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링크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는 것 같다. 고통을 무시하고 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외상으로 인한 출혈. 그녀가 걷는 곳마다 피가 흐른다. 오래된, 아주 오래된 유적. 모래를 구워만든 벽돌로 지어진 지하통로를 채우고 있는 마른 모래의 향. 그 안에서 어깨의 스트랩에 부착한 작은 조명 하나에 의지해 한발자국씩 나아가는 하은.


“캬아악!”


뱀파이어 하나가 달려든다. 그녀의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온 뱀파이어들을 벌써 몇마리째 상대하고 있는건지. 흐려져가는 시야 속에서도 총을 날카롭게 조준한다. 픽,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뼈가 박살나며 널부러진다.


그때, 사각에서 한 마리가 더 달려든다. 총구를 돌리지만 느리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실수. 총이 그녀의 손에서 튕겨나간다. 달려드는 뱀파이어를 제지해야할 왼팔은 오래전에 잘려나갔다.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뱀파이어의 이빨이 그녀의 목에 닿는다.



-이젠, 정말 끝이다.



그러나 그것이 목을 물어뜯는 일은 없었다.



“합!”


남성의 기합 소리. 동시에 뱀파이어의 머리가 두개골째로 박살난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움직임으로 누군가가 순식간에 뱀파이어들을 처치한다.


“캬아악!”


달려드는 뱀파이어. 그러나 괴물보다 그의 움직임이 훨씬 빠르다.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공중에 있는 놈의 목덜미를 잡아 바닥에 머리부터 내려찍는다. 오래된 벽돌이 두개골 조각과 함께 산산조각난다. 그 뒤에 있는 뱀파이어의 복부에 깔끔하게 작렬하는 정권. 그의 주먹에 실린 초인적인 힘에 뱀파이어가 날아가 천장에 부딪힌다. 상황이 정리되자 그가 하은을 돌아본다.


그녀의 앞에 잊을 수 없는 남자가 나타나 있었다. 그가 실내용의 조명탄에 불을 붙여 바닥으로 던진다. 붉은 불빛에 그의 모습이 다시 확연하게 드러난다.


“왜…”


언제나와 같은 모습.


하은의 앞에는, 류 국장이 서있었다.


“말을 하는 걸 보니 멀쩡하군.”


그가 언제나와 같은 무감정한 말투로 말을 건넨다. 처음에 느껴졌던 무감정한 시선의 정체는 그였던 것이다. 하은이 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우려 이미 그럴 힘 조차 없다. 여기서 당할 수는-



그럴수가.



너무나 오랜만에, 하은이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류 국장의 뒤에 선 너무나 익숙한 형상.



교관The Man.



류 국장을 향해 달려드는 두 마리의 뱀파이어. 류 국장이 가볍게 한놈을 빗겨내며 그 목을 잡아 바닥에 내려친다. 그것과 정확하게 똑같이 행동하는 교관의 모습. 또 하나의 뱀파이어를 향해 낮게 접근하는 그. 뱀파이어의 손톱이 그에게 닿기 전, 관성을 무시하는 움직임으로 그가 즉각 멈춰서 한쪽 다리를 축으로 회전한다. 그의 주먹에 뱀파이어의 머리가 터져나간다. 물리 법칙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움직임, 인간을 한참이나 초월한 근력과 내구력. 교관의 비현실적인 움직임을 그가 재현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제서야 깨닫는다. 류 국장이 단 한번 보여주었던 인간을 한참이나 초월한 속도와 민첩성. 그것은 하이퍼테크 디바이스의 힘을 빌린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 역시 하은처럼 교관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당신이?”


“이상한가?”


그가 담담하게 말한다.


“대체 그럼 왜…?”


너무나 많은 것을 담은 질문. 대체 왜 자신의 오리지널을 네판디로 만들어버린 것인지, 유니언이 둘로 갈라져버릴 정도의 정보를 없애지 않고 숨겨놓은 것인지, 그러면서도 왜 자신을 쫓아온 것인지. 그러나 대답 대신 어둠 속을 노려보는 그. 하은도 무시무시한 파괴 그 자체가 이곳을 잠식하는 것을 느낀다. 서향이 그녀를 쫓고 있었다.


“원래 저 운명은 네 것이었다.”


그가 짤막하게 말한다.


“세계를 멸망시킬 것으로 운명 지어져 태어났지만, 동시에 그것을 막을 운명도 부여받았지.”


도저히 그라고 생각할 수 없는 말. 고도로 훈련 받은 NWO의 요원이라면 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비현실 적이다.


“그래서…”


“그렇다. 전자의 운명은 네 오리지널에게, 그리고 후자는 네게 남겨졌다.”


그가 무심하게 말한다.


“나는 마법을 부릴수도, 운명을 뒤틀 수도 없다. 테크노크라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명의 노하은을 만드는 것밖에 없었지.”


“당신이 운명 같은 것을 믿을리가 없어.”


