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느 때 처럼 비는 내렸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동굴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보고서, 사내가 한숨을 짙게 내뱉었다.
생각 없이 걷던 게 화근이었나 하며 후회를 하기도 잠시. 그 갑갑한 폐허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나와 있었다는 사실이 보답이 되어 오히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웃으며 걸었을까. 쫓아오는 빗방울들을 피한답시고 사내가 발을 딛을 때 마다 바닥이 철퍽거리며 흙탕물이 튈 정도로 물이 고이자, 좀전의 낙천적이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지하라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하다. 땅 속에 있으면서도 멀쩡히 해가 뜨고, 별이 진다. 물론 지금처럼 동굴 안에서 비가 내리기도 했고.
신비로움이 기분의 상승과 직결되는 건 아니라서, 비에 온몸을 적시게 된 사내에게 지금의 신비로움은 끓기 시작하는 분노였다.
아직 이곳──워터폴은 햇살이 조금씩 들르긴 한다. 근처의 스노딘에선 젖어버린 옷을 말리기엔 충분할 정도로 햇살이 내린다. 그가 하루종일 처박혀 보내는 폐허는 전혀 그렇지 않고.
에봇 산의 구멍은 인간들에 의해 막혀버렸다. 빨래 하나 말리자고 지상과 연결된 게이트를 쓰는 것 만큼 미친 짓도 없을거고. 제대로 된 마법 하나 구사 못 하는 폐허 사람들로서는 모닥불이라도 피우는 수 밖에. 사내는 단순히 일상도 보장 받지 못 하는 폐허가 싫을 뿐이다.
그나마 빠르게 움직이는 게 최선이라며 발을 놀릴 때, 사내의 의식이 한 쪽으로 빨려들어갔다.
"……음?"
빗방울들이 거세게 연주하는 불협화음 속을 비집고 들어오며 퍼지는 멜로디. 어딘가 익숙한, 그러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드는 소리가 사내의 귓전을 맴돌았다.
사내는 이끌리듯 소리가 퍼지는 곳으로 다가갔다. 빗속에서 흐릿하게 형체를 유지하는 그것이 눈에 들어오더니──뚜렷해지며 다가왔다.
"이건……."
인간과 비슷한 형체의, 상반신만 잘린 듯 만들어놓은 석상. 머리 부근에 뿔 한 쌍을 붙여놓았고, 빛 바랜 붉은 색의 우산 하나가 엉성하게 씌워져 있었다. 석상 한가운데서 새어 나오는 소리──오르골의 음색이 맞물리며 위화감을 만들어 갔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그런 감각. 뭐, 그게 어쨌는가. 눈 앞에 간절히 바라던 게 있는데.
"운이 좋네."
석상에게서 우산을 뺏어든 사내의 얼굴에 웃음기가 어렸다.
우산을 쓴 사내의 발걸음이 멀어져가면서, 석상에게서 흘러나오던 오르골 소리도 천천히 작아져갔다.
스노딘의 초소에는 얼굴 한 번만 비추고 통과해 마을로 들어섰다.
'활기찬 눈의 마을'이란 이미지는 깨어진 지 오래. 돌아다니는 건 칙칙한 인상의 기관 소속 경비원들 뿐이다.
──몇년 전만 해도 저들 대신에 괴물들이 걸어다니고 있었을 텐데.
그 생각이 문제였을까. 기억이 되살아나며 사내의 시야를 과거로 덧칠해갔다. 새하얀 눈의 벌판, 그 위로 들어선 집들, 철자 틀린 도서관 간판, 그릴비의 가게, 뼈다귀 형제.
그 자신의 기억이 아니긴 했다만, 피어나는 아련함과 과거의 기억은 사내의 머릿속을 채우고──
"……젠장할."
짜증 섞인 사내의 말 한 마디에 눈 녹듯 사라졌다.
이건 분명 정신병이다. '그 녀석'과 계약한 이후로 생겨난, 아주 지독한 병.
'그 녀석'은 괴물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정한 뜻에서.
처음 녀석이 나타났을 때, 인간은 괴물이 결계를 뚫고 나왔다는 데에서 경악했다. 뒤이은 건 혼란. 결계를 뚫고 나온 괴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
그 때의 싸움 탓일까, 모두가 전쟁이라는 결말을 내 놓고 머리를 굴릴 때──녀석은 계약을 제시했다.
