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심판의 날, 일곱.
“14번 환자는?”
“장기 임플란트 중 두 개가 사실상 기능 정지라, 새걸로 바꿔 달든가 아예 비장을 들어내야할 판입니다.”
소피아가 그녀답지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생체공학으로 만들어진 바이오닉 아이에 재고 상태가 나타난다. 프로제니터 식의 바이오닉 아이는 기계적인 인터페이스와는 거리가 멀다. 딱딱한 폰트가 아니라 마치 망막에 맺히는 듯한 모습의 둥글둥글한 숫자와 글자들. 도저히 이 환자에게까지 돌아갈만한 재고가 없다.
“임플란트랑 장기랑 다 들어내야겠어요.”
그녀가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죽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것이다. 현장을 뛰어다니는 유능한 요원이 순식간에 의료장비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폐인으로 전락한다. 그것도 재고부족 때문에. 그것이 지금의 테크노크라시다.
“알겠습니다. 23시에 잡을까요?”
“그렇게 해줘요.”
“그 다음-”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소피아의 청각신경에 통신이 연결된다. 이어폰 같은게 아니라 청각으로 직접 들려오는, 마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
“소피아, 저에요.”
그 목소리에 소피아가 그녀에게 브리핑을 하고 있던 EC의 말을 끊는다.
“잠깐만요.”
그녀가 몸을 돌려 조용한 곳으로 간다.
“무슨 일이에요? 그리고 닥터 소피아라니까?”
오랜 친구와 말을 나눈다는 사실에 오랜만에 목소리가 밝아지는 그녀. 도시 전체가 날아가고 부상당한 유니언의 요원을 치료할 방법이 없는 현실 속에서 즐거운 일이 얼마나 될까.
“소피아 라이언이니까 닥터 라이언이어야 하는거 아니에요?”
그레인저의 가벼운 농담. 그러나 소피아는 농담이나 하기 위한 호출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이시야마 박사의 과거 기록을 전부 말소 했어요. 그의 전과는 그의 클론 쪽에게 전부 기록 이전을 해놨으니까 앞으로도 문제 없을거에요.”
“네?”
“그분과 같이 네판디의 기술을 무효화 시킬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해줘요.”
“...내일이 100번째 생일인데 좋은 선물이네요. 고마워요.”
그레인저는 한참이나 말이 없다. 소피아는 그녀의 주치의나 다름없다. 이미 그녀는 그레인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최근 몇번이나 크게 부상당하며 의수의 나노머신에 의존해 살아남은 탓에 그녀의 몸은 점점 나노머신으로 침식되어가고 있었다. 몇년 있으면 그녀는 무균실 밖에서는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장점이 있다면 예전보다 훨씬 쉽게 하이퍼테크 디바이스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정도.
“한동안 연락이 안될거에요. MSF 아말감 관련 업무는 몰레티와 상담해줘요.”
“알았어요. 조심해요.”
통신이 끊긴다. 어쩌면 한동안이 아니라 계속, 이 될수도 있겠지.
소피아가 허리에 손을 얹는다. 무너져가는 현실을 떠받치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 생각을 가지고 그녀가 발걸음을 옮긴다.
-위잉.
낡은 엘리베이터가 불안한 작동음을 내며 움직인다. 북구의 어느 곳. 유니언의 요원들에게도 이곳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화물용 엘레베이터인지 그레인저, 에이다, 그리고 클론 요원들까지 탔는데도 꽤나 공간이 넉넉했다.
-철컹.
작동음이 멈춘다. 그레인저가 낡은 패널에 손을 뻗는다. 엘레베이터의 버튼들이 수명이 다했음을 암시하는 것인지 간헐적으로 깜빡거린다. 그녀의 손이 닿기전에 에이다가 그녀를 제지하듯 말한다.
“진.”
“네.”
그녀의 손이 멈춘다.
“당신이 뭘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위험하다는건 압니다.”
에이다는 클론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급속성장 탱크 안에서 보냈다. 그녀에게는 뛰어놀며 생겨난 자유로움도, 폭력에 시달리며 씌인 두려움도, 학원에서 공부하며 생긴 강박도 없다. 그녀가 교육 받은 것은 오직 테크노크라틱 유니언의 사상, 그리고 그레인저와 함께 사선을 넘으며 배운 그레인저의 가치관 뿐. 어떤 의미에서 에이다는 그 어떤 요원보다 백지에 가까웠다. 불안함이란 무너지기 직전의 기둥이라도 있어야하는 것. 그런 것이 없는 에이다는 불안함 같은 것 조차 쉽사리 느끼지 못한다.
그런 그녀도 그레인저 감독관의 행위가 너무나 위험하다는건 안다. 파헤쳐서는 안되는 비밀을 파헤쳤으며, 결국 진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채 몇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겪었을 뿐. 그런데 또 그런 일을 하려는 것이다.
“맞아요.”
“다시 한번만 생각해보길.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에이팍 요원이 그러더군요. 제가 너무 용감하다고.”
그녀가 마른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피곤함이 묻어나는 그녀의 얼굴. 그녀가 자신의 복부에서 올라오는 나노머신의 위화감을 느낀다. 이번에도 부상을 당한다면 나노머신이 또 그녀를 구해줄지, 아니면 폭주해서 내부에서부터 그녀를 무너트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가 손을 뻗어 패널의 B5 라고 쓰인 곳의 밑을 누른다. 아무 버튼도 없는 패널이 그대로 눌려 들어간다. 동시에 널찍한 엘리베이터 안이 붉은색 조명으로 가득찬다. 마치 비상등을 연상케하는 색.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가기 시작한다. 아까의 고장날 것 같은 작동음은 온데간데 없고 매끄럽게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약간의 진동과 함께 이번에는 수평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만큼이나 연기 실력도 좀 늘었으면 좋겠네요.”
1분 정도 지났을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린다.
“신원을 밝혀라.”
기계음과 함께 눈부신 헤드라이트가 그들을 비춘다. 물론 눈을 찡그리는 사람은 없다. 에이다의 바이오닉 의안은 이 정도 광량은 조절해 걸러낼 수 있다. 그레인저도 체내의 나노머신과 연결된 렌즈 형태의 디바이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옆에는 대공 방어용으로나 쓰는 CIWS가 그들을 조준하고 있었다. 방어선 뒤에는 거대한 벙커 입구가 보였다.
“MSF 아말감 감독관, 진 그레인저.”
“신원 확인. 신원 등급 3등급으로의 상승을 확인. 뉴 에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감독관. 잠시만 대기해주십시오.”
동시에 헤드라이트가 꺼진다.
