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얘기좀 하자."


나는 침묵을 버티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지친 상태라고 해도,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 칼슘 덩어리의 행보를 별거 아닌 일인척 넘겨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야가 아니라 샌즈인데?"


아.

벌써부터 다시 빡친다.


"..샌즈.

 이야기 좀 하자고."


"좋지.

 이야기는 언제나 환영이야.

 어디,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

 내가 널 죽일 뻔 했던 이야기?

 토리엘과 내가 주고받았던 펜팔 이야기?"


저 놈은 어쩌면 남의 성질을 긁는게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괴물인지도 모르겠다.

처음 습격 때, 불길에 휩싸인 채로 우두커니 서서 방안에 널부러진 토리엘과 나를 보고 '핫hot한 드라마'라고 이죽거렸던 것만 봐도..

나는 몰라도 토리엘까지 그 조롱에 포함시켜버리는 건 어지간히 심사가 뒤틀린 놈이 아니고선 못할 짓이다.


"..그것도 아니면, 네가 토리엘을 죽일 뻔 했던 이야기?"


어쩌면이 아니라 기정사실이네 저 씨발새끼 저거.

샌즈는 내 얼굴에 떠올랐을 분노를 그대로 응시한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곧 피식 웃으며 윙크했다.


"아이고 무서워라.

 그렇게 죽일듯이 노려보지 말라고.

 솔직히 말해서 나도 너하고 말을 섞어야하는 지금 같은 상황이 달갑진 않아.

 하지만, 음.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니잖아?

 휴전하자고. 휴전."


휴전이라는 단어는 필경 지금은 싸우지 말자는 관용적 표현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지만, 분명히 더 중요한 일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 번뜩이는 독설이 목울대에서 꿈틀거렸다.

난 모처럼 찾아온 설욕의 기회를, 그게 비참한 정신승리일지라도 그냥 놓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토리엘이 위중한 상태라고 해도 결국은 내 자존심이 더 중요했다.


"휴전이라고 했냐?

 야. 대가리에 든게 없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

 전쟁은 군인이 하는 거야.

 너하고 나는 군인이냐?

 그래서, 네가 나하고 죽자고 싸우면 그게 전쟁이냐?

 존나 너 좋을대로 현실 왜곡하지마라.

 사고 당해서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얼른 안뒤지고 뭐하냐면서 목을 조르면 그게 전쟁이야?

 더 간단하게 끝낼 수단이 있어도 수고스럽게 시간을 들여 다리를 으스러뜨리고 병신을 만드는게, 전쟁이면 당연한 일이었냐?

 그렇게 전쟁이라는 거창한 말 뒤에 숨으면 누가 널 추켜세워줄 것 같디?

 이게 용서받아야 할 정도로 잘못된 일이라는 의식은 있었어?

 그래서 이건 전쟁이었고, 지금은 휴전할 때라고 말한 거야?

 비열한 새끼.

 넌 그냥 더러운 살인자야.

 유일하게 아다리가 안맞는 점은, 내가 아직 살아있어서 살인 미수라는 거겠지!"


샌즈는 말이 없었다.

아마 기가 차서 말도 안나올 테지.

하지만 어차피 무슨 반응이 돌아오던, 난 멈출 생각 같은건 없었다.


"나도 들은건 있다.

 인간이 예고도 없이 괴물들을 공격했고, 학살에 가까운 일방적인 폭력이었다고?

 남은 괴물들은 지하에 가둬졌고, 밖으로 나가려면 일곱 인간의 영혼이 필요하다고?

 내가 생각해도 인간이 잘못했네.

 근데,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일곱 번째 영혼만 있으면 된다고?

 죽어달라고?

 네놈들이 그러면 내가 어이구 인송합니다 간송합니다 휴송합니다 먼송합니다 이러면서 투신이라도 해야하냐?

 전부 다 네놈들 이야기잖아.

 난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잖아.

 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믿으라고 강요해?

 이게 누굴 개호구로 보나."


목이 타서 말을 쉬어야만 했다.

꽤 오랫동안.

샌즈는 그 동안에도 계속 실체없는 시선과 의미모를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래서 난 도저히 멈추고 싶은 생각이 안들었다.

저 놈이 분노하든, 움츠리든, 똑같이 저열한 말싸움에 뛰어들어 진흙탕 싸움을 하든..

뭐라도 끌어내고 싶었다.

저 놈의 침묵이 가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게 사실이라면, 인간과 괴물들과의 전쟁이 사실이라면 뭐하러 에봇 산 같은 데에 사람들이 찾아왔을까?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감히 여기에 찾아올 이유가 뭐였을까?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이 좆같은 세상 괴물들이 다 때려부수고 망해버리라면서 떨어졌을 지도 모르지.