글쎄, 이 때의 인간들은 아마 전쟁에 지쳤나 보다. 해골 바가지인지 유령인지도 모를 녀석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 보면.
계약대로, 지하에는 사내를 포함한 몇 명이 남게 됐다. 정확히는──
"……아. 도착했나."
언제 이 만큼 걸어왔는지 폐허의 문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그나마 '그 녀석'과의 계약 이후로 좋은 점이 있다면, 그놈 욕 하다 보면 시간 하나는 잘 간다는 것. 지금처럼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을 때에 자주 쓰곤 했다.
드르륵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고, 축축한 가운에게서 벗어난다는 기대감에 떠밀린 사내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
에봇 산의 구멍이 있던 그 곳까지 다다르자 늘상 봐왔던 풍경들이 다시금 사내를 자극한다. 천장이며 바닥이며 폐허를 갈아 놓아 코어처럼 개조를 해 놓았다. 수십의 거대한 시험관이 여기가 창고인 마냥 균등히 나열되어있고, 벽에는 수백을 넘어서는 모니터들이 쉴 새 없이 그래프들을 그려가며 기계음을 냈다. 그 시험관 사이사이로 사내처럼 흰 가운을 입은 사람 몇몇이 돌아다닌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들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에 따라 사내의 기분도 나빠져 갔다. 녀석들도 '인간을 죽인' 괴물을 도와 연구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나보다. 그렇다고 그만두자니 계약의 건도 있고, 천성이 과학자라 결과에 눈길이 가고. 그러다 보니 저런 식으로 일하고 있는 거다.
"나 왔다."
"아, 소장님!"
적당히 인사랍시고 한 마디 던지니 또 다른 사내가 그를 반겼다.
그 목소리에 반응한 걸까. 모니터를 보고 무언가를 적어내려가던 사람부터 시험관을 바라보던 사람, 앉아서 느긋이 쉬던 사람까지 거진 모두가 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장이란 단어가 가져오는 파급력이 이렇게 강력했던가. 오늘따라 미묘한 공기가 흐르는 '실험실'이었다.
"왜 이렇게 늦으셨습니까. 한참을 기다렸는데."
"기다렸다고? 어째서?"
식사도 철저히 친한 사람끼리만 하더니, 밖으로 나돌기만 하던 자신을 찾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런 사내의 의문은, 이어진 연구원의 말에 짜증으로 변했다.
"그게……. '그 놈'이 왔습니다."
"그 놈이라면?"
"그, 있잖습니까. 우리들이 지하에서 한껏 썩도록 해 준 괴물 놈."
연구원들이 자신을 기다린 데에 납득함과 동시에 사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래……. 지금 어디에 있지?"
"소장님 오실 때 까지 건물 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알겠다. 가 볼 테니까, 다들 일 봐."
사내의 손짓에 좀전까지의 뒤숭숭한 분위기가 사그라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연구원들은 제 자리에서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사내가 '연구소' 안의 건물을 향해 걸어 갔다.
걸치고 있는 축축한 가운이 사내의 기분을 더럽혔다. 이 기세로 가다가는 가운이 다 마르고서야 벗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과학자라고 했던가.
지하 세계의 왕실 과학자라니. 거창한 타이틀과는 다르게 녀석의 첫인상은 괴기하다는 말 외엔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얼굴은 순백색의 가면이라도 썼는지 매끄러웠고──문신처럼 보이는 시커먼 게 눈에서 뻗어나오긴 했다──손에도 눈구멍 비슷히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러면서 양복까지 입고 다니니, 구시대의 괴담이 떠오르게 한다.
그렇게 녀석의 외모를 신랄하게 까다 보니, 어느새 문 앞이다. 이 방법이 편리하다는 건 인정해 줘야 겠다.
사내가 문을 여니 관리를 하지 않아 그런지 경첩에서 끼익거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지하로 내려온 연구원들이 실내를 이용하는 경우는 식사 시간 뿐. 건물 전체가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으니. 원래는 이 건물 마저 식자재의 창고로 사용하다, 연구원 중 하나가 기계에 커피를 들이붓는 바람에 식사 만큼은 식당에서 하도록 했다. 덕분에 '그 녀석'과 만나는 장소는 식당이 되어 버렸고.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실내의 광경은, 그 수많은 식당 중에서 최하층에 만들어 둔 카페였다.
