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요약 : 언갤럼. 게임속으로. 아재. 정의구현. 사이다.


나는 이상한 꽃 때문에 혼비백산하여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내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아치형으로 정갈하게 깎인 거대한 문틀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서는 생길리 없는 좌우 대칭, 닳아있긴 했어도 윤곽이 남아있는 처음보는 문양들..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날 도와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이 공황에 빠져있던 나에게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불어넣었다.


문간을 넘어서자 풍경이 확 바뀌었다.

상황이 아무리 급하다곤 하나 발길을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람.."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주억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보라색. 보라색 뿐이다.

걷기 편하게 잡동사니 하나 없이 깨끗하게 치워진 바닥도 보라색.

금은 갔을 지언정 무너지지않고 천장과 벽을 지탱하고 있는 벽돌 역시 보라색.

앞에 보이는 계단도 보라색..


이런 썅. 계속 보고 있으려니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그나마 군데군데 자란 초록색 덩굴과 어디서 날려왔는지 모를 검붉은 낙엽만이 내 시야를 색을 더해주었다.

서둘러서 계단을 올라 또다른 문간을 넘었다.


..막혀있군.

바로 정면에 문양이 새겨진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이 보였다.

힘으로 밀어보았지만 움직이는 시늉도 안했다.

애초에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 근육에 힘을 주는 것 자체가 경솔했다.

뒤로 물러나자 벽에 무슨 글귀가 적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읽을 수는 있었지만, 이게 무슨 나라의 말인지는 이상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려워않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지니.

 용감한 자들이여, 어리석은 자들이여.

 그대들은 가운뎃 길로 나다니지 말지어다."


..뭔 개소리야, 이게?

글귀의 내용엔 신경끄고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보통 이렇게 힘으로 해결이 안되는 무식한 보안장치에는 많든 적든 공돌이를 갈아넣는 법이다.

스위치나 레버 같은게 어디 있을 것 같은데..

아. 저기 있네.

벽에 노란색 레버가 꽂혀있다. 그러면 그렇지.

좀 시대착오적인 감은 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노란색 레버를 내리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장이 난 걸까? 아니면 힘이 모자랐나?

내가 모르는 락이 더 걸려있나?

괜히 억지로 열어보려고 했다간 고장이 날 것 같아서 치미는 짜증을 누르고 좀 더 시야를 넓혔다.

아, 어지러워.

피가 아직도 멎지 않았다.

정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레버에서 좀 떨어진 곳에 돌판 여럿이 바닥에 박혀있었다.

이거랑 저 레버랑 뭔가 연관이 있나..?

벽에 적혀있는 글귀가 묘하게 신경쓰였지만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혹시나 싶어 돌판에 체중을 싣자 그대로 바닥으로 쑥 내려갔다.

발을 떼도 다시 올라올 기미는 없었다.

이게 무슨 버튼 같은 개념으로 설치된 거라면 분명히 사용하면서 긁히거나 닳은 흔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시간을 들여 돌판을 조사했고, 그 중 두 개의 돌판이 유독 움푹 패여있는 것을 확인했다.

돌판 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바닥도 다른 곳에 비해 흙이 단단히 다져져 있었다.

나는 그것에 확신을 얻고, 패인 돌판을 밟은 뒤 레버를 내렸다.

성공이었다.


..미치겠군.

왠지 이 거추장스러운 짓거리를 앞으로도 계속해야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를 구조의 가능성에서 가로막던 장애물을 해결했음을 좀 더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몰라. 그런거 생각할 시간이 어디있어.


방을 건너니 또 방이 나온다.

아 혈압..

어딘가의 지하니까 처음 있던 곳처럼 넓은 공간이 나타나는게 더 이상하긴 하다만, 이해는 할 지언정 좆같은건 어쩔 도리가 없다.

이렇게 통과하기 거지같은 통로를 지나서 그 끝에 있는게 조그만 꽃밭이라니..

그런 수고스러운 과정을 거쳐서 내 안에 숨겨진 여성성을 소심하게 해소하는 취미 따윈 없다.

아까 그 천장의 구멍에서 떨어진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이 방은 작은 수로와 그 위를 가로지르는 널빤지가 놓여있었다.

물을 보니 갑자기 갈증이 일었지만 수로의 물을 마시려드는 것만은 간신히 참았다.

나란히 이어진 널빤지들을 따라 저 앞에 보이는건..

어디 오리엔탈 판타지 게임의 왕자가 떨어져서 푹 꽂히기 딱 알맞아보이는 가시가 한 무더기..


이런 썅!! 도대체 여기 뭐하는 곳이야?!

왜 저딴게 설치되어있는건데?

사람 던져두고 괴롭히는데엔 정말 끔찍하게 어울리는 공간이다.

어떤 미친 관음증 걸린 새끼들이 정말 날 지켜보고 있는건 아닐까.

다리에 다시 힘이 풀리려고 한다.


"하...뭐 이러냐.."


찌질해지는 대신 더 이상 생각을 안하기로 하고 가시발판 쪽으로 걸어갔다.

의외로 설치된게 몇 개 없어서 그냥 달려서 뛰어넘어도 될 것 같았지만, 상상력이 내 발목을 잡았다.

만약 발판 바로 앞에 시간차로 발동하는 압력 감지 장치같은게 있어서,

내가 그 위로 지나가는 순간 바닥에서 가시가 솟구쳐 오른다면?

원래 함정은 아주 티가 안나거나, 대놓고 티를 내서 방심시키거나 둘 중 하나다.


쫄보인 나는 얌전히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여기도 벽에 레버가 박혀있다.

하나.. 둘 셋.

왠지 귀찮아져서 마구잡이로 조작했다.

어차피 레버가 3개, 레버 위치는 위 아니면 아래.. 경우의 수가 얼마 안되니까 가능한 선택이었다.

함정을 상상하며 부들거리던 놈이 할 짓은 아니었지만 어쩌랴.

벽에 박힌 레버와 바닥에 설치된 뾰족한 꼬챙이 중 더 무시무시한건 말할 나위도 없잖아.

누군가는 삽질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그 삽질로 튀어나온 가시를 가라앉히는데 성공했다.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벽에서 벽돌을 뽑아다가 구멍에다 끼워버렸지만 다행히 중간에 가시가 튀어오르지는 않았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벽돌로 망가질 가시였으면 그냥 처음부터 다 뽀개버리고 지나갔으면 되는거 아냐?

멍청하다, 멍청해..


수로의 방을 등지자 ㄱ자 모양으로 꺾인 방으로 넘어왔다.

이번엔 앞으로 가는 길이 막혀있지 않았다.

어디다 쓰는건지 모를 허수아비가 한 켠에 박혀있었지만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시선이 느껴지는 건 기분탓인가?

이게 무슨 게임같은거라면 저 허수아비는 카메라 따위를 숨겨놓는데 딱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확 발로 까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나를 엿먹이는 놈들에 대한 명백한 반항이다.

그 지랄을 했을 때 별로 좋은 일이 기다릴 것 같진 않았다..


다음 방은 오른 쪽으로 길이 나있었다.

약간 구부정한 길로 들어서는데 별안간 바닥에서 물컹한게 밟혔다.


"개굴."


뭐여 시벌..?

무슨 시체라도 밟은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들어 뒤로 펄쩍 뛰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발을 디디고 있었던 자리엔 생전 처음보는 괴상한 개구리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