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세계의 변두리에는 항상 눈이 쌓여있는 스노딘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영원한 겨울을 보내는 이 마을에는 한명의 이질적인 존재가 살고 있었다.
그의 단정하게 정리된 깔끔한 복장과 지적인 면을 강조하는 안경은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스노딘에서는 눈길을 끌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목을 끄는건 스노딘의 차가운 얼음위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름답게 불타고 있는 그의 전신이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불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내 그릴비.
그는 스노딘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이자 동시에 스노딘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주는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그릴비에게 매일매일은 똑같은 일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벗어나고 싶은 지루한 일상은 아니었다.
그가 차린 작은 술집에 방문해주는 스노딘의 괴물들은 모두 저마다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틈만 나면 주변을 잊고 서로 코를 비비는 강아지 커플, 항상 혼자서 포커를 하는 목이 긴 강아지, 하루종일 여자를 꼬시는 얘기만 하는 한심한 괴물,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는 주제 매일매일 병나발째 들이키려는 작은 토끼.
그런 그들의 소소한 일상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릴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한 하루하루도 언젠가는 변할 수 밖에 없었다.
-새 방문객
그날은 어느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하루였다.
황실 근위대의 견(犬)부대와 다른 단골 손님들로 북적이는 술집에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후줄근한 파란 후드티를 입은 키 작은 해골, 샌즈.
그는 가끔 평소의 가벼운 표정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날카로운 표정이 되어 그릴비를 놀라게 하기는 하지만 그 외에 특별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유쾌하고 평범한 사내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릴비를 놀라게 한 것은 샌즈가 아니었다.
해골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오는 한 꼬마 아이, 십수년동안 술집을 운영하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종족의 꼬마 아이.
바로 '인간'이라고 하는 종족의 아이였다.
책으로 밖에 인간을 본 적이 없었지만 그 아이가 인간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릴비의 놀란 가슴은 곧바로 내려 앉았다.
저 꼬마가 인간이건 살인자건 그런건 그릴비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저 손님일 뿐이다. 그에게 중요한건 오로지 가게를 방문한 자가 누구건 손님으로서 대하는 것 뿐이었다. 그게 오래전부터 그릴비가 자신에게 부여한 의무였다.
"그릴비, 감자튀김 두개 부탁해."
샌즈는 갑작스럽게 인간 아이를 가게에 대려와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음식을 주문했다.
그건 어떻게 생각하면 샌즈다운 일이었고 그릴비도 그릴비답게 주문한 음식을 내어올 뿐이다.
샌즈는 평소와 다름없이 가게의 손님들에게 뼈에 관한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는 캐첩을 통째로 들이마셨다.
어느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샌즈는 돌연 날카로운 표정이 되어서는 인간 아이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샌즈의 이야기를 듣는 인간 아이는 내내 어떠한 표정 변화도 보여주지 않았다.
바깥 세상에서 자라온 아이에게 메아리꽃이나 워터폴에 대한 이야기는 놀라운 것일텐데도 그 표정은 마치 감정이 없는 것처럼 침착했다.
가게 내의 다른 손님들은 이 인간 아이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듯 보였지만 그릴비는 지금 평소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돌연 이 곳을 방문한 인간이 과연 지하세계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어떤 영향을 주던지 그릴비에게는 지금의 매일매일을 계속 할 수 있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말이다.
-해골과 인간
인간이 그릴비네를 방문한 다음날, 가게를 열 준비를 하던 그릴비는 재미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붉은 망토를 두른 홀쭉한 해골이 인간 아이와 같이 온 스노딘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게 아닌가.
아마 저 해골이 샌즈가 종종 얘기하는 동생 파피루스였을 것이다.
"녜-헤헤! 지금부터 널 최고의 장소로 초대할거야!"
그렇게 온 동네에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친 파피루스는 넘쳐나는 혈기를 자랑하듯 주변을 한바퀴 돌고는 인간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가게에 자주 방문하는 손님은 아니지만 차가운 스노딘을 활기차게 만들어주는 그 행동도 그릴비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소소함중 하나였다.
"인간! 지금부터 위대한 파피루스님께서! 네가 원하는 모든 스파게티를 만들어 주겠다!"
가게와 해골 형제의 집이 가까워서 일까, 아니, 아마 저 정도 소리면 스노딘 전체에 울려퍼지고도 남을 지도 모르겠다.
파피루스가 인간과 '우정'을 쌓는 소리는 일에 집중하는 그릴비의 귀에도 똑똑히 들려왔다.
시끄럽다면 시끄러운 목소리였지만 이런 소음도 그릴비에게는 일상의 일부였다.
-물고기와 해골, 그리고 인간
황실 근위대의 리더 언다인은 가끔 스노딘을 방문한다.
그럴때마다 파피루스는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워 지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언다인과 어지간히도 죽이 잘 맞는 모양이었다.
어느날부터인가, 아, 워터폴 쪽에서 알 수 없는 폭발음이 들려온 날 부터였다.
언다인이 스노딘 해골 형제의 집으로 이사왔다.
당연히 파피루스는 평소의 배로 시끄러워 졌는데, 그릴비는 덕분에 황실 과학자에게 의뢰해 파피루스의 목소리를 묻을 수 있을만큼의 음량을 가진 주크 박스를 구해야 했다.
"방금 생각한건데...L은 라임의 약자가 아닐까!"
"글쌔, 난 라이트 블루의 약자라고 생각하는데."
언다인과 파피루스는 하루 종일 집 앞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퍼즐에 대한 이야기, L과 P에 대한 끝없는 토론, 전쟁 영웅 거슨에 대한 칭찬... 그릴비는 가게의 단골 손님들이 했던 얘기 전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느아아아아아! 인가안! 열어보면! 죽인다!"