뉴 에덴.
아포칼립스급 시나리오에 대비해, 대략 50년간 밀폐된 공간에서 수백의 인원을 완벽하게 생존시킬 지하 벙커다. 북구의 한 국가에 지어진 이곳은 일반인들에게는 방사능 폐기물 보관소로 알려져 있다.
NWO 주관으로 비밀리에 지어진 이 곳은 -정상적인 신디케이트라면 이런 예산 낭비를 용인할리가 없기에- 농업시설부터 최신식 군사 시설까지 현대 문명의 모든 곳을 압축시켜 놓은 곳이다. 심지어 이곳만 빼고 전 세계가 멸망한다 하더라도 이곳에 있는 클로닝 시설, 나노머신 팩토리, 핵융합 발전소 등을 통해 100년내에 인류 문명을 상당 수준까지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까지 했다.
거대한 벙커 문이 천천히 열린다. 그 안에서 젊은 현장 요원이 걸어나온다.
“안녕하십니까.”
그가 사무적으로 말하며 두 사람에게 다가온다. 그레인저의 신경망에 장착된 음성 분석기가 그의 목소리에 깔린 경멸적인 태도를 포착한다.
“죄송하지만, 신체 검사가 있겠습니다. 또한 프로필 조회 결과에 따라 최대 3일까지 임시 격-”
“그건 누구 명령인가요?”
그레인저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는다. 예전에는 불가능 했겠지만, 신경망에 유착된 나노머신의 보조를 받는 음성 교정기가 그녀의 어조와 목소리의 높낮이를 미세하게 조절하여 그녀의 말을 협박처럼 들리게 하고 있었다.
“네? 죄송하지만 이 관문의 관리자는 저입니-”
반응을 보아 그는 전형적인,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자에게 약한 타입이다. 그레인저가 즉시 그의 말을 자른다.
“미안하지만 요원, 내가 사지를 뛰어다니며 신디케이트의 치부를 밝혀낼 때 당신은 뭘 하고 있었죠?”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하은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뼈 아픈 실책이었다. 그 때문에 신디케이트가 숨기던 SPD의 존재와 레콘키스타 작전과 관련한 류 국장의 사보타주가 밝혀지며 유니언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더스의 기억을 전송한건 그레인저의 인식번호가 달린 프로토콜을 통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진상을 모르는 자에게는 그레인저가 신디케이트의 치부를 폭로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가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없는 지금, 그런 행적 만큼이나 훌륭한 신원 증명 -아니면 낙인- 은 찾기 힘들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앞에 있는 이 젊은 요원도 알 정도로.
“그건-”
“아마 여기서 아포칼립스 급 시나리오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겠죠? 아니면 트래디션 메이지들을 잡아들이느라 바빴을지도 모르죠.”
“그건 유니언의 요원이라면 응당 해야할 일입니다!”
그가 항변하듯 말하지만 그레인저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투로 몰아붙인다.
“왜, 그러면서 나 같은 요원들까지 잡아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나요? 당신이 잡아들인 현실교란자들이 입힌 피해와 현재 신디케이트가 우리에게 입힌 피해를 비교는 해봤나요? 내전이 일어나기도 전에도?”
그가 대답을 삼킨다. 렌즈 디바이스가 미세한 신체 반응의 변화를 포착해 그의 방어적인 태도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음을 포착한다.
“요새는 외부로부터 무너지지 않아요. 항상 내부로부터 무너지지.”
그가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항변하려 하지만 그레인저가 무언가 꺼내들며 그의 입을 다물게 한다.
“그럼 통제실로 안내하세요. 안 그래도 신디케이트의 기반을 무너트릴 정보를 직접 가져왔으니까.”
그레인저가 홀로그램 디스크 하나를 들어보인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가 기세가 꺾인 말투로 어딘가로 연락을 취한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레인저가 씁쓸하게 웃을 뻔 한다. 어쩌면 그녀가 NWO 내에서 승진하지 못했던 것은 현실교란자들에게 유하게 대해서가 아니라, 이런 식의 속임수를 쓰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감독관님. 즉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녀가 마치 앞장서듯 문을 향해 걸어간다.
비명소리가 울려퍼진다.
차가 미끄러지는 소리, 알수 없는 언어로 내뱉어지는 욕설과 비명. 사고. 화재 경보기의 알람. 괴성. 그것도 사람의 것이 아닌 괴성이다.
철의 냄새.
피의 미끈함.
거리가 전부 피로 젖어오는 것 같다. 도시 전체가 붉은 야수성에 삼켜지는 것이 느껴진다. 하은이 얼마 없는 장비를 무의식적으로 점검한다. 언제나처럼 권총, 탄창, 소형 폭발물 몇개, 그리고 나이프 두 자루 뿐이다. 그녀가 달린다. 그 옆으로 달리는 오마르. 그는 어느새 신발과 상의를 벗어던진 상태다. 그의 피부, 아니, 파충류의 비늘이 가로등 빛을 반사한다. 여차하면 괴물로 변신할 태세다.
“어디로 가야하는 지는 알고있나?”
“네.”
하은의 시각은 이미 일반인의 시각과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다른 자들이 폭력에 물들어가는 길거리를 볼때, 그녀는 목표와 이곳을 있는 길의 개념 그 자체를 본다. 다른 자들이 현상을 볼때 그녀는 본연을 본다. 단서를 통해 답에 도달하는게 아니라 이제 답 그 자체를 본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옥룡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스스로의 현실에 삼켜지지 않는다.
닿고자 하는 것이 그녀가 보는 현실이 아닌, 그녀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우재가 그녀를 현실에 붙들어 준 것은 지금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크아악!”
좁은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사람. 눈동자가 새빨갛고 온몸에는 물어뜯긴 자국이 가득하다. 그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보충이라도 하겠다는 것인지 하은을 향해 이빨을 들이대고 달려드는 뱀파이어. 그것도 갓 뱀파이어가 된 놈이다.
-픽.
소음권총의 소리.
무릎을 꿰뚫린 뱀파이어가 쓰러진다. 무시하고 달리는 두 사람. 확인 사살 따위를 할 시간은 없다. 뱀파이어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해는 완전히 져 버렸다. 거리를 밝히는 것은 도시의 주광등 뿐. 하은이 달리면서 핸드폰을 들어 급하게 무엇인가 입력한다. 입력을 마치는 순간-
-!
하은이 시선을 느낀다. 그러나 그 시선은 곧 사라져버린다.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시선. 오직 목적만이 존재하는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지워버리듯 더 큰 존재가 느껴진다. 증오, 파괴에 대한 욕구, 욕망.
