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터 7까지 순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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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엘은 급속도로 야위어갔다.
털이 북슬북슬해서 겉보기엔 별 차이가 없어보였지만,
가끔씩 연민과 모성으로 가득찬 그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동족을, 그 이전에 친구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좀먹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리라.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구원을 찾을 곳은 문제의 핵심인 나 뿐이었다.
자기가 잘못하고 있는게 아니라고 확신을 얻고 싶겠지.
하지만 습격 이후 나는 토리엘과 대화하는 것을, 아니 같이 있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되었다.
의사소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확실하게 줄어들었다.
내 심정이야 어찌되었든, 그 사실만으로도 토리엘은 지옥을 거니는 심정이겠지.
보호와 살해.
양극단이라 할 수 있는 두 괴물과 그들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온 몸으로 접한 나로선..
나로서는 토리엘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상에서 일어날 수 있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한 쌍의 지팡이를 만드는 것이었다.
집 앞에 있는 고목은 오래된 데다가 이미 죽은 가지도 몇 개 있어서 일이 쉬웠다.
못쓰게된 다리 대신 체중을 싣기 위함도 있었지만, 호신용 무기로서도 지팡이는 안성맞춤이었다.
만약 납을 녹여서 안에다 채운다면 대충 휘둘러도 해골 바가지 하나 정도는 우습게 바숴버리겠지.
불가능하다는 건 알지만 그 상상만으로도 임계점에 도달한 분노를 다스릴 수 있으니 그것으로 괜찮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폐허를 떠나기로 이미 마음을 다잡았다.
토리엘도, 나도 이 상태가 언제까지고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샌즈가 다시 찾아오면 모든게 끝장이다.
그 땐 아마 나 혼자 죽는 정도론 안끝날 것이다.
샌즈 놈이 방을 날려버리고 나서, 토리엘은 나를 옆 방으로 옮겼다.
거긴 톡 까놓고 말해서 애들 방이었다.
글자 적힌 나무 블록, 보드게임, 별이나 초콜릿 스티커가 붙여진 벽지. 알록달록한 인형들..
나는 의식을 잃기 전에 토리엘이 지르던 비명을 기억한다.
아스리엘과 차라. 더 이상 아무도 잃고 싶지 않다.
그 이름들은 과거 이 방에서 놀던 아이들의 것이었겠지.
다음 번에 샌즈가 똑같은 공격을 해온다면 이 방에 남은 아이들의 흔적들도 나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난 그걸 알고서도 여기 남아있을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샌즈를 엿먹여야만 했다.
아주 그냥 골통을 터어어어어얼어버려서 남은 여생을 침이나 질질 흘리면서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타령하도록 확실하게.
최소한 그 녀석 편한대로 일이 굴러가게 하고 싶진 않았다.
폐허를 나가서, 다리 병신이 절대로 갈 수 없을 만한 장소를 찾자.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홀로 죽으리라.
그래서 내 영혼이 발견되지 않고, 괴물들도 지상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기억도 안나는 저 위의 인간의 운명 따윈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나까지 일곱 명이나 그 구덩이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고작 산을 오르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전설 정도나 만들어지는데 그쳤지.
사람이 사라지는데 막지도 않는 병신들이다.
그런 놈들을 위해서 알아주지도 않을 개수작을 내가 뭣하러 한단 말이냐?
뭐.. 그렇게 의미 부여할 필요도 없다.
내 노력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
어쩌면 내가 죽고 하루 1초 뒤에 다른 인간이 이곳으로 떨어질 지도 모른다.
한 세기가 지나서 떨어질 수도 있고.
어쩌면 모든 괴물이 어둠 속에서 말라죽을 때까지 안떨어질 수도 있겠지.
인간은 해괴망측한 짓을 잘도 벌여대는 종족이니까,
사실은 내가 모르는 사이 지상에 대사건이 터져서 인간이 이미 멸종했다고 해도 왠지 납득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일이 있었다.
시점을 현재로 돌려보자면..
나는 이제 지팡이에 의지해서나마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감정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고.
최소한 토리엘 면전에다 욕을 하고 싶어지는 충동은 사라졌다.
오늘은 참 오랜만에 토리엘에게 먼저 말을 걸어보려는 참이다.
복도 바닥을 울리는 디딤 소리는 이미 노크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 역시 예상한듯 난롯가 소파에 앉아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도 오랜만에 하려니까 긴장되네. 젠장.