내부는 한적했다. 녀석이 온다는 소리를 들어서인지, 아니면 지금이 점심 때를 한참 넘겨버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바람에 녀석이 앉아 있는 테이블이 한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에 그려오던 그 기괴함이 그대로 현실에 나타나 있었다. 다만 상상과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컵라면?'
──녀석의 앞에 컵라면이 놓여 있다. 물을 부었는지 젓가락마저 그 뚜껑 위에 올린 채로.
것보다, 지하에 컵라면 자판기를 들여 놓은 기억은 없는데. 라면 만드는 기계라면 몰라도.
"앉게."
컵라면의 등장에 당황하던 나를 일깨운 건 '그 녀석'의 목소리였다.
대답은 무언. 착석한 사내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표정. 일그러진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소름이 끼쳐 왔다.
"내가 왜 자넬 불렀는지 알겠나."
"뜸 들이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가스터."
사내가 짜증나다는 기색을 내비치자, 가스터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성격 급하긴. ……용건이라. 희소식을 전해주러 왔네."
끝이라곤 보이지 않던 가스터의 눈에 흰 광채가 어렸다.
"실험이 끝났다네."
"……뭐?"
"그 말 그대로일세. 난 원하는 걸 찾았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스터가 한 손바닥을 위로 해, 자그마한 시험관 하나를 소환해왔다.
"──이걸로 모든 게 끝이지. 계약은 끝났고, 난 자네에게 보수를 주려 부른 것일세."
"……그건?"
"자네도 잘 알텐데. 3년간 여기서 지내지 않았나."
그 말 대로였다. 사내는 시험관 안의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확신을 못 할 뿐.
뒤집혀져, 아래가 검은 마개로 막힌 시험관 안의, 붉게 빛나는 하트 모양의 그 것.
이건 아마도──
"──의지(Determination)."
"이런 미친……. 말도 안 되는 소릴."
"보고 있지 않은가. 이 광채, 영광, 꺾이지 않는 의지를. 충분히 G의 자리에 오를 만한 의지를."
인간들이 연구원을 모아 지하로 내려보낸 것도, 에봇 산의 구멍을 메워버린 것도, 우리가 폐허에서 매일 썩어가던 것도.
모두 이걸 위해서였다.
녀석, 가스터는 인간에게 제안했다. 자신의 실험을 도우라고. 과학자 몇과 '실험체'를 보내라고 했다.
실험 내용은 어찌 보면 간단했다. 가스터가 원하는 영혼을 가진 인간을 찾아, 그에게 넘긴다. 그 영혼을 놈은 'G의 자리에 오를 영혼'이라 불러댔고.
실험은 순조로웠다. 다 죽어가는 인간을 재료로, 남아 있는 영혼의 잔재에서 의지를 추출한다.
그러나──
"네가 그랬지 않았나. 이때까지의 의지는 실패작이었다며! 강력하지 않다고 그렇게나 떠들어 대던 걸 벌써 잊었나?"
"아하하, 그래. 실패작. 맞아."
뭐가 즐거운지 한참을 웃던 녀석의 머리 위로, 몇 개의 시험관이 소환되어 허공을 떠다녔다.
가스터는 시험관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마틱(Amatic), 도지스(Dosis), 윈드송(Windsong), 다이나라이트(Dynalight). 모두 실패했지. 강한 의지를 가지긴 했지만, 한참 못 미쳐. ──하지만."
무언가 거창한 걸 말하려는 듯, 녀석이 뜸을 들였다.
"나는 물었다네. 어째서 저들의 의지가 부족한지. 어떻게 하면 더 강한 의지를 얻을 수 있는지. 결국 승리는 나의 편이었다네."
가스터가 손을 휘젓자, 처음 소환했던 시험관 외의 것들이 다시금 사라졌다.
녀석의 눈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새하얀 빛이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한 인간에게서 나온 영혼이, 의지가 부족하다면. 두 개, 세 개의 영혼을 합치면 되지 않겠나? 어찌 보면 매우 간단한 해답이었지."
"……영혼을 합친다니? 인간은 다른 인간의 영혼을 흡수할 수 없을 텐데?"