“그렇다.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예측과 계획을 믿지.”


“그럼 처음부터?”


그가 고개를 천천히 흔든다.


“이 일은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나는 단지 그 계획의 실행자일 뿐.”


그가 조용히 말하며 그녀에게 등을 돌린다. 류 국장의 옆에 선 교관의 형상도.


“이곳에서 시간을 끄는 것 역시 나의 역할이다.”


하은이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혼란스러웠다. 여기에 자신이 있는 것이 스스로의 의지 때문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안배해 놓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그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의지만으로도 압도될 것 같다. 그의 힘은 철저한 훈련이나 경험, 또는 그의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맹신적인 의지, 그것이었다.


“고대의 것을 다루는 것이 괴물의 이유여서는 안된다.”


괴물Supernatural의 이유.


힘, 미래, 그리고 현실에 대한 테크노크랏과 현실교란자들의 욕망.


피와 그 피에 담긴 무한한 힘에 대한 흡혈귀들의 갈망.


부정한 것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수호자들의 갈망.


그런 오만함이야말로 세계를 파괴하고 인류를 절멸 시켜버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유라면 괜찮겠지.”


하은의 마음과 후회를 꿰뚫어보는 듯한 말.


그녀가 간신히 마음을 추스리며 묻는다.


“그럼… 누가?”


“그것이 중요한가?”


그가 간결하게 묻는다. 진실을 파헤치는 것과 후회를 지우는 것. 그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느냐라는 질문. 하은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다.


“가라.”


그의 말은 그것 뿐이었다. 하은이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어떻겐가 걸어간다. 류 국장이 어둠 속을 바라본다. 지금의 그라도, 파괴 그 자체Wyrm가 깃든 서향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을 끌 수는 있다. 그의 맹신적인 의지에 기대어.




그레인저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하은의 기억에서 본 옛 문자들이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이곳까지 하은을 쫓아들어온 뱀파이어들이 여기저기 파괴된 채 널부러져 있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뱀파이어들 중 일부는 관절만 부서진채로 무력화 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총탄을 아끼려는 듯. 반면에 다른 뱀파이어들은 아예 형상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박살나 있거나, 초인적인 힘에 의해 강타 당해 몸 곳곳이 부서져있었다. 전투 방법이 전혀 다른 개체가 최소 셋은 이곳을 지나갔다는 뜻이다.


“-윽.”


멀리서 낮은 신음이 들려온다. 그레인저가 클론 요원들과 함께 발걸음을 재촉한다. 드디어 그들이 빛이 밝혀진, 널찍한 방 안으로 들어선다.


그 안의 광경은 처참했다.


수없이 많은 뱀파이어들이 사지가 분리된채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모래벽돌로 만들어진 벽은 시뻘겋게 피칠갑이 된 채였다. 메스꺼운 뱀파이어의 피가 바닥의 모래와 엉겨붙어 기분 나쁜 슬래그가 되어 흐른다. 그 한가운데 익숙한 형상이 있다. 그리고, 그녀보다 더욱 익숙한 남자가 한명 더 있다.


“캐서린!”


그레인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린다. 서향이 손을 거두자 류 국장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정말 그인 것을 확인한 그레인저의 시선이 이내 서향에게 고정된다.


“...그레인저 감독관.”


방에 들이닥친 그레인저를 보며 서향이 웃음을 흘린다.


“내가 죽이고 싶었던 세 사람이 오늘 여기 다 나타나다니, 운이 좋은가봐.”


망설임 없이 손을 뻗는 그녀. 클론 중 하나가 공간의 왜곡에 휘말려 산산조각난다. 피와 내장이 사방으로 튄다. 클론들이 흩어져 사격을 가한다. 그레인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서향의 힘에 모조리 막히는 투사체들. 클론 중 한 명이 공간의 왜곡을 피하며 서향에게 달려든다. 쏟아지는 탄막을 튕겨내는데 집중하는 서향. 그녀의 사각으로 뛰어드는 클론. 그러나 그녀를 보호하듯 그녀 주위의 공간이 왜곡된다. 왜곡에 휘말린 클론이 허공에 붕 뜨며 튕겨나간다.


“직접 조종하고 있는거 모를 줄 알아?”


서향이 비명 지르듯 외친다. 일반적인 클론이라면 서향의 현실교란적 힘을 피하기 위해 엄폐물을 찾아 사격하며 천천히 포위망을 조여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야 화력 부족으로 하나씩 수가 줄어들 뿐. 그레인저가 직접 조종하지 않고서야 저런식으로 한번에 그녀의 방어를 뚫을 수 있는 무모한 행동이 나올리가 없다.


“나도 테크노크라시의 일원이었다고! 그 정도는 알아!”


그녀의 절규와 함께 사이킥 비명이 울려퍼진다. 그레인저를 향해 내뻗어지는 손. 튕겨나간 클론이 다시 서향을 향해 달려든다. 그 손에 들린 나이프가 서향에게 내질러진다.


