 팀 전체가 공들여 손에 넣으려 한 에픽 아이템의 입수 순간 여친의 야만전사 PC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팀원 모두가 암묵적으로 그 이벤트에서 한발 빠져주는 극한의 배려를 보여주기도 했음. 나는 플레이 끝나고 팀원 전원에게 저녁식사라도 대접해야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음.


문제는 여친이 어느 순간 핀트가 나가기 시작했다는 거임. 느낌상 '얼마나 좆같은거 하나 보자. 대충 깽판치고 남친 끌고나가면 되겠네' 같은 스탠스로 게임 시작한 것 같은데, 스스로도 재밌으니까 인지부조화가 오는 것 같았음. 그리고 실제로 맛간 짓을 하기 시작했음. 전개상 'A!'라고 외치기만 하면 되는 순간에서 끝끝내 'B 할게요' 하는 선언을 했고, 우호적인 아군 (남성) NPC에게 기상천외한 짓을 시도했음. 꼴리게 생겼다느니, 엉덩이가 탄탄하게 올라붙어있어 눈을 뗄 수가 없겠다느니 식으로. 처음 한두번에야 다들 걍 웃고 넘어갔는데, 게임이 안터지고 계속 흘러가니 여친은 점점 더 선 넘는 선언을 하기 시작했음. 퀘스트 완료 보고를 하는 도중에 퀘스트를 줬던 (마을 시장) NPC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낀다고 갑자기 옷을 찢는다는 선언을 했음. 나는 거기서 여친을 말렸음. 적당히 하라고, 지금 다 너 도와주려고 애쓰고 있는거 안보이냐고. 부끄럽지 않냐고.


그때 여친이 내 뺨을 후려치면서 이렇게 말했음. '이따위 주사위 씹덕 놀이 하면서 시시덕대는거 3년씩이나 만난 내가 레전드다. 나 간다 씨발놈아.'


여친은 그대로 가방 들고 밖으로 나갔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잡을 생각도 못했음. 근데 거기서 팀원들이 나한테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음. 왜 데려왔냐느니, 여친이랑 만나기 힘들다고 평소에 유난 떨던거 보기 좆같았는데 잘됐다느니, 여친을 TRPG 팀에 데려오는게 얼마나 상식 이상의 일인지 알고는 있었냐느니 하면서. 어쨌든 팀원들은 내가 뭐라고 대꾸도 하기 전에 갑자기 다시 플레이를 시작했음. 이미 내 PC랑 여친 PC는 애초부터 플레이 내에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겜이 굴러갔고, 나는 한 10분 정도 그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음.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거기서 눈물 흘리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음. 그런 생각이 들때 진짜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 가방 들고 일어났는데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음.


난 그대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는데 그 순간 막 눈물이 흘러내렸고, 소리 안내려고 끅끅거리면서 정류장으로 걸어갔음.


그리고 그 순간에 잠에서 깸. 베개가 막 축축하게 젖어있고 가슴이 너무 아팠음. 휴대폰 들고 여친이랑 팀원들한테 연락하려고 전화번호부 뒤지는데 사실 난 3년 사귄 여친도 없고 그보다 오래 된 고정팀도 없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음.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쯤에야 여친 얼굴도, 팀원 얼굴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게 됨. 다행이지만, 가슴 속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진짜여서 너무 힘들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