"멍청하긴. 자네, 과학자로 살며 이런 말도 못 들어봤나?"
혼란스럽다는 사내의 태도에, 가스터가 핀잔하듯 내뱉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게 과학자의 일이라네."
"……말도 안 되는. 인간들이 그런 짓을 안 해 본 줄 아나?"
"그래, 자네는 이해하지 못 하겠지. 자네는 아직 불완전하다네. 아직은 일러."
"그렇다면, 이때까지의 3년은 전부 그것을 위해서──"
"──아니지. 그건 틀렸다네. 물론 영혼을 합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말일세. 난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었거든. 비록 두 영혼밖에 합치지 못하긴 하다만, 이때까지의 3년은 영혼을 합치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합칠 영혼을 찾기 위해서 지나갔으니 말이지."
합칠 영혼을 찾는다. 더 강한 의지를 가진 영혼을 찾는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사내는 불길함이 등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마 네 녀석……."
"살고자 하는 의지. 그걸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게 누굴까? 죽음을 선고받은 노인이나, 죽음에 다가가는 어른보다 강하게 느끼는 인간이 있다네. 자네도 예상은 했으리라 믿지. 어린아이의 둘의 영혼을 합쳤다네. 들어 봤을거야. '차라(Chara)'와 '프리스크(Frisk)'."
"부, 분명히 지상과의 통로는 막았을 텐데? 게다가 게이트는 내가 관리하고──"
"제발. 쓸 데 없는 시간 낭비는 자제해 주지 않겠나, 아스터리스크(Asterisk). 그깟 결계 하나 뚫지 못 하면 내가 진정으로 인간들과 거래했을 거라 믿나?"
웃음기만이 자리하던 가스터의 얼굴이 조금씩 뒤틀려갔다.
"두 아이의 영혼이 필요했지. 극단적인 선과 악. 그 정도로 강한 성향과, 의지를 보여줄 아이 두 명이 말이야. 그래서 인간과 계약했고. 밖에 붙은 모니터 보이나? 저게 또 다른 지하를 보게 해 주는 통로라네."
"또 다른 지하? 전혀 들은 적 없는 얘기인데."
"연구소장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나. 실험에 그렇게 무심하다니. 아, 내가 직접 임명했으니 할 말은 없겠군."
가스터가 다시금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그제서야 물을 받아둔 컵라면에 손을 댔다.
"……이런. 너무 오래 놔 뒀나. 국물이 없군."
"그것도 지상에서 가져온 건가?"
"아, 그렇다네. 나눠 줄 생각은 없으니 정 배 고프면 라면이나 끓이게."
실없는 농담을 던진 가스터가 불어 터진 컵라면을 한 젓가락 베어 물었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모니터. 그래. 두 아이의 영혼의 절반은 찾아진 거고, 절반은 만들어졌다네. 난 너희 인간의 마법을 빌려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어. 지하와 완벽히 닮은 세계를. 그 안에 이 세계의 지하를 집어넣었지. 그 세계에 수백 명의 아이들의 영혼을 넣어 줬고. 이해하겠나? 수많은 지하가 새롭게 만들어졌지.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에봇 산의 구멍으로 떨어지게 했고, 그들이 괴물과 만나며 지하를 나가게 했지. 밖의 모니터 하나가, 세계 하나를 담당해서 수치로 적합한 영혼을 가려내는 거야."
"……영혼이 만들어 졌다는 건?"
"지하에 인간이 떨어진 건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라네. 차라부터 프리스크까지. 여덟 명. 첫 번째로 떨어진 아이가 차라, 마지막으로 떨어진 아이가 프리스크였지. ……다른 시간선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시간선에서는 프리스크를 뺀 나머지 일곱이 떨어지고, 죽었어. 아직 프리스크는 나타나지도 않았고. 그래서──만드는 걸세.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죽어버린 차라의 잔재와, 수백 명의 영혼이 들어간 수백 개의 세계였다네. 모든 아이들에게 차라의 잔재를 심어뒀지. 그 뒤론 시간선 밖의 존재가 아이들을 움직여서, 차라와 프리스크를 만들어 낸 걸세."
설명을 하면서도 컵라면을 입에 넣던 가스터가,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젓가락을 내려놨다.