“헉-”


그레인저가 숨막히는 표정을 짓는다. 그녀가 목을 부여잡는다. 서향의 힘에 잡혀버린 것이다. 동시에 클론들의 움직임도 멈춘다. 서향의 옆구리를 꿰뚫어버릴 수 있는 위치에서 정지하는 클론. 서향의 손짓에 그레인저가 그녀 앞으로 끌려온다. 귀에 달린 작은 귀걸이.


“뇌파 번역기네?”


서향이 귀엽다는 듯 미소지으며 손을 꽉, 쥔다. 그러자 그레인저의 귀에 달린 목걸이가 부서진다. 신호를 받지 못한 클론들이 대기모드로 전환하는 듯, 축, 하고 쳐진다.


“자율형 클론을 데려왔어야지. 그렇게 자신있는 것도 아니었잖아? 아니면 밖에서 다 죽어서 그런가?”


이제 방어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그녀의 몸을 감싼 공간의 왜곡이 사라진다. 그녀가 서서히 손아귀를 조여온다. 그레인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방어에 집중하던 힘으로 그녀의 내장을 하나씩 부숴가고 있는 것이다.


“말이라도 할 수 있으면 명령이라도 내릴텐데.”


조롱하는 듯한 서향의 말. 그러나 그레인저는 간신히 숨을 몰아쉴 뿐이다. 입술 사이로 피가 새어나온다.


“그럼 어떻게-”


순간, 서향이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자신의 힘에 잡혀 있는 여성의 외모. 그레인저와 닮았지만 살짝 다르다. 목을 부여잡고 있긴 하지만 고통의 표정도 약하다.


결정적으로, 의수가 없다.


“무-”



푹.



그녀의 옆으로 달려들었던, 클론, 아니, 클론이라 생각했던 자의 팔에서 카본 블레이드가 튀어나와 서향의 옆구리를 꿰뚫는다. 지체하지 않고 블레이드를 안에서부터 휘둘러 상반신을 찢어낸다. 심장이 터져나가고, 서향의 몸안에 있는 피가 순식간에 뿜어져나온다. 카본 블레이드가 다시 한번 휘둘러져 그녀의 목을 벤다.


그녀의 몸을 지탱하던 현실교란적 힘이 사라진다.


허무하게,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매캐한 철의 냄새를 풍기는 피의 바다. 그 위에 쓰러진 그녀의 몸에는 핏기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


클론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그레인저가 가발을 벗는다. 피에 젖은 더티 블론드의 짧은 머리가 나타난다.


“류 국장.”


그녀가 황급히 그에게 달려간다. 의사는 아니었지만 그녀도 어느정도의 의료지식은 있다.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노하은은 어디있지?”


그의 시선이 반대편의 어두운 통로를 향한다.


“그 목적을 다해야 하는 곳으로 갔다.”


그가 흔들림 없이 말한다. 죽어가는 사람의 말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가 자신을 받쳐든 그레인저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는다. 그답지 않은 행동. 외상은 없다. 그렇다면 서향이 내장을 하나씩 부숴버렸다는 이야기겠지.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다. 우리 둘 다 의무를 다했다.”


“무슨 말이야? 에페메라 작전이란 뭐지? 누가 입안한거지? 난 진상을 알아야겠어!”


그녀의 말. 그러나 류 국장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자세로 대답한다.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아포칼립스 시나리오를 막기 위한-”


“누가 입안한거냔 말이야!”


“...”


류 국장의 입가에서 피가 흐른다. 그의 몸상태를 볼때 말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일이다.


“안되겠네. 일단 나가서-”


“대략 20년 전의 일이다.”


그가 그레인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한다.


“우리가 이제 막 신참 요원이 되었을 때, 그리고 아직 어른도 아니었을때의 일이지.”


“감상적인-”


“이너 서클에 소속된 요원이 탈주하는 사건이 있었다. 내가 모셨던 분이지.”


그레인저의 눈이 크게 뜨인다.


이너 서클.


테크노크라시의 타임 테이블을 결정하는, 다시 말해 전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들. 류 국장이 도달한 위치보다 훨씬,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높은 위치. 그런 위치에 있는 자가 탈주했다니?


“거기에 그는 자신이 포획한 오라클 급 현실교란자와 함께 탈주했다. 그런 스캔들은 기록에 없는게 당연한 일...이지.”


오라클. 국지적인 현실의 파괴는 물론이요 아포칼립스급 시나리오를 촉발시킬 수 있을 만한 강력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패러독스로 인해 현실에 발을 쉬이 들이지 못하는 의지 행사자들. 이너 서클의 요원과 오라클이 엮이다니. 테크노크라트의 입장에서는 이단, 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을 정도의 일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레인저가 오메가급 권한을 행사하던 AI의 모습을 떠올린다. 이제야 모든 일이 어떻게 된건지 알 것 같았다.


“이너 서클에 속한 요원이라면 이런 걸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겠지.”