네판디, 그것도 그녀가 아는 자다. 서향. 그녀가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수단은 뻔하다. 하은에게서 뺏어간 옥룡의 힘을 빌어서겠지. 그러나 후회할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캬악!”
뱀파이어 둘이 창문을 뚫고 두 사람을 향해 낙하한다. 오마르의 몸집이 거대해진다. 피부가 비늘로 바뀌고 꼬리가 바닥을 훝는다. 모래가 날린다. 그의 손이 두 뱀파이어를 잡아챈다.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채 그들은 그대로 쥐어짜여 죽은 세포 덩어리가 된다.
“이쪽으로.”
그녀가 방향을 튼다. 뱀파이어들이 몰려드는 것이 느껴진다. 정면으로 돌파할 수는 없다.
“빌딩 위로 뛰어오를 수 있-”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마르가 그녀를 들어올린다. 차가운 비늘의 감촉. 두 발로 걷는 거대한 파충류가 뛰어올라 건물 사이의 벽에 발톱을 박는 모습. 벽을 차내며 위층으로, 다시 위층으로, 마침내 옥상까지 도달한다. 모래, 그리고 피의 냄새가 섞인 밤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스친다. 하은이 도시 한 가운데를 가리킨다. 화려한 불빛이 켜진 거리. 전통 시장이다.
“캬아악!”
밑에서 부터 뱀파이어들의 괴성이 들려온다. 두 사람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수십, 아니, 적어도 몇백은 되는 뱀파이어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 근방에 살아있는 인간이나 인간 비슷한 것은 그들밖에 없다는 뜻이다.
건물 사이를 뛰어 넘는다. 동시에 건물 옥상 출구가 박살나며 팔다리가 다 부숴진 뱀파이어의 몸이 바닥에 널부러진다. 그 뱀파이어를 밀어 붙이고 있던 다른 뱀파이어들이 튀어나와 둘을 향해 달려든다. 붉은 파도가 그들을 덮친다.
“키야-”
제일 앞에서 달려드는 놈은 오마르의 꼬리에 치여 빌딩에서 떨어진다. 그 다음으로 달려드는 무리는 곧바로 그가 뿜어낸 산성 액체에 맞고는 그대로 붉은 덩어리들로 녹아내린다.
“어서!”
그의 말에 하은이 다른 빌딩으로 뛴다. 빌딩 벽을 기어올라온 뱀파이어의 머리를 차내고 다른 한놈의 손을 맞춰 떨어트린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목적지를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귀엽네.”
서향이 도시 제일 높은 곳에서 정말로 귀엽다는 듯 중얼거린다. 악어 같은 괴물 하나와 전직 테크노크라시 요원이 이집트 한복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싸우고 있는 장면.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도로시랬나, 하은이랬나. 하지만 그 이름은 별로 상관 없다.
옥룡이 그녀가 있는 쪽을 가리킨다. 그녀를 가리키는 것인지 그녀의 목적지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중요하지도 않았다. 새까맣게 물든 옥룡은 점점 깨져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팔에 깃든 악마가 속삭인다. 이제 그 목소리는 악마의 목소리가 아니라 파괴 그 자체Wyrm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전부 죽이자.
그녀가 손을 들어올린다.
멀리서, 폭주하는 뱀파이어들이 가는 길 한복판을 붕괴시킨다. 패러독스의 철퇴는 없다. 국지 현실 그 자체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곧 딥 움브라와 이 도시의 차이는 산소가 있냐 없냐 정도 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갈 길이 무너지자 뱀파이어들이 즉시 방향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폭주하기 시작한다. 서향은 마치 교향곡 지휘자처럼 손을 흔들며 엄청난 수의 뱀파이어들을 몰아간다.
그녀가 직접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뻘건 파도에 휩쓸려 처절하게 무너지는 그들을 보는 것이 더 재밌으니까.
비명소리와 함께 뱀파이어가 반으로 찢겨버린다. 목적지는 눈 앞이었다. 그러나 두 명이 막아내기에는 너무나 많은 수다.
“...이런.”
오마르가 탄식을 내뱉는다. 그들을 향해 붉은 파도가 달려온다. 거리를 가득 채운 뱀파이어들. 적잡아도 수백. 인도를 내달리며 보이는 시체마다 살점과 피를 모조리 삼키는 뱀파이어들. 불타는 차 위를 달리면서도 아랑곳 하지 않는 놈들도 있다. 산책 나왔다가 영문도 모른채 괴물이 된 자, 괴물들을 막으려던 경찰관, 심지어 임산부까지.
아무리 강력하다해도 오마르 혼자 저 뱀파이어들을 다 막아낼 수 있을리가 없다. 오마르의 탄식에 하은이 유심히 거리를 살핀다.
그녀가 건물 하나를 가리킨다.
보인다.
가능성, 길, 단서,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
오마르가 지체하지 않고 그녀를 안고서는 그 건물로 뛰어 넘어간다. 둘 사이에는 벌써 묘한 동질감 같은 것이 생겨나 있었다. 한쪽은 비밀을 지키고, 한쪽은 비밀을 푸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가며 하은이 그 건물을 다시 살핀다. 식당, 그것도 노점에 가까운. 그런 곳에 있을 법한-
하은의 시선에 LPG 통 여러개가 눈에 들어온다.
그 뿐만이 아니다. 사고가 나서 전복된 채 불타고 있는 차량, 그 식당에 배달하기 위해선지 LPG 통을 적재한 트럭, 전신주들. 그녀가 지체하지 않고 건물에 착지하기도 전에 수류탄을 던진다.
“콰앙!”
건물을 울리는 거대한 폭발음. 그러나 건물을 무너트리는 대신, 절묘한 폭압의 조절로 좁은 거리 사이로 쏟아져나오는 화염. 그 화염이 뱀파이어들을, 그리고 트럭 위의 가스통을 덮친다.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나며 뱀파이어들을 갈아버린다. 전신주가 폭발의 충격으로 산산조각나며 괴물들을 조각내고, 팽팽한 전깃줄이 끊어지마 그 탄력으로 뱀파이어들을 썰어버린다. 거리 전체가 거대한 불구덩이가 되며 수백의 뱀파이어들을 불태운다.
“...대단하군.”
오마르가 낮게 중얼거린다.
하은은 폭발의 열기를 느끼며 이상한 점을 알아챈다.
패러독스의 영향이 전혀 없다. 팔에 퍼즐무늬가 생기는 일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에 가까운 연쇄 폭발이 실패하는 일도 없었다. 그녀가 상상한 이미지가 그대로 현실에 재현된 것이다.
