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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 출처 : https://mobile.twitter.com/vvvell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영화 아냐?

거기 보면 똑같은 하루를 몇 번이고 반복하는 남자가 나와

자세한 건 스포니까 안하지만, 여튼 처음에 주인공은 혼란스러워하지


그러다가 이왕 반복되는 거 내 좆대로 해볼까? 하고 존나 즐기지

하지만 그것도 질려버리고, 이제 끝내기 위해 자살을 시도해.

그러나 눈을 뜨면 다시 그날 아침. 몇 번을 시도해도 빠져나가지 못해.

마치 샌즈같지 않아?

어느 순간, 세상이 반복됨을 깨닫고, 처음엔 뭔가 해보려다가 허무함에 빠져드는 인물.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발광하던 남자는, 무슨 바람인지 어떤 노숙자에게 자비를 배풀어.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장난치고 놀기 좋아하는 남자는 변화되어 남을 도우지.

샌즈에게는 프리스크와 만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어.

죽거나 죽이거나가 전부던 지하에서, 전혀 다른 방식을 쓰는 인간을 만나 변화되는 샌즈.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자비롭지 않아.

영화에서는 못해도 30년을 같은 하루만 반복하고, 샌즈는 못해도 수십번의 리셋을 반복하지.

한 번 되돌아 갈 때 마다 무언가 나아지는 것 같아도, 다음순간 오히려 악화되지.

때론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동안 해왔던 걸 전부 새로 작하기도 하고.

그 과정은 정말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화가나고 괴롭지.

영화와 플라워펠은 반복되는 시간에서 어떠한 목표를 위해 나아간다는 공통점이 있어.

영화에서는 남자가 수없이 반복해서 만나고 싶던 여자가 있어.

하지만 그 여자는 어떻게 해도 넘어오지 않았고, 남자는 반복되는 실패에 자살을 결심했던거야.

플라워펠에서는 결계를 부수겠다는 목표를 가진 프리스크를 돕기위해 수없이 노력하는 샌즈가 있다고 볼 수 있지.

각자의 과정에서, 둘은 서서히 자비와 친절을 배우고 좀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게 돼.

하지만, 엔딩에서 영화와 플라워펠은 극단적으로 갈라서지.

영화에서는 남자가 변화되자, 그토록 바라던 여자가 먼저 접근하고, 드디어 하룻밤을 보내게 돼.

하지만 그보다 기쁜건, 그 '다음날'이야.

올바르게 변화된 남자는 드디어 반복되는 하루에서 벗어나고, 사랑에 빠진 여자를 얻게되는 상을 받은거지.

하지만 샌즈는?

샌즈도 마침내, 목표를 이뤄.

결계를 부수고, 괴물들에게 자유와 자비를 알려주게되지. 자신의 행동을 통해.

하지만 그에게 반복되지 않는 '다음날'은 지옥이야.

프리스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오지않는 프리스크를 기다리지.

그는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죄책감을 떨쳐낼 순 없어. 심지어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모든일이 다 끝났는데도, 샌즈는 '상'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 '처벌'을 받아.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서, 내가 플라워펠이 비겁하다고 했지?

정확히는 작가가 비겁해.

비극은 희극보다 사람의 머리에 오래남아.

그래서 계속 그걸 곱씹게되고, 그러면서 무거운 기분을 가지게되지.

물론 이런 작품은 많아. 그런데 내가 플라워펠에 특히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어.

작가는 작품의 완성을 위해 샌즈에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어.

샌즈는 죽거나 죽이는 세상에서 살아왔어.

그런 샌즈에게 프리스크는 자비와 친절이라는 전혀 새로운 방식을 강요하지.

심지어 자신을 지키기위해 머펫을 죽였을 때 조차 프리스크는 고마움보다 슬픔을 먼저 나타내.

뭐, 프리스크가 그러는 걸 어느정도 이해해 줄 순 있어.

어쩌면 영원할지도 모를 고통에서, 자신의 대리자인 샌즈가 자신의 방법으로 하지 않는 게 큰 고통일테니.

샌즈가 만약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자기가 겪은 고통이 다 의미가 없어지잖아.

어쨌든, 중요한 건 샌즈니까 프리스크 얘기는 이쯤하고 되돌아가자고.

샌즈는 프리스크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천해.

그 과정에서 샌즈는 수도없는 갈등과 방해를 받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프리스크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마지막에는 플라위가 없음에도 그 방식으로 아스고어를 물리쳐.

아무도 없음에도 그 방식을 지킨건 샌즈가 진정으로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변화된 샌즈에게 돌아온 건? 끝없는 죄책감과 자괴감이야.

이쯤 괴롭혔으면, 그에게 작은 안식정도는 줘도 되지 않아?

게다가, 샌즈에게 고통을 주는 건 주제와도 안맞아.

자비와 친절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 결과는 결코 자비롭지도, 친절하지도 않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모순이야?

글의 완성도도 좋지만, 그래도 자신의 캐릭터에게 자비를 배풀어 줄 순 없었을까?



사실 나도 알아. 샌즈가 행복하게 끝났다면, overgrowth는 그저그런 3차AU 소설로 남았겠지.

그래도, 그래도 내가 이 글을 쓴 건 너무 안타까워서야. 이렇게라도 푸념을 하고 싶었거든.

혹시라도 여기까지 읽어준 갤럼이 있으면, 횡설수설하는 푸념 들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