“잘못 생각하고 있군.”


류 국장이 아주 희미한 표정을 띄운다.


“이 일은 그 분이 아니라, 모두 그녀가 시작한 일이야.”


“그녀?”


“그래. 그와 같이 탈주한 것은, 여성이었다.”


그레인저가 입을 다문다. 포획되었다는 것은, 일부러 잡혀준 것일까. 그레인저가 허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놀아났다, 라고 하기에는 그 의도가 어처구니 없이 큰 규모인데다가, 너무나 숭고하면서도 오만하다.


류 국장이 허공을 쳐다본다.


교관의 모습이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인류 전체를 지키고자 하는, 인류 전체의 통합적인 의지. 질서와 안전의 화신. 교관의 가호를 받는 자, 노하은을 보았을 때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오래전 자신이 모셨던 요원의 딸이 그녀임을.


“왜 그렇게 복잡한 일을 꾸민거지? 그냥 이곳을 발굴해 없애버리면 되는-”


그녀가 말꼬리를 흐린다.


그럴리가 없다.


저 안에 무엇이 잠들어있든, 테크노크라시는 그것을 가만히 놔두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그것으로 더욱 빠르게 괴물들을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의지 행사자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가장 큰 적Hubris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 테크노크라시도, 트래디션도, 그 어떤 세력도 아닌… 철저하게 개인인 자에게 맡겨야 했다.”


“...그럼 왜 나에게 작전을 인계한거지?”


“그것은 네가 지나치게 용감하기 때문이지.”


간결한 대답에 그레인저가 허탈하게 웃는다. 결국 진상은 땅 밑에 묻혀버릴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알아낸 진상도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몇천년전 무너진 문명들이 없었다면 현대인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겠지만, 결국 현대인에게는 그 중요성이 피부로 느껴질 일이 없다. 그것과 같은 이치다.


“몸을 피해라. 유니언의 폭격이 곧 닥쳐올거다. 나까지 구하려다간 너까지 파묻힐거야.”


그가 손을 뗀다. 그레인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채 일어나 달려나간다. 그녀가 살짝, 뒤를 돌아본다.


류 국장은 사라져 있었다.


피바다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는 것처럼.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그나마 멀쩡한 한쪽 무릎을 꿇는다. 하은이 마침내 빛이 밝혀져 있는 방에 도달한다.


이곳이다.


아무것도 없는 복도의 끝에 있는, 오래된 글자들이 새겨진 벽으로 둘러싸인 공동. 붉은 글씨로 된 고대의 비문이 심장을 죄여오는 듯 하다. 읽지 못한다 해도 그 비문에 담겨있는 절망과 저주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절규의 끝에 도달한 영겁의 고통까지도.


그 방 한가운데에 노인이 앉아있다. 그가 태연하게 하은에게 말을 건넨다. 그 언어는 하은이 알지 못하는 언어였다. 그럼에도 섭리를 읽는 그녀의 마음 속에 그의 뜻이 울린다.


“어서 오시게.”


하은이 방을 둘러본다. 그 빛은 노인이 들고 있는 꺼져가는 횃불에서 새어나오는 것이었다. 그가 횃불을 내려놓는다. 꺼져가면서도 마치 영원히 탈 것 같은 느낌의 횃불이 그의 모습을 비춘다. 형형한 눈빛과 섬뜩할 정도로 흰 백발.


“내 이름은 자발Jabal, 시종의 장이라네.”


하은이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아직 몸에서 멀쩡한 근육과 관절을 떠올린다. 어색하지만, 어떻게든 걸을수는 있다. 그러나 응급처치가 없다면 기껏해야 몇시간 내에 죽고 말 것이다.


“당신은…”


하은이 그의 정체를 바로 꿰뚫어본다. 충혈된 눈. 처진 피부 위로 튀어나온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발달된 근육. 새빨간 입술. 그리고 옛 기운까지.


“구울이군요.”


“그렇다네. 나는 처음 오신 그 분의 종으로서, 그 분의 피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지.”


하은이 그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본다. 낡아 부서지기 시작한 제단 위에 올려진 나무컵. 어찌나 오래되었는지 지금은 멸종한 나무로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은이 그것으로 다가간다.


그 안에는,


붉은,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진하고 붉은 피가 담겨 있었다.


이제서야 이해한다.


처음 오신 그 분Caine, 이라는 말. 진정한 죽음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는 뱀파이어를 깨울만한 강력한 피. 이 세계의 모든 흡혈귀들을 폭주시킬만큼 진한 피.


“이해했군.”


최초의 뱀파이어의 피.


“...”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 생명이 위협받아 느끼는 공포가 아닌,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척추를 타고 오른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며 인간의 영역을 한참이나 벗어난 유물.