합의된 현실의 붕괴.
하은은 이제서야 자신이, 그리고 세계가 어떤 운명에 처해있는지 알아차린다. 오래된 뱀파이어의 피, 영원한 죽음을 맞기 직전인 민려, 뱀파이어들의 폭주, 펜텍스, 세계의 붕괴.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있는 자신.
철저하게 개인적인 이유로 여기에 있지만 그녀가 맞닥뜨린 것은 거대한, 너무나 거대한 사건이었다.
“가죠.”
그녀가 그 생각을 지워버리려는 듯 말한다. 시장은 별로 멀지 않았다. 그들이 거리로 내려온다. 폭발의 열기는 가시지 않았지만 화염은 이제 거리의 가장자리로 물러나 있었다.
-쿵.
그러나 뱀파이어가 끝이 아니었다. 불타고 있는 건물 뒤에서 거대한 형상들이 걸어나온다. 오마르보다는 작지만, 일반적인 인간보다 몇배나 큰 괴물들. 여러 다리가 달린 비대한 인간, 흉곽의 안과 밖이 뒤집힌 자,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괴물. 오마르가 그들을 보고 이빨을 갈며 쉬익, 하는 소리를 낸다.
웜의 주구, 포모리다.
괴물 셋이 그들을 향해 달려든다. 순식간에 거리는 비현실적인 싸움의 현장으로 변한다. 하은은 꼼짝없이 그들 중 하나와 싸우게 될 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패러독스의 위험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 끔찍함 만큼이나… 편리한 것이었다.
“크오오!”
괴성. 그녀가 있던 자리를 괴물이 내려친다. 그녀만한 팔이 내려쳐지는데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뒤로 뛰하며 피한다. 한번 더 그 과정이 반복된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그녀. 이번에는 마치 쳐보라는 듯이 버티고 선 하은.
“자, 쳐봐.”
괴물이 분노하며 그곳을 내려치는 순간, 그녀가 살짝 몸을 피한다.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몸으로 가리고 있던 소화전이 엄청난 수압으로 물을 내뿜는다. 얼굴이 물로 강타당한 괴물이 살짝 휘청거린다. 괴물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 하은이 전신주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다.
-픽.
소음권총의 발사음. 동시에 전깃줄 하나가 끊어지며 정확하게 괴물의 머리로 떨어진다. 엄청난 고압전력이 흐르자 괴물이 경련하기 시작한다. 피부의 낭종이 터져나오고 피부 여기 저기서 갈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괴물은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바닥으로 쓰러진다. 오마르도 두 마리를 순식간에 처치하고는 쉬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둠속에 숨어있을 괴물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우웅-
머리 위.
상공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작은데도, 모든 비명 소리를 뚫고 들릴 정도의. 두 사람이 두려워 하고 있던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멈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시 위로 날아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비행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비행음.
그러나 그것은 도시에 대한 사형선고다.
거대한 지휘 통제실.
그레인저는 그렇게 거대한 규모의 통제실은 처음 보았다. 세계 전체를 지휘하기 위한 지휘 통제실이라고 하면 될까. 거대한 모니터들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흐른다. 차분한 분위기 가운데 정보를 수집하고 정리하며, 그에 기반해 명령을 내리는 요원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의료 지원의 중단, 국지적 내전에의 개입, 정치인의 암살, 대대적인 대피작전의 보강, 난민 구호 활동. 수천의 삶을 뒤바꿔버릴 수도 있는 결정들이 효율적으로, 그러나 너무나 빠르게 내려진다.
“아, 그레인저 감독관.”
그레인저의 이름을 부르는 고위 요원. 그레인저를 안내해온 요원이 그에게 다가가지만 고위 요원이 물러가라는 듯 손짓한다.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싶군.”
“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선다.
“이리오게, 감독관.”
그레인저와 에이다가 그가 있는 플랫폼으로 올라간다. 물러나던 요원이 그들을 제지하듯 말한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올라가는건 한분으로 충-”
“누가 자네에게 말할 권한을 줬지?”
고위 요원이 말한다. 고압적인 말투가 아닌데도 그의 얼굴이 실수를 알아차린듯 일그러진다. 그가 빠르게 자리를 뜬다.
“미안하군. 자, 올라오시게. 둘 다 올라왔으면 좋겠군.”
그레인저가 그의 시선을 느낀다. 그녀를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은 아니다. 그냥 보고있다, 라는 느낌.
“뭐라고 불러드리면 되겠습니까?”
“그게 중요한가?”
플랫폼 위에서 보는 지휘통제실은 장관이라할만 했다. 인간의 눈으로 감시 가능한 거의 모든 정보가 이곳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각 정부 요인의 동향, 인터넷 상의 여론, 감시용의 군사위성이 보내오는 초고화질의 위성사진, 시시각각으로 포착되는 위험 인물들의 움직임, 주요 군사 요충지의 정보, 테러리스트들의 위치, 그리고 정보, 정보, 정보-
“어떤가?”
그가 묻는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거의 모든 법을 위반하고 있군요.”
그레인저가 되도록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건조한 감상을 남긴다. 이 정도는 비난의 축에도 속하지 못하니까. 오히려 냉정한 현실 파악이다.
“그렇다네.”
그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대답하며 스크린을 주시한다. 순식간에 엄청난 정보들이 갈아치워진다.
“신디케이트의 또 다른 치부를 밝힐만한 정보를 가져왔다고?”
“네. 그들의 기반을 결정적으로 무너트릴 수 있는 정보입니다.”
그녀가 디스크를 들어보인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다.
거기에 적당한 정보가 들어있는 것은 맞지만 핵심은 지휘통제 프로그램을 사보타주할 해킹 프로그램이다. 그녀나 그녀의 부하가 만들어낸 프로그램은 아니다. 에페메라 작전의 AI가 넘겨준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지휘 통제실의 보안을 뚫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그에게 넘겨받은 프로그램이라면 실패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군. 그런데 말일세. 자네의 단어 선택을 좀 교정할 필요가 있군.”
그레인저가 불안함을 느낀다. 특히 ‘교정’이라는 단어에서.
“어떤 점 말입니까?”
“자네는 개인정보 보호법이 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나?”
자신이 이야기 한 것 중, 제일 지금 상황과 무관해보이는 주제. 그 주제에 대해 질문 받을거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과거, 현실교란자들과의 데면데면한 관계, 아니면 최근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니. 왜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가 말을 이어간다.
“대답해보게.”