"토리엘. 폐허의 함정과 수수께끼에 대해서 알려줘요."
"네에..?"
그녀는 돋보기 안경을 벗으려는듯 손을 들어올렸지만, 털복숭이 손은 허공만 할퀴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뭐..
이제 지팡이가 내 다리인데 익숙해져야죠.
근데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걸어만 다니면 재미도 없고 의욕도 안나고..
그리고 당신..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날 돌본다고 제대로 못쉬었잖습니까.
하루, 아니 한 일주일은 쉬어야지 안그러면 쓰러져요."
"어머나..
요즘 들은 말 중에 제일 마음 따뜻해지는 말이네요."
토리엘은 헛기침을 하면서 잠시 말을 흐렸지만, 그녀가 지식을 전수해주리라는건 이미 불보듯 훤했다.
나는 경직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웃어보였다.
처음부터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꺼낸 말이다.
토리엘은 이 순간을 상상은 못했을 지언정 계속 기다려왔을 것이다.
너무 일관적인 괴물이라 파악하기가 쉽고, 나로서는 그녀를 이용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별 수 없다.
이 집에서 달리거나 지팡이 휘두르는 연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물론 폐허의 점검은 정말로 할 것이다.
나 스스로도 납득할 수 있어야 토리엘도 납득할 것이고, 무엇보다 이건 눈치 못채게 하려고 벌이는 일이니까.
요컨대 이건 양동작전이다.
왜 이런 삽질을 하냐고?
내가 떠냐려고 하면, 아니 낌새만 보여도 토리엘은 분명히 막으려 든다.
샌즈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괴물이라면 나와 만나는 순간 둘 중 하나는 다칠 것이다.
그리고 그걸 토리엘이 묵과할리 없지.
그걸 막으려고 이어온 삶이라고 하잖아.
재수없으면 토리엘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는 수도 있다.
회초리 휘두르듯 찰싹찰싹 한 두대 때리는 걸론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정말 기절하거나 어디 잘못될 정도로 힘껏 갈기지않는다면 토리엘은 계속 날 막아서겠지.
그리고 그건 정말 정말 재수가 없는 일이다.
싸움을 피하는 것도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그건 멀쩡한 사람한테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내 망가진 다리로는 싸움을 피하고 도망치는 선택 따위는 할 수 없다.
아무리 지팡이로 걷는 연습을 해봤자 한계가 있다.
내가 평화롭게 일을 해결한다면, 그건 오직 말로써만 이루어질 것이다.
그게 실패하면 누군가는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정말 결의에 차서 날 죽이려고 든다면, 나 역시 그 상대를 죽일 작정으로 싸울 것이다.
살려둬봤자 언제고 내 뒤통수를 노릴테니까.
..뭐, 말이 그렇단 거다.
존나 비장한척 말하는데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럴 일은 없다.
고작 지팡이에 맞아서 죽을 정도면 그건 괴물이냐, 개불이지.
죽는건 나다.
그냥 시도해보는거지.
그걸 위한 연습이고, 속임수고, 거짓말이다.
"하지만 옷도 없이 밖에 나가면 감기 걸려요.
치료할 때 옷을 다 잘라낸데다가 처음부터 넝마 조각이었고..
지금이야 집 안이니까 내복차림이어도 되는거지만..
바깥은.."
그녀는 말하다 말고 먼 곳을 보는 눈이 되었다.
"잠시 있어봐요."
토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가에 있던 외투걸이에서 옷을 하나 걷어서 벽난로에 던졌다.
아니 잠깐, 뭐?! 왜?!
내가 억 소리도 못내고 그 꼴을 지켜보는 사이, 그녀는 다시 벽난로에 손을 집어넣어 완전히 그을어버린 옷을 꺼냈다.
재가 되었을 줄 알았던 옷은 탈탈 털자 원형이 다시 나타났다.
두건이 달린..우비?
아니 이건 보통 로브라고 하던거 같은데.
토리엘이 입고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희한하게도 잿빛이 되었는데도 옷감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문양도 그대로 남아있고..
이거시 마-법인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네.
"이걸 입고 있으면 폐허의 괴물들이 당신을 건드리지 않을거에요."
"어.. 고마워요. 잘 입을게요."
나는 멋쩍게 옷을 받아들었다.
확실히 이거 입으면 바람은 막겠다.
근데 이거 목이 좀 늘어난 거같은데?
설마 입던건가..
굳 -_-
힘내 친구!
꾸르잼!!
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