"벌써 다 먹어 버렸군. 걱정은 말게나. 시간은 남아 있으니."
그러면서 새로이 컵라면을 소환해, 마법으로 물을 붓고 뚜껑을 덮은 가스터였다.
"……말도 안 되는 걸 한번에 듣다 보니 머리가 혼란해지는군."
"걱정 말라 하지 않았나. 나는 자비로운 괴물이라네.(I'M A MERCIFUL MONSTER.) 비록 인간과의 계약도 끝났고, 원하던 '의지'마저 손에 넣긴 했지만 자네에게 지금을 설명해 줄 여유는 있으니."
"……이걸 이제서야 알게 되는 것도 그렇고. 보수란 건 뭔가?"
"글쎄. 듣다 보면 모든 걸, 내가 왜 자네에게 이 사실을 감추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을테지. 자네가 아는 게 많아질수록 나야 좋으니. 그리고──크후훗. 보수라."
가스터가 웃자, 처음보다 녀석의 안광이 짙어진 것은 사내의 착각이었을까.
"얘기가 다 끝나면 자연적으로 얻을 걸세."
2
"괴물들이 결계를 부수고 나오려면 인간 일곱의 영혼이 필요하지. 내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시간선에서는, 우리의 대왕인 아스고어도 여섯 인간의 영혼을 모았었고. 남은 한 영혼을 채워 줄 인간이 떨어졌지."
평안한 어조. 옛 추억을 떠올린 듯 가스터의 말에서 그리움이 묻어났다.
"아이는 모든 괴물에게 자비를 베풀다가, 안타깝께도 결국엔 죽었지. 작정하고 인간을 죽이려던 괴물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말이지, 아이에겐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고, 그게 결국 변수가 됐지."
가스터가 새로운 컵라면을 개봉했다. 그러면서도 말은 이어졌다. 어딘가 전래동화를 얘기하주는 말투로.
"전에 떨어진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힘은 있었어. 인내(Patience), 용기(Bravery), 고결(Integrity), 끈기(Perseverance), 친절(Kindness), 정의(Justice), 아니면 마지막 아이와 같은 의지(Determination). 많은 영혼들을 봐 오며 그들을 죽인 괴물들이긴 했지만, 시간을 다시 돌리는데 어떻게 하겠나."
"……시간을 돌린다고?"
"그렇다네. 의지로 시간선을 뒤흔들고, 꼬아서 죽더라도 살아나고. 한 술 더 떠서 그런 식으로 공간까지 왜곡하며 다녔지. 결국 괴물들은 아이를 죽이는 걸 포기했고, 아이는 그런 괴물들마저 용서했지."
말하면서도 우물거리며 먹던 컵라면의 면을 끊어내고, 크게 한숨을 내뱉는다.
"하, 거기까진 괜찮았어. 아스고어는 여섯 인간의 영혼을 흡수했고, 여섯 개의 힘을 얻었다네. 단번에 영혼 하나를 더 얻는 건 쉬웠지. 그게 문제였다네. 괴물의 그릇으로는, 여섯 인간의 영혼을 흡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지를 견뎌내지 못했지. 아스고어는 녹아내렸고, 그 도중에 의지의 힘으로 과거로 돌어갔다네. 일곱 인간의 영혼을 가진 채로. 세계는 일곱 인간의 영혼을 흡수한 아스고어를, 과거의 아스고어와 같은 괴물로 보질 않았어.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대로 아스고어는 사라졌다네. 세계의 법칙을 어긴 대가로 시간과 공간의 틈에서 갈려나갔지."
가스터가 컵라면의 국물을 들이키며 말을 이어갔다.
"남은 건 괴물의 영혼 정도의 힘을 가진 것 하나와, 강인한 의지를 가진 영혼 하나. 나머지 영혼 덩어리들은 틈에서 찢겨지며 수백의 괴물의 영혼 속으로 섞이거나, 그 자체로서 괴물이 되었다네. 난 그 중에서 처음에 남겨진 괴물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거고."
"……마시거나, 말 하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해 줬으면 좋겠다만. 것보다 손으로 말 할 수도 있었나."
"미안하게 됐군. 수화로 말하는 괴물인지라. 지금은 알아 들으라고 약간의 마법을 써 주는 거라네."