그녀는 아말감 지휘관이다. 아말감 지휘관이라는 것은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권력 -그리고 책임- 을 가진 자리다. 자신의 업무에 관련된 일이라면 일반인이 보기에는 거의 무제한적인 권한을 가진다. 당장 그레인저 본인만 해도 현실교란자의 절제를 위해 정부 부처 하나를 셧다운 시킬수 있고, 대대 규모의 군대를 징발할 수 있으며, 필요시 소규모의 궤도 폭격마저 요청할 수 있다. 그들 여럿이 동의하면 도시 하나를 봉쇄하거나 지워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녀는, 대입 시험에나 나올 법한 질문을 받고 있다.
“...그거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
“틀렸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물론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네. 어쨌든 테크노크라틱 유니언이 현실에 끼워넣고자 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니까.”
그의 눈동자에 스크린의 불빛이 반사된다. 스크린에 나타나는 정보들을 읽고 있는 걸까? 그것이 그에게 중요하기는 할까? 어쩌면, 그가 직접 결정해야할 일들은 저런 정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일인 것이 아닐까? 그런 질문이 떠올라온다. 그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그레인저에게 다시 묻는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그거야-”
“틀렸네.”
이제는 대답마저도 듣지 않는다.
“왜입니까?”
“답은 ‘예’도, ‘아니오’도 아니기 때문일세. 다시 말해 내 질문이 틀린 것이지.”
그가 조용히 말한다. 그들 밑에서 클론 요원들이 수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일차적으로 걸러낸다. 그 정보를 계몽된 요원들이 수집해 어떤 것은 스크린에 띄우고, 어떤 것은 아카이빙한다. 마지막으로 가공된 정보에 기초해 무거운 결정이 내려진다. 이 짧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몇백명의 운명이 갈렸을까.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옳다, 라는 개념으로 봐야하는 것이 아니네.”
그의 말이 그녀를 압도하는 것을 느낀다. 물러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의심당한다. 이미 의심당하고 있지 않다면.
“필요한가, 하는 개념으로 봐야하는 것이지.”
그레인저가 간신히 고개를 끄덕인다. 동의도 납득도 아니다. 압도된 자의 무의식적인 저항이다.
“개인정보 보호법은 개인정보를 보호하려는 법이 아니야.”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어간다.
“우리가 아닌 자들이 개인정보를 함부로 들여다보지 못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레인저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린다. 그는 개인이 아니다. NWO의 최고 지도부가 통합적인 의지를 행사하는 단말에 가깝다. 그 인형 뒤에는 NWO 그 자체의 사상과 의지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를 전부 파괴하기 전까지는 절대 없어지지 않을 무시무시한 통합된 정신이.
“마찬가지일세, 감독관. 자네가 NWO를 바꾸고 싶다면 먼저 NWO, 아니, 테크노크라틱 유니언을 이해해야하지.”
움직일 수가 없다.
“그 디스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자네가 옳다고 생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중요하네.”
그가 스크린을 눈으로 훑으며 말한다. 그레인저가 자신의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한다. 평소라면 뭔가를 들켰을때 드는 불안 정도는 계몽심리학적 테크닉으로 억누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단말 뒤에 숨은 무한한 의지에 압도된 것인지 그것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도 잘못되어 있네. 개인정보 보호법과 비슷한 얘길세. 테크노크라시는 옳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야.”
“말도 안됩니다!”
그레인저가 강변한다.
“옳은 일이 아니라면-”
“우리는 필요한 일을 할 뿐일세. 우리가 정의롭다… 같은 뻔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 같나? 그런 것은 유동적이야. 정의 그 자체보다, 정의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하네. 알겠나? 중요한 것은 오직 목적과 필요, 그리고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 뿐이지.”
그의 손짓에 메인 스크린이 전환된다. 메인 스크린에 표시되고 있는 것은 누가봐도 폭격기의 비행궤적이었다.
“그리고 자네의 목적은 비교적 명확하네.”
그레인저의 눈동자가 무의식적으로 스크린을 향할 뻔 한다.
“잘 숨기는군.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네. 우리는 모든 조직과 개인을 들여다본다네. 어쩌면 자네의 신경조직 속에도 바이러스 형태를 취한 우리의 정보원이 있을지도 모르지.”
불쾌하기 짝이 없는 농담.
들켰다.
들켰다면, 더 이상 연기를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레인저가 외친다. 에이다도 그녀의 의중을 읽고 무기를 꺼내려 손을 뻗는다.
“에이-”
“드라코니안 에이지.”
그러나 고위 요원이 먼저 정체불명의 단어를 읊는다. 동시에 에이다가 무릎을 꿇으며 쓰러진다. 그녀가 조종하는 클론 요원들도 움직임을 정지한다.
시야가 흐려진다.
무의식 레벨에 새겨진 전투 프로토콜이 전부 지워지는 느낌이다. 몸을 움직이는 방법도, 전술적으로 생각하는 방법도, 유니언의 디바이스를 이용하거나 프로시져를 사용하는 방법마저도 흐려진다. 고위 요원이 말한 단어는 그녀의 컨디셔닝 그 자체를 락다운 시키는, 그녀가 만들어질때부터 심어진 단어일 것이다. 미리 그 프로시져로 대비를 해놓고 있었을 정도라면, 그들의 계획이 들켰다는 의미다. 처음부터.
시야 뿐만 아니라 정신 그 자체가 흐려진다. 자아를 붙들고 있을수가 없다.
“에이다?”
그레인저가 권총을 꺼내들며 요원의 머리에 겨눈다. 동시에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순식간에 열명은 되는 블랙 수트들이 그녀를 둘러싼다. 그가 그레인저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듯 그는 말을 계속한다.
“자네를 여기까지 들어오게 한 것도 필요에 의해서지. 우리는 자네가 이 일련의 사태에 매우 큰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있네.”
냉기가 흐른다.
“진상을 알기 위해서라면 자네의 뇌를 꺼내는 것도 괜찮겠지. 우리가 프로제니터의 뉴럴 인터페이스 상용화를 허가해주지 않고 있는 이유를 아는가?”
그가 무표정하게 말한다.
에이다가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으려고 노력한다.
목적.
-목적.
그것만이 머릿속을 울린다.
일어나서, 그레인저를 보호해야한다. 그것만이 그녀의 목적이다. 흐려져가는 정신 속에서도 그것만이 유일하게 그녀의 정신을 떠나지 않는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정보를, 우리만이 알기 위해서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 그레인저가 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지만 그걸 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알고 있다.
“자, 그럼 항복하게. 눈을 뜨면 지금의 기억이 마치 농담처럼 여겨질걸세.”