 근데 내가 알게 뭐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다 모르는 이야기야.

 그런데, 듣고 있자니까 이상하더라?

 이미 죽고 영혼만 남았다는 그 여섯 명.

 어떻게 죽었을까?

 그들이 모두 떨어지자마자 죽었다면, 토리엘은 폐허의 수호자를 자청할 필요가 없었어.

 함정도 필요없고, 수수께끼도 필요없고, 인간이 무슨 해를 끼칠지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고.

 하지만 난 살아있었어.

 피는 많이 흘렸지만 어쨌든 살아있었고, 지금도 간신히 숨은 붙어있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이 땅굴 속에서도 한때는 살아있었다는 거지.

 한 사람 씩, 어쩌면 둘이서, 여섯 명이 한꺼번에 떨어졌을지도 몰라.

 중요한건, 괴물들이 그들을 죽였다는 사실이겠지.

 외딴 곳에 떨어져서 의지할 곳도 없고, 영문도 모른 채

 '저기 인간이 있다! 저 새끼가 n번째다! 우와앙!!'

 하는 괴생명체한테 살해당했다는 거겠지.

 하......

 이 비열한 새끼야.

 너는 그걸 전쟁이라고 하냐?

 미친 놈들이 떼거지로 뭉쳐서 집단린치한거지?"


말을 맺을 때 쯔음, 난 내 감정에 휩쓸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난 분노한 걸까? 먼저 죽어간 여섯 명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걸까?

심판하듯 쏘아붙이는 나 자신의 당당한 모습에 격양되기라도 한걸까?

아니면 부끄러운걸까.

 

"..너희들은.

 괴물들은 다 싸이코야.

 이해할 수가 없어.

 제 정신들이 아니라고.."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정적.


"..이제 내가 말해도 될까.

 딱, 세가지만."


난 대꾸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샌즈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무거웠다.

방금전까지 내가 어떻게 이런 녀석한테 일장연설을 해댈 수 있었는지 나 자신을 의심할 정도로.


"첫째. 더 이상의 말장난이나 심판은 하지 않아.

 괜히 싸우면서 시간만 잡아먹을 것 같고, 최소한 너하고 만큼은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물론 다른 괴물들하고는 할거지만. 그건 내 자유잖아."


주먹쥔 손에서 검지 손가락을 펴며 놈이 말했다.

그리고 중지 손가락을 펴며 '둘째'라고 말했다.


"둘째. 이건 아까 말했던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랑 관련된 건데..

 이건 전적으로 너한테 달린거야.

 원래 계획대로라면 내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서 일이 틀어졌어.

 그래서 너한테 말장난을 하지 않겠다고 한거야.

 지금이라면 괜찮겠지만, 잘못하면 기회가 영영 없어질 것 같거든.

 무슨 소리냐고 묻지마.

 일단 여러 번 겪어보고나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게 될테니까.

 벌써부터 네가 모든 것을 알게되면 곤란해지거든.

 어찌 됐건..

 잠깐 나 좀 따라와줄래?"


샌즈는 진지해보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서 잠자코 벽을 짚고 녀석을 따라 걸었다.

녀석은 000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000 안에서 뭘 하려는 거지?

영문도 모르고 그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고 하는 나를, 아직 오그린 채인 샌즈의 뼈다귀 손이 제지했다.

..그런데 000이 뭐였지?


"그리고 이건 세번째인데..

 난 정말 이런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단 한번만이라도, 아무리 비참하고 뒤틀린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틀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원했어.

 누군가 짜놓은 것도 아니고, 제멋대로 되돌아가서 뜯어고칠 수도 없는..

 억겁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방향성있게,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엄격하고 질서있는 우리의 우주를 다시 되찾고 싶었다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다음 순간, 정신이 마비되었다.

눈과 귀, 코와 혀가, 모든 감각은 통렬하게 그 역할을 다했지만 정작 뇌가 작동을 하지 않았다.

정보만 받아놓고 부하가 걸려 멈춰버린 컴퓨터처럼.

그래서 현실감이 없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뜨겁고 날카로운 고통, 날 채우던 피가 사라지는 감각, 시야에 가득한 날카로운 뼈가 분명히 남아있다.


정말 이상한건, 그 기억이 있음에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왜 내가 꽃밭이 있는 지하공동에 서있지?

불타없어졌을 지팡이는 왜 내 손에 쥐고있는거고?!

또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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