“이걸… 내가…”


그녀가 말을 끝내지 못한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문득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알아차린다. 폭우가 쏟아지던 그 날. 도서관에서 나가지 않고 그냥 계속 공부를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래도 어떻겐가 엮여서 이곳까지 왔을까. 자신의 운명을 가른 것이 겨우 도서관에서 나서냐 마냐, 라는 작은 결정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허망해진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기억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그녀는 그 일을 겪은적이 없다. 오리지널의 기억일 뿐. 그녀가 민려에게 후회의 감정을 가질 이유도 없다. 그녀와 그녀의 오리지널은 다른 존재다. 만약 하은이 아니라, 오리지널이 그날의 싸움에서 이겼다면? 그럼 서향이 할 일을 하은의 오리지널이 대신하고 있을까.


하은이 피를 들여다본다.


느낄 수 있다.


이 피의 주인은 첫번째 흡혈귀이기도 하지만, 첫번째 의지 행사자Will Worker이기도 했음을. 이 피에 담긴 것은 단순한 흡혈귀의 피가 아니다. 진리가 여러개로 갈라졌을 때, 세계에 살아있는 인간의 수를 손으로 셀 수 있을 때와 이어져있는 그 무언가. 자연적으로 정해진 섭리를 억지로 꺾어버린 최초의 인간. 그의 흔적이 그녀의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주인님께서는 오랜 시간 그분의 후손들을 지켜보셨다네.”


노인의 말은 깊다.


“나는 그 분의 옆에서 그 후손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왔다네.”


그가 조용히, 타이르듯 말한다.


“인간을 위해 덧없이 목숨을 던지는 자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가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피의 구속 없이도 인간이 혈족을 구하기 위해 이런 곳 까지 찾아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군.”


“그건 어떻게?”


하은이 간신히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그 분들은 후손의 눈을 통해 모든 것을 보신다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인간의 몸으로 괴물들의 세계 깊숙한 곳에 몸담은 그들.


그녀가 다시 잔 안을 쳐다본다.


“...되돌릴 수 있을까요?”


“이 세계에 마지막 남아있는 저주 중 하나라네. 인간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것으로 치면 거의 유일하고.”


그가 한숨 쉬듯 말한다.


“무엇을 하고 싶던, 그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방법도 없겠지.”


그녀가 한 손으로 무너져가는 자신의 몸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간신히 그 잔을 쥔다.


“뱀파이어의 피를 마시는 자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겠지?”


하은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구울. 주인인 뱀파이어의 의지에 철저하게 종속된 자.


후회를 지우기 위해, 자기 자신까지 지울 수 있는가?


발목을 잡는건 네판디도, 테크노크라틱 유니언도, 뱀파이어도, 다른 괴물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


그 뿐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도망다녀야 하겠죠.”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저주, 신화의 마지막 흔적. 그녀는 그 마지막 흔적이 지워지는 날까지 피를 쫓는 자들에게서 도망다녀야 할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고 자신을 숨겨야하리라.



이제는 무언가를 풀어내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이 풀려야할 무엇인가로 화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지우면서,


동시에 자신의 가능성, 그 끝에 달한다.



그렇기에 그녀는 망설임을 버린다. 그 순간 지축을 울리는 충격이 방을 흔든다. 테크노크라틱 유니언이 폭격을 개시한 것이다. 이 도시와, 그 밑에 잠든 모든 것을 파묻어버리기 위해.


그러나 하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천천히 잔에 입을 댄다.


진한 피.


목을 불태우는 듯한 뜨거움. 고대의 기억이 밀려들어온다. 온 몸을 불태우는 듯한 열기가 퍼져나간다.



그녀가,


-무언가 다른 것이 된다.



동시에 모든 것이 무너진다. 붉은 저주의 비문도, 수천년간 그 피를 지키던 늙은 구울도, 피가 놓여있던 제단도, 지하에 잠들어있던 고대의 유산까지 그 모든 것이.




“삐익.”


연합 아말감의 기지, 그레인저의 방.


모니터가 제멋대로 켜진다. 홀로그램이 나타나 방 안을 둘러본다. 그의 옆에서 엄청난 속도로 정보가 스쳐지나간다. 위성사진, 인터셉트된 통신 내용, 언론 보도, SNS, 지진파 정보, 군 통신망, 심지어는 대기 정보나 황색 잡지까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까지 스쳐지나간다.


“다 되었군.”


마치 사람처럼 독백하는 AI. 정보의 흐름이 멈춘다.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정보 사이에서 법칙을 읽는다. 마치 퍼즐을 풀어내듯 불완전한 정보 사이를 잇고, 제일 확률이 높은 상황을 예측한다. 익숙하지 않은 자가 보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풀어낸다. 단서, 힌트, 정보, 지식을 통해.


그가 원하는대로 되었다. 아니-



-맞아요. 다 되었어요.



목소리가 울린다. 아니, 목소리가 아니라 그 뜻이 울린다. 목소리는 인간이 그 뜻을 받아들이는 수단일 뿐. 그녀가 원하는대로 되었다. 모든 것이.