그릴비가 폐점 준비를 위해 주크 박스를 끄는 순간 파피루스보다도 몇배는 큰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소소한 일상이 왠지 한참 더 시끄러워 지기는 했지만, 단골 손님들도 이게 즐거운 모양이니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악몽
그릴비는 악몽에 시달렸다.
온 몸에 형형색색의 피를 묻힌 인간 아이가 그릴비를 노려보았다.
전에 보았던 검고 작은 눈동자가 아닌, 피처럼 붉고 또 아름답게 커다란 눈동자가 보였다.
그는 생각할 겨를없이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밖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인간이 하는 일은 단순했다. 죽이고, 또 죽인다.
그가 사랑했던 일상이 죽어간다.
큰 덩치에 안 어울리게 귀여웠던 그레이터 도그도, 목을 쭉 늘어트린 레서 도그도, 항상 개껌을 수십개씩 가지고 다니던 도고도, 코를 비비던 도가미, 도가레사 부부도, 인간의 손에 무자비하게 찢겨나갔다.
인간과 즐겁게 놀았던 파피루스도, 내심 인간을 아끼고 있던 언다인도, 사라져간다.
가게를 닫고나서 소소한 즐거움으로 지켜보았던 스타 메타톤도, 부서진다.
모두를 학살한 인간의 앞에 선 것은, 샌즈였다.
평소의 유쾌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게된 그에게 인간이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다가간다.
그는 인간이 샌즈를 죽이는 순간 모든게 끝날 것이라고, 스노딘의 일상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릴비는 외치고 싶었다, 도망치라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제 인간은 샌즈의 코 앞에 서있었다.
그릴비가 느끼는 절망이 절정에 다다를때, 샌즈는...웃었다.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수한 뼛조각이 흩날리며 인간의 살을 찢고 내장을 파괴한다.
아무도 막지 못할 것 같던 인간은 갈기갈기 찢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하지만 다 끝난 것인가 하던 순간에, 인간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하게 다시 샌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조금 짜증난 표정인데?"
그러나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샌즈의 빠른 공격이 다시 인간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겼다.
그럴때마다 인간은 또다시 살아나 샌즈에게 다가갔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휘둘러지는 칼날과 폭풍처럼 휘날리는 뼛조각이 하염없는 시간동안 계속해서 부딪혔다.
아무리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도 인간은 포기하지 않고 샌즈에게 덤벼든다.
샌즈의 공격을 피하는 인간의 동작이 점점 능숙해져간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그릴비는 언젠가 인간의 칼이 샌즈의 몸에 닿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것은 샌즈도 마찬가지였다.
"난 네가 사실 좋은 사람이였을 거라는 희미한 빛이 보여."
다시 휘둘러지는 칼날.
"이봐, 친구, 날 기억해? 듣고 있다면... 다 잊어버려."
칼날은 계속해서 허공을 가른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거야, 네가 이 모든걸 그만둘때까지, 세상이 끝날때 까지라도 말이야."
인간의 동작이 점점 무뎌져간다.
그렇게 섬뜩하게 잔혹하기만 하던 인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잔혹한 핏빛의 눈동자가, 조금씩 조금씩 원래의 가늘고 검은 눈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샌즈에게 외친다, 왜 포기하지 않는거냐고, 왜 그렇게까지 하는거냐고.
결국 인간의 피투성이 칼이, 땅에 힘없이 떨어진다.
숨을 헐떡이며 지켜보던 샌즈는 천천히 인간에게 다가갔다.
"네가 얼마나 힘든 선택을 한건지는 알아. 네가 했던 모든 걸 되돌리려는 선택..."
샌즈는 그릴비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 한마디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알아줘. 난 네가 망가지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말이 끝나는 그 순간, 샌즈의 손끝이 인간의 심장을 찌른다.
"네가 정말 친구라면...다시는 이 길로 돌아오지 말아줘."
꿈은 거기까지였다.
인간에게 무참히 짖밟힌 그릴비의 일상은 모두 원래 그대로였다.
하지만 악몽은 마치 그게 정말로 있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그릴비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THE END
가게를 닫을 준비를 마친 그릴비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자신의 공간에 한참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지하세계의 역사는 끝났다.
결국 인간은 악몽과는 정 반대로 화합을 이루어냈고, 결계는 부서졌다.
하지만 악몽과 똑같은 사실이 하나 남아있었다.
앞으로 그릴비의 술집에서 스노딘의 모두가 모여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일은 없을거라는 사실.
스노딘 주민 대부분이 마을을 떠났고 핫랜드에 사는 가족과 합류하기로 한 시간이 이미 한참이나 지났지만, 그릴비는 발걸음을 땔 수가 없었다.
"그릴비, 안가고 뭐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샌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평소에 무엇을 했던 것인지 뒷정리를 하는 것에 동생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사용한 모양이었다.
그릴비는 굳이 샌즈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으로 가게의 간판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뭐, 지상에서도 외상 부탁해."
샌즈의 이 한마디를 듣고 급히 고개를 돌린 그릴비에게 샌즈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스노딘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슬로건이 적힌 간판만이 눈에 들어왔다.
"..."
스노딘에서의 소소한 일상은 끝났다.
하지만 지상에서도 다시 새로운 손님까지 더해 또다른 소소한 일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지상에 새로운 가게를 낸다는 그릴비의 결심을 굳혔다.
그릴비 입장에서 어땠을까 하고 적은 글인데
적고보니까 존나 오글거리네
개추야
엄청재밌게읽었다 개추
L과 R을 L과 P라고 적었네
그릴비 느낌 나네 크
좋당 수고했엉 ;D
... 금손은 개추야
오우야.......
개추 ㄷ 지금 봐도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