컵라면의 용기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입은 움직이지 않고서.
"두 번째. 아니, 괴물로 나뉜 나로서는 처음 보는 세계였지. 난 거기서 왕실 과학자가 되었다네. 내가 섞여있던 걸 죽이고, 다시 그걸 흡수해 간 대왕의 밑에서 일하는 게 약간 미묘하긴 했다만. 코어라고 해서 마법을 에너지로 바꾸는 것도 만들어 주고, 혹여 나중에 인간의 영혼을 모을 일이 있다면 흡수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도 하고. 아무리 그 때의 아스고어와 여덟 인간의 영혼이 날 만들었다곤 해도, 날 만들어 준 존재끼리 죽이도록 두는 건 뭔가 아니다 싶었지. 그 외에도 별 걸 다 만들었어."
가스터는 추억에 잠겨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듯한 기분에 빠져서는 미소를 띄었다.
"최고이자 최악이었던 게 의지 추출기였지. 내가 처음 탄생할 때에도 의지의 일부를 가졌었거든. 혹시나 하고 만들었었는데, 실패했지. 내가 가진 영혼의 힘은 의지와는 다른, 변형된 무언가였어.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열정(Enthusiasm), '삶에 대한 열정' 정도겠군. 비슷한 힘을 발휘하긴 하지만 대가로 영혼의 힘이 약해져 갔다네. 죽음을 앞두고 내가 찾은 방법은, 코어에 뛰어드는 것이었지."
"괴물이 마법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인가."
"잘 알아내는군. 역시 내가 임명한 연구소장답네. 내가 에너지가 된다면, 엔트로피 그 자체가 된다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진지한 분위기에서 농담을 툭툭 던져대는 것도 그렇고. 언제는 자신을 까 내리더니, 다시금 칭찬하는 걸 보면 정상은 아닐거라며 사내가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했다네. 영혼이 섞인 괴물은 아무리 코어라고 해도 에너지로 갈아버리지 못하더군. 그렇다고 영혼을 분리하자니, 내가 죽어버릴 게 아닌가. 결국엔 영혼의 잔재를 남기게 하는 '의지'가 필요했지. 그래서 난 미래의 시간선으로 갔다네. 인간이 에봇 산의 구멍으로 떨어지는 미래로. 거기서 내가 만난 게──자네의 기억에도 이름이 있겠지만──샌즈(Sans)와 알피스(Alphys)였지."
"……확실히. 받은 기억에는 들어 있군."
"아스고어가 여섯 인간의 영혼을 모았을 그 때에 도착했다네. 여덟 번째 인간이 떨어지기 전이자, 알피스가 '의지'를 다 쓰기 전인 때에. 알피스와 샌즈를 동료로 해 살아있는 괴물에게서 영혼을 뽑아낼, 그리고 의지를 주입할 방법을 연구했지. 그렇게 나 자신을 영혼의 그릇으로 만들고, 에너지 자체가 된 뒤 영혼을 받아 영원히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긴 했다네. 매우 비효율적이고, 자칫하면 영원히 영혼의 그릇이 깨진 채로 존재하게 되는 방법을. 영혼을 뽑아낸 뒤 의지를 받질 못 하면 일어날 일이었기에, 걱정은 않았지."
"성공하진 않았겠군. 아니라면 내가 여기 앉아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자네 말대로일세. 난 다시 실패했지. 아니, 절반만 성공했을지도. 내 영혼이 완전한 괴물의 영혼이 아니란 걸 간과했던거야. 샌즈에게 맡긴 영혼──기억과 감정 따위를 전부 포함했던 그것──은 그에게 흡수당하다시피 되었고, 에너지가 된 후에 그에게 돌려받은 영혼엔 열정이 빠져 있었네."
목소리 탓일까. 가면에 가까운 가스터의 얼굴이 어쩐지 슬퍼 보인다고 느낀 사내였다.
"불완전한 영혼을 가지곤 괴물로서 살아갈 수 없었지. 인간으로서는 더더욱 그렇고. 사고하는 생명체의 형체도 잡지 못하고, 난 다시 시간과 공간의 틈에서 찢겨 가루가 되었지. 애초에 이 세계가 영혼을, 어쩌면 불완전한 영혼을 가진 에너지를 받아 들이지 못 하는 거야. 그렇게 여러 시간선을 헤메면서, 나와 갈라진 다른 영혼들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 인간의 영혼은 프리스크라는 아이가, 하나의 괴물이 된 영혼들은 내 추종자가 되었다더라고. 내가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면서. 웃기지 않나? 같은 방식으로 창조된 괴물들이, 단지 그랬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섬기다니. 내가 저들 중 하나였다면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도 가지 않더군."