몸을 일으키려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신의 근원부터 행동 하나하나까지 유니언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스스로의 무력함이 이렇게 절실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유니언에게 받은 것이 아닌, 자기 자신만의 것이 있던가?
하나라도?
하나라-
“그럴 순 없어요.”
그레인저가 번개 같이 권총을 한자루 더 뽑아든다. 그러나 블랙 수트 요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아무리봐도 만용일 뿐이다.
“괜찮네, 요원.”
고위 요원의 입이 천천히 움직인다.
“자네는 충분히 재활용 할 수 있으니까.”
그의 시선이 에이다를 향한다.
“저쪽에 있는 요원도 마찬가지겠고.”
있다.
교육받지 않은 것이. 그레인저와 사선을 넘으며 배운 그녀의 생각. 그녀가 그레인저를 따르는 이유. 어리석지만, 따를 수밖에 없는 그녀의 방식. 그렇기에 에이다의 충성은 맹목적이다.
류 국장이 말해준 단어를 마음 속에 떠올린다.
-맹목적인 충성심.
동시에 그녀의 마음을 뒤덮고 있던 안개가 사라진다. 심리학적 프로시져의 억압이 사라진다. 류 국장이 남긴 말은 그냥 표현이 아니라 프로시져의 해제 코드였던 것이다. 왜 류 국장이 그것을 알려줬는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에이다에게는 몇배나 중요한 일이 있다.
“진!”
그녀의 입이 그레인저의 이름을 외친다. 동시에 그녀의 클론들이 벨트에 부착된 연막탄을 작동시킨다. 플랫폼 위가 흰색 연기로 뒤덮힌다. 총탄 소리가 울린다. 그레인저가 납작 엎드려 탄을 피한다. 고위 요원의 형상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엎드린 곳 옆에 데이터 포트가 보인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데이터 디스크를 꽂아넣는다. 동시에 디스크 내에 내장된 해킹 프로그램이 작동을 시작한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디스크를 보며 그녀가 몸을 피한다. 총탄이 그녀의 어깻죽지를 스쳐지나가지만 이미 생체보다는 기계에 가까워진 부위라 별 고통은 없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몸을 피해, 클론들 사이를 지난다. 자신을 가로막는 블랙 수트들을 때려눕히고 출구로 달아난다. 물론 일반적인 출구가 아니라, 에페메라 작전의 담당 AI가 알려준 비밀 출구다.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벽에 다가가 희미하게 색이 다른 패널에 그녀의 손을 얹는다.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크기의 작은 문이 열린다.
그레인저가 지휘 통제실을 빠져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바닥에 누운채 필사적으로 엄폐물에 몸을 숨기는 에이다가 복부에 연달아 총을 맞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의 눈길이 잠깐 마주친다. 그레인저가 그녀의 의지를 읽는다.
그리고, 그 의지에 따르듯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레인저가 문으로 뛰어든다.
-위잉.
서향이 그 소리를 즐긴다.
파괴의 교향곡의 마지막.
이제 곧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이곳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인간의 문명은 그저 파편과 폐허로 그 존재를 증명하게 되리라.
위이잉-
도시 상공에 폭격기가 도달한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폭격기에서 은색의 캐니스터가 떨어지는 일도, 도시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는 일도 없다. 폭격기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코스를 이탈해 지평선 쪽으로 사라진다. 서향이 분노의 눈길로 도시를 쏘아본다. 그 위로 테크노크라시의 폭격기가 하릴없이 지나간다. 폭탄이 떨어져 도시를 쓸어버리는 일은 없었다.
왜?
그녀가 분노에 찬 얼굴로 다시 한번 손을 휘두른다. 건틀렛을 찢어 웜의 수하들을 불러낸다. 파괴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녀의 눈길, 그리고 손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군가 우릴 돕고있군.”
오마르가 쉬익 거리며 말한다. 폭격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본격적으로 거리의 그림자에서 괴물들이 튀어나온다. 오마르가 엄청난 완력으로 놈들을 제압하고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하은은 전깃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건물, 굴러다니는 LPG 통, 그리고 괴물들이 장님 같이 휘둘러대는 힘을 이용해 놈들을 처치한다.
그러나, 수가 너무 많다.
“윽-”
그녀가 신음을 흘린다. 차라리 거대한 놈들이 싸우기 쉽다. 건물 벽에 붙어서 마치 촉수 같은 기다란 혀로 그녀를 노려오는 메스꺼운 생물. 속도가 빠르고, 피하기도 쉽지 않다. 하은이 전력 질주 한다. 엄폐물로 숨어야-
“쿠오오!”
그 전에 빌딩 사이를 깨부수고 나오는 거대한 괴물. 그 괴물이 하은을 향해 갑각이 덮힌 팔을 내려친다. 간신히 피한다. 그러나 그 다음은 피할 수가 없다. 피하는 대신 그녀가 자신의 옆, 소화전에서 새어나온 물로 손을 뻗는다.
물 웅덩이, 라는 현상에 부여된 의미를 찾는다.
물, 마실 수 있는 것, 생명, 그리고-
-거울.
그녀가 의미를 제외한다. 하나만의 의미, 거울이라는 의미만이 남은 물 웅덩이. 그 안에서 무엇인가 솟구쳐오른다. 뛰쳐나온 늑대인간의 형상이 하은을 향해 내려쳐지는 팔을 두 손으로 막아낸다.
“오긴 왔네요.”
그녀의 말과 함께 늑대인간이 등에 메고 있던, 위버 테크로 만들어진 총으로 괴물의 얼굴을 박살내버린다.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인사를 건넨다.
“메시지는 받았습니다. 건틀렛의 경계가 완전히 헝클어져서 오는데 좀 오래 걸렸군요.”
동시에 거리의 곳곳에서 가루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물 웅덩이, 박살난 가게의 유리창, 거울 역할을 할 수 있는 모든 곳에서. 그러나 너무나 소수다. 김인혁의 뜻에 따르는 자들만 온 것이겠지.
“최후의 날입니다.”
그의 말. 거대한 늑대인간들이 연달아 늑대의 울음을 지어내며 괴물들에게 달려든다.
영광을, 이라고 외치는 듯한 그들의 포효.
늑대의 울음이 다시 한번 도시를 울린다. 위버테크 탄환이 허공을 가르며 불꽃을 피워낸다. 괴물들의 팔 다리를 할퀴고 머리를 뜯어낸다. 작은 괴물들은 한손으로 잡아 머리를 터트려버린다. 그들의 눈에는 전투의 광기 뿐만 아니라, 멸망의 전조에 맞서 싸운다는 영광에 대한 욕구가 깃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포모리들이 갈기갈기 찣겨져버린다.