형상이 나타난다. 그 형상에는, 구체성이라고는 전혀 없다.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형상 섭리 그 자체를 체화한 무엇인가가 있을 뿐. 그 안에서 이데아라고 부를 법한 것들이 휘몰아친다. 모성애, 지혜, 안타까움, 안도감, 그 뿐만이 아니라 오만함까지도.


AI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이름은 바꾸지 않았더군.”



무형의 형상이 수긍한다.



“딸 아이에겐 미안할 뿐이군.”



-괜찮아요.



목소리가 아닌 위로 그 자체가 방 안에 퍼져나간다. 자연어에서 기계어로 흐르는 번역처리조차도 필요없다. 개념 그 자체의 전달.



“이제 사라질때가 되었소.”



-안녕, 내 사랑.



동시에 두 존재가 사라진다.


하나는 죽어서도 그 의지와 치밀한 계획이 영원히 계속되는 전설로서,


다른 하나는 섭리 그 자체가 되어.


그 둘이 섞인 무언가를 이 세상에 남기고.




[에필로그]




“...”


그레인저가 겨울에 휩싸인 도시를 내려다본다.


불황이 가라앉지 않은 인간의 세계. 폭력과 광기가 지배하는 세계.


내전은 누구의 승리도 없이 끝났다. NWO, 신디케이트, 다른 컨벤션, 심지어 그 기회를 노리던 트래디션이나 다른 괴물들까지 모두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체제는 변했으며 현실은 삐걱대고 있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던 모든 자가 현실에 삼켜질뻔 했다.


그러나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다.


단지 변했을 뿐.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경제, 정치, 군사, 법, 통신, 교통, 그 모든 일상적인 분야에서 잿더미 위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세워진다. 괴물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너지는 카마릴라를 대신할 무엇인가가 등장하고, 세계의 파멸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트래디션도 새로이 재편되었다. 그것은 테크노크라틱 유니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감독관님. 44번 채널로 전환바랍니다. 14번 시나리오 발생.]


[C조 대기시키세요.]


[네.]


그레인저의 눈 안에서 나노머신들이 재배열 되며 그녀의 시력을 증강시킨다. 몇배나 또렷해진 상이 그녀의 망막에 맺힌다.


[B조도.]


그녀가 현장에 나가 있는 클론 부대에 원격신경망을 연결한다. 오늘도 희생자가 좀 나올 모양이었다.


[돌입 준비.]


그녀의 시각에 제일 먼저 돌입하는 클론의 시야가 덧씌워진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안쪽으로 박살나는 것이 보인다. 시퍼런 플라즈마 샷건 쉘이 불을 뿜는다. 괴물들이 달려든다.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서로의 욕망을 짓눌러버리기 위해.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비극, 욕망, 편견, 그리고 어둠에 휩싸인 세계.


그것뿐이었다.




헤어날 수 없는 깊음.


그리움.


단지 희미한 그리움만이 자아를 유지해 줄 뿐.


한발자국만 나아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그리움에 나아가지 않을뿐.


하지만 이제 그 그리움마저 희미해져간다. 이제, 언제라도-



아.




붉은 짙음이 눈 앞에 퍼져나간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감각.


입술에 진한 무언가가 흐른다.


죽어버린 몸에 따뜻함이 퍼져나간다.



아.



신음을 낸다.



“내가 구해주겠다고 했죠?”



그리운 목소리가 들린다.



“-아가씨.”



얼마만인가. 그리움이 감정이 되고, 감정이 온 몸을 뒤흔든다. 천천히 눈이 뜨인다. 대체 얼마만일까. 민려가 손을 뻗는다. 반 정도 없어졌었던 그녀의 몸은 원래대로 돌아와있었다. 창백한 피부 밑으로 붉은 기운이 흐른다. 저주받은 불사의 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손을 뻗어 그리운 그녀를 찾는다. 그러나-


“아가씨?”


다시 한번 간신히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다녀갔다는 희미한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 그것도 일부러, 아니, 남겨야 하기 때문에 남긴 흔적일 뿐.


“정말이었구나.”


그녀가 입술을 핥는다. 따뜻함이 느껴진다.


“...고마워요.”


그녀가 어둠 속에서 작게 중얼거린다.


어둠 속에 묻혀 버릴 정도로, 작게.




完.




=====

완결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소설의 프로토타입 격 되는 글을 쓴게 2년 전이니 2년 만에 완결내는 소설이네요. 메이지 홍보용 쓴 글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랐습니다. 메이지 이야기는 보통 거대 담론으로 이어지는데, 개별 메이지 이야기도 그만큼 흥미롭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쓴 글입니다. 머리는 좀 아팠지만 다행스럽게도 즐겁게 쓸 수 있었습니다.


원래 완결이 아니라 하은이 부모 관련 외전을 쓰고 싶었는데 생각이 반반입니다. 반드시 필요할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부분은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요. 일종의 토끼발이기도 하고.


외전 쓰는 중!


원래는 지금보다 분량이 30편 정도 길었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제가 힘이 빠질 것 같아 계획해 놓은 일부의 에피소드를 뺐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빠졌습니다.