"……."
"다른 시간선에선 하나같이 괴물들이 날 기억하지 못하더군. 내가 만들어 놓은 코어는 멀쩡한데 말이야. 내 추종자라는 괴물들만이 예외였지. ……그 외에도 하나 있던 것 같지만, 기억은 잘 안 나는군. 아, 샌즈는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지. 시간이 지나면서──아니, 이 말은 맞지 않겠군. 시간선을 넘나들면서, 알피스가 주입해 준 의지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네. 최초의 아이의 의지처럼 내 영혼이 깎여나가는 걸 막아주진 못 했지. 난 더 완벽해질 필요를 느꼈네. 그래서 이 세계로 와서 자네들과 계약을 한 게야."
가스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사내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혼란함. 그 감정과 동시에 뒤쪽에서 밀려오는 가스터의 목소리가 있었다.
"이 신체는 꽤나 편리하단 말이야. 어디에든 있고, 어디에도 없다고 하던가? 지금의 내가 딱 그런 기분일세. 얘기를 계속하지. 난 더 강한 의지를 가질 필요가 있어. 내 영혼을 복구하기 위해 쓸 인간의 영혼도 필요하고 말이지. 내가 괜히 바깥의 저 장치──언더테일(Undertale)을 만들어 내서 시간선 바깥의 존재의 힘을 빌린 게 아니라 이 소릴세. 이제 진실을 자네에게 알려주지."
"진실? 무슨 소린가 그게? 시덥잖은 장난은 그만 두게. 3년간 일한 보수를 준다며 날 부른 게 아니었나?"
"보수라. 하, 자네가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면 이러고 있지는 않을텐데 말이야."
찢어지는 웃음소리. 그와 함께 귓전에서 괴상한 피아노곡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가스터(Gaster)가 되기 위해서는 시작이 되는 의지인 'G'와 영혼이 되는 'Aster'가 필요하다네. 프리스크(Frisk)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지. 의지인 'F'와 영혼인 'Risk'. 시덥잖은 말장난이지, 그렇지 않은가? 불행하게도 이 말장난이 현실이 되고 있단게 아쉬울 따름이지. 처음이 되었던 아이의 영혼이 갈라져서 만들어 진 것이라네. 이제 최초가 된 '그 아이'의 이름이 뭔지 알겠나, 아스터리스크(Asterisk)?"
"……무슨. 그러면 네 녀석이 날 불렀단 게──"
"이해가 빨라서 좋군 그래.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라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사라졌던 가스터가 사내의 눈 앞에 나타났다. 전보다 괴기한 얼굴을 하고, 붉은 빛의 안광을 뿜어내면서.
"기억도 영혼의 일부지. 약간 시간이 걸리더라도, 비슷하게 기억을 끼워맞춰주면 그보다 영혼을 흡수하기 좋은 조건은 없다네. 이제 자네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왜 '기억'을 빌려 줬는지 알겠는가?"
"아, 아아……."
사내가 지르는, 깨달음의, 절망적인 절규가 퍼져나갔다.
그게 뭐가 좋은지, 가스터가 연신 눈에서 붉은 빛을 뿌리며 입꼬리를 말아올리고──용의 두개골 비슷하게 생긴 기계장치를 여럿 소환해댔다.
개추
개추..
*잘려나간 1편 뒷부분 :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undertale&no=128377
비밀번호가 어째서인지 안 맞아서 수정을 못 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째서인지 댓글이 적다.
* 대박인데
* 길어서 안읽고 넘어가나봐...
잘쓰네 폰트도좋고. 뮬론안릵음 .문아픔
개추다 - DCW
오
떡밥 진짜 잘 엮어낸것같다. 몰살에서 아스고어가 영혼을 흡수하지않았는지 설명도 되고 가스터의 추종자들도 그렇고
좀 어렵긴해도 끝까지 다읽었다 빨랑 2편도 들고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