전투가 소강 상태에 접어든다. 그제서야 가루우들은 자신의 한 가운데 서있는 거대한 모콜레를 경계하며 그를 둘러싼다.
“...전사들이여.”
오마르는 경계하는 눈빛 대신, 존경의 말로 그들을 타이른다.
“최후의 날이 왔소. 지켜야할 것이 있다는 뜻이오.”
그가 갈기갈기 찢겨진 포모리들을 보며 말한다. 그것만으로도 대화가 끝난다. 애초에 그들 사이에 대화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그들에게는 사명이 있으니까.
더 많은 포모리들이 어둠, 아니,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다. 폭발로 무너진 건물의 폐허 사이로 드리운 그림자를 들치고 기어나오는 괴물, 전신주의 그림자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뱀 형상의 무언가. 그 뿐만이 아니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곤충과 동물을 반반 섞어놓은 것 같은 끔찍한 흉물Nexus Crawler도 튀어나온다.
그리고 괴물 모두를 막기에는 가루우의 수가 너무 적었다.
“당신이 틀리지 않았길 바랍니다.”
인혁이 남긴 것은 그 한마디 뿐이었다.
동시에 싸움이 시작된다. 뱀파이어 뿐만 아니라 포모리와 실체화된 베인 정령들도 그들에게 달려든다. 거대한 짐승들이 부딪힌다. 인간은 꿈도 꿀 수 없는 스케일의 싸움. 팔이 반정도 뜯겨 나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목덜미를 물어 뜯고, 복부가 뚫려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재생하며 싸운다. 거대한 괴물에게 겁없이 달려드는 또 다른 괴물들.
“가라!”
오마르가 굵은 짐승의 목소리로 외치며 하은을 향해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을 한손으로 쓸어버린다. 그러나 숫적 열세는 명백했다. 아무리 거대한 괴물이라도, 달려드는 수십, 수백의 거머리들을 상대로는 시간을 끄는게 고작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가루우의 발톱에 괴물 하나가 찢겨질 때마다, 셋이 튀어나온다.
“크오오!”
가루우의 필사적인 괴성. 그러나 온 몸에 발톱을 박아대며 기어오르는 벌레를 닮은 끔찍한 생물들을 쳐내자마자 그의 한쪽 팔을 포모리가 물어 뜯어버린다. 마지막 힘을 다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팔과 다리부터 온 몸을 먹혀버린채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다른 가루우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괴물의 점액을 뒤집어 쓴채 온몸의 피부가 녹아내리는 모습, 사방에서 달려드는 흉물들을 도륙하지만 파도 같은 괴물들의 바다에 휩쓸리는 광경.
하은이 그 사이를 달린다. 그들이 너무 불리하다. 괴물들을 불러오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 먼저다.
섭리를 읽는다. 길, 그리고 길로 이어지는 문을 닫는다. 간단한 일이다. 패러독스가 없다면 더욱.
그녀가 권총을 들어 전신주에 위태위태하게 매달려 있는 변압기를 조준한다. 픽, 하는 소리와 함께 총탄이 변압기에 명중한다. 변압기가 터지며 거리의 모든 조명이 사라진다. 거리를 밝히는 것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희미한 달빛, 그리고 거리를 불태우는 화염 뿐.
빛이 사라지면 그림자가 사라진다. 넘실거리는 화염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변화무쌍한 탓인지, 괴물들이 기어나올 통로가 되지 못한다. 그림자에서 기어나오던 괴물들이 다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희망이 생겨 날 수 없는 곳에, 절망도 생겨 날 수 없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모든걸 삼켜버릴 것 같던 수가 시간은 끌어볼 수 있을 만큼의 수로 줄어든다.
-!
증오.
오직 그 의미만이 공간에 퍼져나간다. 하은의 앞에 있던 공간이 찢겨나간다. 서향이 그 공간을 찢으며 나타나 하은에게 손을 뻗는다. 하은도 찢겨나가는 공간의 패턴을 읽는다. 그 패턴을 따라, 칼을 던진다.
-퍼억.
파열음.
뒤틀림에 휘말린 하은의 왼팔 팔꿈치 아래가 그대로 파열한다. 피부가 찢겨 나가고 근육이 살점채로 발라내진다. 싯누런 지방이 터져 바닥에 흩뿌려지고 뼈가 조각난다.
“심장을... 터트려 버리려고... 했는데 말야.”
공간을 찢고 나타난 서향이 하은을 조롱하듯 말한다. 그러나 서향의 목소리는 고통에 차 있었다. 하은이 던진 나이프의 앞쪽이 잘려나간채로 서향의 한쪽 눈에 박혀 있었다.
“으...”
그녀가 신음한다. 칼날이 그녀의 눈에서 뽑혀 바닥으로 떨어진다. 뭉개진 그녀의 눈도. 그녀의 상처가 흉하게 우그러들며 강제로 지혈된다.
하은도 파열한 한 쪽 팔을 부여잡은채 그녀를 노려본다. 그녀가 천천히, 서향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채 찢긴 옷자락으로 그녀의 팔을 지혈한다. 피에 젖은 옷자락을 이빨로 물어 당기는 그녀. 찢어진 옷자락이 상처에 덮힌채 붉게 젖어간다. 도저히 이 정도로 지혈이 될 상처가 아님에도, 아무렇게나 묶어놓은 옷자락이 그녀의 상처를 절묘하게 막아놓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주위의 격렬한 전투가 계속된다. 괴성, 죽음, 폭력. 누구의 것인지 모를 잘려나간 팔이 철퍽, 하는 소리를 내며 두 사람 사이에 떨어진다.
서향이 손을 뻗는다.
“!”
공간의 뒤틀림이 다시 하은을 덮친다. 다른 사람이, 아니, 깨어난 자Mage가 아니라면 그 공간 사이의 허점을 알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높은 파도에 휘말려 물에 빠져버리는 사람도 있고, 그 파도를 타는 사람도 있다면 하은은 후자다.
그녀가 뒤틀림 사이를 달린다. 그녀의 총구가 서향의 가슴으로 이어지는, 왜곡 사이의 실낱 같은 길을 향한다.
뒤틀림이 그녀를 덮친다.
픽, 하는 소음 권총의 발사음.
인력과 척력, 공간 그 자체가 뒤집히는 왜곡.
