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 오후다. 그리 늦지 않았음에도 벌써 어둑한 것은, 잔뜩 낀 구름 때문이다. 살짝 떨어지는 빗방울이 보라색 마법사의 어깨 위로 떨어진다.

그가 회색 폐공장 문을 열었다. 잔뜩 쌓였던 먼지가 흩날린다. 여기저기 무너진 공장 벽은 도색이 벗겨져 나가 회색 콘크리트 알몸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공중에 곰팡이 냄새가 비 내음과 함께 뒤섞여 상쾌한 느낌마저 든다. 건물 안에는 아무 인기척이 없다. 천장까지 우뚝 솟은 기둥이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다. 드문드문 깨진 창문에서 희미한 햇빛이 샌다. 보라법사가 그렇게 한참 건물 안을 살핀다.

"아휴, 그런다고 뭐가 나옵니까, 보라색 아저씨?"

뒤에서 칼리가 그를 살짝 밀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보라법사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 입을 벌렸지만, 말로 뱉지는 않았다. 그도 뒤이어 살짝 한숨을 쉬고 건물 안으로 들어온다. 지난번 만남 이후로 그녀와 수 번 합을 맞춰 보아 이젠 꽤 죽이 맞았지만, 근본적인 성격 차이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냥 이해하려 노력할 뿐.

"흐음... 분위기 하나는 괜찮긴 한데. 여기 확실한 거 맞아?"

칼리가 풍선껌을 씹으며 주변을 스윽 한 번 둘러본다. 숨을 한 번 들이키더니 검은 가죽조끼 매무새를 다듬고, 주황 장갑을 꽉 낀다.

"분석 결과를 따라온 것뿐이야."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거 아니고?"

그녀가 분주하게 이리저리 쏘아다닌다. 엎어져 있는 팻말을 뒤집어 읽다가, 어디에 쓰는 건지 도통 모를 기계를 만져봤다가, 깨진 창문 유리를 손가락을 뻗어 만져본다. 

"선배. 아무리 봐도 잘못짚었다니까. 이것 봐."

칼리가 더럽다는 표정으로 바닥에서 뒹구는 곰 인형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올린다. 잔뜩 때가 낀 인형은 여기저기 솜이 빠져나와 있다.

"곰돌이 만드는 공장에 나쁜 놈들이 있다고? 너무 안 어울리는데."

"나쁜 놈들이 아니라, 내 누나야."

"나쁜 짓 하면 나쁜 놈이지 뭘. 아, 그래. 놈이 아니라 년이라고 해야지. 괴물 납치나 하는 나쁜 년."

칼리가 보라법사를 뒤로 하고 공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분홍색 풍선이 부풀어 오른다. 공장 안으로 더 걸어가니 그나마 있던 빛도 희미하게 어둠 속에 묻힌다. 한 걸음 들어갈 때마다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러다 쇠로 된 문을 하나 마주친다. 칼리가 잔뜩 궁금하단 표정으로 손잡이를 돌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잠깐 멈춰 문을 꼼꼼히 살펴보자, 잔뜩 녹이 슨 문틈 사이로 솜덩이 같은 흰 것이 빠져나와 있다. 칼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한참 뒤에 있는 보라법사에게 외친다.

"선배! 여기 뭐 있는데?!"

공장 안에 칼리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옅은 진동이 울렸다. 창문들이 살짝 흔들렸고, 구멍 뚫린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워. 방금 뭐야?"

칼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틈으로 빠져나온 솜덩이를 쳐다본다. 껌을 씹는 것도 잊은 채로. 땅이 울려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눈앞에 솜덩이가 움직인 것만 같았다. 

"칼리! 아무거나 막 건들지 마. 아무래도 여기,"

솜이 한 번 더 꿈틀댄다. 이번엔 그게 움직이는 걸 똑똑히 보았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그것에 손을 가져간다. 

"뭔가 있는... 거... 같으니까..."

그것을 만지자, 갑자기 크게 부푼다. 공장 안에 쇠가 찌그러지는 소리와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린다. 그러다 그것을 가두고 있던 문이 결국 굉음을 내며 튕겨 나갔다. 칼리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한도를 모르고 계속 커지더니, 결국은 천장에 닿을 때까지 부풀어 올랐다. 뒤에서 주의를 주던 보라법사까지 적잖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

흰 것이 스스로 빙글 돌더니, 돌연 검은 눈코입이 나타난다. 잔뜩 뭉개져 알아보기 힘들지만, 개의 얼굴과 비슷하다. 게다가 하나뿐이 아니다. 양옆으로 하나씩 얼굴들이 자리를 잡더니 곧 군데군데 더 튀어나온다. 이윽고 다리와 꼬리로 보이는 것들 여러 개가 튀어나와 형체를 갖춘다. 그것이 아주 낮은 음으로 헥헥댄다. 위협적인 소리는 아니었지만, 듣기 좋지도 않다. 그 크기에 압도당한 칼리와 보라법사는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 음... 안녕, 괴물 친구?"

