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nity TALE









* * *




입방체의 자그마한 회색 공간, 시간이 멈춘듯 고요한 그 중심점에 그와 차라가 서 있었다.
끊임없이 대류하는 벽면은 폐수같이 역겨운 색을 띄었으나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았다. 공기 중에서는 옅게 약품 냄새가 풍겨 왔다. 언젠가 워터폴의 쓰레기장에서 맡았던 냄새와 흡사했다. 알피스의 실험실에서 조우했던 융합체들에게서도 비슷한 냄새가 났다. 아니, 정확히는 실험실의 어느 곳을 가던 이 냄새가 풍겨왔더랬다.

차라는 손을 들어 피부에 맞닿는 공기의 감촉을 느꼈다. 방 안에서 우웅 하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의 오감을 전부 사용해서 이 새로운 공간을 느꼈다. 여태껏 와보지 못했던 스타팅 포인트에 도착했다는 흥분감이 그의 온몸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영혼 주도권 싸움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지 모른다.

그러나 차라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폐허가 아닌 이곳에서 눈을 뜬 것일까.

차라는 자신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괴상한 생김새는 둘째치고, 대류하는 벽에서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빛이 모든 방향을 차별없이 비추고 있음에도 그의 그림자는 한 방향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는 검은색이었다. 차라가 여태까지 본 어떤 검은색보다 어두운, 진짜배기 검은색이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밀랍인형같은 창백한 얼굴에 기분 나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 꽤나 그럴듯한 몰골이다.

왜 나는 여기서 이 남자와 대면하고 있을까.

어째서지,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째설까, 누군가가 장단을 맞추었다.

_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기 때문이야.

나지막히 남자는 말했다.
그의 의사소통은 입이 아닌,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중에 떠다니는 손들이 말을 자아내었다. 그것은 수화도 아니었고 글자도 아니었지만 어째선지 차라는 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웅변적이고, 부드러워서 차라는 압도당한 채 움직이지 못했다.

남자가 그곳에 존재하는 방식은 기이했다. 그는 대류하는 방 전체와 하나였고, 거대한 물살에 휩쓸린 채 이곳저곳으로 옮겨가고 있었으나 차라가 정신차려 방 중앙을 보면 알맞게 생긴 그의 육체가 붙박힌 채 천연히 서 있었다. 차라는 입을 여는데 평소보다 갑절의 힘을 들여야 했다.

"당신은 누구지."

손의 언어를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는 입을 열어 남자에게 물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죽여온 괴물들 중에 그 이름을 물은 첫번째 괴물일 것이다. 한 수 접어주고 들어가는 것이 마뜩찮았지만, 그만큼이나 차라는 그의 이름이 궁금했다. 자신이 불렀다는 남자의 이름. 어쩌면, '시나몬'이라거나 '케챱'이라거나 하는 이름이라 대화 중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면 가능성 없는 이야기다.

남자는 쿡쿡 웃었다. 물론 손으로 웃었다. 그의 조악한 얼굴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그는 영혼을 두드리는 맑은 웃음소리를 낼 수 있었다.

_나는 W. D. 가스터야.

"난 그런 이름 부른적 없어."

차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가스터라는 이름은 어디에선가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심판자 코미디언과 싸우면서 가스터 어쩌구 하는 공격을 몇 번이고 피한 적이 있다. 앞에 서 있는 남자가 그 이름만큼이나 성가신 괴물이라면 차라는 빨리 그의 뒷목에 칼을 꽂아넣고 방을 나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차라는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은 스타팅 포인트고 자신에게는 어떤 무기도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잠깐,
차라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 뼈다귀가 쓰는 무기의 이름이 '가스터 어쩌고'라는 것은 어쩌다 알게 되었더라?

_너 말고, '너'에게 말하는 거야.

가스터가 중얼거렸다.

순간, 차라는 몸속 어딘가가 고동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을 뚫고 나올듯한 기세로 몸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격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몸을 뒤틀었다.

'그녀'였다.

차라는 홀로 춤추듯 공간을 헤집고 다녔다. 회색 공간이 붉어졌다 푸르러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물과 함께 그는 아무렇게나 흘러갔다. 아득한 정신의 말단부까지 도달한 끝에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은 차라가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다리를 찔렀다.

아니, 자신에게 칼은 없었을터다.

_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야

가스터는 유쾌한듯 어깨를 들썩였다. 차라는 어느새 자신의 다리에 칼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괴물들의 피를 흘린 바로 그 칼이었다. 그 칼을 보자마자 갑자기 그에게 통각이 찾아왔다.
차라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 모로 쓰러졌다.

