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지상에는 여러 종족이 살고 있었다.

처음엔 모든 종족이 어울려 살았다.
하지만 그중 인간이라는 종족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그들의 역사서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먼 옛날, 지상에는 두 종족이 살고 있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인간은 구분짓기를 좋아했다.
누가 인간이고 누가 괴물인지.
어떤게 인간의 것이고 어떤게 아닌지.
어디까지 인간의 땅이고 어디가 아닌지.
그리고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구분이 끝나자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서로 잘못했다고 하며 싸우듯.
전쟁은 긴 세월동안 이어졌다.
정확히는, 긴 세월동안 이어갔다.
괴물들은 인간들에게 순식간에 당해버렸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들에게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고,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웃으며 인사하던 인간이 자신을 죽이려든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파이를 나누어 먹던 인간이 이웃을 배어버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병정놀이를 하던 아이의 부모가 진짜 칼을 들고 다가온다.
어째서, 라는 물음에 인간은 괴물이니까라고 답했다.
괴물들은 그 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괴물 중 한 명이 인간을 죽였다는 걸 알게된 건 전쟁이 시작되고 많은 괴물이 죽은 뒤였다.
그때도 괴물들은 그 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들의 손에 죽은 괴물 대다수는 인간을 죽인 괴물을 본 적도 없다.
괴물들을 죽인 인간 대다수는 죽은 인간을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오로지, 종족이 같다는 이유로 자신들을 죽이려든다.
인간을 죽인 괴물이 어떤 종족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건, 그 괴물이 여러 종족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괴물들은 인간에 대한 적개심 대신 인간에 대한 의문만을 가졌다.
그리고 적개심을 품지 못한 괴물들은 결코 인간을 이길 수 없었다.

괴물들은 살기위해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몇몇 영웅들이 나타나 인간을 막아섰지만 그들은 훗날 인간의 동화에 인간용사를 막은 괴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 괴물들이 충분히 도망 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다만, 인간은 그 시간보다 더욱 많은 시간을 투자해 괴물들을 찾아내었다.
결국 인간의 의지에 의해 계속된 전쟁은, 마침내 에봇산에서 끝나려고 하고 있었다.

괴물들은 모두 에봇산에 모여있었다.
처음부터 그곳으로 도망 간 괴물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망치고 또 도망치다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었다.
인간과 가장 멀리 떨어진 땅.
인간이 그동안 한 번도 발디딘 적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던 그곳.
하지만 지금은 산 아래에 인간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엔 괴물들이 퍼즐을 이용하여 인간을 막아냈다.
인간들은 괴물들의 퍼즐을 통과하지 못하고 번번히 되돌아가야만 했다.
가끔 인간이 퍼즐을 풀어냈지만 연이어 있는 다음 퍼즐에 막혀버렸다.
그러기를 수십 번. 인간들은 마침내 산을 오르는 걸 포기했다.
대신, 산 아래에서 기다릴 뿐이었다.

인간들이 산을 포위하고 한참이 지났다.
괴물들은 산속에 굴을 파고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괴물들은 하루하루를 그저 죽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격려하는 일부 괴물들이 있었지만, 괴물들에게 의지를 부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퍼즐을 다 풀고 괴물들을 찾아온 일곱 명의 인간과 만나게 되었다.
모든 괴물들이 인간들을 보고 의지를 잃어버렸을 때, 그 인간들 앞을 한 괴물이 막아섰다.
괴물들의 왕. 가장 존경받는 괴물 아스고어가 그의 무기를 땅에 내려꽂았다.
그리고 뒤이어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살아남고 괴물들을 이곳까지 이끌어온, 그의 망치만큼이나 단단한 의지를 가진 거슨이 아스고어의 옆에 섰다.
그런 그들의 뒤에는 또다른 염소괴물이 다른 괴물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의지가 무색하게도, 인간들은 싸울 의사를 내비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인간과의 격리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
아스고어는 인간의 가축이 될 순 없다며 거절했다.
거슨은 말도 안된다며 그의 거대한 망치를 땅에 내리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인간들은 간절하게 격리를 받아들이라고 부탁했다.
마치 그들이 멸망을 앞둔 것처럼 그들은 괴물들을 설득했다.
언젠가, 인류의 광기가 멈추는 날, 괴물들은 다시 세상에 나올 것이며, 그때까지만 견뎌달라고.
그리고 마침내, 괴물들의 왕과 영웅에 의하여 괴물들의 격리가 결정되었다.
에봇산 입구부터 이어진 퍼즐은 혹시 모를 인간들의 출입을 막기 위하여 남겨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날, 지상에는 인간의 승리가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날, 지하에서는 델타 룬이 기록되었다.
언젠가 지상에서 이 문양을 지닌 인간들이 내려오는 날, 그들은 해방될 것이라고.