칼리가 더듬더듬 인사를 건넨다. 그러자, 흰 것이 대답이라도 하듯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귀청이 터져나갈 듯한 소리에 칼리가 중심을 잃고 휘청인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위험해. 휘청거리는 몸을 다잡고, 눈을 주황색으로 빛낸다. 새로 배운 걸 시험해 볼 기회였다.

"입으로 대화가 안 되면... 몸으로 해야지!"

오른손 주먹을 힘껏 쥐고, 자세를 낮춘다. 이어 온몸을 감싸는 주황빛을 모아 주먹 끝으로 정렬시킨다. 꽉 쥔 주먹이 마치 백열등처럼 환하게 타오르자, 가장 기본적인 공격인, 정권을 내질렀다.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온전한 전쟁기계 그 자체였다. 팔 전체가 포신이며, 주먹은 포문이다. 그 끝에서 파괴적인 주황색 불이 뿜어져 나왔다. 순수한 마력탄 한 발이 공기를 가르며 흰 것에 정면에 꽂힌다.

땅이 울리고, 사방에 먼지가 흩날린다. 그 엄청난 폭발음은 반경 몇 킬로미터까지 퍼졌을 테다. 칼리는 대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지도 않고, 두 번째 탄환을 장전한다. 확실히 한 방 더 집어넣을 작정이었다. 주문을 완료한 후, 숨을 가다듬으며 날카롭게 대상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마치 공간 자체가 깨진 듯 금이 간 모습이었다. 채널이 잡히지 않는 TV 화면처럼 치직대며, 깨진 컴퓨터 그래픽처럼 사방에 달린 얼굴들이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약간의 피해라도 있었을까? 아니, 아무런 상처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화를 돋웠을 뿐.

흰 것이 다시 울었다. 이전과는 다른 위협적인 저음이었다. 칼리가 약간 충격을 받은 듯 자리에 서서 흰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흰 것의 얼굴 중 하나와 눈이 마주친다. 그러자, 다른 모든 얼굴들도 칼리를 발견한다.

하지만 그것이 채 반응도 하기 전에, 보라법사가 마법 하나를 던져 넣는다. 그가 황급히 칼리의 뒷덜미를 잡고 끌어다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당황한 칼리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뭐... 뭐야 저거?"

"융합체야. 나도 보는 건 처음인데..."

"그게 뭔데!"

"여러 괴물이 하나로 합쳐진 거야."

"저딴 걸 어떻게 잡아?"

"못 잡아."

보라법사는 얼굴을 살짝 내밀어 융합체의 동태를 살핀다. 아직 자신의 마법에 맞아 혼란스러워하고 있지만, 곧 정신을 차릴 거였다.

"그럼 어떡해!"

"플렌 C로 가자."

"뭐...? 어... 그니까."

칼리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외운다.

"A가 훔치는 거고, B가 싸우는 거, 그럼 C는... 도망치는 거였던가?"

"아니."

보라법사가 자기도 웃긴 듯 피식 웃더니 말한다.

"친구 되는 거."




믿기지 않겠지만, 몇 번의 격한 쓰다듬과 몇 번의 활기 넘치는 놀아줌 이후에 그들은 친구가 됐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라법사를 뺀 칼리와 융합체가. 융합체는 아까보다 훨씬 작아진 몸집으로 칼리 앞에서 배를 뒤집고 헥헥거리고 있다.

"아이구, 우리 융융이!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칼리가 자기가 붙인 이상한 이름으로 융합체를 불렀다. 그녀는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 표정을 지으며 융합체의 배를 만지작거린다. 융합체는 다른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웠는지 그렇게나 놀아줬음에도 여전히 잔뜩 흥분해 있다.

"또 놀고 싶어? 그래! 이리 와! 언니가...! 아니. 누나인가? 어쨌든 한 번 더 하자!!!"

칼리가 융합체와 술래잡기라도 하듯 공장 안을 휩쓸고 다닌다. 눈을 주황색으로 빛내가면서. 이제는 누가 누구와 놀아 주는 건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보라법사는 그 모습을 보며 대단해 해야 하는 건지, 한심해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는 표정이었다. 뭐, 지금으로는 잘 된 일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 원래 융합체를 가두고 있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 무너진 벽 사이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위쪽 절반이 전부 내려앉은 책장이 있었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찌그러진 가구들이 나뒹굴었다. 유심히 방을 살펴보던 그가 바닥에 깔린 양탄자를 걷어냈다. 거기에 문이 하나 있었다. 문을 열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보라법사는 숨을 한 번 고른 뒤,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곳이다. 내려갈수록 점점 더 시야가 좁아졌다. 그러나 보라법사에게는 어둠을 두려워하는 본능적 두려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히려 그는 익숙했다. 그가 주저하지 않고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곤두세운 촉각과 경계를 유지한 채로. 이윽고 시야가 완전히 사라지자 주머니에서 알피스가 만들어 준 휴대폰을 꺼내 전등 기능을 켰다. 그의 눈앞에 거대한 기계가 낮은 소리로 웅웅대고 있었다. 그가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가 가다가, 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보라법사가 입을 연다.

"뭔가 찾았어. 샌즈. 좀 와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