트래디션-테크노크라시가 역전된 세계

비극으로 끝난 휴가

사람의 몸으로 돌아온 후 카발 하나를 이끄는 이야기

쓰렛널 이야기 후속편

퍼펙트 메티스 이야기 (고아/예언편에서 BSD가 말한 “낳아 줘야 할 것” 과 관련된 이야기인데, 이 부분은 이 편을 쓰기 전에 계획해놓고 있다가 그냥 쓰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이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면 이세연이 성인으로 나왔을겁니다. 위의 퍼펙트 메티스 이야기를 썼으면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가루우의 비중이 훨씬 높았을텐데, 제가 가루우 전문가가 아니라 접었습니다.)

백사장 과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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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작품/비주얼 오마쥬


배트맨/배트맨 비욘드

빅 오

공각기동대 (이노센스)

에이전트 오브 쉴드

총몽

판옵티콘 (메이지 팬픽)


이국종 교수 관련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사이코

몰락 (영화)

1984 (책, 영화)

이반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양철북

스페이드 퀸

단테의 신곡

거울 나라의 앨리스

변신

변신 이야기 (및 그리스 신화)

두 도시 이야기 (제목만..)



메이지 관련 서플리먼트 거의 전권 (일부 트래디션 북 제외)

글래스워커 트라이브 북

랫킨

킨드레드 오브 이스트

북 오브 웜

북 오브 위버

타임 오브 저지먼트(메이지)

프릭 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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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익, 하는 소리가 캐시의 예민한 귀를 울린다. 호버-밴의 바닥에 매달려있는 그녀가 왼쪽의 사이버네틱 아이로 지상과 건물 사이의 브릿지 플로어들을 훑는다. 공중마저 부동산으로 쓰기 위해 건물 사이를 잇는 다리를 놓고 그 공간을 임대해주는 것은 꽤나 흔한 광경이 되었다. 그런 공간을 언젠가부터 브릿지 플로어로 부르곤 했다.


물론 부실공사로 인해 입주민 전체가 추락사하는 경우도 있기에 임대료는 싼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에 그 임대료 이상을 감당할 수 없는 빈민들 만이 그런 곳에 살곤 했다. 당연히 그들은 연결된 건물의 시설 사용에 제한을 받곤 했다. 캐시도 한때 그런 곳에 살았다.


“찾았다.”


그녀의 눈을 대신하고 있는 기계장치가 그의 목표를 포착한다. 실시간으로 목표에 사선이 겹쳐지며 거리와 방향이 초록색의 딱딱한 폰트로 망막 디스플레이에 표시된다. 그나마 좀 깔끔한 플로어에 지어진 집창촌.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음란한 색의 이미지들이 번쩍인다.


“...으엑.”


그녀가 토하는 시늉을 한다. 안드로이드 창녀촌을 운영하는 포주라니. 포착했으면 이제는 분석할 때다. 그녀가 의안의 추적기능을 꺼버리고 다른 쪽의 눈을 뜬다.


마법으로 강화된 눈. 그녀의 눈으로 흘러들어가는 피. 단순한 피가 아니라 그녀의 마나 글랜드에서 뿜어져나오는 아케인 호르몬 -아마도 요정의 날개를 갈아서 만들었다던가 하는- 이 섞인 피다. 그녀의 동공이 시퍼렇게 빛나며 그녀의 목표에 고정된다.


“자, 가볼까.”


그녀가 가볍게 호버-카의 바닥에서 손을 뗀다. 덜컹거리는 호버-카. 아마 운전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애꿎은 자기 차를 욕하고 있을걸 생각하니 어쩐지 즐거워진다. 캐시는 항상 화려한 스타일을 선호한다.


등에서 옆집 드워프 아저씨가 어릴때 만들어준 스팀펑크 스타일의 자동 석궁을 꺼낸다. 한손으로도 장전할 수 있고, 필요시에는 마법이 부여된 소각탄이나 퇴마탄 같은 것도 쏠 수 있다. 후자는 캐시 같이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다른 쪽 팔은 하이테크 의수다. 의수가 전개되며 불법 개조한 CTARK-44 기관단총으로 변형된다. 개같은 메가콥 요원들에게 걸리면 바로 팔이 잘려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등에서 강제로 이식한 거대한 박쥐의 날개가 펼쳐진다. 빌어먹을 놈의 스플라이서가 개판으로 수술을 해놓은 탓인지 날개를 펼치는 순간 왼쪽으로 방향이 틀어지곤 한다. 거기에 마법으로 거대화해놓은 날개라 가끔 지 멋대로 움직이곤 했다.


뭐, 상관없다.


그녀가 목표 위로 날아든다.


“쾅!”


동시에 자동 석궁에서 쏘아진 폭발탄이 폭발을 일으킨다. 그녀의 목표는 꽤나 덩치가 컸다.


“죽어 죽어 죽어!”