"....이런 망할.."

또다시 프리스크가 발버둥쳤다.

그녀의 영혼을 완벽히 자기것으로 만들었음에도, 차라는 또 한번 '불살'을 시도했다. 모두를 완벽히 속이고, 지상으로 그들을 끌고가기 위해 의지를 이용했다. 결계를 부수고, 인간 세계로 빠져나간 뒤, 인간과 괴물들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영혼 여섯개로 단칼에 세상을 끝내버리는 것은 재미가 없으니까.

그 순간, 그 카타르시스를 위해 차라는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토가 쏠리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아스리엘이 사실 넌 차라가 아니지, 라고 물었을 때. 나다, 차라,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이름 대신 존재가 사라졌을터인 아이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

'프리스크'

차라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인정하기 싫지만 멍청하게도,
자신이 프리스크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그녀는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결계를 부순 뒤에도, 토리엘과 함께 살게 된 뒤에도, 차라가 누군가를 죽이려 할 때마다 프리스크가 깨어나 그것을 저지했다. 차라가 어떤 EXP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육체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죽이지 못한 채, 종언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차라는 두려웠다.
그리고, 누군가가 세계를 리셋시켰다.

그 누군가는 자신도 아니었고, 프리스크도 아니었다.

다리를 찔린 뒤에 잠잠해진 그녀가 빈틈을 타 또다시 몸 안에서 꿈틀대었다.
차라는 자신의 왼쪽 가슴을 강하게 후려쳤다. 정확히는 그녀의 왼쪽 가슴이었다.
공명하는 영혼을 억누르기 위해, 그는 한참 프리스크를 공격했다. 격통은 물론 자신에게도 찾아왔다.
가스터는 측은하다는 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_자신을 너무 미워하는군

"...잘 들어. 난 차라, 여기에 나말고 다른 '나'는 없어."

말하면서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네 이름을 입에 담은 적도 없고... 자의식 과잉 아냐?"

다리에 박힌 칼을 비틀어 빼내며 차라가 남은 말을 토해냈다. 붉은 선혈이 지금은 그의 것인 발목을 적셨다. 자신의 LOVE가 낮음에 안도하며 차라는 칼을 입에 물었다. 뭐라고 떠들어대던 간에 결국 저 새끼가 보스라는거 아냐. 장난감이든 뭐든 써보라고. 어차피 이쪽에는 의지가 있으니까.

그러나 가스터는 아무런 태세도 취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차라의 눈을 마주한 채로 얼굴을 반바퀴 돌렸다.
우드득하고 그의 목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으나 그는 딱히 신경쓰지 않는듯 보였다.

_이상하지, 난 분명 들었거든. 내 이름이 먼 곳으로부터 불려지고 있었어.

가스터의 얼굴은 조금씩 차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약품 냄새가 점점 더 진해졌다. 차라는 침착하게, 하지만 다소 긴장한 채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기다렸다.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징그럽고 흉측한 모습이었다. 창백한 손을 뻗어 가스터는 차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충분히 칼로 벨 수 있는 거리였지만 차라는 공격하지 못했다. 몸이 그 자리에 붙박힌듯 움직이지 않았다.

차라는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꼈다.

_한 사람의 주장만 듣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겠나?

가스터는 '입'으로 말했다.
말라붙은 입술에서 새어나온 소리였다. 입김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
깊은 심연같은 가스터의 두 눈에서 안광이 켜졌다.

순간,
차라는 튀어올랐다.
매미가 허물을 벗어내듯 차라는 자신의 영혼이 바깥으로 튀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비명을 내지르려 했지만, 소리조차 입밖으로 새어나가게 할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성대가 아니었고, 자신의 육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라는 프리스크의 몸 바깥으로 추방당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풍경 속 그는 자신의 정신이 까마득한 지하로 떨어지는 것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정신이란 것은 애초에 누구의 것이었더라.
이렇게 자유롭게 되어서는 칼을 잡을수도, 또 누군가를 죽일수도 없다.
아직 죽여야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남았는데.

혼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차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어째서 하필 이 녀석의, 이딴 말이 떠오르는 것인지 그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을리 없지.









'넌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을거야'









* * *











쓰고 있는건 1화고, 미완이다.
그리고 차라 안죽었다.
차라 남 프리 여 공식을 따른다.



왜 이름이 trinity tale(약칭 TTT)인고 하니,
주인공이 세명이라 그렇다.

차라, 프리, 플레이어(의지) 이렇게.
뭐 잘돼서 AU로 취급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마스크테일처럼 인간화 AU다.
이유는 소설 내에서 서술할거임 ㅇㅇ.