오랜 시간이 흘렀다.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가진 거슨은 이제 새로운 창을 벼려내는 대장간의 망치가 되었다.
가장 존경받는 괴물은 가장 사랑받는 왕이 되었다.
끝까지 남을 위로해주던 괴물은 가장 사랑받는 왕에게 가장 사랑받는 왕비가 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기억하는 괴물들은 하나 둘 사라져갔다.
에봇산의 진실을 기억하는 인간은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괴물들은 여전히 델타 룬의 약속을 믿고있었다.
그리고 일곱 인간의 약속도 인간들에게 이어지고 있었다.

또다시 많은 세월이 지났다.
이제 전쟁을 기억하는 괴물은 한 자리수가 되었다.
거슨은 모든 걸 내려놓고 델타 룬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늙은이가 되었다.
괴물들은 천사가 내려오는 날 자신들이 해방된다는 전설을 믿었다.
아스고어는 여전히 모든 괴물에게 사랑받았지만, 바깥을 보여달라는 요청에 고민하고있었다.
토리엘은 그런 아스고어를 가만히 끌어안아줬다.
그들의 어린 아들 아스리엘은 그 존재만으로 힘이 되었다.
한편, 인류는 엄청난 번영을 이루고 있었다.
마법따위는 하찮게 여겨질 정도로 발달된 과학은 괴물들을 이야기 속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일곱 인간의 약속은 대를 이어오고 있었다.
다른 인간들이 비웃었지만 그들은 대를 이은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지켜냈다.
다만 그들의 약속은 조금씩 빠지고 뒤틀려버렸다.
괴물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일곱 영혼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일곱 목숨으로 바뀌어버렸다.

소녀는 자신이 왜 괴물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대신 소녀는 자신을 억지로 희생시키려 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품었다.
그 분노는 이내 소녀를 먹어치웠고, 소녀는 분노와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버렸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인간들은 대를 이어온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녀를 산 위로 올려보냈다.

아스고어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는 과거를 잊어버릴 만큼 충분히 분노하지 못했다.
그는 현재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그는 미래를 내다보지 못할 만큼 충분히 멍청하지 못했다.
그는 감정을 무시할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했다.
그는 이성을 무시할 만큼 충분히 감정적이지 못했다.
그의 아이들이 인간에게 죽은 뒤, 그는 복수를 다짐했으나 복수를 하기에 그는 너무 착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괴물들의 분노를 외면하기엔 너무나도 책임감이 강했다.
휘청이는 그를 지탱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그를 질책하며 떠나버렸다.
결국 그는 최초의 인간 이후 여섯 명의 인간이 더 죽을때까지, 어느쪽으로도 충분하지 못했다.
부족한 그는 스스로 공허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일곱 인간과 괴물들 사이의 약속을 들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죽어서 돌아온 자신의 조상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들은 소년에게 약속을 지키러 간 어린 소녀를 죽인 괴물들을 믿지말라했다.
하지만 소년은 오히려 그 소녀가 죽었기에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나머지 사람들도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소년은 에봇산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