그녀가 외치며 기관단총을 난사한다. 음란한 춤을 추던 안드로이드들의 관절이 관통되며 쓰러진다. 그 상태에서도 계속 춤을 추려하는 안드로이드들의 우스운 모습. 그녀의 목표가 코트를 집어던진다.


“이런 씹-”


그녀가 욕설을 내뱉으며 위로 날아오른다. 코트가 아니라 마법으로 위장한 그물이었던 모양이다. 순식간에 모양이 변하며 그녀를 덮치는 그물. 간신히 피해낸다.


“탕!”


대구경 리볼버. 좆됐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저런 무기에 맞았다가는 의수라도 박살날 것이다. 어쩌면 손해보는 의뢰를 맡은게 아닌가 싶다.


“탕!”


다시 한번. 상대는 덩치가 크다. 공중에 있으면 엄폐를 할 수가 없다. 그녀가 이판사판으로 폭발탄과 기관단총을 쏘아내며 그에게 달려든다. 그녀가 마나가 충전된 눈에서 시퍼런 빛을 뿜어낸다.


“탕!”


대구경 탄환과 빛이 교차한다. 그녀가 민첩한 동작으로 목표의 머리위에서, 곡선형으로 하강하며 목표의 뒤를 노린다.


-철컥.


그의 총구가 캐시의 이마에 닿는다. 캐시의 기관단총이 그의 얼굴을 노리고 석궁이 그의 가랑이 사이를 노린다. 그녀의 날개가 일으킨 바람에 그의 모자가 휘날린다.


“거길 쏴봐야 다시 자라는데.”


그가 석궁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씹.”


캐시가 욕설을 내뱉는다. 자신의 앞에 서있는 건 큰 덩치의 트롤이다. 그의 근육이 씰룩거리며 캐시를 위협한다.


“당신, 트롤 맞지? 트롤로 위장한 인간 아니고?”


“그렇지.”


그가 정중하게 대답한다.


“...니미.”


캐시가 또다시 욕설을 내뱉으며 무기를 거둔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같은 목표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캐시가 자신의 정보원을 조져놓으리라고 단단히 다짐하며 뒤로 물러선다. 그녀의 성격 때문인지 그녀와 일하는 정보원은 항상 얼마 지나지않아 떨어져나가곤 했다.


“재주가 많은 모양인데?”


그가 입술 위로 튀어나온 아랫니가 무색하게 중후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묻는다.


“맞긴 맞는데, 운이 없네.”


“그런가? 마침 난 그 반대지. 손을 잡지 않겠나?”


“난 100대 0 아니면-”


그 순간 캐시의 익명 계정으로 메시지가 날아온다. 사이버네틱스 면역 억제제에 대한 대금 청구서다. 그것도 아슬아슬한 금액이다.


“...알았어.”


그녀가 작은 손을 내민다. 트롤은 자신의 손 대신 검지 손가락 하나만을 내민다. 그 정도로도 그녀의 손을 꽉 채우고도 남는다.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다리가 사라진채 바닥에서 스트립쇼를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를 보며 웃는다.


“그럼 34가에서 만나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자신의 코트를 회수한다. 역시나 마법이 다중으로 걸려있는지 그의 덩치를 훨씬 작게 보이게 하는 물건인 듯 했다. 그가 경비원들이 달려오기도 전에 사라진다. 캐시도 브릿지 플로어에서 뛰어내린다.


그녀의 시야에 온갖 것들이 들어온다.


전신을 개조한 사이보그, 공사현장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언데드 인부, 그들을 착취하는 뱀파이어들, 시뻘건 눈을 하고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공격하는 오염된 비둘기들, 입에 들어가선 안될 것을 억지로 삼키며 하루 하루를 연명하는 빈민들, 강화 플라스틱 방패를 들고 테슬라 코일로 충전된 검을 휘두르는 성전사들.


그런 가운데 캐시의 모습 정도는 보통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호버-카들의 행렬 사이로 사라져버린다.



서기 2162년.


기계와 마법이 생몸을 압도하는 세계.


생명이 저렴해진 세계.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버린 세계.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세계에서, 기묘한 인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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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갤에서 쓸 아이디로 써서 원글 삭제하고 재업~


현재 외전도 연재중이긴 하지만, 별 내용은 없습니다 ㅎ 그냥 설정구멍 채우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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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글 댓글


  • DED(119.149)

    피날레추(2)(완결)

    06.13 12:03:12
  • 다음작.

    06.13 12:09:19
  • 만야(175.125)

    진짜 고생하셨어요. 어디서도 못 본 느낌의 글이었음 딱딱한 느낌인데 뭐라하기 힘드네 암튼 외전이든 뭐든 다 좋으니 아무거나 써줘요.

    06.13 12:28:28
  • ㅇㅇ(116.33)

    완결추

    06.13 12:34:41
  • ㅇㅇ(175.196)

    그동안 고생했어요.

    06.13 12:45: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