“헉-”
서향이 신음을 내뱉는다. 직선이 아닌, 왜곡 사이를 타고 지그재그로 달린 총탄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다. 동시에 하은의 좌반신을 공간의 우그러짐이 덮친다. 방금 지혈해놓은 상처가 터져나가며 피를 흩뿌린다. 다리뼈가 안에서부터 갈라지며 조각이 그녀의 허벅지를 뚫고 나온다.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는다. 눈알이 안구 안에서 찢어지며 붉게 물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반신은 피해냈다. 그렇지 않았으면 폐나 심장이 파열되어 즉사했겠지.
그녀가 무릎을 꿇은채로 땅으로 쓰러지는 서향을 본다.
공중에 살짝 떠있던 그녀의 발에 땅에 닿는다. 그 다음은 몸이 앞으로 휘청이며 무릎이 땅에, 그 다음엔-
“...”
그녀의 움직임이 공중에서 정지한다. 쓰러지던 궤도 그대로 되돌아오는 그녀. 피부 위로 그녀의 혈관이 맥동하는 것이 보일 정도다. 구멍이 뚫린 그녀의 심장에서 새어나온 피가 서향 주위에 떠다닌다.
그녀의 능력으로 심장을 쥐어짜 기능을 잃은 심장 근육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하은만큼이나, 그녀도 스스로의 존재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사라져.”
그녀의 입술이 그렇게 말한다. 동시에 하은의 온 몸을 죄어오는 왜곡.
“윽-”
일반적인 신음이 아니라 폐가 쥐어짜이며 내뱉는 비명.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려하지만 손 하나 꿈쩍할 수가 없다. 왼팔의 출혈도 점점 심해진다.
“크오오!”
서향을 덮치는 가루우. 동시에 속박에서 풀려나는 하은. 그녀가 비명과 같은 날숨을 토해낸다. 서향이 손을 휘두르자 가루우가 간단하게 튕겨나간다.
“가십시오!”
굵은 김인혁의 외침. 그가 다시 서향에게 뛰어들지만 서향의 힘에 간단히 공중에서 붙잡혀버린다. 그의 팔 관절이 뒤틀리고, 살점이 터져나간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오마르의 산성 점액이 그녀를 덮치지만 공간이 뒤틀리며 점액을 사방으로 흩어놓는다. 하은이 뒤돌아 달린다. 아니, 부러진 것이나 다름 없는 다리를 끌며 어떻게든 몸을 피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시장 한 가운데, 누가 봐도 인적이 없을 법한 가게. 번화 했을 시장 한 가운데서도 홀로 고요하고, 지금의 재앙 속에서도 멀쩡한 그곳.
그곳이 하은의 목적지다.
그녀가 허름한 문에 온 몸을 부딪친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잡동사니만을 파는 가게. 그 한가운데에 놓인 양탄자. 양탄자를 들어낸다. 양탄자로 가려진 나무 문. 10년 정도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것인지 먼지가 사방으로 날린다. 하은이 그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동시에 그녀의 입 안에 피의 맛이 감돈다. 여기다. 꿈에서 보았던 그곳.
그녀의 구원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과거의 잘못을 되돌릴 수 있는 곳이.
그녀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뛰어든다.
“감독관님, 이건 자살 작전입니다.”
그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북구에 있었던 그레인저는, MSF-44 아말감 감독관의 특권으로 징발한 초음속 수송기를 타고 이집트 상공에 와있었다. 조종사는 계속해서 그레인저의 강하를 말리고 있었다.
“다시 한번만 생각해주십시오. 클론 병사들이 있다해도 살아나오시지 못할겁니다.”
그러나 간곡한 부탁에도 그레인저는 그를 재촉할 뿐.
“알아요. 날 저곳으로만 데려다줘요. 그 이후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그녀의 명령에 조종사가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말한다.
“...알겠습니다. 추적장치를 낙하 포드에 링크합니다. 건투를 빕니다.”
동시에 새까만 원통형의 낙하 포드가 수송기에서 분리된다. 웨더스가 하은의 옷에 부착해 놓은 발신기와 링크된 추적장치가 포드의 시스템에 연결된다. 그 신호를 따라 포드가 지옥이 된 도시에 떨어진다.
“크오오!”
괴성.
인간의 악몽에서도 나오지 못할 끔찍한 생물들과 늑대인간들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현장. 그 한복판으로 낙하하는 포드. 포드가 낙하하며 거대한 생물 하나를 그대로 깔아뭉개며 박살낸다. 문이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튀어나온 클론 요원이 또 다른 괴물의 손아귀에 잡혀 저항할 새도 없이 몸이 쥐어 짜여버린다. 뒤이어 뛰쳐나온 요원들이 고화력 하이퍼테크 병기를 난사한다. 그레인저가 제일 마지막으로 뛰어나온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끔찍하기 그지 없는 광경이 그녀를 맞이한다.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괴물들과 늑대인간들.
화재가 번져 불타고 있는 건물들.
그 사이를 달리며 인간과 가루우의 피와 사체를 뜯어먹는 뱀파이어들.
악몽에서조차 쉽사리 보지 못할 흉물스러운 괴물들.
클론 요원 한명이 화염방사기를 난사하며 그레인저의 추적장치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공중에서 날아온 베인 정령이 그 요원을 습격해 채어간다. 허공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허무하게 사라져버린다. 그레인저가 지휘하는 다른 클론들이 간신히 길을 뚫고 추적장치의 신호가 끊긴, 작은 가게 앞까지 도달한다.
그레인저가 그 옆에 쓰러져있는 거대한 현실교란종을 본다.
늑대인간과 비슷하면서도, 그것보다 훨씬 거대한 변신족. 늑대가 아니라 도마뱀이나 악어의 형상을 닮았다. 전신에 주위의 건물에서 뽑아낸 듯한 철근이 박혀 있다. 목, 어깻죽지, 복부, 심장 근처, 팔과 다리의 관절까지. 박혀 있는 개수만 족히 스무개는 넘는다. 간신히 팔을 움직여 철근을 하나씩 뽑아내는 그가 그레인저를 힐끗 쳐다본다. 성대가 파괴된 것인지 말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레인저는 그의 의지를 읽는다. 맹목에 가까운, 괴물들의 사명을.
용의 모습을 한 변신족이 다시 한번 선다. 비틀거리면서도 가게 앞을 막아선다. 괴물들이 그에게 달려든다. 물론 승산은 없다.
그레인저가 고개를 돌리고는 가게 안으로 뛰어든다. 거칠게 비틀어져 열린 바닥의 문. 그리고 핏자국들과 뱀파이어의 것이 분명한 잘려나간 팔다리. 하은의 뒤를 먼저 누군가 쫓아간 것이 분명하다. 몇 남지 않은 클론 요원을 데리고 그레인저가 그 안으로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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